@@[제3장 집 나가면 개고생@@]
데포른 영지.
네벨리언 공작령과 발리스타 공작령의 경계에 위치한 변방의 작은 영지다. 영지의 대부분이 산악지역이라 상권과 농지가 발달하기에는 열악한 환경으로 귀족들이 탐을 내는 영지와는 거리가 멀다.
이곳에 오브라이언 남작가가 3백 년 동안 자리했다. 대대로 남작의 지위를 유지하기도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강성한 시기도 무척이나 짧았다. 그저 영지의 토착 귀족으로 자리 잡았을 뿐이다.
있으나 마나 한 자리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오브라이언 남작 가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변화는 너무 빨랐고, 다시 회복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다. 외부적인 영향도 컸지만 가장 큰 문제는 영지 내부에서 벌어진 과다 경쟁이었다.
오브라이언 남작의 첫째 아들 라이벨, 둘째 아들 류카이젠의 영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각자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려고 부족한 세수를 생각도 않고 경쟁을 한 것이 탈이었다.
이로 인해 영지의 빚이 산더미처럼 늘어났고, 참다못한 오브라이언 남작은 화병으로 몸져눕게 되었다.
영지의 대부분을 차압당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남작가의 저택마저 넘어갈 위기에 놓였었다. 파이트너 상단에서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면 영지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오브라이언 남작의 저택은 총 네 개의 건물로 되어 있었다. 지은 지 오래되고 낡아서 겉으로 보나 안으로 보나 형편없었다.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들과 시녀들의 수도 부족해서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가르딘의 아버지인 브론 오브라이언 남작은 현재 자신의 방에 누워 있었다. 몸이 아픈 것보다 서투른 판단에 후회가 들었기 때문이다.
영지가 무너져가는 것이 자신의 무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귀족가의 아들로 태어나 근근이 살아가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결국 자신의 대를 넘어 아들 대에 3백년 역사의 남작가가 사라질 판국이었다.
시류를 파악하지 못하고 노력하지 않은 뼈아픈 대가였다.
끼이익!
방문을 열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오브라이언 남작의 아들들인 라이벨과 류카이젠이었다.
오브라이언 남작과 라이벨, 류카이젠 모두 겉으로 보면 가르딘과 흡사하게 생겼지만 약간은 편협한 듯 각이 서 있었다.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급한 모습이었다.
오브라이언 남작이 한심한 듯 두 아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됐느냐?”
“돈을 더 이상 빌려주지는 않겠다고 합니다.”
“그렇겠지. 다 기울어가는 영지에 누가 돈을 더 빌려주겠느냐! 크흠!”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신들의 잘못으로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저 동생을 이기고 형을 이겨 영주가 되려는 욕심뿐이었다. 욕심이 주변의 상황을 가려버린 결과였다.
“베로나를 볼 면목이 없구나!”
“죄송합니다! 아버지!”
“알았으니 이만 나가보아라.”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방을 나섰다. 누워 있는 오브라이언 남작은 한숨만 흘러나왔다.
방을 나선 라이벨과 류카이젠도 한숨이 나오기는 마찬가지였다. 뚜렷한 대책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뛰어난 실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자신들이 무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자괴감마저 들었다.
“제기랄!”
“술이나 한잔할까요?”
“상황이 이러니 너하고 술을 같이 마시게 되는구나!”
경쟁을 할 때는 서로 으르렁대기만 했다. 그렇기에 술도 같이 마시지 않았다. 상황이 나빠지고,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자 결국 둘만 남게 되었다.
“가르딘은 후작이 되고 우리는 이게 뭐지!”
“이제까지 연락도 안 하던 놈입니다. 생각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두 형제도 자존심이 있었다. 지금까지 무시해 온 가르딘에게 어떻게 손을 내밀 수 있단 말인가! 두 형제의 마지막 자존심이 작용했다.
가르딘이라면 달랐을 것이다. 당장 가족이 굶어죽게 생겼는데, 그깟 자존심이 대수겠는가! 얼마든지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 쥐꼬리만 한 자존심도 때와 장소를 가리며 지켜야 했다.
결국 두 형제는 상황이 악화되는데도 불구하고 연락을 하지 않았다.
발키리 영지의 곳곳을 누비며 다니는 아이시런 공주였다. 공주의 편안한 이동을 위해서 작은 마차를 준비했다. 공주가 타고 온 마차로 이동하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또한 이동 속도에도 차질을 빚었다. 그래서 가르딘이 작고 속도가 빠른 마차를 따로 구비했다.
그렇다고 마차의 재질이 떨어지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드워프의 손길이 닿은 마차라 튼튼함과 정교함에서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마차였다.
발키리 영지는 넓었다.
점차적으로 영지가 발전이 되어가고 있지만 넓은 영지를 한꺼번에 모두 발전시킬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르딘은 되도록 발전된 영지를 보여주면서도 발전되지 않은 곳은 경치가 좋은 곳으로 안내했다.
산 좋고 물 좋은 곳. 햇살이 비추면서 장대한 풍경을 자아내는 곳을 집중적으로 보여주었다.
발키리 영지는 다크랜드에서 뻗어 나오는 산맥과 산이 자리하고 있어 경치가 유난히 빼어났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드래곤이 나올 것 같은 폭포수와 계곡이 많았다.
작은 마차가 굽이굽이 좁은 길을 내달린다.
마차를 모는 사람은 다름 아닌 사이론이었다. 가르딘의 전용 따가리로 사용이 되었다. 마차를 모는 것도 훈련의 일종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잘도 갖다 붙이는 가르딘이었다.
“이제 영지의 대부분을 돌아봤는데, 또 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까?”
“한 곳이 남아 있기는 한데.”
“설마 다크랜드는 아니겠지요.”
아이시런 공주의 궁금증을 알기에 미리 사전 차단하는 가르딘이었다. 공주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아이시런 공주는 다크랜드에 들어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맞아요.”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곳을 뭐하러 가려고 합니까.”
“스필언 백작과 미토스 백작도 수련하고 있다면서요. 내가 간다고 해도 위험할 일은 없겠네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런 위험한 곳에서 잘못되면 저는 어떻게 됩니까?”
“설마 자신이 없어서 그래요?”
다크랜드는 이제 예전만큼 위험하지 않다. 드래곤과 친하게 된 마당에 다크랜드에서 위협적인 존재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문제가 없다고 해도 암흑의 대지 다크랜드였다. 공주를 다크랜드로 데려갔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놈의 공주가 나를 생각도 안 해주네! 그동안 고생한 내가 안쓰럽지도 않냐!’
가르딘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아이시런 공주였다. 전에 봤던 가르딘보다 지금의 가르딘은 훨씬 더 능숙하고 여우같았다. 아이시런 공주가 발전한 만큼 가르딘도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피닉스 기사단의 단원이었을 때는 수동적으로 움직여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현재의 가르딘은 큰 영지의 영주였다.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경험을 하고 있었다. 심기가 발전한 가장 큰 이유는 헥토르 왕국과의 전쟁을 겪으면서 영주로서의 자각을 했기 때문이다.
가르딘의 안면 드래곤본에 흠집이 나더니 경련이 일었다. 아이시런 공주는 성공했다는 승리감을 맛보았다.
“자신이 없다니요! 제가 지켜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가르딘 후작님만 믿어요.”
“저만 믿으십시오. 반드시 안전하게 지켜 드리겠습니다.”
날이 어두워질 시간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야 했다. 내일부터 조심스럽게 다크랜드로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가르딘이었다.
공주가 오고 나서 다른 일은 손도 못 대고 있었다. 하여간 가르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아이시런 공주였다.
하루의 절반은 어둠과 함께한다.
오러마스터에 이르면 어둠은 별반 상관이 없다. 어둠을 오러로 투영하여 사물의 구분이 자유로워진다. 다만, 현재 스필언과 미토스는 어둠을 물리치는 데 주력하지 않고, 동화되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어둠과 하나 되어 마음속의 어둠을 끄집어내는데 노력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고민했다. 마음속에 자리한 어둠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였다.
“마음속에 어둠이 있을까! 나도 모르는 내가 실제로 있단 말인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마음을 관조한다.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일체의 사심을 모두 배제했다.
처음에는 어려웠다. 마음을 비우고 내면과 소통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악몽 같은 조용함과 어둠의 마력을 이겨내야 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가르딘의 말대로 어려운 지점에 봉착했다는 것을 여실히 느꼈다.
수련을 하고 3일 후가 되었을 때였다. 면벽하는 동굴 안의 또 다른 동굴에서 기이한 향이 진동했다. 관통일뇌의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기이한 향에 이끌려 다가갔다.
무아지경에서 발견한 것은 과실이 열린 식물이었다. 동굴의 바윗덩어리는 무척이나 단단하다. 그 안에서 식물이 자라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3일 동안 스필언과 미토스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저절로 손이 과실에 이끌려 갔다. 과실에 맞닿은 순간에 사르르 녹더니 스필언과 미토스의 몸 안으로 흡수가 되어버렸다. 흡수된 기운은 스필언과 미토스의 항마멸사신공과 결합하여 황금색의 현기 가득한 기운을 발산하였다.
꿈과 현실의 모호한 상태에서 다시 며칠 동안 저절로 운기가 계속되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스필언과 미토스는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전신에 힘이 넘쳐흘렀다. 면벽수련의 벽을 느끼던 스필언과 미토스의 능력에 활로를 열어주었다.
그 이후에 수련은 탄력을 받았다.
20일 정도가 흘렀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지나갔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먹는 것, 자는 것이 그토록 소중하고 어려운 것인지 몰랐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자신들이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을 여실히 느꼈다. 평소에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들이 왜 소중한 것인지를 몸소 체험한 것이다. 둘은 끊임없이 나태함과 안이함을 반성했다.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반성하게 되자 마음속에 자리한 또 다른 내가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르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누구냐?”
“나는 너다!”
“나라고!”
“그렇다. 너는 나를 이겨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직 네게 지지 않았다.”
“나는 너를 이길 것이다.”
“어디 한 번 해보아라!”
마음속 깊이 잠재되어 있었던 일그러진 또 다른 자신은 쉽사리 승부를 결정해 주지 않았다. 그 이후로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사투는 계속되었다. 마음속의 심마와 싸울수록 더욱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이었다.
15일이 더 지난 후에 스필언과 미토스는 동굴에서 나왔다. 가르딘이 하루의 절반만 동굴에서 보내라고 했지만 스필언과 미토스는 최소한의 식량만 가지고 하루 종일 동굴에 처박혀서 자신과의 싸움을 했다.
그 결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동굴에서 나온 스필언과 미토스의 모습은 수염이 길게 자라서 얼굴의 절반을 수북이 덮었다. 옷이 해지고 넝마가 되고, 산적처럼 자라난 수염이 잘생긴 얼굴을 가렸지만 입가에 그려진 미소만큼은 그 무엇도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웠다.
둘의 눈빛은 하늘을 닮아갔다. 세상을 끌어안는 자비로운 눈이었다.
“성과는 있었나?”
“물론.”
“그럼 한 번 대결해 볼까.”
“좋지.”
스르렁!
면벽수련 중에도 검은 항상 지니고 있었다. 검과 몸은 하나였다.
미토스와 스필언이 동시에 검의 그립을 잡았다. 그러자 검이 저절로 검명을 터뜨렸다. 검신일체의 조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몸에서 뻗어 나오는 자연스러운 기운이 신선과 불타가 지상에 강림한 것처럼 보였다. 어떠한 사심과 욕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검과 하나 되어 자유롭고 싶을 뿐이다.
검과 검이 교차했다.
차아앙!
쿠꽈과과과과꽈!
산악을 울리는 압도적인 충격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검격이 부딪친 충격은 상당했다. 둘의 움직임은 보이지도 않았다. 검이 출수되어 다시 회수되는 장면을 볼 수 있는 자도 극히 드물 것이다. 가르딘이 아니라면 볼 수 없을 정도다. 심득이 고스란히 담긴 일검이었다. 더 이상의 증명은 필요 없었다.
만족한 미소를 띤 스필언과 미토스가 통신구를 사용하였다. 이제 하산한다는 것을 가르딘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가르딘은 한 달 반 만에 연락한 두 신성의 보고를 받았다. 천재들도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하산했다는 것에 만족해 미소를 지었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천재라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나도 한 달 반이라는 짧은 시간에 깨달음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평범한 사람들이 느끼는 한계의 고통을 뼈저리게 경험했으리라 확신했다.
그런데 웬걸!
그들이 하산하여 목욕재계를 하고 찾아왔을 때 가르딘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스필언과 미토스에게서 느껴지는 잠재된 힘을 보았던 것이다. 발현되는 힘만으로도 최소한 최상급에 이르렀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빠른 성장 속도였다.
‘최상급에 이른 것도 부족해서 아직 갈무리 못한 기운 덩어리는 도대체 뭐야?’
만약 항사멸사신공이 극의에 도달하여 음양합극에 이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갈무리 못한 기운까지 모두 흡수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성장 속도를 가만 하면 1년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괴물 같은 놈들! 도대체 벽에 뭐가 있었던 거야! 어떻게 벽보고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내지 못하는 가르딘이었다. 상식적인 생각이 있다면 저런 결과가 나와서는 안 되었다. 한계라는 벽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기 바랐건만 신성에게 한계는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다.
가르딘은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했다.
“무엇을 느꼈느냐?”
“포용을 느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내 안에 담아 포용하는 마음이야말로 중요한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르딘은 직감할 수 있었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몸 안에 내재된 심마. 즉 또 다른 자아를 물리친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포용하여 하나가 됐다는 뜻이다.
심마는 이긴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겨 봤자 또 다른 심마가 나타났다. 반면에 포용해 버렸다면 심마는 모두 사라져 버린다.
가장 중요한 깨달음을 이처럼 쉽사리 터득하다니 가르딘이 허탈해할 만했다.
“어렵지는 않았느냐?”
“또 다른 제가 공격하는 바람에 처음에는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계속 물리치고 이겨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저희들은 깨달았습니다. 나를 이겨봤자 결국 나 자신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 자신을 포용해 버린다면 더 이상의 또 다른 나는 사라질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훌 … 륭하구나. 내가 내준 시험의 정확한 답을 내었다.”
“역시 스승님이십시다. 이 모든 것이 다 저희를 위한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다 너희들을 위한 내 마음 … 이니라.”
차마 개고생 시키기 위해서 보냈다고 말하지 못하는 가르딘이었다. 이놈들은 지옥불에 담가놓아도 기어 올라올 독한 놈들이었다.
“그보다 수련 중에 기이한 일이 있지 않았느냐?”
잠시 고민을 해보는 스필언과 미토스였다. 수련 중에 기이한 일은 자아와 만난 것과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기이한향이 진동했다는 것이다.
“몽환적인 상황에서 동굴 안에서 기이한 향이 났습니다. 향에 이끌려 저희들도 모르게 과실을 만졌던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도 과실이 손에 닿자마자 사라지더니 몸에서 황금색의 빛이 났습니다. 그것 이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 알았다. 수고했으니 오늘은 가서 쉬어라.”
“예, 영주님!”
가르딘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스필언과 미토스의 잠재된 힘의 성질을 보니 음양의 기운이 극에 달한 것으로 보였다. 더군다나 황금색의 찬란하고 현기 가득한 기운이 외부로 분출이 되었고, 내력이 넘쳐흘렀다고 했다. 가르딘의 기억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신마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기억의 깊은 바다 속을 헤집고 들어가던 가르딘은 결국 꼭꼭 숨겨진 기억을 찾아낼 수 있었다.
“황금음양과!”
황금음양과.
천지간의 퍼진 기운을 흡수하여 1만 년에 한 번 열린다는 전설적인 영과로 일단 흡수하면 한서불침에 도검이 불침하며, 3갑자의 엄청난 내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이 먹어도 평생 무병장수 할 수 있는 절세의 영과였다.
가르딘은 허탈감과 부러움이 교차했다.
“어떻게 기연을 이런 식으로 퍼다 주냐! 기연을 안 만나도 강해지는 놈들인데 하늘은 도대체 왜 저런 놈들에게 기연을 계속 주는 거야! 이거 현실이 너무 불공평하잖아!”
평범한 사람은 절대 스필언과 미토스와 같은 기연을 만날 수 없다.
황금음양과는 1만 년에 한 번 열리며 시간은 고작 한 시간에 불과하다. 다시 열리려면 또다시 1만 년이 지나야 한다. 현실적으로 황금음양과를 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필언과 미토스는 황금음양과를 얻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점점 신탁의 계시대로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영웅에게 기연 퍼주기는 상식 아닌가!
가르딘이 이토록 억울해하는 것은 자신이 면벽수련을 시키기 위해 보냈다는 것에 있었다. 영웅의 보조다운 망할 놈의 식견이었다.
“아! 아깝다.”
황금음양과를 라이나와 브리안에게 복용시켰다면 평생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덤으로 태양과라도 복용하면 부부금실이 더 좋아질 것이다.
“잠깐, 한 번 나도 가볼까.”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가르딘이었다. 절벽에 가보면 다른 영과나 영물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르딘은 밤이 어두워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주머니를 하나 등에 메고 곧장 길을 나섰다.
저택을 나서는데 필리언을 보았다. 필리언은 큰 주머니를 들고 서두르는 가르딘을 보고 의아해했다.
“너 뭐 하냐?”
“시간 없으니까 말 시키지 마!”
가르딘은 대충 대답하고 필리언을 지나쳤다. 말을 하는 이 시간에도 황금음양과는 사라질지 모른다. 시간이 골드였다.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인간이 필리언이었다. 가르딘이 서두르는 것에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고 뒤를 따랐다.
가르딘은 따라오는 필리언을 보자 짜증이 치밀었다. 대충 둘러대는 것이 아니었다. 냄새 잘 맞는 필리언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어야 했다.
“너 왜 따라오는 거야?”
“혼자 먹으려고 하면 안 되지!”
“개코같은 자식.”
“지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식.”
말로 해서는 떨어뜨릴 수 없는 것을 절감한 가르딘이었다. 이럴 바에는 둘이 협조를 하는 게 나았다. 괜히 말다툼해 봤자 시간낭비였다.
가르딘은 전음을 사용하여 이유를 말해 주었다.
이유를 말하고 난 후 신법을 전개했다. 오러마스터가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자 어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전무했다.
“뭐! 그런 좋은 것을 혼자 먹으려고 한 거냐! 이기적인 놈아!”
“그게 중요한 게 아냐! 그 좋은 게 사라질지도 몰라! 어서 서둘러야지!”
“뭐 해! 빨리 가자!”
쌔애애앵!
공기를 찢는 파공성이 들린다. 가르딘과 필리언은 거의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인간이 이처럼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장면이다. 목적을 가진 인간의 집념을 볼 수 있었다.
다크랜드로 진입한 가르딘이 방향을 잡고 절벽이 있는 곳을 향했다. 직선거리를 내달리기 때문에 가로막는 나무와 숲은 검으로 갈라버렸다.
솨아아아악!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하던 장소에 도착한 가르딘은 10미터 위에 있는 절벽 사이의 동굴로 점프했다. 단 한 번의 점프로 절벽의 동굴에 다다랐다.
그 뒤를 필리언이 질세라 따라서 올라왔다.
가르딘과 필리언은 동굴 안을 살살이 뒤졌다. 그러나 1만 년에 한 번 맺히는 황금음양과는 물론이고, 10년 된 산삼 쪼가리도 찾을 수 없었다.
영물과 영과는 인연이 있는 자에게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필리언과 가르딘은 인연이 없는 자들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일 리 만무했다.
“빌어먹을!”
“그놈들은 없어도 되는 놈들인데, 우리처럼 절실한 사람에게는 왜 안 주는 거야!”
“하늘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오기로라도 찾는다!”
“찾자! 찾다 보면 나올 거야!”
오기 부릴 때가 따로 있었다. 쓸데없는 일에 열을 올리면 결국 몸과 마음만 피곤해진다.
가르딘과 필리언은 폭포는 물론 협곡과 계곡 모두 헤집어 놓았다. 인간의 무서운 집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흉신악살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가르딘과 필리언이었다. 인간의 추한 단면을 보여 주었다.
다크랜드의 북쪽으로 깊숙이 더 들어가게 되었다. 북쪽으로 가려면 큰 산을 하나 넘어야 한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처럼 단면이 예리한 산이라 넘기 상당히 어렵다. 그럼에도 가르딘과 필리언은 망설이지 않고 넘었다. 욕망 앞에 두려움은 무용지물이었다.
북쪽으로 넘어 갔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두 사람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필리언이 화를 냈다.
“너 일부러 나 개고생 시킨 거지?”
“뭐, 뭔 소리야! 내가 할 짓이 없어 그런 짓을 하냐!”
“아냐! 너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그럴 거면 너만 보내지, 나까지 왜 고생하냐!”
“내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겠지!”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은 자제해라!”
가르딘도 짜증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필리언의 자극적인 말을 간신히 참고 견디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너 앞으로 조심해라.”
“흥! 내가 그런다고 겁먹을 줄 알아.”
스필언과 미토스를 고생시키려고 한 가르딘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이 되레 당하고 말았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과물은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 애꿎은 시간만 낭비한 꼴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가르딘은 두 신성이 의심되었다. 일부러 고생하라고 그럴듯한 말을 지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이 발휘되었다.
가르딘은 녀석들이 그럴 놈들이 아니라는 것에 더 짜증이 났다. 계속 찾아봤자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에엔장!”
크게 한 번 소리를 지르고 화를 털어내는 가르딘과 필리언이었다.
“돌아가자.”
“그래.”
돌아가는 것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천지분간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내달렸더니 생각보다 멀리 왔다. 다시 넘어야 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보면서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저걸 어떻게 넘었대!’
자신들이 넘고서도 숨이 턱턱 막히는 엄청난 높이였다. 영과를 찾겠다는 욕망에 눈이 뒤집혀 있을 때는 몰랐었다.
“조금 쉬었다 가자.”
“그 … 럴까.”
체력적으로도 문제지만 정신적으로 너무 지쳤다. 성과물이 없으니 더욱 지친다. 뭐라도 하나 건졌으면 활기가 찼을 것이다.
북쪽의 외곽지역에 불과하지만 이곳은 몬스터가 아직도 많은 곳이다. 인간의 냄새를 맡고, 먹이로 착각하여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냄새를 잘 맞는 몬스터가 가장 먼저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으음메!
소 울음소리와 함께 두 마리의 미노라우로스가 등장했다. 오우거의 세 배에 달하는 힘을 가진 미노라우로스다. 미노라우로스가 두 마리나 등장하면 기사라도 긴장하기 마련이었다. 그에 반해 가르딘과 필리언은 짜증난다는 듯이 미노타우로스를 쳐다보았다.
획! 획!
필리언과 가르딘은 손으로 내저으며 귀찮다는 듯이 저리 가라는 표현을 했다. 좋은 말 할 때 가라는 우호적인 표현이다.
몬스터라서 그런지 본능이 대단히 발달했다. 먹이가 자신들을 무시한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오히려 화가 나서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뭐야! 이것들은!”
“내단도 없는 것들이 왜 설치고 지랄이야!”
퍼퍼퍽!
쿠더더더덩!
필리언이 달려오는 미노타우로스 앞에서 갑작스럽게 튀어 올라, 공중에서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은 정확하게 미노타우로스의 코를 가격했다. 3연타를 직격당한 미노타우로스는 아찔한 충격에 벌러덩 뒤로 넘어졌다. 쓰러진 미노타우로스에 올라탄 필리언이 코만 집중적으로 노렸다.
“이놈의 코가 문제야! 냄새를 더럽게 잘 맞고 지랄이야! 더 이상 냄새를 맡지 못하게 해주마!”
퍼퍼퍼퍼퍼퍼퍼퍽!
으 … 음메 …!
가르딘은 뿔을 내밀고 돌진하는 미노타우로스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물러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착!
가르딘이 미노라우로스의 뿔을 한 손으로 가볍게 잡았다. 잡은 뿔에 힘을 가하자 미노타우로스가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게 되었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가르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천근추(600킬로그램)의 수법을 사용하여 몸을 바위보다 무겁게 만들었다. 힘을 줄수록 가르딘의 발은 지면에 딱 달라붙었다.
번쩍!
3미터를 훌쩍 넘는 미노타우로스의 거대한 신체가 산뜻하게 들어 올려졌다. 그랜드마스터인 가르딘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 올려진 적 없는 미노라우로스는 무척이나 놀랐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러게 애초에 덤비지 말지 왜 나서고 있어. 건진 것도 없으니 그냥 갈 수도 없고 뿔이나 잘라야겠다!”
부르르르!
인간과 미노타우로스가 의사소통이 될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뜻을 파악한 미노타우로스가 몸을 진저리나도록 떨었다.
가르딘은 미노타우로스를 바닥에 내리찍고, 뿔을 떼어내려고 했다. 뿔이라도 건져야 그나마 보람이 있을 것 같았다. 손날을 들어 뿔을 단숨에 잘라내었다.
나머지 한 마리는 필리언이 처리한 상태였다. 필리언은 속 시원해지도록 주먹질을 하고서도 기분이 좋지 않은지 화를 내고 있었다.
“에이! 더러워!”
하필이면 주먹이 미노라우로스의 코에 들어간 것이다. 소 대가리의 코가 너무 커서 벌어진 재앙이었다. 코가 큰 만큼 이물질 덩어리도 컸다. 필리언의 주먹 전체가 이물질로 뒤덮였다.
둘 다 재수 없는 날로 기억할 것이다.
가르딘과 필리언은 한숨을 다시 한 번 쉬고 산을 넘었다. 넘고 넘어 영지까지 힘없이 이동해 나갔다. 총 시간은 5일이 걸렸다. 집에서 걱정하고 있을 라이나를 생각하니 힘을 내야만 하는 가르딘이었다.
5일 동안 다크랜드를 헤집고 다녀서인지 넝마가 된 초라한 모습이었다. 초췌하고 추레한 모습으로 발키리 영지에 도착했다.
가르딘이 저택에 도착하자 라이나가 하던 일을 멈추고 뛰어나왔다.
“여보!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미안. 그럴 일이 있었어.”
“그래도 다행이에요.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서요.”
라이나가 마음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두 신성 때문에 가르딘은 물론 가족 모두가 고생한 일이 되었다.
가르딘은 돌아오고 나서 라이나와 하루를 보낸 다음에 공무를 다시 보았다. 집무실에 들어서자 아이시런 공주가 먼저와 있는 것이 아닌가! 아침 일찍 집무실에 왔기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깼다.
“공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5일 동안 어딜 싸돌아다니다 지금 나타난 거예요?”
아이시런 공주는 며칠 동안 혼자 돌아다녀서 그런지 불만이 쌓여 있는 것 같았다. 가르딘과 다닐 때는 몰랐는데, 없어지자 많이 허전했다. 또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제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발키리 영지에 머물렀다.
한정된 시간을 알차게 보내려는 아이시런 공주에게 가르딘은 중요한 존재였다. 자신에게 웃음을 주고 묘한 신경전을 통해 삶의 활력소를 충전시켜 주었다.
“저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불편을 끼쳐 드렸다면 진심으로 사과하겠습니다.”
가르딘은 신경전을 벌이기보다는 정면 돌파를 감행했다. 이럴 때는 차라리 솔직히 사과하는 것이 나았다. 보통 웬만한 상황이라면 사과를 받아주기 마련이었다.
“흥! 사과한다고 단 줄 알아요! 내 황금 같은 시간 어떻게 보상할 건데요!”
‘황금 하니까 황금음양과가 생각나는구나!’
단, 예외적인 사람도 있었다. 조건을 내밀고 유리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아이시런 공주가 먼저 도발을 했다.
가르딘은 꼼짝없이 걸려들게 되었다는 것을 감지했다. 무리한 부탁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때였다.
파멜라가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영주님!”
다급한 음성만큼이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찌나 급 하게 달려왔는지 얼굴이 땀에 젖어 붉게 달아올랐다. 파멜라는 아이시런 공주가 있음을 알고 먼저 인사를 올렸다.
“무슨 일인데 그래?”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셨어요.”
아이시런 공주가 자리에서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떠나오기 전만 해도 별다른 증상은 없었다. 노안이기는 해도 이처럼 갑작스럽게 쓰러지실 이유가 없었다.
아이시런 공주가 다급하게 상황을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요?”
“자세한 상황은 전달되지 않았어요. 그저 황제 폐하께서 침상에 누워 계신다는 연락을 받았을 뿐이에요.”
아이시런 공주는 현기증을 느꼈는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니언 황자가 죽고 나서 아버지마저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괜히 어리광을 부려 황궁을 나온 것이 후회되었다.
“아쉽지만 돌아가야겠네요.”
“준비를 서두르겠습니다. 파멜라! 너는 즉시 스필언과 미토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떠날 준비를 하라고 해.”
“예, 영주님!”
가르딘은 골칫거리라고 할 수 있는 공주가 떠나는 사실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정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만약 황제의 병환마저 누군가의 수작이 결부되었다면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갈 것이다.
‘정보가 더 필요해.’
단순히 피곤해서 황제가 쓰러진 것인지, 노환이 심각해진 것인지 분석해 둘 필요성이 있었다. 만일의 경우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해서 준비를 해두어야 했다.
아이시런 공주가 떠날 차비는 그날 바로 준비가 되었다. 마차는 물론 기사들, 병사들까지 모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주는 몸만 떠나면 되었다.
아이시런 공주는 발키리 영지를 떠나는 것이 섭섭했다. 짧았지만 생애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았다. 자유롭게 돌아보았고, 라이나와 브리안, 가르딘과 같이 즐겁게 보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오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욱더 발키리 영지에서의 시간이 아쉽고 안타까웠다.
가르딘이 아이시런 공주를 마중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강한 분입니다. 분명 별다른 이상 없이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마워요. 다음에도 웃으며 만났으면 좋겠네요.”
“반드시 그럴 겁니다.”
아이시런 공주가 마차에 타면서 보여준 마지막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약간은 씁쓸하면서도 안타까운 듯한 표정이었다. 가르딘도 시원섭섭한 감정이 들었다.
‘제국의 공주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지.’
가르딘은 스필언과 미토스에게 당부했다.
“공주님을 잘 보살펴 드리도록 해.”
“최선을 다해 공주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아이시런 공주가 탄 마차가 움직였다. 한동안 영지를 바쁘고 시끄럽게 한 존재가 떠나갔다. 갑작스럽게 떠나는 것이지 만 소식을 들은 영지 민들이 공주가 떠나는 길을 마중했다.
가르딘은 공주가 떠나는 장면을 끝까지 본 후, 파멜라에게 황궁의 정보를 수집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아이시런 공주가 안타까운 것보다 현 황궁의 세력구도 변화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시류를 냉정하고 철저하게 분석해야만 미래를 대비할 수 있었다.
“1황자와 3황자 모두 바쁘게 움직이겠지.”
당장은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황제가 쓰러지고 난 후 바로 움직이면 속이 뻔히 보이는 일이 되었다. 점차적으로 대비를 하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만반의 준비를 하며 황제가 죽을 때까지 대비를 해놓을 것이다.
명령을 받은 파멜라는 들어오는 정보를 수집하는 반면에 인포메드에 연락해서 정보를 샀다.
가르딘은 지금 즉시 영지의 전투체제를 1단계에서 2단계로 올렸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일이었다.
특히 헥토르 공국에 머무는 쥐새끼는 조심해야 했다. 뛰어난 인물은 아니더라도 군사력은 발키리 영지군보다 많았다. 갑작스럽게 기습을 받게 되면 상당한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영지군을 재정비한 후 집무실에 돌아왔다.
파멜라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가지고 왔다.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은 것은 분석할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황제의 병환은 특급기밀에 속할 수밖에 없었다. 인포메드에서도 자세한 정보를 수집하기는 어려웠다. 그저 황제가 쓰러졌다는 일반적인 소식만을 받아 왔다.
“계속 조사를 하겠지만 핵심 정보는 어려울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지. 많은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 마음 쓸 것 없다. 결국 시간이 지나봐야 알 테니 그때까지 되는 대로 정보를 수집하도록 해.”
“황도에 머무는 정보원까지 모두 동원하겠어요.”
“그렇게 해.”
황제가 병석에 누운 사실은 알게 모르게 카이로만 제국 전체로 퍼져 나갔다.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공표하기는 했지만 쉽게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유는 황제의 나이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아이시런 공주가 떠나고 20일이 흘렀다. 지금쯤 황궁에 도착했을 것이다. 오는 시간보다 가는 시간이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병환이 급하기에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아이시런 공주가 도착하고 5일이 더 흘러서야 스필언에게서 연락이 왔다. 통신구를 통해 가르딘에게 전달이 되었다.
긴장감이 흐르는 상황에서 연락을 받은 가르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전보다 좋은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공무를 볼 수 있을 정도는 된다고 하였다.
“후우. 다행이군. 만약 죽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
황태자위를 선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죽었다면 문제가 커졌을 것이다. 내전도 문제지만 서로의 명분을 위해서 내전의 양상이 심각하게 변했을 것이 뻔했다.
황궁의 사건이 심상치 않게 변하는 상황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영지가 있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간신히 끈 상황에서 다른 곳에 여력을 상황이 아니었다. 반면에 해결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두 폐는 며칠째 술독에 빠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히 화를 풀기 위해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실 때는 현실의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술이 깼을 때 또다시 현실의 비참함을 맛보아야 했다. 그래서 계속 술을 마셨다.
“형님! 어머니가 저보고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뭐라 했는데?”
“가르딘에게 사정하라고 하더군요!”
“너한테도 했구나!”
“형님한테도 했었군요!”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똑같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가르딘은 자신들과 다른 위치의 인물이었다. 새로운 성까지 하사받은 상급 귀족이 되었다. 혈육의 정으로 호소한다면 들어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이제 와서 어머니가 가르딘에게 사정하라는 말도 우습기 짝이 없었다. 가르딘을 괴롭히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어머니, 소니아 때문이었다.
후처였던 가르딘의 어머니, 사브리나에 대한 삐뚤어진 감정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모진 학대를 받은 사브리나는 결국 가르딘을 낳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결론적으로 소니아는 가르딘에게 말할 자격이 없었다. 가르딘이 아버지 이상으로 증오하는 자가 있다면 소니아였다.
‘난 싫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우리도 자존심이 있습니다!”
술 마실 돈도 얼마 없는 처지에도 자존심은 살아 있었다. 두 형제가 마시는 곳은 그나마 남아 있는 영지의 하나 남은 술집이었다. 다른 곳은 모두 넘어가고 문을 닫은 상태였다. 좁은 영지에 사람이 많지 않으니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한 병, 두 병 술병이 쌓여갈수록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기분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다. 그때 옆에서 여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제법 아름다운 목소리였기에 두 형제는 고개를 돌려서 보았다.
“이것도 영지라고 술집이 있네.”
“영지의 대부분을 빼앗겼다고 하던데.”
“참 무능한 종자들이네. 쥐꼬리만 한 영지를 가지고 형제끼리 경쟁하다니 한심하다!”
“맞아. 남아 있는 영지도 동생에게 사정해서 보전한 거라고 하던데.”
“얼마나 못난 놈들인지 얼굴 한 번 보고 싶네! 호호호호!”
“쓰레기를 보다가는 눈이 썩을지 몰라!”
두 여인의 대화는 정말 가관이었다. 얼굴이 반반하고 목소리가 아름다워서 듣고 있던 라이벨과 류카이젠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술이 들어가자 주변의 상황이 보이지 않았다.
“이년들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귀족을 능멸하고 살 성싶으냐!”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두 여인 중에 붉은 머리의 여인이 일어섰다.
“누군데 우리에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가요?"
닥쳐랏! 무례한 것이 누군데!”
“호오! 그럼 당신들이 그 형편없는 형제들인가요!”
“뭐라! 이년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이상한 상황이었다. 여인들은 사내가 달려드는데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뭔가 작은 반응이라도 보여야 정상이 아닌가!
“멈춰라!”
퍼퍽!
꽈다다다당!
달려들던 라이벨과 류카이젠이 한 방씩 얻어맞고 바닥을 뒹굴었다. 술이 만취한 상태라 몸의 균형을 잡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순식간에 얻어맞은 라이벨과 류카이젠이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귀족을 때리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이름을 밝혀라!”
라이벨과 류카이젠을 막은 인물이 하찮다는 듯이 대답해 주었다. 신분을 밝혀도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나는 제브라 자작령 소속 강철 기사단 단장인 불리쳐라고 한다. 이분들은 제브라 자작님의 영애이신 비비안 아가씨와 카밀라 아가씨다! 이제 됐나!”
블리쳐의 무서운 기세가 라이벨과 류카이젠에게 쏘아졌다.
움찔!
지금까지 먹은 술이 확 깨는 순간이었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두려움에 블리쳐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이제 대가를 치러야겠지.”
“무슨 소립니까! 저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대가를 치러야합니까?”
“닥쳐랏! 감히 아가씨를 위협하고 무사히 넘어갈 성싶으냐!”
“먼저 잘못을 한 것은 그쪽이지 않습니까! 귀족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호오!’
“그래서 잘못이 없다는 이 말이지.”
“그 … 렇습니다.”
“좋다. 하지만 나는 너희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정당하게 기사대결을 통해 잘잘못을 따졌으면 한다!”
기사대결은 카이로만 제국의 오랜 전통이다. 귀족들 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려온 방법이다. 문제는 한 번 대결을 신청하면 물러서면 안 되었다. 물러서면 귀족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내놓아야 한다.
물론 강한 귀족에게 유리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강자를 위한 법칙을 따르지,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순간 숨이 덜컥 막혔다. 기사대결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하며 승부에 지게 되면 피해를 보상해 주어야 한다. 기사도 돈도 아무것도 없는 라이벨과 류카이젠으로서는 막막한 전통이었다.
“블리쳐 경! 쥐꼬리만 한 영지에서 기사대결에 응하려면 시간을 조금 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알겠습니다. 비비안 아가씨는 역시 마음이 넓습니다.”
“아니에요!”
얼굴에 홍조를 띠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저 두 자매였다. 이유도 없이 귀족을 모욕했으니 두 형제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2개월의 시간을 주지. 그때까지 대비를 해놓는 게 좋을 거다.”
사실 비비안, 카밀라, 블리쳐 모두 평복을 입고 있었다. 귀족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그들이 귀족의 모습이었다면 라이벨과 류카이젠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두 자매와 블리쳐가 술집을 나가고 난 후 라이벨과 류카이젠은 한동안 얼이 빠진 채 움직이지 못했다.
“형님! 이제 어떡하지요?”
“나도 모르겠다!”
생각한다고 딱히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끝도 없이 높아 아래가 보이지 않는 절벽의 가장자리로 밀려가는 형국이었다. 조금만 더 밀려가면 절벽 아래로 떨어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