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2/93)

   @@[제2장 신성 덤을 데리고 돌아오다[two plus one]@@]

 황궁에서는 세력공방전과 황태자위 계승에 대한 일로 신경전이 지속되었다. 각 세력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5대 공작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필요한 귀족들의 수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었다.

 정쟁의 승부는 수와 관계가 깊다. 아무리 정의롭고 바른 정치를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수적인 열세에 처한다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결국 다수의 결정에 의해 정치는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정치의 핵심인 귀족은 소수다. 제국의 귀족이 대다수의 제국민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의 핵심논리다. 따라서 귀족의 대다수를 확보하기 위한 움직임이 끊임없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황궁의 치열함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미묘한 흐름과 숨 막히는 긴장감은 보이는 것보다 더 치열하다. 그렇기에 보이지 않는 힘의 원칙을 파악해서 줄을 잘 서야만 오래 살 수 있다. 잘못 선 줄은 다시 빠져나올 수 없는 그물이었다.

 지속되던 신경전이 주춤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물밑으로 포섭한 귀족들의 수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느 한쪽에 소속된 힘을 빼 오는 것이 주된 일이 되어버렸다. 세력에 귀속된 귀족을 빼 오는 일은 쉽지 않다. 배신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잃을 수 도 있다.

 더군다나 점차적으로 팽팽해지는 세력균형에서 어디에 설지 판단을 내리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세력이 팽팽한 상황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황제다. 황제의 말은 명분과 실리를 가진다. 힘이 없다고 해도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정의가 되기 때문이다.

 현 카이로만 제국의 코스트너 황제는 노환을 겪었는데도 아직 힘이 있었다. 코스트너 황제의 뜻에 의해 대세가 기울어질 수 있다.

 가장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코스트너 황제는 상당한 심력을 소비했다. 황제는 매번 5대 공작의 상소문을 받아야 했다. 각 공작들이 지지하는 황자를 황태자위에 올려놓기 위한 경쟁이었다.

 “누가 옳은 것인가?”

 자조적인 한탄이 흘러나오는 코스트너 황제였다. 황제 직속 비밀호위기사들인 피닉스윙을 통한 조사는 이루어졌다. 조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판명이 나지 않았다. 모호한 정보가 쌓여갈수록 황제의 노안에는 주름이 깊게 파였다.

 자신의 손안에 제국의 운명이 달려있다. 무턱대고 함부로 선별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특히 황태자위는 다음 대 황위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되어 있다. 천 년의 번영을 자랑하는 카이로만 제국의 미래를 위한 신중한 결정이 필요했다.

  바이멘 후작은 공정한 인물이다. 코스트너 황제가 가장 믿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다. 그러나 신임하는 바이멘 후작의 판단을 믿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든다.

 바이멘 후작은 확실치 않은 정보를 가지고 1황를 내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 내렸다. 제국의 기틀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장자가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했다.

 문제는 3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가져오는 정보가 거짓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또한 현재 세력의 균형이 너무 팽팽하다. 갑자기 어느 한쪽에 손을 들어주게 된다면 결과는 뻔하다. 불만을 가진 세력이 분란을 일으킬 것이다.

 “쉽지 않구나!”

 주름 가득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은 어린 시절의 황제에게나 현재의 황제에게나 항상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높고 파란 하늘처럼 맑고 변함없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초췌한 코스트너 황제에게 누군가 찾아왔다.

 파리한 안색의 여인은 누구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아이시런, 무슨 일이냐?”

 “그냥 왔어요.”

 “네가 아무 이유 없이 아비에게 찾아올 녀석이냐?”

 “아버지는 제가 아직도 철이 없는 줄 아세요!”

 새침한 모습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우면서 귀엽다. 누가 아이시런의 배필이 될지 무척이나 궁금한 코스트너 황제였다.

 한편으로는 못내 안타깝다. 둘째가 죽고 나서 가장 슬플 사람이 아이시런 공주였다. 자신의 슬픔으로 인해 돌봐주지 못한 아이가 스스로 털어버린 모양이다.

 ‘장하구나!’

 제국의 공주다운 면모였다.

 어려운 일을 벗어나니 이제 확실히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코스트너 황제는 이전까지 아이시런을 어린 소녀로 보았었다. 소녀에서 어른이 되었으니 그에 맞는 대접을 해주어야 했다. 어른은 홀로 결정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 뜻을 존중해 줄 필요성이 있었다.

 “아버지랑 술이라도 한잔할까 해서요.”

 “이 녀석, 술은 아직 무리다.”

 “왜요! 저도 이제 열여덟 살이에요. 술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어요!”

 “허허! 네가 나의 술 상대를 해주겠다는 말이냐.”

 “아버지가 제 상대가 될까요.”

 “요 녀석! 아직 아비가 그 정도는 아니다!”

 코스트너 황제의 노안에 오랜만에 활기가 돈다. 아이시런 공주와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활기가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아이시런 공주의 외모는 날이 갈수록 빛을 발했다. 

 황제는 황궁의 특산주인 슬라이트페론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슬라이트페론은 황제만이 마실 수 있는 독특한 술이다. 술 자체적으로 도수가 적으면서도 몸 안에 활력을 불어넣는 건강 음료주라고 할 수 있었다.

 술의 도수를 조절하고 취기 후의 어려움까지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렵고 난해한 배합이 필요하다. 황궁 내부에서 전문적으로 술을 담그는 주조장인이 아니라면 만들 수 없을 정도 다.

 1년에 딱 열 병만 생산하는 한정 수량이었다.

 “딱 세 잔만 해라! 좋은 술이라도 많이 마시면 해로운 법이다.”

 “알았어요. 아버지나 적당히 드세요.”

 “아비는 열 병을 마셔도 끄떡없느니라! 걱정하지 마라!”

 “그럼 러브샷 한번 할까요!”

 “어험! 그런 … 건 어디서 배웠느냐? 뭐 싫지는 않구나!”

 딸과 마시는 러브샷이 웃기는 모양이지만 코스트너 황제는 싫지 않았다.

 물론 궁금하기는 했다. 딸이 어디서 이런 방법을 배웠는지 말이다. 차마 다른 놈과 러브샷 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싫었다. 좋은 배필을 찾기 바라면서도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일지 모른다.

 두 잔 정도를 마시자 코스트너 황제가 진짜로 물었다.

 “네가 아무 이유 없이 올 리는 없지 않느냐! 하물며 다 늙은 아비를 기쁘게 해주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겠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은 다 들어주마!”

 기분이 좋아졌는지 코스트너 황제가 기쁘게 고개를 끄떡였다. 아이시런 공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전에 제가 여행 갈 수 있게 해주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에 여행을 가고 싶어요.”

 ‘크음!’

 내정이 혼란한 시기에 공주의 외출은 달갑지 않다. 코스트너 황제의 표정이 굳었다. 허락하겠다고 한 것은 전쟁이 있기 전이었다. 지금은 그 당시와 많은 것이 달라졌다. 고민하는 코스트너 황제에게 쐐기를 박는 아이시런 공주였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같이 갈 거예요.”

 “음!”

 스필언과 미토스는 제국의 신성이다. 최연소 오러마스터에다가 대륙 역사상 두 번째로 그랜드마스터에 오를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코스트너 황제도 두 신성을 눈여겨보았다. 앞으로 제국을 이끌어 가는 위대한 검이 될 것이 확실했다. 스필언과 미토스 누구 하나 부족하지 않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배경까지 생각하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차고 넘쳤다.

 ‘그 아이들이라면 아이시런의 배필로도 충분하겠지.’

  그래도 많은 시간 여행하게 할 수는 없다. 정국이 어수선한 분위기에 공주와 공작가의 이들이 만나는 것도 문제의 소지가 충분히 되었다.

 황궁에서의 생활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없다. 그것이 빌미가 되고 배신의 연결고리가 되어버린다.

 코스트너 황제는 간절하게 바라는 아이시런 공주의 마음을 외면하지 못했다. 아들이 죽고 무척이나 답답한 생활을 해왔으니 보답을 해주어야겠다고 판단을 내렸다.

 “네가 그토록 원하니 어쩔 수 없구나. 허락하마.”

 “고마워요! 아버지!”

 “단, 너무 아비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라.”

 “조금만 놀다 올게요!”

 기뻐하는 아이시런 공주의 모습을 보자 코스트너 황제는 흡족해졌다.

 ‘이제 아저씨 놀리러 가볼까!’

 해맑은 웃음 뒤로 아이시런 공주는 벌써부터 가르딘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

 ‘끄응!’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 둘 모두 앓는 소리를 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수련을 하겠다고 하는 미토스와 스필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발키리 영지로 가겠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냐?”

 “아직 수련이 미진합니다.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 싶습니다!”

 완고할 정도로 확고한 미토스와 스필언이었다. 현재 아들의 실력은 파악하기조차 힘들어진 상태였다. 지금보다 더 강해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한계의 벽을 넘는 일이다.

 벽을 넘는다면 좋겠지만 무리한 수련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한계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깨어질 수 있는 종잇장이 아니었다. 꾸준한 수련과 세월의 힘 앞에서 무너질 뿐이었다. 조급함이 화를 자초하기에 아들의 행보를 만류하게 된 두 공작이었다.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너희들은 충분히 강해졌다!”

 “그렇지 않습니다. 벽이 허물어질 수 있는 단초를 발견했습니다. 이대로 나태한 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현재 저희들이 이곳에 있다고 해도 특별히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일을 두 공작이 처리한다. 미토스와 스필언이 자리에 없다고 해서 당장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필요한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은 고민이 되었다. 현재로서는 들들의 말이 틀리지 않다. 그럼에도 망설여졌다.

 “영지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아버님이 도와주십시오.”

  “맡기겠다는 말이야?”

 “예.”

 영지를 대리로 경영하는 것. 물론 힘든 일이지만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영지에 직속 귀족과 행정관을 몇 명 파견하고 뒤를 돌봐주면 그만이었다. 대륙 최강의 공작인데 누가 감히 아들의 영지를 핍박할 수 있단 말인가!

 별 어려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공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영지 경영은 해봐야 한다. 그래야 더 높은 지위를 가졌을 때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다.

 “공주님이 같이 가실 것입니다.”

 쿵!

 뜻밖의 말이었다.

 아이시런 공주와 같이 움직인다는 것은 공주의 영향력을 흡수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더군다나 죽은 2황자의 동생이었다. 3황자 진영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두 공작의 입가에 작은 호선이 그려졌다.

 “그렇다면 가보아라.”

 “감사합니다!”

 여행을 위해서 스필언과 미토스는 아이시런 공주를 은밀하게 만났다. 비밀스런 만남을 통해 담합을 이루어냈다. 서로의 목적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스필언과 미토스였다. 가르딘의 성정을 조금씩 물려받기 시작했다.

 ‘기다리십시오, 스승님!’

 공주의 외출.

 그로 인해서 황궁에 소란이 벌어졌다. 혼란한 시기에 공주의 외출은 가당치 않다는 뜻이었다.

 특히 3황자 진영의 타이가라 공작과 네벨리언 공작이 발을 동동 구르며 반대했다.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스필언과 미토스가 공주의 호위로 정해졌다는 것은 반대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제의 단호한 결정에 반대할 수 없게 되었다. 코스트너 황제는 이번 여행은 공주의 의향을 최대한 들어준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로 인해 황태자 선택에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영향이 없다는 황제의 뜻에 다소 안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황제의 의중일 뿐이다. 귀족들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릴 것이다. 결국 황제의 선택이 1황자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든다.

 다마트 황자의 방에 타이가라 공작이 자리했다. 이미 타이가라 공작과 네벨리언 공작은 회합을 가져 귀족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굳건함을 재확인했다. 빠져나가려는 귀족들이 있다면 곤란한 상황이다.

 지금 상황은 팽팽한 것 같지만 실제적인 힘에서 1황자가 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귀족이 빠져나감으로써 전체적으로 굳건했던 철벽에 균열이 발생한다. 균열은 점차 커져 커다란 골칫거리가 될 수 있었다.

  “참 곤란하게 됐군요.”

 “면목이 없습니다.”

 “이번 공주의 여행이 발키리 영지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참으로 공교롭게 여러 번 방해를 하는군요.”

 가르딘은 현재 아무 발언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둘은 일방적으로 가르딘만을 요주의 인물로 보고 있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끊임없이 걸림돌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현재로선 공주의 암살은 어려웠다. 암살에 대한 죄를 스필언과 미토스에게 뒤집어씌운다면 좋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둘 다 오러마스터에다가 각 공작의 일급 기사들이 배치가 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목적도 없이 스필언과 미토스가 공주를 죽일 이유가 없었다.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3황자가 그 죄를 역으로 뒤집어쓸 수 있다. 이제까지 해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모든 죄가 가르딘에게 쏠리게 되었다. 미운 놈은 뭘 해도 미운 것이다. 가르딘으로서는 무척이나 억울한 일이다. 휩쓸리기 싫어서 피한 것인데, 그로 인해 오해가 쌓이고 있었다.

 “그 일은 얼마나 진행이 됐나요?”

 “네벨리언 공작이 치밀하게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만일을 위해서 길드에 연락을 해놓았습니다. 놈이 움직인다면 빠져 나갈 구멍은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성공했으면 좋겠군요.”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타이가라 공작은 귀족들을 매수하는 작업에 대한 상황을 다마트 황자에게 말했다. 전체적으로 움직임은 뚜렷하지 않았다. 모든 귀족들이 줄을 확실히 선 상태였다. 문제는 이번 황제의 결정으로 인해 조금씩 흔들리는 귀족이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문제가 커질 소지가 있었다.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은밀한 움직임이 감지가 되었다. 움직임은 은밀하면서도 치밀하게 3황자와 타이가라 공작의 계획을 들춰내고 있었다.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가 제 일을 방해하는군요. 의도대로 움직여줬으면 남은 날이라도 살 수 있었을 텐데.”

 “계획대로 합니까?”

 “이번 일이 처리된 후, 적당한 시기에 움직이세요. 물론 우리의 존재는 … 알지요?”

 “물론입니다.”

 가르딘은 오전 공무를 끝마치고 난 후 기사들의 수련을 지휘하고 있었다. 필리언, 갈라, 유타가 직접 수련을 조절하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기사들 모두 현운심법이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조금 더 수련이 이루어지면 익스퍼트 중급에 다다르는 기사들이 제법 나타날 것이다.

 기사들은 수련이 끝나면 현운심법을 운용하였다.

  가르딘이 운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전음을 사용하였다. 틀린 부분을 지적해 주기 위한 것이다. 진기의 흐름과 운용은 동기들보다 가르딘이 훨씬 뛰어났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네.”

 “그러게 말이야.”

 “한동안 맑을 줄 알았는데.”

 필리언, 갈라, 유타가 하늘을 보며 구시렁거렸다. 며칠 동안 맑을 것이라는 예견이 나왔다. 날씨가 모두 맞는 경우도 드물지만 갑자기 변하는 경우도 드문 발키리 영지였다.

 먹구름이 영지의 저택을 내리쬐는 해를 가렸다.

 가르딘도 불안감이 다가오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꼭 오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찾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현운심법을 운용해서 그런가!’

 현운은 검은 구름을 뜻한다. 참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그런 이유 따위로 구름과 벼락이 떨어지는 경우는 드문 게 아니라 없다. 있다면 말도 안 되는 경우다.

 운기가 끝나고 난 후 가르딘은 기사들에게 지켜야 할 규칙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알고 있지만 지키지 않는 것과, 나태해진 것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기 위한 일이다.

 부대를 관리하는 입장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기사단이나 부대의 단장, 또는 부대 통솔책임자는 15일에 한번 정도는 확인을 해서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방지한다.

 이를 두고 짜증나는 정신교육이라고 하는 것도 공공연하다. 실제적으로 효용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겠지만 소용 있다. 아닌 것 같지만 잠재의식 속에 자리하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지키게 된다. 일명 세뇌교육이라고도 한다.

 “기사란 모름지기 주군에게 충성하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그중에서도 충의에 대한 가르침은 카이로만 대제 전기에 명확히 명시되어 있다.”

 카이로만 대제 전기란 기사들이 읽어야 하는 필수 과목에 속하는 것으로 카이로만 대제가 살아가면서 지껄인 명언들을 집약시켜 놓은 것이다. 영웅이라서 그런지 말을 해도 멋있다.

 물론 그 당시에 집필하는 사람들이 영웅을 미화시키기 위해서 각색한 부분도 있겠지만 충분히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다. 기사가 무엇인지 핵심적인 내용이 적혀 있어, 기사의 정신수양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카이로만 대제 전기 272장 14절을 꼭 챙겨 보도록.”

 “저!”

 “왜 그러나, 슈안?”

 “272장이 아니라 292장인데요.”

 “뭐?”

 슈안은 제법 지식 좀 쌓은 기사였다. 가문 대대로 학사 집안이었다. 슈안이 특이하게 기사가 된 것이다.

 가르딘은 자신이 틀렸는지를 확인해 보았다.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길 바랐건만 슈안의 말이 맞았다. 아는 체하다 기사단이 보는 가운데서 개망신을 당한 것이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았다면 중간은 갔을 것이다.

 가르딘은 짐짓 그럴 수 있다는 듯이 슈안을 칭찬했다. 부끄러워하면 지는 것이다.

 “슈안은 참 똑똑하군. 다들 슈안을 본받아서 기사의 덕목을 지키도록. 알겠나!”

 “충!”

 황급히 기사단을 빠져나온 가르딘의 양옆으로 필리언, 갈라, 유타가 바짝 따라붙었다. 왜 따라붙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큭! 모르면 가만히 있지, 나서기는!”

 “자기는 안 지키면서 남은 지키라고 하니 말이 안 되지!”

 “분명 어제 급하게 찾다가 잘못 말한 걸 거야! 그렇지!”

 가르딘이 공부할 리 만무했다.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의 성격과 행동을 정확하게 꼬집었다.

 가르딘은 어제 자신의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카이로만 대제 전기의 필요한 부분을 읽었다. 그런데 실수로 페이지를 잘못 계산한 것이다.

 슈안이 가만히만 있었으면 아무도 몰랐을 내용이었다. 카이로만 대제 전기가 필수과목이라고 해도 페이지 수까지 정확하게 아는 기사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슈안, 이놈!’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아직 가르딘의 성격을 잘 모르는 모양이다. 한 번 삐친 가르딘은 오래간다. 뒤끝이 너무 강해서 슬레임 소갈딱지라는 말이 떠돌 정도다. 슬레임은 몬스터의 일종으로 평소에는 겉과 속이 투명하지만 화가 나면 금세 불투명해진다.

 기사들이 보고 있기에 칭찬을 했지만 결국 큰 피해를 볼 것이다. 암묵적인 불이익이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날씨는 왜 이렇게 우중충해!”

 “우울하면 술이나 한잔할까?”

 마무리 못한 서류가 있어서 안 돼.”

 “그러냐! 그럼 우리 끼리 마셔야지. 가자!”

 “좋지. 오늘 한 번 죽어보자!”

 퇴근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동기들이다. 야근이라도 시키는 날에는 돈이 더 들어갈까 봐서 차마 꺼내지 못하는 가르딘이었다. 도와준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 동기들이다. 노는 것 싫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가르딘도 영주만 아니면 술 마시며 놀고 싶었다.

 ‘매정한 놈들! 그렇다고 지들끼리 가냐!’

 돈 들어가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베로나의 부탁대로 파이트너 상단을 통해 돈을 융통시켰다. 괜한 일에 돈이 들어가니 계획했던 것들이 제대로 운용되지 않았다. 파멜라에게 바가지 좀 긁혔다.

 집무실로 들어가자 안에 파멜라가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퇴근한 줄 알았다.

 “무슨 일이야?”

  “공주님이 오신대요.”

 ‘응?’

 순간 잘못 들었는지 귀를 청소하고 다시 물었다.

 “다시 말해 봐.”

 “공주님이 오신대요.”

 “정말!”

 “통신구를 통해 연락이 왔어요. 확인해 보면 알 것을 제가 왜 거짓말하겠어요.”

 담담히 말을 하는 파멜라와는 다르게 가르딘은 긴장했다. 황궁에 있을 때 한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실현시킬 줄은 가르딘도 예상하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정이 이토록 혼란스러운데 공주를 외출시키다니 황제가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충분히 그럴 만한 나이긴 했다.

 가르딘은 불충스러운 생각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좀 전까지 충의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던 자가 맞는지 의문스럽다. 확실히 가르딘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인간이었다. 똥 누기 전 다르고, 똥 싸고 난 후 달랐다.

 ‘치매에 걸렸나! 제기랄!’

 공주가 의미를 두지 않고 오는 여행일지라도 가르딘에게는 부담이었다. 공주는 죽은 2황자의 동생이다. 1황자를 지지하는 가르딘으로서는 정쟁의 중심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미 오기로 한 공주를 막아설 수도 없는 일이기에 답답했다.

 “스필언 경과 미토스 경도 함께 오고 있다고 하네요!”

 스필언이 온다는 것에 화색이 도는 파멜라였다. 스필언이 떠나고 난 후 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자 무척 상심했던 파멜라였다. 돌아온다는 소식만으로도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빠직!

 가르딘의 미간에 주름이 기이한 각도로 튀어나왔다. 하긴 공주 혼자 다크랜드와 근접한 발키리 영지에 온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 도와주는 자가 있어야만 가능한 여행이었다.

 ‘이것들이 키워주니까 스승을 배신해!’

 분명히 가르딘을 말려 죽이려는 수작이었다. 가르딘은 자신의 의중에 반하는 자를 배신자로 단정해 버렸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한순간에 배신자가 되어버렸다.

 가르딘은 공주와 스필언, 미토스가 담합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누구 하나 의견이 충돌하면 절대로 결정될 수 없는 일이었다.

 “짜증 제대로다.”

 “예?”

 “아냐, 그냥 그럴 일이 있어.”

 “그럼 저는 이만 퇴근할게요.”

 “그래라.”

  집무실에 남겨진 가르딘은 심경이 복잡했다. 공주가 발키리 영지에 간다고 했으니 3황자 진영에서는 가르딘을 눈엣 가시로 여길 것이 분명하다. 특히 타이가라 공작과 네벨리언 공작은 가르딘을 죽이려고 이를 갈지 모른다.

 내전이 벌어지더라도 그 전까지 조용히 지내려는 가르딘을 소용돌이 속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공주만 움직이면 가르딘의 인생이 뒤바뀐다.

 “아씨! 또 돈 들어가겠네!”

 공주가 찾아왔는데 아무렇게나 대접하기도 뭐했다.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야 한다. 가르딘의 처지가 하급 귀족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명색이 후작이었다. 후작이 되어서 공주에게 고구마빵이나 특산물이라고 내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황제가 내준 상금을 생각지도 못한 일에 고스란히 헌납하고 있었다. 계획된 일에 쓰기는커녕 다시 토해내어야 할 판이다.

 “짜식들이 막판에 속을 썩이네.”

 이 모든 것이 스필언과 미토스 때문인 것 같았다. 그동안 잘해 와도 한 번 잘못하면 끝장나는 게 세상 이치다. 다시 원상 복구하기 위해서는 무지막지한 노력이 필요하다.

 바자바인 후작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존재가 아이시런 공주였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종잡을 수가 없을 정도다. 공주가 움직이기만 하면 가르딘의 일상생활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마차는 조용히 움직였다.

 마차 바퀴의 재질이 딱딱하지 않고, 마차 내부에 충격을 완화하는 장치가 마련되어 승차감이 최상에 이른다.

 마차의 외부는 화려하게 수놓은 문양과 장식이 달려 있어 기품과 위엄을 나타내었다. 게다가 외부의 충격에 대비한 5서클의 방어 마법까지 걸려 있다.

 그 주변으로 칼날같이 날이 선 기사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어느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마차를 지키는 호위기사 중에 가장 돋보이는 인물 두 명이 있었다. 제국의 떠오르는 신성 스필언과 미토스였다.

 마차에 타고 있는 여인은 제국의 공주 아이시런이었다.

 아이시런 공주는 가끔씩 마차의 창문을 열어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알렸다. 또한 기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아이시런 공주의 모습에 기사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창문을 닫은 후.

 “되게 머네.”

 “맞아요! 어찌나 먼지 멀미나서 미치겠어요.”

 “그러게 말이야. 움직이지도 못하고 짜증나 죽겠어.”

 문을 닫자마자 평소의 모습으로 돌변하는 아이시런 공주였다. 마차 안은 완벽한 방음처리가 되어 있어 말소리가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는다.

 아이시런 공주가 황궁을 나온 지 정확히 20일이 흘렀다. 마차로 이동하는 중이라 생각만큼 속도가 나지 않았다. 공주의 주변을 지키는 미토스와 스필언은 정확한 규칙만을 내세웠다. 가르딘의 융통성을 완벽하게 체득하지 못해서 아이시런 공주의 심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엘리언! 얼마나 남았지?”

 “이반 영지를 지나고 조금 더 가면 발키리 영지가 나온다고 하네요.”

 “아직도 멀었네. 벌써 20일이나 소모했잖아.”

 아이시런 공주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오랜 시간 머물 수 없는 아이시런 공주로서는 최대한 빨리 이동하고 싶었다. 그러나 맘처럼 쉽지 않았다.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줄 수 없기에 더 답답했다. 이제까지 꾸며온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두 가지 상충된 삶을 살아가는 아이시런 공주의 비애였다.

 공주가 편안한 여행을 하며 답답해할 때 가르딘은 빨빨거리며 돌아다녀야 했다. 영지 주변을 정리하고 다듬어야 했다.

 공주가 지나가는 길에 사는 영지민들에 대한 교육도 실시했다. 도로를 청소하고 주변에 꽃을 심었다. 번듯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영지의 모든 곳을 다 정리하기에는 시간과 돈이 너무 많이 든다. 원래 중요한 것은 보이는 부분이다. 보이는 곳만 제대로 정비하면 그만이었다.

 “저건 뭐야?”

 “밀농사 후에 생기는 지푸라기 더미입니다. 썩혀두었다가 나중에 밀 농지에 흙과 함께 뿌리면 밀의 성장에 도움이 됩니다.”

 “치워.”

 “예? 그게 무슨?”

 “저런 위생 상태 불결한 것을 공주님에게 보이면 좋아하겠냐! 냄새도 고약한데, 우선은 보이지 않는 곳에 갖다 놔!”

 “알겠습니다.”

 농사를 위해 필요한 것이기에 하지 말라는 말은 할 수 없다. 다만 공주가 볼 수 없는 곳에 놔두는 것이 나았다.

 물론 공주는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공주의 주변에 있는 귀족들이 핑곗거리를 잡을지 모른다. 대비를 해놓는 것이 과하지 않았다.

 공주는 호기심이 왕성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궁금해 하며, 귀찮게 할 것이 분명하다. 그 전에 미리 준비를 하면서도 영지 내에 구경할 만한 몇 곳을 지정해 두었다. 발키리 영지에서 가장 발전한 곳을 선정했다.

 처리해야 할 일도 많은 시간에 자잘한 것들까지 신경을 쓰고 있는 가르딘이었다. 20일 동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몸이 피곤하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쌓여갈수록 스필언과 미토스에 대한 배신감이 짙어졌다.

 20일 동안 스필언과 미토스를 어떻게 처리할지도 고민했다. 그에 더해서 가르딘은 누군가를 항상 끌고 다니면서 일을 시켰다.

  “슈안! 영지민들이 힘들어하는 것 같다. 젊고 힘센 네가 가서 도와주어라.”

 “알 … 겠습니다.”

 슈안은 갈금 아닌 갈금을 받고 있었다.

 가르딘은 절대 허튼 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피곤하고 자잘한 일들을 시켰다.

 슈안은 영주가 시키는 일을 거절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10일 동안은 가르딘이 자신을 신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깨달았다. 필리언 단장님과 유타, 갈라 부단장님이 동정 어린 시선으로 볼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때 말하지 말걸!’

 괜히 정정해 준다고 말한 것을 후회하는 슈안이었다. 이미 지나버린 일이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다. 가르딘의 성정을 몸속 깊이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가르딘은 슈안과 돌아다니면서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일일이 손보았다. 시키면 될 일을 가지고 직접 움직이는 모습이 부조화의 극치였다.

 슈안이 작업하는 동안 가르딘은 그늘지고 서늘한 바람이 부는 곳에 기대서 한숨 때렸다. 거나하게 한숨 자고 난 후 일어났을 때 슈안의 얼굴은 일에 지쳐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일이 제법 힘들었던 모양이다.

 “너도 이리 와서 쉬어라. 쉴 때 쉬고, 할 때 빡세게 일하는 것이 현명한 거야.”

 가르딘의 친절한 말에도 슈안은 쉽게 안도하지 못했다. 쉬는 만큼 몸을 힘들게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자잘한 일들이 왜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직접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들이다.

 “힘드냐?”

 “아닙니다.”

 “그래, 한창때는 하이브릴도 씹어 먹을 수 있지.”

 “ … 그렇습니다.”

 하이브릴.

 신의 금속이라고 전해지는 전설의 금속이다. 금속 자체적으로 신성을 띠고 있어 어떠한 공격과 마법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신화에 따르면 삼신기라고 불리는 기체가 하이브릴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지만 누구도 본 적은 없다고 한다. 말로만 전해지는 전설상의 금속, 들어는 봤어도 보지는 못하는 허상에 떠다니는 신의 금속이 바로 하이브릴이다.

 하이브릴을 씹어 먹을 수 있는 치아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무기보다 강력한 치아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그런 치아를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 가르딘의 정신 공격에 점점 지쳐가는 슈안이었다.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 움직여볼까.”

 가르딘이 움직이면 당연히 슈안도 일어나서 움직여야 한다. 일도 안하고 지시만 내리는 자는 잠자다 일어나고, 일만 실컷 한 사람은 개미 호흡만큼 쉬다가 다시 일해야 한다.

  슈안은 세상의 불합리가 여기에 다 모여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가르딘은 영지를 돌다가 밀 농지 부근에 거대한 바위를 보았다. 너무 커서 옮길 수가 없을 정도다. 정확히 집 한 채만 한 바위가 농지에 떡하니 박혀 있었다. 밀 농지에 들어가는 수로를 막고 있어 그 주변으로 따로 물을 길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슈안은 설마 했다.

 가르딘이 바위를 보고 있는 것 자체가 불안했다.

 설마가 원래 사람 잡는다.

 “슈안, 부숴라.”

 “예? 저걸 언제 ….”

 “오러로 쪼개다 보면 부술 수 있을 거다.”

 바위라고 해도 오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말이지만 문제는 슈안이 이제 막 익스퍼트에 들어선 기사라는 것에 있었다. 오러를 장시간 사용할 정도로 능숙하지 않다.

 “하다 보면 된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하면 되지. 안 그러냐!”

 “… 그렇습니다.”

 차마 못 하겠다고 할 수 없었던 슈안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바위덩어리를 향해 걸었다.

 ‘그래, 할 수 있다!’

 오기로라도 해야 했다. 현운심공을 최선을 다해 운용하였다. 그러자 슈안의 검에 백색의 오러가 흘러나왔다.

 “히얍!”

 사아아아악!

 우선은 겉부터 조금씩 잘라내기로 결정했다. 슈안이 있는 힘을 다해 휘둘러도 수백만 년 동안 압력을 받아 형성된 바윗덩어리가 만만할 리 없었다. 큰 덩어리답게 쉽게 잘리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잘리다만다. 다시 휘두르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출수가 필요하다. 오러의 운용뿐만 아니라 체력적으로도 무척이나 고된 작업이었다.

 슈안이 검을 휘두른 지 30분이 흘렀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숨을 조금이라도 더 들이마시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슈안이었다. 호흡조차 불규칙하게 쉬어졌다. 호흡의 규칙성은 오러의 운용과 체력에 관련되어 있다. 힘들더라도 규칙적으로 호흡해야 한다.

 슈안은 검을 들고 있을 힘조차 없어 보였다.

 “숨을 고르고 마음을 차분히 해라! 어려운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마음만 있다면 이겨낼 수 있다. 기사란 무엇이냐! 힘들면 포기하는 그런 나약한 존재가 기사인가! 그것이 네가 말하는 기사인가!”

 가르딘의 가차 없는 독설이 이어졌다. 끊어져가던 슈안의 정신과 체력을 붙잡는 계기가 되었다. 오기가 차올라 다시 한 번 힘을 내었다. 그러자 몸 안에 잠재되어 있던 힘들이 다시 살아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오러의 운용이 한결 탄력을 받았다.

 그러나!

 바윗덩어리는 너무 크고 단단했다.

 결국 슈안은 더 이상 부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숨을 고르는 것조차 버거운 것 같은 상황이었다.

 가르딘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격려의 한마디를 슈안에게 해주었다.

 “세상에 마음만으로 안 되는 것도 있구나! 슈안, 너로 인해 좋은 교훈을 얻었다.”

 꼴까닥!

 슈안은 그제야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르딘의 사악함에 정신이 하늘로 승천해 버렸다. 게거품을 문 채로 기절해 버린 슈안이었다.

 정신을 잃은 슈안을 보며 가르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은혜는 십분지 일로, 원한은 백만 배로 갚아주는 가르딘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더 강하다면 못 할 것도 없지.”

 가르딘의 검이 뽑혔다. 뽑혀진 검이 바윗덩어리를 향했다. 시위는 고요하며 바람마저 멈췄다. 대기의 움직임조차 가르딘의 의지에 의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만물에 의지를 싣는다. 그러면 단순한 막대기라도 천고의 병기가 될 수 있다.

 가르딘의 검은 명검이라고 할 수 없다. 일반 기사들이 사용하는 검이다. 그러나 의지를 실은 검은 어떤 것도 부숴 버릴 수 있는 예기를 발했다.

 가르딘의 검이 뻗어 나갔다. 일검이 만검으로 변했다. 단 일검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서 서린 가르딘의 의지는 만검에 달했다.

 슈우우응!

 가르딘의 의지가 바윗덩어리를 통과했다.

 - 무극칠검식-제6절초-무극만검-소멸.

 무극칠검식의 후반 3식의 두 번째 초식이 발현되었다. 가르딘도 몇 번 사용해 보지 않은 절초다. 주변에 어느 누구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검의 의지가 베고 지나간 바윗덩어리는 여전히 우뚝 솟아 있었다. 가르딘의 검이 다시 회수되어 제자리로 돌아왔다.

 휘이이잉!

 가르딘이 장악한 의지의 공간이 풀어졌다. 그로 인해 바람이 다시 불었다. 바람은 그리 세지 않았다. 산들거리는 바람은 땀을 식혀주는 정도였다.

 바람이 바윗덩어리로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뚝 솟은 바위가 모래성처럼 바람을 타고 허물어져 가는 것이 아닌가! 산들바람에 흩날리며 부서졌다.

 집채만 한 바위가 부서져 버리는 엄청난 광경이었다. 누군가 보았다면 가르딘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부서져 내린 바위를 보면서도 가르딘은 만족하지 않았다.

  “아직 완벽하지 않군.”

 무극만검이 극의에 이르면 유를 무로 돌려버린다. 가루조차 남지 않고 소멸시켜 버린다는 뜻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검의였다. 신마조차 완벽하지 않았던 경지에 점차적으로 다가서는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의 경우 수련을 하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적으로 강해지고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내 가족을 지키려면 나는 누구보다 강해져야 한다. 나의 의지는 가족이며, 가족이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의지의 원동력이다!”

 어떤 누구라도 가족을 위협한다면 두말하지 않고 살려두지 않을 가르딘이다.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목적을 달성하는 데 명분과 정의를 내던져 버린 지 오래였다.

 “고생했으니 보답은 해야겠지.”

 가르딘의 의지가 슈안의 몸을 들어 올렸다. 허공섭물을 시전한 가르딘은 슈안의 몸을 곧추세우고 어루만졌다. 열심히 노력했으니 대가를 주는 것이 마땅했다. 그동안 고생한 보람을 주었다. 대신 고통은 따른다.

 퍼퍼퍼퍼퍼퍽!

 진기를 주입하는 추궁과혈이었다. 가르딘이 맘만 잘 먹으면 고통 없이 가능하겠지만 세상에 공짜는 존재하지 않았다. 슈안이 고통 속에 신음성을 내질렀다.

 “크으으으윽!”

 공주가 발키리 영지에 오기 바로 전날에 누군가 찾아왔다. 가르딘으로서는 보기 싫은 짜증나는 인간이었다. 공주가 온다는 냄새를 맡자 발키리 영지에 찾아온 것이다.

 현재 눈앞에 있는 쥐새끼 같은 놈은 핵토르 공국의 알토란같은 영지를 받아놓고 관리하는 코워드 공작이었다. 두목 쥐새끼를 따라 수하 쥐새끼인 버루거 자작과 비린스 자작이 함께 나타났다.

 가르딘은 쥐 면상의 코워드 공작이 찾아온 것이 불만이었다. 물론 겉으로 내색하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았다.

 “공사가 다망한 시기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코워드 공작님!”

 “아닐세, 공주님이 오시는데 오지 않을 수가 있나.”

 코워드 공작은 귀족들뿐만 아니라 젊은 쥐새끼를 동반했다. 코워드 공작의 젊었을 적 얼굴을 그대로 빼다 닮았다. 한 눈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둘 다 주먹을 부르는 얼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아들 와이어트라고 하네.”

 “오러마스터를 보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나도 반갑네.”

 와이어트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공작이 되었으니 권력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력이라 고는 쥐뿔도 없어 보이는 것이 코워드 공작의 성품까지 빼다 박았다.

 가르딘은 코워드 공작의 잔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공주가 왔으니 자신의 아들을 밀어보려는 수작이었다. 불가능에 도 전하는 인간들이 여기에 또 있었다.

  ‘미친 거 아냐! 상대가 누군지 알고 하는 거 야!’

 주제파악 못 하는 것은 아버지나 아들이나 똑같았다. 저런 면상을 들고 다니는 것부터가 죄악이었다. 문제를 만들지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문제는 이것만 아니었다. 코워드 공작은 3황자의 편에 섰다. 결론적으로 가르딘을 감시하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가르딘이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코워드 공작이 감시자 역할로 뽑혔을 가능성이 컸다.

 ‘타이가라 공작이 꼼수를 부렸군.’

 코워드 공작은 결코. 뛰어난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지위는 만만치 않다. 발키리 영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르딘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행동의 제약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타이가라 공작이 직접 움직이기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그렇기에 차선책으로 코워드 공작을 이용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가르딘을 심중으로 압박하려는 수작이었다. 여러 가지로 가르딘을 귀찮게 하는 타이가라 공작이었다.

 “내일 공주님이 도착하는 대로 연회를 할 것입니다. 그동안 편안히 쉬십시오.”

 “알겠네.”

 코워드 공작에게 방을 배정하고 난 후 가르딘은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에 필리언, 갈라, 유타, 파멜라가 앉아 있었다.

 “쥐새끼는 왜 온 거야?”

 “타이가라 공작이 보냈겠지. 스스로 생각할 만큼 역량 있는 쥐새끼는 아니잖아.”

 동기들과 파멜라는 가르딘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이 수긍했다. 코워드 공작이 그런 주변머리를 가지고 있었다면 핵토르 왕국과의 교전을 그처럼 어렵게 몰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슈안을 어떻게 한 거냐? 애가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던데.”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가르딘은 뻔뻔했다. 오히려 가만히 잘 생활하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무어냐는 듯한 반문을 했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애가 그렇게 되냐!”

 “공주님이 오시는데 그런 시시한 얘기는 그만하지.”

 슈안에 대한 얘기는 두 마디가 끝이었다. 시시한 내용으로 치부되어 버린 불쌍한 슈안이었다.

 필리언, 갈라, 유타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기에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불쌍하지만 아이시런 공주를 대접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공주가 방문하는 것이 영광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무척이나 고단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공주님의 처소는 준비가 얼마나 진행되었지?”

 “오늘 중으로 완벽하게 처리했어요.”

  “다행이군.”

 저택이 완성되지 않은 관계로 공주의 처소만 따로 만들어야 했다. 돈이 두 배로 드는 작업이었다. 공주의 방을 만들기 위해 일꾼들이 모두 동원되어야 했다. 부서진 것들을 다시 수리하고, 집안 구조를 꾸미는 일도 만만치 않은 돈이 들었다.

 “파멜라는 꼬투리 잡히지 않도록 준비 철저히 하고 확인도 직접 하도록 해.”

 “물론이에요.”

 파멜라의 일 처리는 확실하니, 별반 걱정되지는 않았다.

 “기사단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공주의 주변을 삼중으로 경호하고, 작은 것이라도 이상한 점이 있으며 즉시 나에게 연락을 해.”

 “알았다.”

 필리언, 갈라, 유타가 경호하는 이상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까지 공주의 주변을 감시할 예정이었다.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적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공주가 죽거나 다치는 일이 발생하면 정말 큰일이었다. 이유를 불문하고 모든 화살이 가르딘에게 올 수도 있다.

 공주의 방문을 환영하는 귀족들과 다르게 가르딘은 무척이나 번거롭게 생각했다.

 빠드득!

 “아주 고맙구나! 스필언! 미토스!”

 “뭔 소리야?”

 이를 갈며 고맙다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필리언, 갈라, 유타였다. 저게 과연 고맙다고 하는 말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공주님이 오신다니 황홀할 정도로 기뻐서 그런다!”

 “네가!”

 “설마!”

 동기들은 이번에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슈안이 당한 것을 봐서 곱게 넘어갈 위인이 아니었다. 티 나지 않게 괴롭히는데 도가 튼 가르딘이었다.

 ‘스필언, 미토스! 아주 고달프겠구나!’

 50명에 달하는 기사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아이시런 공주의 마차가 발키리 영지에 다다랐다. 마차가 영지로 들어서자 그 주변으로 영지민들이 공주를 반겼다. 도로를 비워둔 채 이열 종대로 줄이 잘 잡혀 있었다. 가르딘과 같이 며칠 동안 연습한 효과가 나타났다.

 환영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발키리 영지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웠던 스필언과 미토스가 공주를 호위하자 더 열광적이었다.

 “와아아아아! 공주님 만세! 신성 만세!”

 아이시런 공주가 영지민의 열렬한 환영에 보답하듯이 마차의 창문을 열어 얼굴을 비추었다. 햇살에 반사되는 아이시런 공주의 눈부신 미모가 영지민들의 영혼마저 하늘로 승천하게 만들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너무 아름다워서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아이시런 공주에 대한 소문은 영지민들도 들었다. 카이로만 제국 제일 미인이라는 것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함성 소리가 갑자기 더 커졌다. 특히 젊은 사내들은 아이시런 공주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경험을 하고 말았다. 결혼한 사내는 부인들의 질시가 담시 시선을 받아야 했다.

 영지민의 환호를 받으며 마차는 발키리 영지의 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영지는 제법 구색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가르딘이 보이는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관리했기 때문이다. 큰 영지일수록 빛과 어둠이 크기 마련이다. 모든 곳을 완벽하게 관리한다는 것은 신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아저씨가 제법인데.”

 “그러네요, 공주님!”

 아이시런 공주와 엘리언이 짐짓 감탄했다. 여기까지는 가르딘의 의도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마차는 발키리 영주의 저택에서 다다라서야 멈추었다. 가르딘은 미리 마중을 하여 공주를 환영하였다.

 “제국의 상징이자 꽃인 아이시런 공주님을 다시 뵙게 되어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가르딘의 입에서 정중한 말이 술술 나왔다. 보는 눈이 많기 때문에 정중하면서도 깔끔한 마무리를 하였다. 말은 길고 구차하게 해봐야 꼴이 우스워진다. 가르딘의 옆으로 코워드 공작도 인사를 올렸다.

 아이시런 공주의 모습은 황홀할 지경이었다. 눈이 부시는 아름다움에 사내들은 넋이 나가버렸다. 특히 코워드 공작의 옆에 자리한 와이어트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생전 처음이었던 것이다. 침이 절로 고여서 흘렀다.

 사뿐! 사뿐!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날개가 있다면 날아갈 것만 같은 모습이다. 사뿐히 걸어 가르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가르딘의 옆에는 라이나와 브리안이 서 있었다. 라이나는 조금 긴장한 모습이었고, 브리안은 신기한 듯 아이시런 공주를 바라보았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네요.”

 “소신도 영광입니다.”

 아이시런 공주의 시선이 라이나와 브리안에게 향했다. 공주는 예전부터 무척이나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여인이기에 가르딘이 죽고 못 사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라이나는 빤히 바라보는 아이시런 공주의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가르딘이 옆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르딘이 있기에 라이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당당했다.

 “반가워요!”

 “공주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라이나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이상한 감정이 들었지만 별일 아닌 일로 치부했다. 그녀는 가르딘을 믿었다.

  “조금 후에 연회가 시작될 것입니다. 공주님께서 참석해 주신다면 연회장이 더욱더 빛이 날 겁니다!”

 가르딘의 입에 발린 말이 작렬했다.

 “기대되네요.”

 아이시런 공주도 알면서 대꾸해 주었다. 가르딘은 아이시런 공주가 여장을 풀고 쉴 수 있도록 방으로 에스코트 했다.

 가르딘은 공주를 방으로 안내하면서 온종일 미소를 잃지 않았다. 공주를 방으로 안내하고 난 후 스필언과 미토스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가르딘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싹!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필언과 미토스는 소름이 돋는 것을 경험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괜히 다가가기 겁이 날 정도다.

 “공주님을 무사히 모셔 오느라 수고했다.”

 “과찬입니다. 저희들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냐? 그런데 황궁 사정은 어떠하더냐?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은 나도 귀가 있으니 듣고 있었다. 정말 그런 것이냐?”

 스필언과 미토스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가르딘이 말한 대로 황궁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특별하게 큰 움직임은 없다지만 폭풍이 일기 전의 고요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궁의 사정은 후작님이 생각하신 대로입니다.”

 “어렵구나. 내정이 혼란한데도 공주님이 이곳까지 오다니 조금 특이하기는 하구나!”

 “처음에는 어려웠습니다. 공주님과 저희들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호오!’

 혹시나 해서 찔러봤는데 역시나였다. 가르딘을 상대로 거짓을 말하지 않는 순진한 스필언과 미토스였다. 가르딘이 무슨 의도로 물었는지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의도를 알았다면 무턱대고 사실을 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순전히 공주님 때문에 온 것이냐?

 “아닙니다. 공주님도 중요하지만 아직 저희의 수련이 미진한 것 같아서 후작님을 찾아왔습니다. 가르침을 더 받고 싶습니다!”

 씨익!

 “그래, 가르침이라!”

 가르딘은 고심하는 척했다.

 ‘가르침은 개뿔, 이제부터는 스스로 헤쳐 나가는 것뿐이 야!’

 스필언과 미토스는 어느새 한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오러 마스터에 올라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벽을 느끼는 것이다. 성장 속도가 너무 빨랐다.

  이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너무 빠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심마에 빠질 수 있다. 심마는 자신도 모르게 다가온다. 또한 빠른 성장일수록 정신이 받쳐주지 못해 쉽게 마에 귀속될 수 있다.

 스필언과 미토스의 정신력이 강하기에 지금까지 버려왔지만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고 누군가 도와주기에는 힘든 시점이었다. 지금은 스스로 돌파해야 한다. 누군가 가르쳐주는 것은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을 인지시켜 주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벽이 느껴졌겠지.”

 “그렇습니다.”

 “벽을 허물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욱 크고 단단한 벽을 느꼈을 테지.”

 가르딘도 겪어본 일이었다. 그렇기에 스필언과 미토스의 상태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누구도 알지 못했던 벽을 한순간에 파악한 가르딘을 스필언과 미토스는 존경스럽게 바라보았다.

 “역시 저희들의 스승님 이십니다!”

 “하나, 방법은 없다.”

 “정말 없는 것입니까?”

 “있다면 스스로 헤쳐 나가는 것뿐이지. 지금 단계는 무척이나 중요해서 섣부른 선택으로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면 오러 플로젼을 각오해야 해.”

 스필언과 미토스는 실망하지 않았다. 방법이 없다고 해도 노력하면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 천재들이었다.

 “실망할 필요는 없다. 반드시 홀로 수련할 강직한 정신력만 뒷받침이 된다면 충분히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해답은 연회가 끝이 난 후 알려주마.”

 “감사합니다, 후작님!”

 가르딘은 홀로 고민하는 것도 깨달음을 얻는 시초가 될 수 있다며 답을 잠시 미루는 척했다. 하지만 이번은 그렇게 쉽게 답을 주지 않을 것이다.

 천재에게도 시련은 다가온다. 이번 시련이 생애에서 가장 큰 시련이 될 것이 분명하다.

 왜냐! 가르딘이 그렇게 만들 생각이니 말이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축 공주 방문 기념연회.

 공주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글귀만큼이나 연회는 성대하게 차려졌다. 연회에 들어가는 돈도 장난 아니었다. 가르딘은 심장이 점점 타들어가는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화려하게 차려진 음식들과 세련된 장식품들. 특히 장식품들은 무척 고급스러웠다. 평소에 가르딘의 저택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3일 전.

 가르딘은 파이트너 상단의 몬타나 지점장을 찾아갔다. 주문한 것들이 도착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영주님! 4천 골드는 내셔야 합니다.”

 “빌리는데 왜 그렇게 비싸!”

 “장식품 가격만 해도 10만 골드가 넘어가는 특제품들입니다. 잘못하다 흠집이라도 나는 날에는 제목이 달아납니다!”

 몬타나 지점장은 사정사정 했다.

 가르딘도 웬만한 가격이면 사려고 했다. 그런데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다. 차라리 집을 짓는 것보다 더 비쌌다. 한 번 사용하고 언제 사용할지도 모르는 장식품들을 위해서 몇만 골드를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빌리는 것이었다.

 “4천 골드 주면 되잖아! 엄살 그만 피워.”

 “감사합니다! 역시 후작님이 되시니 배포가 크십니다!”

 “빈정거리는 것 다 들린다. 그만 해라.”

 몬타나 지점장이 사례 걸렸는지 기침을 했다.

 “커흠! 죄송합니다.”

 “진짜 빈정거린 거냐!”

 “… 아닙니다.”

 현재.

 장식품들 모두 다 빌린 것들이다. 집에 있는 것들을 활용하려고 했지만 모두 낡고 오래된 것들이라 사용하기 힘들었다. 가르딘은 눈에 불을 켜고 연회장을 지켜보았다. 장식품 중 하나라도 부서뜨리는 날에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었다.

 시녀인 미리네가 가르딘에게 차를 가지고 왔다. 미리네는 아직 서툰 기색이 완연했다. 핵토르 왕국의 침공이 있은 후 다시 뽑은 시녀였다. 찻잔을 들고 오다가 발이 접질렸는지 넘어질 뻔했다.

 ‘협!’

 가르딘이 헛바람을 삼켰다.

 ‘아, 안 돼!’

 “후우!”

 다행히도 시녀가 곧바로 몸의 균형을 바로잡았다. 순간 가르딘은 심장이 덜컥했다. 미리네가 한숨 쉬는 것보다 가르딘이 한숨 쉬는 게 더 크게 느껴졌다. 시녀들은 장식품들을 빌린 것인지 모른다. 사실을 아는 사람은 가르딘과 몬타나뿐이었다.

 “후우! 애 떨어질 뻔했네.”

 미리네가 한숨과 동시에 안도를 했다. 오히려 혈색이 파래진 사람은 가르딘이었다.

 ‘난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다, 이 XXX야!’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었다.

 탁!

 가르딘의 청각에 잡히는 잡음이 들렸다. 술잔을 거칠게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좌측의 기둥 옆으로 와이어트가 술을 연거푸 마시는 것이 보였다.

 ‘저건 또 뭐야! 술잔을 소중히 하라고!’

 연회는 공주가 들어와야 본격적으로 시작이 된다.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술이 취하도록 마시는 경우는 드물었다.

 가르딘은 와이어트가 신경이 계속 쓰였다. 와이어트보다 술잔이 깨질까 봐 조바심이 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빌어먹을!”

 크게 소리치지는 않았다.

 20분 전, 연회장에 오기 전에 와이어트는 공주의 방으로 찾아갔다. 공주의 숙소는 경비가 대단히 살벌했다. 삼중으로 기사들과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라 개미 한 마리도 접근이 불가능했다.

 와이어트는 당당했다. 아버지가 공작이었다. 신분이 확실한 상황이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무슨 일인가요?”

 연회복장을 모두 차려입은 아이시런 공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보는 순간 넋이 빠져나가 버릴 정도로 강렬한 충격을 받은 와이어트였다. 잠시 주춤하던 와이어트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정신을 추스르고 찾아온 목적을 전했다.

 “제가 공주님의 춤 상대가 되어도 되겠습니까?”

 “싫은데요.”

 와이어트는 아이시런 공주의 거절에 다시 한 번 신청을 했다. 춤 신청을 하면 의례적으로 몇 번 정도 거절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싫어요.”

 “알 … 겠습니다.”

 공주는 생각도 안 해보는 것 같았다. 마치 너 같은 것이 주제도 모르고 자신을 넘본다는 시선처럼 느껴졌다. 아름다움은 여전했지만 와이어트의 자존심은 한순간에 모두 무너져 버렸다. 상대가 공주만 아니라면 강제로라도 데려가겠지만 어쩔 수 없이 물러서야 했다.

 거절을 당하고 돌아오는 중간에 여인을 한 명 더 보았다. 아이시런 공주의 공식적인 행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 파멜라가 찾아가고 있었다.

 파멜라는 아이시런 공주만큼 아름답지는 않지만 제법 순수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

 파멜라는 와이어트의 얼굴을 보고 곧바로 쥐새끼를 떠올렸다. 어찌나 똑같은지 코워드 공작을 알면 당연히 알게 되는 혈연일통관계를 설명해 주었다.

 “발키리 영지 시종장을 맞고 있는 파멜라 토스칸이라고 합니다.”

 음정의 고하가 별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똑 부러지게 대답해 주었다.

 파멜라가 귀족이라는 것을 알자 와이어트는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공작의 아들이라는 것이 먹힐 것이라고 확신했다.

  “와이어트 공자님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업무로 인해 급히 가야 한다는 파멜라의 팔을 잡은 와이어트였다. 상당히 무례한 행동처럼 보였다.

 파멜라는 별다른 표정이 없이 와이어트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일인가요?”

 “이번 연회에 내 춤 상대가 되어줬으면 하는데, 당연히 허락하겠지?”

 “싫습니다.”

 응?

 곧바로 거절한다. 공작의 아들이 말을 하는데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하다니! 연거푸 거절을 당한 와이어트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고작 하급 귀족 주제에 감히 나를 거절하는 것이냐! 네가 정말 … 커억!”

 “그만 하지.”

 어느새 누군가 나타나서 와이어트를 압박했다. 바람처럼 나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타난 인물은 스필언이었다.

 스필언은 파멜라를 잡고 있던 와이어트의 오른팔을 강제로 풀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무형의 기운을 쏘아내어 와이어트를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아니! 당신은!”

 “여인의 뜻도 존중해 주지 않은 자라니! 상당히 무례하군! 파멜라 양에게 사과하지 않는다면 나와 정식으로 대결을 해야 할 것이다!”

 와이어트는 순간 움찔거리며 세 걸음을 더 뒤로 물러섰다. 상대는 자신처럼 아버지의 배경만 믿는 사내가 아니었다. 스스로의 실력으로 오러마스터에 이른 천재기사였다. 귀족 대 귀족의 자존심 싸움으로 인해 때론 목숨도 잃을 수 있다. 와이어트는 이런 일로 목숨을 걸 인물이 되지 못했다.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스필언 백작님!”

 “정중하게 사과하도록.”

 “파멜라 양에게 무례를 범한 점, 진심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사과를 받아주십시오!”

 파멜라는 스필언의 등장에 감동을 받았다. 꿈에 그리던 백마 탄 왕자의 등장이 이와 같을까! 쥐새끼의 무례한 행동은 금세 잊어버렸다. 쥐새끼의 존재감은 그 정도가 다였다.

 “사과를 받아들일게요.”

 “감사합니다, 파멜라 양!”

 다음부터 파멜라 양에게 또다시 무례를 범한다면 내 검이 용서치 않겠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와이어트는 비굴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전형적인 소인배였다. 와이어트는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여기에 더 있어봤자 자신만 초라해질 뿐이었다.

 연회장 안으로 돌아온 와이어트는 그다음부터 술을 거칠게 마셨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거절을 당하고, 망신까지 당했다. 쥐새끼의 속인 만큼 무척이나 좁고 편협했다.

 술을 한 병 이상 마시고 난 후 와이어트는 자리를 벗어났다. 화를 삭이기 위해서 바람을 쐬려는 것 같았다.

 가르딘은 와이어트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술을 어찌나 급하게 먹는지 벌써부터 취기가 달아올라 얼굴이 붉었다. 저대로 조금 더 마시면 인사불성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술 마시고 주접떠는 놈이 제일 추했다. 차라리 자리를 피하는 것이 현명했다.

 ‘그래, 그냥 나가서 놀아라! 네가 나가니 벌써부터 분위기가 산다, 인마!’

 연회장에 다시 활기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또 다른 쥐새끼가 등장했다. 어린 쥐새끼가 나가자 늙은 쥐새끼가 들어온 것이다.

 코워드 공작이 아이시런 공주를 보기 위해서 나타났다. 젊으나 늙으나 예쁜 여자 좋아하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코워드 공작이 가르딘에게 다가왔다.

 “내 아들이 먼저 나갔는데 여기 오지 않았나?”

 “그런가요. 전 보지 못했습니다.”

 “흠, 어디 간지 모르겠군.”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 곧 찾아오겠지요.”

 “그렇겠지.”

 가르딘은 알면서도 모른 척해 버렸다. 필요 없는 인간들을 배려해 줄 정도로 착하지 않았다.

 ‘나한테 그걸 왜 물어! 내가 네 꼬붕이냐!’

 때마침 연회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주인공이 나타났다. 흰색과 분홍색의 조화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아이시런 공주가 황족다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등장했다. 연회장의 모든 시선이 아이시런 공주에게 쏠렸다. 눈을 델 수 없는 미의 여신이었다.

 좀 전까지 아들을 찾던 코워드 공작마저 아이시런 공주의 아름다움에 와이어트를 잊어버렸다. 그딴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와이어트의 입지가 졸지에 쓰레기처럼 비참해졌다.

 ‘오!’

 가르딘은 속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르딘이 바라보는 곳은 아이시런 공주가 등장하는 곳의 오른쪽으로 서른 걸음에 위치했다. 연회장의 구석은 아니지만 어느 누구의 시선도 받지 못한 곳이었다. 라이나와 브리안, 록산느, 파멜라가 들어오고 있었다.

 가르딘의 시선을 받은 라이나가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이처럼 화려한 옷을 입기는 라이나도 처음이었다. 라이나는 가르딘이 사준 목걸이를 걸고 나왔다. 가르딘이 보기에 목걸이가 라이나의 아름다움을 한결 상승시켜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라이나가 가르딘의 옆으로 어색하게 걸어왔다.

  “저 괜찮아요? 어색하지 않아요?”

 “너무 아름다워.”

 “아빠, 나는?”

 “우리 브리안도 아름답구나! 역시 내 딸이야!”

 가르딘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가족과 있을 때는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한참 동안 라이나와 브리안을 보고 있다가 옆에 있는 록산느와 파멜라를 보았다. 가르딘은 라이나와 있으면 다른 곳에 시선이 잘 가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크흠!”

 “미안.”

 “아니에요. 보기 좋네요!”

 “파멜라가 차려입은 모습은 처음 보는데, 잘 어울리는구나!”

 “그래요. 엄마가 억지로 입으라고 해서 어색할 줄 알았는데.”

 록산느가 한사코 입으라고 해서 입은 옷이었다. 평상시 간편하게 입는 것을 선호하는 파멜라로서는 어색함 그 자체였다.

 “부인도 잘 어울립니다.”

 “영주님의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에요!”

 록산느에게 가르딘은 은인이었다. 힘겨운 상황에서 가르딘이 없었다면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자신과 딸을 돌봐준 가르딘에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었다. 록산느는 가르딘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이었다.

 “부담 갖지 마세요. 우리는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가르딘이 가족들과 모여서 정겨운 얘기를 할 때 아이시런 공주는 귀족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시시콜콜하고 고리타분한 인사가 이어졌기에 그다지 속이 좋지 않은 아이시런 공주였다.

 그녀는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가르딘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중해서 찾자 그녀의 시야에 가르딘이 가족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이 들어왔다.

 ‘보기 좋네.’

 가르딘은 진짜로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이시런 공주는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질투가 나고 심술기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는 솔직히 알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지, 나는 짜증나는데 너무 좋아하는 것 아냐!’

 연회장 안에 연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주는 잔잔하면서 몸을 들썩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발키리 영지 특유의 거친 야성이 음악에 섞여 있었다.

 연회장 안의 중심에 공터가 생겼다. 그 안으로 사람들이 한둘씩 짝을 지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연회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댄스 타임이 다가온 것이다.

 기사 정복을 벗고 연회복을 입은 미토스가 아이시런 공주의 첫 상대가 되었다. 선남선녀의 만남이라서 그런지 그림이 잘 잡혔다.

 가르딘과 같이 있던 파멜라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와이어트로부터 구해준 백마 탄 왕자가 춤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럼 우리도 춰볼까요, 라이나 양!”

 “부탁해요, 가르딘 경!”

 가르딘과 라이나는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처럼 들떠 있었다. 맞잡은 두 손이 살짝 떨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떨림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연주가 계속되고, 춤을 출수록 어색함이 사라지고 자연스러워졌다.

 록산느와 함께 있는 브리안은 엄마, 아빠의 다정한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연회장의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 갔다.

 휘이이잉! 휘위이이잉!

 연회장 밖은 찬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다크랜드의 거대한 산맥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라, 서늘하면서도 몸을 움츠리게 만든다.

 연회장에서 나온 와이어트는 술병을 들고, 처량하게 혼자 마시고 있었다.

 “젠장! 감히 나를 무시해!”

 아이시런 공주의 거절과 파멜라의 거절. 또한 스필언의 서늘한 기운에 눌려 반항 한 번 못하고 짓눌렸던 자신을 생각하자 더욱 화가 났다. 지금 당장 화를 풀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술로 화를 달랬다.

 술을 한참 마시다 보니 연회장에서 연주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쯤 공주와 파멜라가 춤을 추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자 가라앉던 화가 다시 치솟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럽고 화나는 일이었던 것이다. 쉽사리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술을 마실수록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이 형성되었다.

 “얼마나 잘난 놈이랑 추는지 봐주지.”

 일어나서 움직이려고 할 때 와이어트의 시야에 여인이 보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눈을 비비고 다시 보는 와이어트였다. 여인은 아이시런 공주와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인이 걸어가는데 와이어트는 자신도 모르게 앞을 가로 막았다.

 “무슨 일인가요?”

 앞을 막는 정체불명의 사내를 보고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이유를 묻는 여인이었다. 당당함 때문인지 와이어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 따라 같은 상황을 여러 번 겪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코워드 공작가의 장남 와이어트라고 한다.”

 “그래서요?”

 오늘은 정말 이상하다. 공작의 아들이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못한 존재는 아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전혀 주눅 들지 않는다. 오히려 반문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마치 길을 왜 막고 있는 것이냐고 따지는 것 같았다.

  인내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와이어트가 순간 치솟는 화를 간신히 참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취기가 돌아 혀가 정상은 아니었다.

 “오늘 내 추음 상대가 되어주어야겠다.”

 “싫은데요.”

 빠직!

 “뭐라고!”

 “싫다고요.”

 “네년이 감히 내 말을 거절하겠다는 말이야!”

 “그래요.”

 여인은 와이어트가 화를 내는데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개가 짖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간신히 참고 있던 와이어트의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완력으로라도 마음먹은 대로 하려는 사내의 무식한 본능이 와이어트의 두뇌를 잠식했다.

 착!

 와이어트가 여인의 오른 손목을 잡았다. 힘으로 끌어당겼다. 와이어트는 여인의 완력이 제아무리 강해도 사내의 힘 앞에서는 소용없다고 믿었다.

 끄응!

 “아니?” 

 여인의 발이 지면에 달라붙은 것처럼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겨도 여인은 별것 아닌 것처럼 버티고 있었다. 그러더니 와이어트의 시야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하늘과 지면이 거꾸로 보이게 되었다. 세상이 거꾸로 되는 시간은 찰나였다.

 쿠쿵!

 와이어트의 몸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바닥에 쓰러진 후에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새 여인이 다가와서 와이어트의 면상을 발로 걷어찼다. 어찌나 힘차고 시원하게 차는지 속이 다 후련해졌다.

 퍼퍽!

 데굴데굴!

 와이어트는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극심한 고통과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어떻게 저런 연약한 여인이 이토록 무지막지한 힘을 가졌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으! 내가 … 누군 … 줄 ….”

 퍼퍽!

 제대로 된 말을 하기도 전에 또다시 발이 면상을 가격했다. 상대는 와이어트가 어떤 신분을 가졌는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괜히 말했다가 매를 버는 와이어트였다. 면상 자체가 발길질을 부르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모양이다.

 바닥에 또다시 굴러서 엎어진 와이어트는 개구리가 쫘악 퍼진 것처럼 뻗었다.

 움찔! 움찔!

 정신은 깨어 있는 것 같지만 심한 충격을 견딜 수 없는 몸은 저절로 경련이 일어났다. 태어나서 이토록 무식하게 맞아 본 적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사박! 사박!

 사뿐히 걸어오는 여인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이 들릴수록 와이어트는 심한 공포를 느꼈다. 여기서 더 맞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었다. 차라리 기절하고 싶은 충동까지 받았다.

 “안젤리카! 거기서 뭐 하는 거냐?”

 뒤에서 여인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안젤리카의 아버지인 라이젠이었다.

 “아빠! 이 사람이 싫다는데 제 손을 함부로 잡았어요.”

 “뭐라고! 이런 개잡놈을 봤나!”

 라이젠의 움직임이 유령처럼 빨랐다.

 와이어트는 힘겹게 뜬 눈으로 불같이 화를 내는 노인을 보았다. 노인의 얼굴이 흉신악살의 악마를 보는 것처럼 바뀌었다. 순간 마왕의 현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연약하고 여린 내 딸의 손목을 강제로 잡아! 너같이 추잡한 놈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

 ‘… 연약?’

 부정하고 싶은 와이어트는 말할 틈이 없었다. 이미 라이젠의 발이 와이어트의 면상과 몸을 지근지근 밟고 있었다.

 퍼퍼퍼퍼퍼퍽!

 거침없이 짓밟았다. 와이어트의 몸이 넝마로 변해가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엄청나게 밟혔다.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변했다. 얼굴이 잘못 만들어진 고구마빵처럼 짓뭉개졌다. 라이젠이 안젤리카를 사랑하는 만큼 발길질이 계속되었다. 더 맞았다가는 죽을지도 몰랐다.

 “아빠, 나는 괜찮으니까 그만 하세요.”

 “흥! 착한 내 딸이 아니었으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가르딘의 청각은 예민하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이상해서 찾아와 봤다. 가르딘이 왔을 때 와이어트는 이미 만신창이 상태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놈이 내 딸을 희롱했네! 죽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안젤리카가 말리지 않았다면 죽였을 것이다. 함부로 인간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딸을 희롱한 놈을 살려둘 정도로 성격 좋은 드래곤은 아니었다.

  가르딘도 라이젠의 마음은 이해했다. 만약 쥐새끼 같은 놈이 브리안을 희롱했다면 가르딘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쥐새끼가 코워드 공작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대로 살려두면 가만히 있을 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이자니 일이 커질 염려가 있었다.

 “우선 원상태로 회복시켜 주십시오.”

 “왜 그러는데?”

 “이놈이 코워드 공작의 아들입니다. 여기서 죽으면 귀찮은 일이 발생합니다.”

 ‘음!’

 라이젠은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결론적으로 안젤리카의 유희가 자신의 개입으로 인해 엉망이 될 수 있었다.

 “알겠네. 힐링!”

 드래곤의 마력이 쏟아지자 엉망진창으로 망가졌던 와이어트의 얼굴과 몸이 원상태로 회복이 되었다. 한순간에 완벽하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더러워진 옷은 클린 마법을 통해 깨끗하게 세탁이 되었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꿈을 꾸게 해줘야죠.”

 신마의 신변잡기 중에서 가장 극악한 수법. 사람의 머릿속에 환상을 심어주는 대법이었다.

 일명 몽환대법이라고 불리는 이 수법은 원래 배교의 술법으로, 제대로 걸리게 되면 평생을 꿈속에서 악몽을 꾸다 죽을 수 있다. 인간의 정신 속에 잠재된 가장 극악한 기억을 떠오르게 만드는 술법이다.

 신마는 배교의 몽환대법을 손보면서 자유자재로 사용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한바탕 꿈을 꾸게 되지만 꿈은 곧 현실이 된다.

 “이거 제대로 될지 모르겠네.”

 몽환대법의 위험한 점은 혈을 잘못 누르거나, 내공의 조절이 잘못되면 백치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가르딘도 몽환대법을 사용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잘 될지가 의문이었다.

 ‘안 되면 말지.’

 백치가 되어버려도 상관없었다. 지금 있었던 기억만 사라지면 그만이니 말이다. 무식하게 여인을 힘으로 제압하려는 놈은 당해도 쌌다.

 가르딘은 머리의 혈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혈인 백회혈과 뇌호혈에 흐르는 기운에 몽환의 사술을 걸었다. 조금이라도 흔들림이 있으면 대법은 실패하고, 시전자는 백치가 된다.

 파팟! 파팟!

 두 번 정도 내공을 집약해 와이어트의 몸을 두드린 후 가르딘은 라이젠과 안젤리카에게 연회장에 들어가자고 했다. 대법은 제대로 된 것 같으니 30분 정도 후에 깨어날 것이다.

 “이제 들어가죠.”

  “이리 놔두어도 되는 건가?”

 “괜찮습니다. 조금 있다 재밌는 구경을 하게 될 겁니다!”

 가르딘과 안젤리카, 라이젠이 연회장에 들어오자 시선이 쏠렸다. 아이시런 공주에 비해 손색이 없는 안젤리카를 보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대시를 받았지만 안젤리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법사라는 것을 밝혔기에 안젤리카를 함부로 대하는 자는 없었다.

 안젤리카는 대범하게 먼저 나섰다.

 움찔!

 안젤리카가 미토스에게 다가가서 춤을 신청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남자가 먼저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자가 하는 경우도 있었다.

 안젤리카가 나서는 모습에 라이젠의 눈빛에 노기가 떠올랐다. 앞으로 나가서 딸을 잡으려고 할 때 가르딘이 어깨를 잡았다.

 [언제까지 다 큰 딸을 품에 안고 있을 생각입니까! 이제는 자유롭게 놔줄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자네 딸 아니라고 쉽게 말하는 것 아닌가!]

 [크흠!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만약 브리안이 다른 남자에게 춤을 신청하면 가만히 있을 수 있나!]

 가르딘은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고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일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미토스는 춤을 신청 받으면서도 떨떠름했다. 오싹한 기분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안젤리카의 손을 잡으면 안 된다고 머릿속에는 경고성이 울리고 있었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숙녀의 용기를 무시하는 것도 기사의 도리가 아니었다.

 결국 미토스는 드래곤의 손을 잡았다. 정직한 기사는 융통성이 부족했다.

 안젤리카는 미토스의 손을 잡자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전율과 동시에 짜릿함, 그리고 설렘이 느껴졌다. 무척이나 생소한 느낌이지만 기분이 좋았다.

 끼이익!

 조용한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연회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술을 많이 마셨는지 비틀거리며 연회장에 마련된 탁자에 다가선 그가 갑자기 옷을 벗는 것이 아닌가!

 옷을 벗고 정갈하게 개놓은 인물은 탁자 위에 눕더니 고요하게 잠을 잤다. 마치 자신의 방 안에 들어가서 자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의만 입은 자의 행동을 그냥 넋 놓고 보게 된 사람들이었다.

 어떤 미친놈이 연회장에서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 가! 제정신은 아니었다.

 하의를 그대로 드러낸 모습을 보자 여인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장 어이없는 사람은 코워드 공작이었다. 와이어트의 당당한 행동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놈을 데리고 가라!”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보인 와이어트의 추태는 코워드 공작의 망신과 직결됐다. 아들의 추태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아이시런 공주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코워드 공작을 한심하게 보았다.

 연회장에서 급하게 벗어나려는 코워드 공작이었다. 코워드 공작이 아들을 데리고 나가자 그를 따르는 귀족들도 우르르 따라 나갔다.

 씨익!

 가르딘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생성됐다. 라이젠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라이젠도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쥐덫 완성!’

 이로써 코워드 공작은 발키리 영지에서 머물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귀족들이 보는 가운데서 벌어진 일이라 어떠한 변명도 소용없어 졌다.

 연회장을 아수라장을 만들어 버린 와이어트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일어난 후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술을 마시고 밖으로 나간 것만을 기억했다.

 그가 일어나자마자 코워드 공작이 불같이 화를 냈다. 와이어트는 일어나자 벌어진 날벼락 같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이 되어서야 사실을 알고 쥐구멍에라도 숨으려고 했다.

 결국 아침에 아이시런 공주에게 비공식적인 사과를 올리고 난 후 바로 헥토르 공국으로 사라져 버렸다.

 가르딘과 동기들은 급하게 떠나는 코워드 공작과 귀족들을 보며 정겹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남겨진 코워드 공작의 귀족들이 몇 명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되지 않았다. 발키리 영지에서 공주를 제외하면 가르딘이 왕이었다. 상급 귀족의 지위를 이용하여 압박하면 되었다. 권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있는 권력 안 쓰면 낡아 버린다.

 가르딘이 저택의 뒤로 보이는 작은 동산에 올라섰다. 이곳에 올라온 이유는 스필언과 미토스를 따로 불러서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산은 가까우면서도 조용하고 한적했다. 그렇기에 개인 면담을 집중적으로 나누기에 좋은 장소였다. 누군가 들어서 좋은 내용이 오가지는 않을 것이다.

 가르딘이 먼저 올라와서 무게를 잡고 있었다. 동산의 맞은편에서 지어지고 있는 저택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지 관리에 관한 심도 있고 깊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할 건 해야겠지.’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과거의 일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원인을 분석하고 찾아냈으면 그에 합당한 결과와 대가를 지불해야만 사라지는 것이다.

 가르딘이 뒷짐을 지고 무게를 잡고 있을 때 스필언과 미토스가 황급히 뛰어 올라왔다. 가르딘을 기다리게 했다는 것 자체가 죄스러울 따름이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가르딘은 일부러 그런 느낌이 들도록 미리 올라온 것이다.

 기세싸움에서 중요한 것이 선빵이다. 선빵을 날려 기선을 끓어 올려야만 나중에 편해진다. 그것은 모든 상황에서의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초반부터 지고 들어가면 다시 회복하기 무척 어렵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먼저 올라온 것이다. 부담 가질 필요 없느니라.”

 부담 가지라고 하는 행동이었다. 안 가지면 섭섭한 가르딘이다.

 “수련의 벽이 느껴진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게 찾아온 거겠지. 하지만 너희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나를 생각하고 의지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너희들은 이미 오러마스터 중급을 넘었을 것이다. 다 자란 녀석들이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이제부터 수련은 홀로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가에 달렸다. 정신이 강하다면 벽은 어느새 무너져 있을 것이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가르딘의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집중했다. 가르딘은 두 신성의 마음을 파고드는 말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사실을 사실처럼 거짓을 사실처럼 스스럼없이 말하는 가르딘이었다.

 “저기 들판을 보아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지 않으냐! 한낱 풀에 불과하지만 성장해서 씨를 뿌린다는 목표를 가지고, 홀로 모든 것을 버티며 자라난 것이다. 이제 막 자라나는 풀조차 목표가 있고, 홀로 모든 것을 견딜 준비가 되어있다. 하물며 우리는 사람이다. 또한 너희들은 제국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신성이다. 내 말뜻을 알겠느냐!”

 한동안 스필언과 미토스는 격정적인 감정에 말을 잇지 못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한 부분을 이해한 것이다. 반면에 가르딘은 기겁했다. 그럴 의도는 없었다.

 ‘이것들이 개 풀 뜯어먹는 소리에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네!’

 깨달음을 얻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저 있는 말, 없는 말을 그럴듯하게 섞은 것에 불과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그동안 자만했던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반성하는 두 신성이었다. 그에 반해 가르딘은 기가 찼다.

 ‘너희들이 자만한 거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게으르고 나태한 것이냐!’

 쓸데없는 말로 깨달음을 얻을 정도면 심득이 담긴 말을 듣게 되면 바로 벽을 허물지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가르딘이 남 잘되는 것을 기쁘게 바라보는 그런 사람인가! 속이 뒤틀리며 배가 상당히 아파왔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알고 있다면 너희들은 벽을 허물 자세가 된 것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정신력을 강화시키고, 스스로 벽을 허물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까지 너희들은 항상 누군가가 옆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스스로 깨달을 때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가 장소를 알려주겠다. 따라오너라.”

  가르딘은 두 신성을 이끌고 다크랜드로 향했다. 어둠의 대지라고 불리는 다크랜드에 들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스필언과 미토스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한 어떠한 의문도 들지 않았다. 그만큼 가르딘을 믿고 있었다.

 가르딘은 신성을 이끌고 제법 깊숙이 들어갔다. 영지까지 다시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천천히 움직이다가 속력을 내었다. 다크랜드 안으로 한참을 들어가던 가르딘이 멈추었다.

 가르딘이 안내한 장소는 절벽과 그 옆으로 거대한 폭포와 계곡이 자리한 곳이었다. 폭포 아래에는 수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공터가 존재했다. 또한 지면에서 10미터 정도 위에 자연적으로 생성된 동굴 10여 개가 있었다.

 “내가 이곳으로 안내한 이유를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곳까지 무엇을 하기 위해 왔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여기서 너희들은 수련을 한다. 물론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수련을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수련의 목적은 주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생존하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여기에서 해결을 해야 한다. 어떤 방법을 쓰든 상관없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느끼는 것이다! 또한 하루의 절반은 반드시 동굴에 들어가서 명상을 해야 한다.”

 두 신성은 조금 긴장했다. 생소한 상황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르딘이 이유 없이 쓸데없는 일을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었다.

 “어두운 동굴의 벽을 보고 있으면 미칠 수도 있다. 하지만 내면의 잠재된 자신을 만날 수 있다. 마음속의 또 다른 나와 대화를 나누어라! 그럼 반드시 벽이 허물어질 것이다! 시간은 따로 정하지 않았다. 깨달음을 얻을 때 나오너라! 나는 너희들을 믿는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가르딘은 두 신성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려주었다.

 “고생이 되겠지만 깨닫는 점이 있을 것이다. 연락이 필요 하다면 이것을 사용하여라.”

 “배려에 감사합니다, 가르딘 후작님!”

 ‘배려는 무슨! 크크크!’

 가르딘은 통신구를 하나 주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황궁에서 벌어지는 일이 급박하면 통신구로 연락을 해야 했다.

 통신구를 주고 난 후 가르딘은 미련 없이 방향을 돌렸다. 천천히 두 신성에게서 멀어져 갔다.

 돌아가는 가르딘의 얼굴에 희열에 찬 듯한 사악한 미소가 번져갔다. 공주를 데려온 일을 절대 잊지 않는 가르딘이었다.

 ‘쉽지 않을 거다.’

 가르딘이 신성에게 시킨 수련은 면벽수련이었다. 흔히 불교의 고승이나 도를 깊게 수련하는 도인이나 할 수 있는 수련법으로 기사의 수련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길을 지향한다. 욕망의 절제라는 명제 아래, 색욕, 금욕, 식욕, 명예욕 등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하는 수련이다. 절대 쉽지 않았다.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어렵고 고단한 수련이 될 수 있다.

 특히 어려운 점은 어두운 벽을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벽만 보고 수련한다고 해보아라. 도대체 벽에서 무엇이 나오겠는가! 말도 안 되는 수련이었다.

 색욕, 금욕,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가르딘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수련이었다. 보통 한 달 버티면 용하다는 평가를 받는 지독한 수련이다.

 “녀석들이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지. 하지만 쉽지 않을 거다. 그리고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소중한 교훈을 깨닫도록 하여라!”

 면벽수련을 통해 세상이 음험함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믿는 배틀엑스에 발등을 찍힐 수 있다는 소중한 교훈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가르딘은 발키리 영지 내의 치안을 강화하였다. 헥토르 왕국과의 전쟁으로 병사들을 보강하는 차원에서 1만을 더 징병했었다.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낸 인원을 다시 차출했다.

 아이시런 공주가 발키리 영지 내에 머무는 동안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취했다. 영지 곳곳에 경비병들을 배치하여 수상한자들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최소한으로 압축을 시켰다.

 또한 은밀히 숨기에 좋은 장소를 탐색할 수 있도록 인포메드 지부장인 테이란과 협조를 했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다. 영지 탐색에 들어가는 모든 기타비용과 정보비용을 제공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가르딘으로서는 쓰리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발키리 영지의 순수 전투력은 타 영지에 비해 결코 약하지 않았다. 다만, 정보력에서는 턱없이 부족했다. 인포메드마저 없다면 눈과 귀를 가린 꼴이 되어버린다.

 “정보가 힘인데 황궁 내의 정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답답하네.”

 인포메드만 믿고 있다가 나중에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을 수 있었다. 인포메드 외에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정보를 얻으려면 시간과 노력, 가장 중요한 경험이 필요하다. 시류를 읽고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자를 포섭하는 일이 결코 쉬울 리 없다. 더군다나 믿을 수 있는 자여야 한다. 단기간 내에 정보력을 보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집무실에 앉아 있는 가르딘은 파멜라를 불러 정보력을 보강할 수 있는 임시방편을 모색해 보았다. 파멜라와 의논하면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것이 각 행정관이 머무는 장소란 말이지.”

 “행정관은 파견된 각각의 마을을 분석해서 보고서로 작성하도록 되어 있어요. 지금까지는 마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까지 병행한다면 영지 내의 정보는 확실할 거예요.”

 “다행이군. 그런데 영지 이외의 점들은 뭐지?”

 “제가 오스라인에서 친하게 지낸 모든 인원을 데려오지는 못했잖아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에요. 그들은 각자 맡은 지역에서 어렵게 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당장 장사를 접을 정도는 아니겠지만 자금력이 받쳐주지 못해서 세를 불릴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예전에 급히 필요한 자금을 그들에게 빌려주면서 세를 불릴 수 있도록 해주었어요.”

  “믿을 수 있는 자들인가?”

 “믿을 수 있는 자들만 포섭을 한 상태라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무리예요.”

 영지 이외의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점들은 엉성하며 열악했다. 거미줄 같은 연결이 아니라 허술하며 거리도 멀었다. 믿을 수 있는 자들로 구성하려고 하다 보니 인원의 증강이 힘들었던 것이다.

 “내가 원하는 지점에 정보원을 둘 수 있을까?”

 “원하는 지점이 어디인데요?”

 “카론 마이어 공작, 네벨리언 공작, 타이가라 공작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이 좋겠어. 또한 황궁의 움직임을 파악해야 하니 황도 오스란에도 정보원을 보냈으면 하는데.”

 대륙의 전체적인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너무 힘이 들었다. 돈도 돈이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우선은 시간이 없는 관계로 적대 관계에 있는 3황자 진영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중요한 정보는 어쩔 수 없이 인포메드를 이용하겠지만 대략적인 흐름을 파악할 정보가 필요한 일이었다.

 파멜라는 지도의 위치를 고려하면서 이동할 수 있는지를 파악해 보았다.

 “가능할 거예요. 다만 돈이 더 필요할 것으로 예상이 돼요.”

 “이럴 때도 돈을 아끼면 내가 이상한 놈이지. 그런 일에는 써도 되니까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럼 영주님의 의중대로 실행하겠어요.”

 “네게 고생만 시키는구나.”

 “아니에요. 제게 살아가는 목적을 깨닫게 해주신 분이 바로 영주님이에요. 저는 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어요.”

 “그러냐? 다행이구나! 그보다 진법은 여전히 잘 되어가고 있는 것이냐?”

 “아마 영주님도 놀라실걸요. 헥토르 왕국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진법보다 족히 열 배는 더 무서운 진법이 완성 직전이거든요.”

 “그거 무서운 말이구나.”

 “그럼 이만 가보겠어요.”

 헥토르 왕국의 공격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 파멜라의 진법 실력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진법 실력이 진일보한 것이다.

 당시의 진법의 열 배 이상이라니.

 가르딘은 파멜라의 재능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어제의 파멜라와 오늘의 파멜라가 달라 보이기까지 했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는 능력이었다.

 ‘이거 괴물을 키우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파멜라의 진법에 갇힌다는 상상만으로도 감당이 되지 않는다. 아마 죽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파멜라가 나가고 난 후 필리언이 들어왔다. 기사단의 배치와 준비가 완벽히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공주님의 근처는 되도록 실력 있는 기사를 소수로 배치하고, 나머지는 외곽을 집중적으로 감시해.”

 “그래도 될까. 조금 위험하지 않아?”

 “아무래도 나와 너희들 중 한 명은 꼭 공주님의 옆에 있어야겠지.”

 공주의 자유로움을 최대한 보장해야 했다. 공주의 성격을 알고 있는 가르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면 짜증을 부릴지도 모른다. 나중에 탈이 나면 감당이 되지 않는 공주였다.

 가르딘은 최대한 외부에서부터 침입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데 집중을 했다. 영지군을 경비병으로 운용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당분간 영지민들이 불안해할 수도 있지만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공주님은 지금 뭐하고 있지?”

 “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네 부인한테 간다고 했어.”

 “그러냐.”

 요즘 들어 라이나와 자주 만나고 있는 아이시런 공주였다. 여자들끼리 통하는 것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조금 수상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았다.

 “공주님에게 갈 테니 너는 영지에 수상한 움직임이 없는 지 살펴줘.”

 “걱정하지 마라.”

 “호호호호!”

 거실에서 여인들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서로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은지 쉴 틈 없이 수다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라이나와 아이시런 공주가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둘 다 어색해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아이시런 공주가 비록 제국의 공주이지만 나이는 라이나가 더 많았다. 라이나가 먼저 대화를 풀어나가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 결과 이제는 많이 친해져 있었다.

 “가르딘 후작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이 들었나요?”

 “웬걸요! 지금이야 제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지만 그 당시 남편은 조금 거칠었어요. 또한 상당히 불량스러웠거든요!”

 “그래요?”

 가르딘의 성격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아이시런 공주였다. 가르딘이 능글맞은 것은 연상이 되지만 거칠고 불량스러웠다는 것은 연상이 되지 않았다.

 “황도에서 알아주는 골칫거리였어요. 소문만 들었을 땐 도저히 사람 구실 못할 사람처럼 느껴졌다니까요.”

 “어땠는데요?”

 “저도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서 소문만 알고 있었어요.”

  라이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소문을 적당히 말해 주었다. 남편을 흉보는 일이라고 해도 이미 지난 일이었다.

 방탕한 사총사 시절의 이야기였다. 가르딘, 필리언, 갈라, 유타로 불리는 이들이 출현하면 황도의 골목길이 모두 숨죽여야 한다는 소문까지 퍼졌었다.

 “호호호호!”

 “정말이요! 상상이 안 가네요!”

 “그런가요. 예전 이야기는 남편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말하면 부끄러워하거든요!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데요!”

 “부인이 정말 대단하네요.”

 아이시런 공주는 가르딘보다 라이나가 대단하게 여겨졌다. 일생 동안 형성된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 대단한 일을 라이나는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가르딘이 왜 라이나에게 빠져들었는지 짐작이 되었다.

 라이나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면서도 끌어들이는 매력을 가졌다. 겉으로 보이는 얼굴은 아이시런 공주가 훨씬 아름답지만 라이나는 은은하면서도 포근함을 주는 인상을 가졌다.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시런 공주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저 황궁에서 살기에 형식적으로 매인 관계였을 뿐이다. 라이나에게서 모성애를 발견한 것이다.

 엘리언은 거실 밖에서 브리안과 놀아주고 있었다. 아이시런 공주와 라이나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삐질! 삐질!

 엘리언은 브리안과 대화하면서 과연 이 아이가 애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아이시런 공주의 시녀장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귀족의 기초적인 학문은 물론이며, 황실의 예절까지 완비가 되어야 한다. 일반적인 하급 귀족들은 엘리언의 상대조차 되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브리안과 대화를 이끌어 나가기 어려웠다.

 ‘가르딘 후작님에게서 어떻게 이런 아이가 나왔지?’

 “그게 말이지요 ….”

 “모르면 모른다고 해도 돼요.”

 빠직!

 은근히 기분이 나쁘다. 솔직히 모르는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답할 수 없었던 엘리언이었다. 아이의 말투를 들어보면 모를 수 있다는 투였다. 가르딘의 피를 완벽하게 이어받은 브리안이다. 엘리언이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엘리언이 기를 쓰며 답을 알아내려고 하기에, 수렁에 더 깊이 빠지고 있었다. 차라리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면 되는 일이었다.

 “음. 조금 미진하지만 맞았다고 해줄게요.”

 “고 … 맙네요. 그럼 이제 제가 물어볼게요.”

  “그러세요.”

 말을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엘리언의 미간에 주름이 잔뜩 생겨났다. 이제는 물러설 수 없는 자존심 싸움이 되고 말았다. 어른이 아이를 상대로 자존심 싸움을 하다니 보기에 따라서는 유치하게 보이겠지만 상대가 브리안이었다. 어떤 어른도 브리안과 만나면 이런 상황을 당하게 된다.

 한동안 얘기를 나누던 아이시런 공주가 먼저 일어났다. 라이나가 공주를 배웅해 주었다.

 아이시런 공주가 일어나자 엘리언도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방으로 돌아가는 아이시런 공주는 엘리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것을 보았다.

 “엘리언, 왜 그래?”

 “…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닌 것 같은데.”

 “사실은 ….”

 엘리언이 브리안과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말했다. 부끄럽지만 공주가 물어보는데 거짓을 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엘리언의 말을 다 듣고 난 후 아이시런 공주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이고! 배야!”

 “공주님! 그렇게 웃을 것까지는 없잖아요!”

 “생각해 봐 웃기잖아! 시녀장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엘리언이 그런 개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

 “가르딘 후작님의 따님이 괴물이라서 그런 거예요!”

 아이시런 공주가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웃자 엘리언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주가 시원하게 웃는 모습에 안도했다. 요 근래 한 번도 속 시원하게 웃어본 적이 없었던 아이시런 공주였다. 시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큰 웃음을 선사했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공주가 저택 내부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가르딘이 배려했다. 주변에 기사도, 귀족도 없는 상태였다. 대신 가르딘은 저택의 외부를 철통경계 했다.

 또한 공주의 동선에 따라서 경계의 태세가 달라지도록 설정했다. 공주가 이동하는 방향을 미리 파악하여 그 주변에 수상한 움직임이 없는지를 감시하도록 했다. 따라서 공주는 평소보다 자유로움이 보장되었다.

 아이시런 공주가 체면 무시하고 웃을 때 가르딘이 나타났다.

 “공주님은 여전하십니다.”

 “가르딘 후작도 여전하다는 것을 느끼네요.”

 아이시런 공주는 자신의 민망한 모습을 들켰는데도 별로 창피해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가르딘에게는 정형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편한 건지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영지를 둘러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배려에 감사해요.”

 “당연히 해야 될 일입니다.”

 아이시런 공주는 가르딘이 너무 쉽게 허락하자 의심이 되었다. 이처럼 쉽게 허락을 하는 성품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편하게 살아갈까 고민하는 자가 번거로움을 자초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꼼수가 있는 것 같은데.’

 ‘꼼수 같은 것 없으니 좀 믿으십시오!’

 의심이 많은 자는 상대의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이시런 공주와 가르딘 모두 상대의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가르딘이 진정으로 말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이시런 공주가 의문스런 표정을 짓자 불안감이 들었다.

 “그보다 코워드 공작의 들이었던가요.”

 “그렇습니다.”

 “생긴 것답게 아들 교육을 자알 시켜놨더군요. 신선한 충격을 줄줄도 알고 말이에요.”

 “역시 사람은 생긴 대로 사는 것 같습니다.”

 “가르딘 후작도 생긴 대로 살 건가요?”

 “저야 생긴 대로 살면 누구보다 잘살겠지요.”

 “역시 아저씨랑 대화하면 아주 재밌다니까.”

 “저도 공주님과 대화하면 의욕이 생깁니다.”

 치열한 심리전이 계속되었다. 누가 이기게 될지 모를 정도로 팽팽했다. 서로의 심중을 파악하기 위해 미끼를 지속적으로 던졌다. 덜컥 물었다가는 낭패를 면하기 쉽지 않다. 오랜 연기를 해왔던 가르딘과 아이시런이었다. 아직은 경력에서 가르딘을 따라오기는 어렵겠지만 금방 따라붙을 정도로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쉽게 당할 것 같습니까.’

 ‘역시 만만치가 않아.’

 반격과 반격이 이어지면서도 심중의 생각은 꼭꼭 숨겨두었다.

 아이시런 공주의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상당한 충격과 후유증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천사 같은 공주가 누구보다 심계가 깊고 여우같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 확실하다.

 “스필언 백작과 미토스 백작이 안 보이던데, 어디 갔나요?”

 “수련에 열중하기 위해서 산중에 들어갔습니다. 조만간 연락이 올 것입니다.”

 “누구하고는 다르게 열심이네요.”

 “그렇습니까.”

 그 정도로 흔들릴 가르딘이 아니다. 이미 안면을 드래곤본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생채기도 생기지 않는다.

  “내정이 불안한데 놀러 오는 누구보다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움찔!

 가르딘이 아이시런 공주의 정곡을 찔렸다. 마음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만 하는 아이시런 공주였다. 말싸움으로 가르딘을 이기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아주 재밌네요.”

 “저도 흥미진진합니다.”

 노려보는 두 사람 사이에 뇌전이 번쩍이고 천지가 진동하는 듯했다.

 네벨리언 공작에게 빌링턴 백작이 찾아왔다. 계획된 일이 진행되는 상황을 보고하고, 해야 할 일을 전달받기 위해서였다.

 “돈을 갚았다고.”

 “차압된 영지를 제외하고 저택과 주변 영지를 찾을 정도의 돈이었습니다. 총 2만 골드에 해당합니다.”

 “그 정도의 여력이 있었단 건가.”

 가르딘이 도움을 주었다면 모든 영지를 다 찾을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했다. 최소한의 영지만 찾을 정도의 금액만을 준 것이 의심이 되었다. 네벨리언 공작의 의문에 빌링턴 백작이 정확한 상황을 전달했다.

 “오브라이언 남작은 2만 골드도 없습니다. 현재 오브라이언 남작에게 돈을 빌려준 곳은 파이트너 상단입니다. 알아본 결과 겉으로는 오브라이언 남작의 사위인 라슈어 남작이 담보를 서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가르딘 후작이 빌려준 것이었습니다.”

 “앙금이 남아서 최소한의 도움을 줬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결국 외면하지 못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혈육의 끈은 외면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을 확인했으니 다음 계획으로 넘어갔다.

 “그럼 계획대로 하게.”

 “제브라 자작이 알아서 잘 할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실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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