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딘 전기 8 건드리고고 @@[Title [email protected]@]
@@[제1장 뜻밖의 방문(2)@@]
후르르륵!
차를 마시는 소리를 제외하고 거실은 조용했다. 저택의 겉모습이 많이 부서져 있기는 해도 안은 나름 정리가 되어 있어 아늑함을 자아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세 사람 중에 중년의 귀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이름은 베로나. 가르딘의 바로 위 누나로서 열일곱 살에 결혼하여 이제는 라슈어 남작 부인으로 불린다.
가르딘은 가출한 이후 누나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르딘으로서는 생각지도 않은 방문이었다. 미안한 소리지만 잊어버리고 있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듯이 자기 일 바쁘면 다른 데는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넌 별로 안 늙었구나! 좋겠다. 나도 오러마스터나 됐으면 피부가 탱탱할 텐데.”
“오러마스터가 뉘 집 오크 이름인 줄 알아! 정 그렇게 부러우면 지금부터라도 수련을 해. 죽도록 노력하면 80 중반부터 다시 젊어질지도 모르지.”
40년이 넘도록 검을 잡아본 적도 없는 여인이 검법을 수련해서 오러마스터가 되는 경우는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대륙의 평균 수명이 45살을 겨우 넘는다. 80까지 살면 장수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었다.
“호오! 제법인데.”
‘난 항상 제법이었어.”
“어렸을 때는 반항기만 있고, 앞뒤 구분도 못 했는데 이제는 누나 놀릴 줄도 아네.”
나이 40이 넘어서 농담할 때는 지난 것 같은데.”
지금도 도를 넘어서는 장난을 서슴없이 잘 치는 가르딘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딘은 태연하게 남을 꾸짖을 정도로 안면이 드래곤본이었다. 잘하면 심검도 얼굴로 막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능구렁이가 다 됐구나.”
“드래곤이 됐다고 하는 게 어때.”
시답지 않은 말이 계속되었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건지 아닌지 헷갈리는 남매였다. 아무튼 무척이나 애매모호했다. 옆에서 차를 따르는 라이나가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
라이나로서는 시누이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올리는 자리였다.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않는 라이나가 생애 처음으로 긴장했다. 시누이 무서워하지 않는 여인 없다는 말이 새삼스러울 지경이다.
가르딘이 긴장하는 라이나에게 평소처럼 하라고 했다.
“라이나, 평소처럼 해. 잘할 필요 없는 사람이야!”
“얘 좀 봐! 너는 이 누나가 그렇게 싸 보이니!”
“누나는 예전부터 저렴했으니까.”
“뭐야!”
큰소리를 내는 베로나였다. 예전에는 말발로 가르딘을 이겼었다. 과거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 같았다.
매섭게 눈을 치켜뜨던 베로나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다 자란 동생을 대견스럽게 보았다.
“호호호호! 내 동생 많이 컸다.”
“원래 내가 더 컸잖아.”
“거기는 작잖아.”
커억!
순간 가르딘은 울컥했다. 사내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다니,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당장 취소하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라이나가 자신도 모르게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젠장!’
둘 다 이상한 남매 관계였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것이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말투는 틱틱거리며 까칠하지만 악의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이런 모습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한동안 계속되던 웃음소리가 멈췄다.
가르딘이 생각하기에도 누나의 방문은 정말 뜻밖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잊어버리고 있었다. 유일하게 친하게 지낸 누나였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현실이 슬픈 이유는 그 안에 살면서 안주하기 때문이다. 자기 살기도 바쁜 세상이다. 다른 사람을 돌볼 틈이 없다.
“그 당시 가출은 충격이었어. 난 네가 다시 돌아올 줄 알았거든.”
“사내가 한 번 길을 나섰으면 갈 때까지 가야지.”
“아버지와 오빠들이 그렇게 싫었어?”
“싫었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가르딘은 단호했다.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기에는 그동안 쌓인 것이 너무 많았다. 또한 없던 정이 다시 생기지도 않는다. 베로나가 아니라 아버지나 두 형이 왔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네 가족이야.”
“지금에 와서 무슨 소용이지? 없던 정이 다시 생기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것 같은데. 그저 지금처럼 살아가면 되잖아.”
20년이 넘도록 보지 않았다. 이것은 서로 상관하지 않고 살겠다는 뜻과 진배없다. 지금에 와서 다시 혈연을 들먹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생각해 봤자 서로에게 아픈 추억이다.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형들은 형들 나름대로 힘들 것이다. 또한 가장 힘들었던 가르딘으로서도 달갑지가 않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가 않는구나.”
“어쩔 수 없지. 세상사 변하지 않는 것도 있기 마련이니까. 평행선이 왜 존재하는지 알아? 결코 화해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거야.”
“아니, 한쪽이 양보하면 평행선은 유지되지 않아. 인간관계가 칼같이 이성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 말도 안 되는 경우지만 가족이기에 이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데? 자꾸 쓸데없는 일을 들먹이는 이유가 뭐야?”
가르딘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누나는 조카와 함께 발키리 영지까지 왔다. 라슈어 남작의 영지와 발키리 영지는 무척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호위를 달랑 두 명만 데리고 오기에는 너무 멀었다. 여기까지 와서 지나간 과거의 일을 들추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베로나는 가르딘의 가족을 만나보고 나서 예전과는 달라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가르딘은 여전히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과거의 상처로 인해 오히려 심기가 더 불편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도 낫지 않는 상처이기에 방치할 수만은 없다. 어떻게 해서든 터진 상처를 꿰매고 치료해야 했다.
“아버지가 병이 나셨어.”
“그래서?”
“무심했지만 그래도 아버지야. 너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아버지가 아프다는데 고작 그래서라니, 너 원래이랬니!”
언성이 높아지는 베로나였다.
“아버지에게는 형들이 있잖아. 내가 가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라이나와 결혼을 할 때 소식을 전했더니 절대 허락할 수 없다는 서신이 왔다. 만약 결혼하면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가르딘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은 이제 남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가슴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감정의 편린이 비집고 올라오는 것을 느껴야 했다.
‘아직도 감정이 남아 있었나.’
서운한 것도 정이 있기에 생기는 것이다. 지독하게 싫어하는 것도 그에 반하는 감정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르딘은 감성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병이 든 게 바로 오빠들 때문이야. 이대로 놔두면 아버지도 오빠들도 모두 잃을 거야.”
“후우!”
가르딘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관여하기 싫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질기고 강했다. 한번 정해진 운명은 해어 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우선은 자초지종을 들어보아야 했다. 전후사정도 모르고 덥석 도와주기에는 석연치 않았다.
“나도 남편에게 들어서 자세히는 몰라.”
“아는 만큼 말해 봐.”
가르딘은 누나에게 사정을 들으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가 영지의 일을 형들에게 맡기면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기타 내용은 그렇다 치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세수를 낭비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연이은 연회와 무리한 영지 경영이 불러온 화였다.
베로나도 자신이 할 수 있으면 남편을 통해서 해결하고 싶었지만 영지도 너무 멀었고, 도울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오브라이언 남작은 네벨리언 공작령에 속하는데 라슈어 남작은 발리스타 공작령에 포함되었다. 발리스타 공작 산하의 하급 귀족인 라슈어 남작이 해결하기는 무리였다.
가르딘은 고민이 되었다. 얼마나 심각한지 감히 잡히지 않았다. 베로나의 말만 듣고서 파악하기에는 어려웠다.
‘잠깐?’
순간 찌릿한 감각이 가르딘의 전신을 휘감고 지나갔다. 오싹하게 만드는 불길한 기운이었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재정이 적자라면 돈을 보태주면 되었다. 돈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당장 그것이 무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무심코 지나치기에는 꺼림칙했다.
‘뭐야, 이건? 상당히 불길한데.’
고민을 해봐도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론을 낼 수 없는 일은 시일을 두고 생각하는 것이 나았다. 관점을 벗어나 다시 생각해야 폭넓은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시야가 좁았다. 이대로 결론을 내면 후일 후회거리로 남을 수 있다.
“알았어. 내가 한번 확인해 볼게.”
“그래야 내 동생이지.”
“해결해 준다는 건 아냐! 영지를 책임지는 일을 맡았으면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한 일이야. 책임감도 없이 영지를 맡아 실패했다면 도와준다고 해도 일어서지 못할 거야.”
“도와줄 거잖아!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음이 따뜻했으니까!”
“그건 ….”
차마 라이나가 보고 있어서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가르딘이다. 라이나에게는 최고로 자상하고 인자한 남편이어야 한다. 매몰찬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이제까지 마련한 모든 것은 라이나와 브리안을 위해서다. 이제 와서 차가운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그동안 노력한 것이 아까웠다. 무엇보다 라이나를 너무 사랑한다. 변하지 않는 진실을 위해서 노력하는 가르딘이었다.
‘그렇다고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같은 사람으로 보면 곤란한데.’
한번 도와주는 것은 그렇다 쳐도 매번 도와주는 것은 힘들었다. 되도록 아버지, 형들과는 엮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다다다다닥!
급하게 뛰어 들어오는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브리안보다는 나이가 많았지만 16세를 넘지 않아 보였다. 앙증맞게 부풀어 오른 두 볼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귀엽게 보였다. 다만 뛰어 들어오는 폼이 말 잘 안 듣는 말괄량이였다. 부모 속 꽤나 썩일 인상이다.
“외삼촌, 저 멜리사예요!”
“그 … 러니.”
“저 귀엽죠? 다들 저 보면 귀여워서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하던데요!”
“정 … 말 그렇구나!”
‘손발이 오그라든다’라는 표현이 어떤 말인지 알고서 하는 말인지 의문이지만 가르딘도 손과 발이 저절로 안으로 굽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 보는 외삼촌 앞에서 서슴없이 행동하는 모습이나, 자기 자랑을 당연하게 떠벌이는 것을 봐서는 딱 누나의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였다.
“내 딸 귀엽지. 어찌나 귀여운지! 내 어린 시절 모습을 빼다 박았다니까!”
“말도 안 돼! 내가 엄마보다 더 귀여워!”
자기 딸이라면 져줄 만도 하건만 베로나는 상식 밖이었다. 고개를 내 저으면서 아니라고 반박한다.
“아직 부족해! 귀염성에서 당시에 나를 따라올 자는 아무도 없었어. 내 딸이니 너도 가능성은 있겠지만 많이 부족해.”
“흥! 그럼 외삼촌이 판정해 줘요!”
“뭐 …?”
두 모녀가 두 주먹을 턱에 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빡 거린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동작을 둘이 하자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게 된 가르딘이었다. 그것은 옆에 있던 라이나도 마찬가지였다.
‘뻔뻔한 것은 둘다 똑같네.’
하지만 그보다 더 뻔뻔한 인간이 존재했다. 자타공인 안면철판 가르딘이다.
“아직 멀었어.”
“뭐?”
“라이나와 브리안을 따라오기에는 멀었지.”
당당하게 아내와 딸을 자랑한다. 이번에는 베로나와 멜리사의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듣고 있던 라이나도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다.
“멜리사! 안타깝지만 귀염성에서 브리안을 따라오기에는 한참 멀었다. 인정할 건 인정하렴. 그래야 살아가는 데 불행하지 않아.”
“너 내 딸에게 뭐 하는 짓이야.”
“현실을 직시하라는 거지.”
“나보다 못하지만 내 딸이 얼마나 귀여운데.”
쓸데없는 말싸움으로 30분을 낭비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평행선의 극치였다. 타협 불가결의 문제였던 것이다.
베로나와 멜리사의 모습을 보자 가르딘의 성격이 어디에서 기인한지 알 수 있었다. 분명 아버지와 어머니, 형들에게서 물려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외삼촌! 정말 오러마스터예요?”
“아니라면 후작이 될 수 없었겠지.”
“와! 좋겠다! 우리 아빠는 아직도 남작인데 언제 자작 되나!”
“베로나, 네 아빠도 충분히 노력하고 있어. 조금 부족해서 그렇지.”
귀족 작위가 애들 땅따먹기도 아니고, 너무 쉽게 생각하는 모녀였다. 누가 들으면 가르딘이 후작까지 쉽게 올라온 줄 착각할지도 모른다. 그 뒤에 숨겨진 난관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방법은 하나뿐인데.”
“뭔데?”
멜리사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큰 거 하나 물고 시집가는 거요.”
“뭐, 뭐라고?”
고작 열여섯 살짜리 계집애가 한다는 소리치고는 황당하고 대범했다.
가르딘과 라이나가 황당해하는 상황인데 반해 베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해 주었다.
“여자 인생은 모두 사내 잘 만나야 하는 거야.”
“누나, 애한테 할 말이 따로 있지.”
“뭘, 사실이잖아. 배경 좋고 좋은 사람 만나는 것이 뭐가 어때서? 그래야 떵떵거리며 잘살 수 있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서로 사랑하고 아껴준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현실이라는 안타까운 장벽 앞에 가로막혀서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상처 주는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가르딘이 강한 세력에 붙어서 오래 살려는 것과 별반 차이는 없어 보였다.
내친김에 멜리사가 아주 중대한 질문을 했다. 여기에 온 이유는 외삼촌 때문만이 아니었다. 목적이 있기에 베로나를 따라 먼 거리를 이동한 것이다.
“저! 두 분은 언제 오나요?”
“누구를 말하는 거냐?”
“아! 있잖아요. 세상에서 제일 잘생기고, 배경 좋고, 실력 좋은 젊은 분이요.”
멜리사가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윤곽이 잡힌다. 아니, 바로 알아채지 못하면 바보다. 카이로만 제국의 신성 스필언과 미토스를 말하는 것이다.
제국에서 스필언과 미토스를 싫어하는 여인은 아마 없을 것이 분명하다. 아직 어린 멜리사마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오지 않을 거다.”
“정말요! 그럼 안 되는데! 내 귀염성으로 한 방에 보내버려야 하는데.”
급 실망하는 멜리사였다.
여기까지 베로나를 따라온 이유가 바로 스필언과 미토스를 보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가르딘은 기가 막혔다.
어린 소녀가 잘생긴 남자를 좋아할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
솔직히 멜리사의미모가 그 정도로 대단한 수준은 아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배경이 훌륭한 것도 아니다. 변방 남작 영지의 딸이 공작 아들과 맺어지는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다.
한마디로 그림의 빵이었다.
쿵! 쿵! 쿵!
묵직한 발소리가 들리고, 탄탄한 철갑근육과 거대한 신체를 가진 투르가 들어왔다. 늦게야 훈련을 마치고 보고차 들어온 것이다. 요즘 들어 크레이지드래곤 창기병의 수련이 부족했었다.
묵직한 발소리만큼이나 대단한 위압감을 내뿜었다. 마치 산악을 헤집고 다니는 거대한 타이거가 포효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광천패황신공의 화후가 나날이 상승하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과 다르게 마공의 영향이 짙은 광천패황 신공이었다. 마공은 정종의 심공과는 다르게 속성으로 대성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에 따른 성격의 변화가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워낙 정순한 성격을 가진 투르여서 별다른 문제는 아직까지 발생하지 않았다.
투르의 몸은 근육이 옷을 비집고 터져 나올 정도로 팽팽하다. 일반 사람보다 머리 두 개는 족히 더 큰 육체의 소유자였다. 어느 누구도 투르를 보면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영주님! 수련이 모두 끝났습니다.”
“그보다 창기병의 인원 확충은 어느 정도나 진행됐지?”
“인원 보충은 거의 끝났습니다.”
“잘됐군.”
투르의 오판으로 인한 희생이었다. 투르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느꼈다. 크레이지드래곤 창기병이 처음 탄생 했을 때는 그저 자신의 분풀이 대상으로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속감이 생겼다. 지금에 와서 수하들을 위하는 마음은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보고가 끝이 나고 돌아가려는 투르의 주위를 호기심에 빙글빙글 도는 소녀가 있었다. 멜리사였다. 처음 오자마자 빨빨거리며 영지를 돌아다녔을 정도로 호기심이 왕성한 멜리사였다. 투르의 거대한 신체와 탄탄한 근육은 정말 신기했다. 사람의 몸이 저처럼 탄탄해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우와! 몸이 진짜 단단해!”
콕! 콕! 콕!
손가락으로 투르의 몸을 찔러보고 있었다. 투르에게 이런 식으로 대범한 행동을 하는 소녀는 한 명도 없었다.
화를 낼 만도 하건만 투르는 의외로 가만히 있었다. 멜리사의 행동에 순간 얼음이 되었던 것이다. 그간 느껴보지 못한 떨떠름한 기분을 맛보았다.
가르딘은 어이없다는 듯이 베로나를 보았다.
“아주 쌍둥이 나셨네!”
“내 딸이니 당연하지.”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이 왕성했던 베로나의 모습 그대로였다.
투르가 난감해하는데 멜리사가 질문을 했다.
“아저씨! 얼마나 수련해야 이런 근육이 나오는 거야?”
빠직!
투르는 아저씨라는 말을 들을 나이가 아니다.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되었다. 멜리사와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생긴 것만 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현실이었다.
한마디로 투르는 노안이었다.
“나 아저씨 아니다.”
“설마!”
“맞아!”
“증거 있어요?”
“영주님! 말 좀 해주십시오.”
투르가 가르딘을 보며 사정했다. 의외로 투르가 여자에게 약한 것 같았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멜리사가 악의가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일 수도 있다.
“확실히 아저씨는 아니지. 이제 막 열여덟 살이니 말이야.”
화들짝!
멜리사와 베로나 둘 다 동시에 놀랐다. 저 얼굴에 저 덩치를 봐서는 절대 열여덟 살이 아니었다. 족히 서른 살은 되어 보였다. 그래도 자세히 뜯어보면 투르의 얼굴이 아직 어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해라.”
자리가 불편한지 투르가 먼저 나갔다. 투르에게는 어색하고 쑥스러운 자리였다. 커다란 덩치와는 안 어울리게 순박했다.
멜리사가 새침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외로 마음에 와 닿는지도 몰랐다.
“재는 뭘 처먹었기에 저렇게 크고 늙었대.”
“늙기는. 덩치가 조금 커서 그렇지. 실력만 따지면 이미 오러마스터에 근접해 있을걸.”
“진짜?”
“당연하지.”
고작 열여덟 살에 오러마스터에 근접해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단순히 덩치만 큰 것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를 감안해 보면 누구라도 군침을 흘릴 청년이 아닌가!
멜리사가 가르딘의 말을 듣자마자 투르의 뒤를 따라갔다. 일반 여인들은 무서워서 투르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멜리사는 오히려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잠재된 가치를 알아보는 타고난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허! 투르가 사냥감으로 보이다니!”
압도적인 포식자의 위치에 서 있는 투르가 졸지에 사냥감이 되어버렸다. 세상이 뒤집어지지 않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벌어졌다. 예전의 베로나를 한참이나 능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까지 머물 거야?”
“여기까지 오는데도 꽤 걸려서 5일 정도 있다가 돌아가야 돼.”
“하긴. 너무 오래 걸리긴 하지.”
발키리 영지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과 가는 데 걸릴 시간을 감안하면 5일도 많이 머무는 것이었다.
가르딘은 오랜만에 만난 베로나가 조금 더 머물기를 바랐다.
‘골치 아픈 일이지만 확인은 해봐야겠군.’
아버지와 형들의 일을 조사는 해볼 생각이다. 베로나가 힘들게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 오브라이언 남작가의 존속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누나의 말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런데 자식이 멜리사뿐이야?”
“뭔 소리야! 재는 막내야. 위로 다섯 명이나 더 있어.”
“굉장하다!”
“비결 알려줄까?”
가르딘은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브리안밖에 생산해 내지 못하는 사내의 무능을 고스란히 들킨 꼴이었다.
‘나는 그랜드마스턴데 왜 이러지?’
그랜드마스터가 되면 육신은 젊어지고 활력은 끓어 넘친다. 가만히 있어도 대기 중에 퍼진 기운이 저절로 스며드는 공령의 지체에 도달한 가르딘이다. 대륙 전체를 따져보아도 가르딘보다 건강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력은 공력과는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비결이 궁금하기는 라이나도 마찬가지였다. 귀를 종긋 세우고 집중하는 모습이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무언가 하나라도 건져야 한다는 사명감을 불태우는 가르딘과 라이나였다. 존속의 보전은 가르딘과 라이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후르륵!
찻잔을 입에 대고 한적하게 차를 마신다. 그걸 앞에서 보고 있는 여인은 짜증이 치밀고 있다. 며칠 전부터 뒷골이 당기기 시작하는데 이유가 바로 눈앞의 인간 때문인 것 같다. 이 인간이 들렀다 간 후 한동안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다.
‘이 인간 또 왔어!’
이제는 제집 드나들듯이 찾아온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무척이나 한가롭고 유유자적하다. 걱정거리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찾아와서 필요한 정보만 얻어 내고 사라져 버린다.
테이란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반면에 가르딘은 가벼운 농담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테이란이 짐짓 표정을 굳혔다.
“무슨 일로 또 오신 건가요?'’
‘또’라는 단어에 어감을 강하게 했다. 이번에도 헛소리하면 국물도 없다는 단도직입적인 표현이다.
“그렇게 말하면 섭섭한데.”
말투가 시리도록 차갑다.
가르딘의 어투가 작지만 강해졌다. 테이란은 순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가르딘은 테이란이 함부로 할 수 없는 대륙 최강국의 후작이다. 위치를 망각한 것에 대한 질책이나 다름없다.
정보상인은 상황이나 때, 사람의 성격까지 잘 파악해야한다. 그렇지 못한 점을 가르딘이 지적한 것이다.
테이란은 정신이 바짝 들었다.
“죄송합니다, 가르딘 후작님!”
“알면 됐어.”
또다시 말이 가벼워졌다. 무엇이 진실한 모습인지 테이란은 짐작하지 못했다. 어느 때는 무척이나 차갑고 비정한 것 같으면서도 또 다른 때는 능글맞은 중년인이었다. 종잡을 수 없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자네가 잘못을 인정하니 가볍게 물어보겠네.”
‘후우! 역시나!’
수 싸움에서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 권력을 있는 대로 이용하여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고, 자신이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낸다. 모든 것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쉬운 상대가 아님을 테이란은 느낄 수 있었다. 가벼움 안에 무서운 심계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러나 테이란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가르딘이 가볍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치가 떨리도록 무서운 심계를 부릴 정도로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다. 할 수는 있어도 귀찮아서 하지 않는 인간이 바로 가르딘이다.
“데포론 영지의 사정에 대해서 알아봐 줄 수 있나?”
“물론이에요.”
망설이지 않고 데포른 영지에 대한 자료를 꺼내 오는 테이란이었다.
조사를 의뢰하고 나서 곧바로 보고서가 작성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미 조사가 되었을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다.
자료는 상당히 섬세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분량을 따져보아도 제법 나갔다.
“언제 이 많은 것을 조사한 거야?”
“영주님에 대한 정보는 이제 특급에 해당해요. 모든 귀족들이 주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런 중요한 인물에 대한 사전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요.”
“음!”
가르딘은 새삼 자신의 입지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제국의 후작이다. 오러마스터이자 후작이란 지위를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테이란의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
사전조사가 이루어졌다면 가르딘의 과거 조사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족관계는 무엇보다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동안 과거의 인연과는 절연했기에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무심코 잊어버리고 있던 일들이지만 완전히 끊어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자료 제공료는 10골드예요.”
“비싸지 않군.”
“공공연한 일이에요. 수행비를 제외하고 별달리 감출 것은 없어요.”
가르딘은 테이란이 넘겨준 자료를 자세히 읽었다. 가르딘이 가출하고 난 후 25년간의 자료 중에서도 최근의 일을 눈여겨보았다.
10년 전부터 오브라이언 남작은 일선에서 물러났다. 대부분의 일을 큰형이 처리하고 나머지 일은 작은형이 처리했다.
형제간의 반목은 여전했던 모양이다. 서로 처리하는 일이 틀어지는 바람에 지출은 많아지고, 경영은 무리하게 운용이 되어 낭비가 심했다.
또한 남작가의 작은 영지에서 무리해서 화려한 연회를 개최하여 지출의 규모가 상당히 컸다. 아무래도 서로의 입지를 높이려고 경쟁하려다가 벌어진 것 같았다.
돈이 부족해서 빌린 돈으로 재정을 충당하다 보니 빚이 쌓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쌓인 돈만 해도 족히 5만 골드가 넘었다. 작은 영지에서 5만 골드는 영지 1년 예산을 넘어서는 액수였다.
빌린 이자는 복리로 계산이 되었다. 상단에서 빌린 돈을 다시 빌린 돈으로 돌려 막는 실정이니 이제는 누구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영지민들의 신뢰도 잃었다.
영지의 경영 상태가 엉망으로 변하자 화를 참지 못한 오브라이언 남작은 몸져눕게 되었다. 한마디로 화병이었다.
최근에 빌린 돈은 네벨리언 공작령의 직속 수하라고 할 수 있는 빌링턴 백작에게 꾼 것으로 보였다.
빌링턴 백작은 돈을 빌려주면서 담보로 영지의 일부를 하나씩 차압해 나갔다. 최근에 들어 차압이 심해져서 영지의 대부분이 빌링턴 백작에게 넘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귀족에게 영지는 명예와 목숨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영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미 삼분지 이를 빼앗겼다.
문제는 또 있었다. 형들의 작위가 이제는 준귀족에 속한다는 것이다. 남작의 작위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영지까지 빼앗기게 되면 영지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발판을 잃어버린 미아가 될 수 있었다.
“끝났군.”
“솔직히 이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어요.”
“차라리 잘됐어. 빚이라도 탕감해서 사는 것이 낫겠다.” 미숙한 이에게 영지를 운영하는 책임을 맡기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알게 해주는 좋은 예였다.
가르딘은 이미 차압된 영지까지 모두 찾아줄 수 없었다. 차라리 현재 남아 있는 영지를 보존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보였다.
“남아 있는 영지가 어느 정도지?”
“빌링턴 백작의 차압이 생각보다 심해요. 최근에 압박이 더 심해진 것 같아요! 예상보다 더 비싼 원금과 이자를 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모든 영지가 차압될 거예요.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영지 저택을 중심으로 50가구 정도의 주택과 그 주변의 작은 밀 농지가 전부예요.”
간신히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영지만 남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것마저도 모두 차압될 것이다.
가르딘은 순간적으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빌링턴 백작은 네벨리언 공작의 명령을 직접적으로 받는다. 이번 논공행상에서 보여준 네벨리언 공작의 적의를 볼 때 결코 가르딘과 무관하지 않았다. 시작은 두 형들이 했을지 몰라도 가속도를 붙인 사람은 가르딘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치사하게 가족을 미끼로 가르딘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너무 뻔한 일이었다. 가르딘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니 심기를 흔들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영지를 제외하고 빚이 얼마나 되는 거야?”
“총 빚은 6만 5천 골드예요. 그중에 영지 차압으로 들어간 돈을 제외하면 2만 골드 정도가 빚으로 남아 있어요.”
“역시 복리겠지.”
“원래는 원금상환을 조건으로 했는데 갑자기 복리로 바뀌었어요. 다른 곳은 돈을 빌려주지도 않으니 오브라이언 남작 가로서는 어쩔 수 없이 빌링턴 백작의 조건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우선은 돈이 걸린 문제니 돈으로 해결해야 한다. 직접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빌미를 제공해 줄지 모른다.
또한 돈을 갚지 못하는 최악의 경우 귀족의 작위마저 흔들리게 되고, 빌링턴 백작의 소속이 되어버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최악이다. 다시 꺼내 오기 위해서는 돈보다 상대의 의사가 중요하다. 노예는 아닐지라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 된다. 네벨리언 공작이라면 절대 가르딘의 뜻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파이트너 상단을 통해서 돈을 전달하고 난 후 누나에게 말을 해야겠구나!’
가르딘이 주었다는 것을 알리면 좋지 않다. 애초부터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돈을 빌려준 사실을 알게 되면 혈육의 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는 인상을 주게 될 것이 분명하다.
“테이란! 내가 도와줄 것 같은가?”
“예? 그게 무슨?”
“사실 난 도와주기 싫어. 아버지와 형들이 무척이나 싫거든. 솔직한 심정이야! 내가 이상한가?”
“그래도 혈육의 정은 어쩔 수 없겠죠.”
“흠. 역시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군.”
가르딘은 다른 이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알아본 것이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적인 생각만으로 세상이 돌아가지는 않으니 말이다.
투르를 식은땀이 다 나도록 괴롭힌 후 돌아온 멜리사였다. 그날 투르는 수련한 것보다 멜리사에게 시달린 것이 더 피곤했다.
저녁때쯤에 돌아온 멜리사는 정원에 나와 있는 브리안을 보았다. 무언가 고민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주위로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브리안의 생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았다.
“오늘은 해산.”
“응!”
모두 한목소리로 대답한다. 아이들은 브리안의 말에 절대 복종하는 것 같았다. 단순히 귀족의 딸이라서 하는 행동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브리안은 홀로 남겨진 자리에서 한동안 묵묵히 고민하더니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언니! 거기서 뭐해?”
“어? 그냥 네가 뭘 생각하나 본 거야.”
“그래.”
“그보다 너 꼭 골목대장 같다.”
“맞아.”
여자아이에게 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브리안은 똑 부러졌다. 멜리사는 순간 움찔하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브리안은 멜리사가 아는 아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아이였다. 상식적으로 판단해서는 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멜리사는 아직 일곱 살밖에 안 된 브리안에게 주눅 들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억지로 호기롭게 행동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자랑했다. 라슈어 남작가의 자식들 중에서도 제법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는 멜리사였다. 여자라는 한계를 감안하면 부족하지 않은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공부 안 하고 늦도록 놀면 머리 나빠져. 그래서 훌륭한 귀족가의 여자로 자라날 수 있겠니 !”
빠직!
브리안은 가르딘과 같이 이중적인 성격을 타고난 소녀였다. 겉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감싸고 있지만 속은 드래곤 두 마리는 충분히 찜 쪄 먹을 수 있는 심계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나 건드린 거야! 그럼 해보자는 거지.’
가르딘과 라이나 앞에서는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처럼 행동했다. 반면에 신분이 비슷하거나 전혀 자신에게 이득이 없을 것 같은 이들에게는 철저하게 본성을 드러낸다. 거의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브리안이었다.
동네 아이들에게 무소불위의 절대무적, 가히 여제로 추앙받는다. 여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동을 하는 자가 약세를 보이면 가차 없이 응징한다. 그것이 세상의 진리라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깨달은 브리안이다. 여기서 뒤로 물러서면 주도권은 상대방에게 넘어간다.
“멜리사 언니는 공부 많이 했나 봐!”
브리안이 의례적으로 운을 띄운다. 미끼를 던졌다. 멜리사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며 여러 가지 사전 미끼를 뿌리기 위해 머릿속으로 수없이 많은 계산을 한다.
그러나 브리안의 노력은 헛수고에 불과했다. 한번 던진 미끼를 바로 물어버리는 멜리사였다.
“그럼! 당연하지! 내가 이래봬도 귀족 필수 5대 학문의 기초를 마스터하고, 중급에 달해 있다니까! 물론 내가 열심히 한 것도 있지만 타고난 재능이 받쳐주니까 가능한 거지. 학문적 지식도 높고, 귀엽기까지 한 나는 역시 타고난 귀족가의 여인이야!”
자기 자랑을 서슴없이 하는 멜리사였다. 그 앞에 공격하기 직전의 뱀처럼 독을 잔뜩 품고 있는 작고 귀여운 소녀가 있다. 브리안의 이면에 숨겨진 잔인한 폭군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지금 누구 앞에서 자랑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럼 귀족 수칙 130절의 기본 규칙 사항인 제7조 6항에 적힌 내용에서 귀족이 왜 충성조약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가의 당위성에 대해서 심도 깊게 탐구해 보는 게 어때, 멜리사 언니?”
응?
헛소리가 들린 것 같다. 지금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귀를 뚫고 다시 들어보았다. 현재 들린 내용을 요약하면 무척이나 간단하지만 쉽게 답변을 내기 어렵다. 또한 7조 6항에 그런 내용이 있는지 기억하고 있지도 않은 멜리사였다.
‘지금 내가 헛소리를 들은 건가!’
그러나 헛소리가 아니었다. 브리안의 입에서는 여전히 진중한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스라인을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 파멜라의 전담교육을 받은 브리안이었다. 날름 핥은 지식으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당위성이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어. 모든 정책은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어야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보기에 적어도 30가지의 당위성이 예로 제시되어야 한다고 보거든. 멜리사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나도 그 정도니 멜리사 언니는 아마 족히 100개의 당위성을 확보하고 있겠지. 우선 함께 토론을 해보자고.”
다섯 가지를 대면 더 이상 들이댈 것이 없다. 멜리사는 눈앞에 있는 브리안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며 공포감이 들었다. 이건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기 싫어하는 것은 멜리사도 마찬가지였다. 베로나와 거의 흡사한 성격을 가진 멜리사가 이 정도로 포기할 리가 없다.
멜리사가 간신히 대꾸하며 다음 질문을 했다. 자신도 알기 어려운 문제를 냈다. 풀지 못할 것을 내서 브리안을 흔들려는 수작이었다. 두 소녀의 질긴 신경전은 치열하기까지 했다.
주르륵!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귀밑머리를 타고 땀이 흘러내리는 멜리사였다. 브리안은 막힘이 없었다. 멜리사는 자신이 타고난 천재라고 자찬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머리싸움으로는 브리안을 이길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외삼촌의 어린 딸에게도 지기 싫은 멜리사는 다른 것으로 대결하자고 했다.
한참 대결을 하던 멜리사는 점점 궁지에 몰리는 것을 느꼈다. 어느 것을 해도 이길 수가 없었다.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결국 무식한 방법까지 토해내고 말았다. 숙녀에게 필요한 대결 종목은 아니다.
“귀족가의 사람이면 스스로 지킬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어떠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
멜리사는 여자치고 제법 힘이 셌다. 많은 수련을 한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도록 기본적인 수련을 하기는 했다. 더군다나 멜리사는 브리안보다 아홉 살은 더 많았다. 브리안에게 힘으로 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골목대장이라고 해도 결국 같은 나이 또래보다 조금 센 정도로 판단했다.
“잘 봐!”
휘익! 휘익!
어설프지만 제법 배운 티가 나는 주먹질이었다. 멜리사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주먹을 뻗었다. 멜리사의 동작이 사내들과 비슷한 수준은 아닐지 몰라도 어린 브리안에게는 대단하게 보였을 것이라 판단했다.
‘피식!’
브리안은 속으로 가소롭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브리안은 그 즉시 뒷주머니에 숨겨놓은 장갑을 꺼냈다. 장갑은 가르딘이 사준 것으로 미노타우로스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더군다나 주먹을 쥐었을 때 튀어나오는 쇳조각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멜리사는 브리안이 난데없이 이상한 장갑을 끼자 의아한 듯이 물었다.
“왜 장갑을 끼니?”
“별거 아냐, 언니. 아빠가 사준 건데 손을 보호하는 데 효과가 좋거든.”
“그러니?”
브리안은 장갑을 끼고 정원의 중앙에 있는 나무에 다가갔다. 나무는 오랜 시간 저택의 정원을 지키고 있었다. 제법 큰 나무라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브리안이 나무를 바라보며 정면으로 섰다.
“뭐 하려고?”
“주먹으로 나무를 치려고!”
“뭐? 그런 무식한 짓을 왜 해? 그러다 손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니!”
멜리사는 절대로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다. 나무를 주먹으로 치면 당연히 주먹이 아프다. 주먹을 돌처럼 단련하지 않는 이상 잘못하면 주먹이 부서질 수도 있다.
멜리사는 급히 말리려고 했다. 그러나 브리안의 주먹은 뻗어 나간 지 오래였다.
퍼어어엉!
후드드드드득!
퍼어어어엉!
후드드드드득!
고사리처럼 작은 주먹이 단단한 나무의 밑동을 치자, 쇳소리가 터지는 듯한 파공성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나뭇잎들이 충격을 받고 사방으로 퍼지더니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브리안의 주먹에는 무영신권의 오의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벌모세수로 인해 20년의 공력이 쌓여 있는 브리안이다. 전신에 힘을 주자 공력이 저절로 움직여 주먹에 힘을 싣는다. 자연스럽게 공신일체의 능력을 보여 주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멜리사는 눈이 휘둥그fp졌다.
멍!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멜리사는 괴물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브리안이 천진하게 멜리사를 바라보았다.
“멜리사 언니, 나 어때! 조금 약하게 쳤는데, 한번 언니하고 대련해 볼까!”
브리안의 주먹은 작지만, 파괴력은 결코 작지 않다. 한 대 맞으면 사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크레이지 프린세스, 크레이지 헤드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화들짝!
“나 어제 무리했는지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 오늘은 들어가서 쉬어야 할 것 같아.”
“아쉽다. 그래도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내일 대련하자!”
둘 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지만 한쪽은 죽어가고 있으며, 한쪽은 살아나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짓는 브리안의 모습에 소름이 끼치는 멜리사였다. 한번 건드렸다가 제대로 당하고 말았다.
씨익!
‘어딜 덤벼!’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해지는 브리안이었다. 세상 사는 이치가 무엇인지 멜리사에게 혹독하게 신고식을 치러주었다. 멜리사가 제대로 임자 만난 꼴이었다.
5일의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가르딘은 되도록 베로나와 멜리사가 편안히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혈육이기에 마음속으로 반가웠던 것이다.
다음 날이면 돌아가야 하는 날이라 가족이 모두 다 모여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식사는 제법 성대하게 차려졌다.
“내일 출발할 때 호위기사로 다섯 명을 더 붙여줄게.”
“됐어. 올 때도 그냥 왔는데 뭐 어때!”
“안 돼. 그냥 내 말에 따라.”
“지금 걱정해 주는 거야?”
“걱정은 무슨! 누나가 위험해지면 내 체면이 뭐가 돼! 명색이 후작이 되어서 누나조차 보호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어야 속 시원해?”
“돌려 말하긴.”
베로나가 돌아가는 길에 위험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가르딘은 호위를 붙여주기로 했다. 위험한 일이 발생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사전에 차단할 필요성은 있었다.
식사는 화목하게 이루어졌다. 라이나와 베로나도 제법 정이 든 모양이다. 그동안 라이나와 베로나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가출 이후 가르딘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어렸을 때 얼마나 찌질했던지, 툭하면 삐쳐서 말도 안 했다니까!”
“누나! 다 지난 일을 가지고!”
“얘는! 내가 틀린 말 했니!”
“당신이 그랬다니 믿을 수가 없네요!”
“호호호호!”
여인들끼리 대화가 잘 통하는 모양이다. 가르딘은 어린 시절 지나간 얘기를 꺼내는 누나가 얄미웠지만 라이나와 친근하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서로 소원하면 어찌해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
브리안도 식사하면서 가르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한지 물어 보았다.
“아빠가 그랬어?”
“아냐! 내가 얼마나 마음이 넓은데. 브리안은 커서 이 아빠처럼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응! 아빠!”
“아이구! 귀여운 내 새끼!”
브리안은 정말 어린아이 같았다. 가르딘은 브리안의 볼을 비비면서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흐뭇해했다. 모두가 화기애애하고 화목해 보였다.
그에 반해 멜리사는 한쪽에서 조용히 식사를 했다. 식사하는 내내 브리안의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며 속으로 툴툴거렸다.
‘저, 저, 저! 어쩜!’
브리안과의 대결이 있은 이후 멜리사는 브리안을 피해 다녀야 했다.
브리안은 집요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좋아하는 언니를 찾아가는 어린 동생으로 보이겠지만 멜리사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난다. 하지만 대답 못하는 자신의 초라함을 느껴야 하는 심정적 부담감이 컸다.
그렇다고 대놓고 브리안을 탓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애가 어른 같다고 타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누구에게나 천적이 있을 수 있다. 멜리사의 천적은 바로 브리안이었다.
‘윽! 답답해!’
“멜리사, 왜 그러니?”
“아니에요, 외삼촌.”
가르딘은 너무 조용한 멜리사를 보자 의아했다. 처음에 보여준 활기찬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조카의 시무룩한 모습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러나 당사자가 아무렇지 않다고 하자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해 버렸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봐도 마음 아파하는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보았다.
식사가 끝나고 나서 서재에서 베로나와 단둘이 차를 마셨다. 가르딘은 누나와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따로 부른 것이다. 식구들이 알아서 좋을 내용은 아니었다.
“데포론 영지에 대해서 조사를 해봤어.”
“벌써!”
“누나가 온 다음 날 바로 조사를 했지.”
“어떠니? 도와줄 수 있는 거지.”
가르딘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따라 베로나도 심각하게 굳어갔다.
가르딘은 차분하게 데포론 영지의 사정을 설명해 나갔다. 사실이 아닌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사실만을 말해 주었다.
물론 가르딘과 연관돼서 잘못되었다는 것은 뺐다. 말해 봤자 베로나가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괜히 불안감만 조성할 수 있다.
말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고, 해도 되는 것이 있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내정은 빼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빚이 6만 5천 골드라고!”
“맞아.”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액수였다. 빚이 그 정도까지 많은 줄은 몰랐다. 또한 영지의 대부분이 차압당했다는 것도 처음 들었다. 어려운 것도 정도가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미 도와줄 수 있는 단계를 한참이나 벗어났다.
“설마 오빠들이 이렇게 무능할 줄이야!”
“무능보다는 욕심이 컸지. 서로 과시욕이 강한 것이 잘못이야! 작은 영지의 주인이면 그에 걸맞게 행동하거나 자제를 했어야 하는데 말이야. 이겨봐야 남는 것도 없는 영지를 가지고 탐욕을 부리다니 당해도 싸지!”
가르딘은 냉정했다. 현실은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가르딘의 냉정한 말에 베로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럼에도 도와 달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이번 한번만 도와줄 생각이야.”
“정말로!”
“뚫린 입으로 두말할 수도 있지만 누나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
가르딘은 가족을 위해서 거짓을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세상사 살아가는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누나에게까지 거짓을 말할 이유는 아직 없었다.
“이번에 탕감될 빚 중에서 2만 골드 정도는 갚아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되면 영지의 대부분이 빌링턴 백작의 손에 들어가겠지만 살아가는데 부족하지는 않을 거야.”
“역시 영지를 다 찾지는 못하는구나!”
가르딘이 마음먹으면 다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데포른 영지 자체가 네벨리언 공작령 안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찾아도 또다시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이 되어버릴 수 있었다.
“내가 직접적으로 도와주지는 않을 거야. 대신에 파이트너 상단을 통해서 도움을 줄 거야. 돈의 융통을 라슈어 남작이 담보를 대주었다는 식으로 했으면 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남편에게 말하면 해줄 거야.”
“단, 이번 한번뿐이야! 더 이상의 도움은 없어.”
“그래도 한번은 찾아가 보지 그러니!”
“됐어. 봐봤자 서로 마음만 아프지.”
가르딘은 이번이 마지막 도움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현실이 맘처럼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은 흔들리는 조각배와 같다. 흔들리지 않도록 사공은 항상 노력하겠지만 바람과 모진 풍랑은 마음먹은 대로 놔두지 않는다.
좌우 반경 300미터에 해당하는 거대한 저택.
저택을 주변으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정원이 펼쳐졌다. 정원 안에는 정원수와 분수대가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밤이 깊어지는 늦은 시각에도 불빛이 대저택을 비추었다.
정원의 끝에는 거대한 담벼락이 있고, 그 주변으로 기사들과 병사들이 철통경계를 서고 있었다.
대저택은 다시 열 개로 나누어져 있으며 그 중심을 원처럼 둘러싸고 있다. 원의 중심에 저택의 주인이 자리하고 있다.
네벨리언 공작가.
카이로만 제국 5대 공작가인 네벨리언 공작의 저택이었다. 황도 오스란의 서쪽 지역에 자리하며 황궁의 수문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네벨리언 공작의 회의실은 외부에서 볼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 위치하며, 외부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 창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벽으로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은 무척이나 밝고 화려하다. 곳곳에 라이트 마법이 걸려 있는 수정구가 박혀 있기 때문이다.
회의실을 기준으로 각 방은 함정이 설치되어 있으며, 적이 침입할 수 있는 위치에는 기사들이 숨어 있었다.
넓은 회의실에는 두 명이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네벨리언 공작과 빌링턴 백작이었다.
빌링턴 백작은 그동안 조사한 내용을 네벨리언 공작에게 전했다. 이번에 조사한 내용은 누군가에 대한 자세한 자료였다. 그가 살아간 흔적들을 모두 조사한 내용이었다.
‘흠!’
서류를 읽어 내려간 네벨리언 공작은 고민하는 흔적을 보였다. 서류는 자신이 원하던 내용이 아니었다.
“소원하군.”
“20년 이상 연락을 하지 않은 점을 봐서 조사한 내용 그대로입니다.”
- 어머니가 달라 형제간의 반목이 심했음.
- 열다섯 살이 되는 나이에 데포른 영지에서 뛰쳐나옴. 그 뒤로 연락을 한 번도 하지 않음.
“그래도 가족입니다. 소원해졌다고 해도 모른 척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네벨리언 공작의 눈가에 잔인한 살심이 감돌았다. 한번 마음을 정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네벨리언 공작이다. 카론 마이어 공작과 비슷한 성향이었다. 그렇기에 서로 같은 목표를 향해 내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계획의 중요한 점은 상대의 심기를 흔들면서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놈이 도와준다면 확실해지겠지.”
“결국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당시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닫게 해주어야지. 실패는 없다. 알겠느냐!”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놈이 움직이는 순간 지옥이 기다릴 것입니다.”
“만약에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주어야 한다.”
“물론입니다.”
베로나가 떠나는 날이 되었다.
가르딘과 라이나, 브리안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마차는 전에 타고 온 것이지만 호위기사는 두 명에서 일곱 명으로 늘었다. 멜리사가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투르가 호위기사로 뽑혔다.
투르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거북한 일이었다. 가르딘이 명령하지 않았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베로나도 투르를 유심히 보았기에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투르야! 누나와 멜리사를 잘 호위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가르딘은 조금 불안했다. 투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었다. 베로나와 멜리사가 주장하는 바람에 호위기사로 붙여주었지만 불안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아직 투르가 폭발한 경우는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사고 치면 죽는다!]
투르에게 전음으로 경고했다. 투르는 순간 움찔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사고 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베로나와 멜리사가 마차에 탔다.
“다음에 시간 나면 또 올게.”
“어련하시겠어.”
“외삼촌, 저도 자주 찾아올게요.”
“언제든지 오렴.”
두 신성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드래곤 대신에 와이번을 사냥감으로 정한 멜리사는 만족했다. 한순간에 와이번으로 전락해 버린 투르가 찰나 몸을 움찔거렸다.
가기 전에 브리안을 못 이긴 것은 무척이나 아쉬웠다. 어찌나 영악한지 멜리사조차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베로나가 떠나는 시각. 광속의 용병 사이론은 세 명에게 둘러싸여 있다. 가르딘의 동기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사이론을 유린했다.
“야! 이쪽으로 움직여야지.”
그들이 검을 한번 움직일 때마다 사이론은 바닥을 뒹굴어야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검속이 어찌나 빠른지 틈을 전혀 주지 않는다. 장난처럼 휘두르는 검에는 사이론의 기본적인 관념을 뒤집어 버리는 능력이 있었다.
철퍼덕!
검이 따라오다 방향을 바꾸었다. 일직선으로 뻗어 나오는 검속이 너무 빨랐다. 그런 상태에서 다시 방향을 바꾸다니 상상 이상의 실력이었다. 세 명 모두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호오!’
필리언, 유타, 갈라는 사이론이 제법 한다는 것을 느꼈다. 홀로 용병 생활을 하면서 이만큼의 수련을 쌓았다는 것은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가능성이 있기에 적당히 할 수 없다. 성장할 수 있는 녀석이기에 더욱더 두드리는 것이다. 포기했다면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사이론은 필사적이었다. 한순간 방심이 엄청난 손실을 가져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자들이!’
모르긴 몰라도 세 명 다 오러마스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필리언이 오러마스터인 것을 보았다. 갈라와 유타의 경우 오러블레이드를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느껴지는 기운을 보면 오러마스터인 것 같았다.
더군다나 익스퍼트 중급을 아무나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러마스터쯤 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파파팡!
필리언의 검기가 사이론의 좌측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 즉시 사이론이 감각적으로 반응하여 오른쪽으로 피했다. 그 틈에 다시 유타의 검기가 사이론의 목을 노렸다. 목이 잘릴 것 같은 공포심에 반응하여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갈라의 검기가 아래서 위로 그어지는 것이 아닌가!
사이론이 검을 바닥에 튕기듯이 차냈다. 그러자 몸이 활처럼 휘며 공중으로 도약했다. 간신히 갈라의 검기를 피한 사이론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볍게 착지를 하려고 했다.
탁!
꽈다다당!
착지하려는 오른발을 누군가가 인정머리 없이 차버렸다. 감각에도 잡히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버팀목을 잃어버린 사이론의 중심이 무너지며 바닥에 꼴사납게 엎어졌다. 바닥에 엎어진 사이론이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다. 이미 누군지 알고 있었다. 툭하면 유령처럼 나타나서 자신을 괴롭힌다.
“한동안 친척이 와서 소원했지.”
“아닙니다!”
‘계속 소원했으면 좋겠습니다!’
가르딘에게 배우지 않아도 충분히 효과가 있었다. 필리언, 갈라, 유타만 해도 차고 넘칠 정도로 뛰어난 기사였다.
‘왜! 나만 괴롭힙니까!’
짜증 제대로였다.
미소 짓는 가르딘이 사악하게만 느껴졌다.
“네 누나는 돌아갔냐?”
“그렇지. 뭐!”
“난 네가 고아인 줄 알았는데 가족이 있긴 있구나!”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가르딘은 다른 것은 공유해도 가족에 대한 일은 동기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사이가 좋지 않다는 말만 했을 뿐이다. 동기들도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괜히 좋지 않은 일을 들먹이는 것도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저 녀석 실력이 제법 좋아졌어.”
“세 번째까지 피한 적은 오늘이 처음이거든.”
마지막에 가르딘이 다리를 걸지만 않았어도 완벽했을 것이다.
사이론은 필리언, 갈라, 유타의 칭찬에 조금 안도가 되었다. 실력이 좋아진 것은 자신도 느끼고 있는 일이었다. 또한 평가가 좋지 못하면 가르딘의 갈금을 받아야 한다. 차라리 지독한 수련을 하는 것이 낫지 가르딘의 갈금을 받으면 하루 종일 정신이 멍하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어버린다.
“사이론! 나는 절대 사심이 없다. 다 네가 잘되라고 하는 것이다. 한 톨의 사심이 있다면 그 즉시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꽈과과광!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어딘가에 떨어졌다. 순간 가르딘이 움찔하여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실 사심 없이 수련을 가르치는 사부가 얼마나 많을지 의문이 된다. 가르딘은 지극히 주관적으로 사이론을 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