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8/93)

   @@[제5장 논공행상@@]

 황도 오스란의 분위기 자체는 축제분위기다. 제국의 2황자가 죽었다는 것보다는 제국전쟁에서 이겼다는 것에 큰 비중을 두었다. 카이로만 제국으로서는 2황자의 죽음으로 인해 제국 전체적인 분위기가 침울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듯했다. 어차피 제국민들의 입장에서 황궁 내의 변화는 쉽사리 알 수 없다. 그저 황궁에서 알려주는 정보만을 토대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에 반해 황궁 내부와 귀족들의 분위기는 달랐다. 모두 긴장감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변 할지 모르는 시국이었다. 대륙 전체적으로는 최강국이라는 것을 증명했지만 내부적으로 문제가 쌓여가고 있었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 러쉬 황자를 황태자위에 올려놓으려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제국전쟁에서 가장 많은 공적을 쌓은 황자가 러쉬 황자였다. 장자 승계 원칙에 따라서 러쉬 황자가 황태자가 되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2황자가 죽는 바람에 확고했던 위치가 조금씩 흔들리는 분위기였다. 코스트너 황제가 확실하게 뜻을 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황제 역시도 2황자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러쉬 황자의 거처에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이 자리했다. 그들은 이번 논공행상에 대한 일을 처리하는 동시에 황태자 즉위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황제 폐하의 뜻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도 어쩔 수 없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서운하긴 하군요! 내가 여태껏 보여준 것들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실망입니다.”

 “시간이 들겠지만 이해하실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러쉬 황자는 이제까지 만들어 놓은 입지가 곤란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카이로만 제국의 굳건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루속히 황태자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이 제국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러쉬 황자 본인도 황제에 대한 욕심은 있다.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장자인 데다가 가장 많은 공적을 세운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현재 전공 대상자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전공은 저희 쪽 사람에게 전달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네벨리언 공작과 타이가라 공작, 마이어 공작 쪽의 전공 수여도 상당수가 될 것입니다.”

 “수적인 면을 보면, 절반에서 약간 부족한 편이군요.”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네벨리언 공작이 귀족들의 힘을 자신의 쪽으로 몰아가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전공은 모두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 진영이 수여받게 될 테지만, 네벨리언 공작과 타이가라 공작, 마이어 공작 진영도 만만치가 않았다. 전체적인 수를 보면 거의 대등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다마트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러쉬 황자의 물음에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실 다마트 황자는 주변 분위기와는 다르게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황위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타이가라 공작과 네벨리언 공작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둘이 움직이는 이상 다마트 황자는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 한다. 권력은 혼자 만의 결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마이어 공작까지 합세를 한 시국이었다. 제국의 5대 공작 중에 3명이 다마트 황자에게 붙었다. 결국 다마트 황자도 황태자위에 올라서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사실 네벨리언 공작과 타이가라 공작, 마이어 공작까지 모두 다마트 황자에게 붙었습니다. 지금 상황이 유지되게 되면 내전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다마트가 그럴 리 없습니다.”

 “황자님도 현실을 아시지 않습니까! 혼자만의 결정으로 되는 상황이 아닙니다. 결국 다마트 황자는 세 공작의 의중을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전을 피하기 위해서는 되도록 많은 귀족을 포섭해야 합니다.”

 “파스트론 공작의 의견이 옳습니다.”

 러쉬 황자는 가능한 내전을 피하고 싶다. 따라서 만반의 준비를 해서 압도적인 힘으로 이겨나가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데, 무리하게 내전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전에서 지면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포섭해야 할 귀족이 얼마나 되나요?”

 “중요한 귀족들은 10명 안팎입니다. 나머지는 어느 정도의 보장만 하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주도권은 저희가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가장 필요한 인물이지요?”

 “되도록 오러 마스터는 포섭해야 합니다. 가르딘 백작과, 바자바인 후작은 반드시 필요한 인물들입니다.”

 “둘은 이미 우리 편이 아닌가요.”

 “아직 모르는 겁니다. 확실하게 접촉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전쟁이든, 암투든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들이다. 그중에서도 오러 마스터의 존재는 가장 중요한 변수로 다가온다. 마스터를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전쟁의 승패가 뒤바뀌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재 가르딘과 바자바인 후작을 영입하게 되면 총 마스터의 수에서 러쉬 황자 진영이 6명이 되고, 다마트 황자 진영이 3명이 된다. 절대적인 숫자에서 배나 차이가 난다. 하지만 가르딘과 바자바인 후작을 빼앗기게 되면 4 대 5로 역전이 되어 버린다. 힘든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완벽하게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것은 중요했다.

 다마트 황자의 거처에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예전 다마트 황자의 경우 근처에 타이가라 공작을 제외하고 사람들이 없었다. 반면에 지금은 네벨리언 공작과 마이어 공작이 모여 있었다. 과거와 무척이나 달라진 상황이었다. 다마트 황자는 처음에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자꾸 모이게 되면 황태자위에 관심 있는 것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는 것을 어필했다. 다마트 황자가 자꾸 거절할수록 네벨리언 공작과 마이어 공작의 심중은 다급해졌다. 어떻게 해서든 설득을 해야 했다. 결국 다마트 황자가 마지못해 결정을 내려야 했다.

 “두 분의 뜻이 이처럼 완강한 줄 몰랐습니다. 저는 많이 부족합니다. 형님들처럼 현명하지도, 강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제가 황태자가 되기를 바라신다면 이제부터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자님은 분명히 뛰어난 성군이 되실 겁니다. 저희들이 최선을 다해 황자님을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네벨리언 공작과 마이어 공작, 타이가라 공작이 뜻을 맞추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고 있었다. 아직 황제 폐하의 의중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설혹 미리 결정을 내렸다고 해도 뒤집을 수 있는 힘만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되도록 많은 귀족을 포섭하는 게 관건입니다. 현재 일을 진행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형님도 같은 조치를 취하고 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벌써부터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이 직접 나서고 있습니다.”

 “형님과 경쟁을 해야 한다니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마음 단단히 해야 합니다. 나약한 마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마트 황자는 모든 일을 네벨리언 공작과 마이어 공작의 뜻대로 하라고 했다. 자신은 그 뒤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여전히 직접적이지 않지만 이것만해도 성과라고 여긴 두 공작이었다.

 일이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이라 오랜 시간 다마트 황자와 있을 수 없는 네벨리언 공작과 마이어 공작이 먼저 일어났다.

 타이가라 공작과 남게 된 다마트 황자는 수그렸던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맺힌 미소가 섬뜩하기까지 했다.

 “병졸 두 마리를 획득했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여야겠지요.”

 “그렇습니다. 황자 전하!”

 “나머지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요?”

 “오러 마스터 중에서 바자바인 후작은 힘들 것으로 예상 됩니다. 가능성이 있다면 가르딘 백작 정도입니다.”

 “가르딘 백작이라, 아직 접촉을 하지 않았나요?”

 다른 귀족들과 다르게 거리가 멀어서 늦게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도착하는 즉시 접촉을 하면 넘어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작 가능성인가요, 넘어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지요.”

 “물론입니다.”

 다마트 황자와 타이가라 공작의 눈빛이 검붉게 물들었다. 진득한 살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떠벅! 떠벅!

 말을 탄 4명이 황도 오스란의 입구에 도착했다. 여러 사람들이 들어가는 입구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길에 서 있었다. 줄을 지어 황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검열을 받았다. 전공 수여식이 있을 때, 제국민이 모이는 오스란의 카이로만 광장에서 직접 수여를 하기에 검열이 철저했다. 들어가는 입구는 큰 편이지만 그 앞으로 귀족들은 순서를 지키지 않고 들어가고 있었다. 귀족들이기에 당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에 반해 가르딘과 필리언, 투르, 사이론은 평민들 사이에 줄을 섰다.

 사이론은 백작인 가르딘이 줄을 서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귀족이라면 의당 사람들이 피해주기 마련이었다. 당연히 받아야 하는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줄을 서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왜 줄을 섭니까?”

 “먼저 들어가 봐야 뭐가 있는데, 시간도 있는데 줄을 서는 게 당연하지.”

 “그게 당연한 겁니까?”

 “아니면 말고, 그럼 너는 먼저 들어가라.”

 가르딘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세상은 평등하다고 말을 하는 것은 귀족들의 세상을 무너뜨리는 말이다. 이런 말을 함부로 말했다가는 모두에게 공적이 될 수 있다. 가르딘은 평민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또한 기득권을 내세워 그들에게 강압적이고 싶지도 않다. 물론 현실적으로 가르딘이 평등하게 사람들을 대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상일 뿐이다.

 누군가 엄청난 인물이 나타나 세상의 규칙을 허물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혁명이 일어나도 언젠가는 또다시 권력자와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가르딘은 조용히 지낼 뿐이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도 부족할 판에 그런 일할 시간이 없었다. 사실은 귀찮은 것도 한몫 했다.

 사이론이 먼저 들어갈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가르딘과 같이 기다려야 했다. 한참을 기다리자 줄이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가르딘이 검문을 받을 차례가 다가왔다. 경비병은 황도의 얼굴답게 잘생긴 놈으로 세웠다. 얼굴마담이라는 말과, 보기 좋은 빵이 먹기도 좋다는 말이 있다. 잘생긴 놈으로 놔야 수도의 얼굴이 산다는 뜻이다. 성격이 좋지 못하면 말짱 꽝이라는 말도 있지만, 세상사 보여주는 것이 먼저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신분증을 보여주시오.”

 “여기.”

 가르딘의 행색을 보면 귀족처럼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옷차림으로 평민들 사이에 들어가 있으니 평민처럼 보인다. 얼굴이 잘난 것도 아니어서 필연이었다. 경비병 왈슨도 별다른 생각 없이 가르딘의 신분증을 확인했다. 그런데 신분증에 쓰인 내용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눈여겨봤다. 몇 번을 확인해도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놀라서 뒤로 주춤 거렸다.

 “가르딘 백작님!”

 “내 이름일세.”

 “죄송합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제국의 오러 마스터이자 백작이었다. 왈슨이 당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백작이나 되는 사람이 평민들 사이에 껴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르딘이 맘 좋은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괜찮으니, 천천히 하게.”

 가르딘의 선전용 미소가 작렬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 이렇게 맘 넓고 좋은 사람이라고 광고하는 듯했다. 가르딘이 넓은 아량으로 왈슨을 칭찬하자 주변 평민들 모두 감탄했다. 저토록 소탈하고, 구김살 없는 인물이 제국의 오러 마스터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필리언과 사이론은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천연덕스럽게 사람들을 혹세무민시킨고 있지 않은가! 평소 성격을 아는 필리언과 사이론은 저런 성격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사이론은 생각했다. 가르딘이 이 모든 것을 의도했다고 말이다.

 ‘무서운 분이시다!’

 생각할수록 자신의 인생이 쉽지 않게 생겼다고 느껴졌다.

 가르딘은 경비병들의 과잉친절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가르딘은 경비병들이 수고한다며 노고를 치하해 주었다. 칭찬하는데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맘껏 포장해 주었다.

  가르딘은 수도 외곽에 마련된 여관에 숙소를 마련했다. 귀족들의 방문을 되도록 받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위치를 알지 못하면 찾아오기 힘들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그것도 신분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제국에서도 가르딘은 이제 방귀 좀 뀌어도 되는 위치에 속한다. 각 공작 진영에서 가르딘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가르딘을 완벽하게 포섭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가르딘이 외진 곳에 있든, 숨어 있든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3일 후에 코스트너 황제의 전공 수여식이 거행된다. 제국민에게 제국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가르딘은 3일 동안 조용히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귀족 진영의 사람이 찾아왔다.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 진영에서 먼저 왔다. 그들이 보낸 사람은 가르딘의 수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스필언과 미토스였다. 아무래도 친분이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가르딘으로서는 함부로 대하기 힘든 제자들이라, 거절하기 무척이나 어렵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렇구나! 너희들의 활약은 내 이미 듣고 있었다. 제국의 검이 되어 창공을 훨훨 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뿌듯하구나!”

 인자한 사부의 모습으로 변한 가르딘이었다. 가르딘과 스필언, 미토스 간의 대화는 정상적인 사제 간의 대화로 보인다. 전형적인 스승과 제자, 아주 이상적인 모습이 나왔다.

 “부끄럽습니다. 아직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이제 너희들에게 가르칠 것은 없구나. 나를 뛰어넘은 너희들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실력에 자만심을 갖는 것은 금물이다. 언제나 자신을 단련하는 것을 멈추지 마라.”

 “알겠습니다. 영주님!”

 제자의 성장을 기뻐하는 스승과, 스승을 한없이 존경하는 제자.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과연이라며 감탄을 하겠지만 가르딘의 주변에 있는 필리언과 사이론은 또다시 헛구역질을 했다. 특히 사이론은 무척이나 억울했다.

 ‘뭐야, 난!’

 자신도 제자 격인데, 왜 대하는 태도가 이리 다를 수 있는 가! 좀 전까지의 가르딘이 현재 보고 있는 가르딘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이중인격이 아닌가 의심을 해봐야 하는 상황 이었다. 만약 사이론이 가르딘에게 따진다면, 가르딘은 이런 식으로 대꾸할 것이다. ‘꼬우면 너도 출세해라! 뭐 아버지가 공작이면 한 번 더 봐줄 용의가 있다.’ 라고 말이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이곳에 왜 왔는지 솔직하게 말했다. 가르딘을 존경하기에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가르딘이 러쉬 황자 진영에 속하기를 원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로 찾아뵙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아니다. 너희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잠시 생각을 해보마.”

 가르딘은 생각을 해본다고 했지만 이미 결론은 내고 있었다. 황도에 오기 전부터 마음을 먹은 상황이었다. 가르딘은 테이란으로부터 황도의 소식을 들었다.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의 러쉬 황자 진영과, 네벨리언 공작, 마이어 공작, 타이가라 공작의 다마트 황자 진영으로 나뉘어 있다고 말이다. 어디에 붙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가르딘의 경우 미토스와 스필언이 있는 상황이라 러쉬 황자를 선택해야 한다. 더군다나 타이가라 공작과 네벨리언 공작과는 좋지 않는 기억이 있다. 러쉬 황자를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마트 황자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강한 쪽에 붙어 오래 사는 것이 중요했다. 명분과 의리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기에는 가진 게 너무 많았다.

 “나는 장자승계원칙을 존중하는 편이다.”

 “훌륭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아직 나의 선택을 공표하지는 말았으면 하는구나!”

 “그건 당연합니다.”

 “한 번은 파스트론 공작님과 발리스타 공작님을 만나봐야겠지.”

 “전공 수여식이 끝나는 대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내 너희들만 믿고 있겠다.”

 가르딘은 미토스와 스필언을 믿는다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가르딘은 아직 무언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미토스와 스필언이 찾아올 정도면 다마트 황자 진영도 가르딘의 위치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보다 못 보던 사람이군요.”

 필리언과 투르는 알고 있지만 사이론은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덩치도 제법 큰 편이고, 오러 익스퍼트 중급에 이르렀다. 나이를 감안해 볼 때 꽤 괜찮은 실력이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천재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의 평가가 적당하다. 그러나 사이론도 또래에서는 제법 뛰어난 인재였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저 평가된 것뿐이었다.

 “사이론입니다. 제국의 신성을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서로 인사를 하고 난 후, 대화를 나누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아직 할 일이 있는지 오래 있지는 못했다. 서운한 감이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먼저 일어났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러자꾸나.”

 언제든지 환영한다는 듯한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의 모습은 더없이 훌륭해 보였다. 그러나 스필언과 미토스가 가고 난 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능글맞은 중년인 그 자체였다.

 “내일쯤에 다마트 황자 진영에서도 사람이 올지 모르겠군.”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돼.”

 “뭐가 이해가 안 되는데.”

 “너 같은 놈을 포섭하는 게 이상한 거지, 너처럼 미친놈을 포섭했다가는 제국 전체가 미쳐 버릴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뭐야!”

 “맞는 말이잖아!”

 “나 같은 인기인은 원래부터 피곤한 법이야, 너희같이 인기 없는 것들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웃기고 있어!”

 “난 안 웃긴다.”

 “웃겨!”

 ‘닥쳐!”

 필리언이 가르딘의 염장을 오랜만에 긁었다. 가르딘도 지지 않고 염장을 질렀다. 사이론은 고개를 숙였다. 좀 전까지 정상적인 말을 할 때부터 이상하게 생각했다. 잠시나마 안도한 자신이 멍청했다. 사이론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는 가르딘이었다.

 와구작! 와구작!

 방안 한쪽에는 투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식사를 했다. 20인분에 달하는 식사량을 혼자서 소화하고 있었다. 사이론도 용병들 사이에서는 한 덩치 한다고 하는데, 투르와 비교하면 어른과 아이 차이였다. 역시 이 집단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정상적인 자신이 참고 견딜 수 있는 집단이 아닌 것 같았다.

 ‘나 다시 돌아갈래!’

 블러드 용병대에 둘러싸인 것보다 더 머리 아픈 상황이었다. 차라리 그때가 더 나았다.

 사이론의 환장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밤이 지나가야 끝나는 것이다. 가르딘은 심심한데 수련이나 하자고 했다. 물론 사이론의 수련이었다. 사이론도 수련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수련을 받을수록 강해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마저 아니라면 정말 미칠지 모른다.

 방안은 네 사람이 자는데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수련을 하기에는 부족하다. 칼부림을 하다가는 방안에 있는 물건들 이 부서질 수 있었다.

 “오늘 수련은 기감수련이다. 수련의 요체는 눈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찾는 것이지. 오러를 수련하는 자에게 눈보다 자신의 모든 감각이 중요한 시점이 다가올 수 있다. 그때를 대비한 수련이니 최선을 다하는 게 좋을 거다.”

 기감수련.

 청각, 촉각, 후각, 미각, 초감각(오러)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특히 오러를 사용하는 자는 상대방의 오러를 파악하여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다. 가르딘의 경우 초감각이 극에 달해 눈을 감으나 뜨나 상관없는 상태였다. 기감수련을 하면 할수록 오러의 기운이 세밀해지며, 민감해진다. 작은 반응에도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

 “이 수련은 필리언, 투르, 사이론 모두에게 통용되는 수련이다.”

 필리언과 투르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미 자신들은 가르딘의 수련을 받았다. 기감수련이라는 목적과 더불어 게임이 섞인 수련이다. 게임의 벌칙은 잔혹하다. 차마 입으로 말하기 어려운 벌칙이 가해진다.

 사이론은 긴장했다. 확실히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눈을 가리고 얼마나 움직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좁은 방안에서 나를 찾는 것이다. 모두 눈을 가리고 나를 찾도록.”

 가르딘의 말에 따라 필리언, 투르, 사이론이 눈을 가렸다. 가르딘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가르딘의 기척은 바람조차 불지 않는 조용한 수면과 같다.

  “나는 최소한으로 움직일 것이다. 너희들의 능력에 따라 수준을 높일 것이다. 끝으로 나를 가장 나중으로 찾는 자는 벌칙이 있다. 벌칙의 내용은......!”

 벌칙의 내용을 공개한 가르딘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사이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진정인가?’

 만약 사실이라면 얼굴 들고 다니기 힘들어진다. 어떻게 해서든 가장 먼저 가르딘을 찾아야 한다. 가르딘은 보통 사람의 걸음걸이로 움직인다고 했다. 그 이상으로 움직이게 되면 찾을 수가 없다. 사이론은 오러를 개방했다. 감각을 예리하게 키웠다. 확실히 눈을 감고 있으니 감각이 날카로워졌다.

 ‘응?’

 필리언과 투르의 기척은 느껴졌다. 숨 쉬는 기운이 퍼지자 확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가르딘은 없다. 방안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럴 수가!’

 살아 있는 사람이 숨 쉬는 소리조차 없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사람마다 내쉬는 숨이 틀린다. 사이론은 감각을 최대한 키웠다. 그럼에도 찾을 수 없자 움직였다. 방안에서 투르와 필리언을 제외한 방향으로 움직여 나갔다.

 허우적! 허우적!

 방안에 있는 물건들이 거치적거린다. 사이론은 힘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마와 등 뒤로 땀이 흘러내렸다.

 “잡았다.”

 “이런 걸렸네.”

 필리언이 잡았다는 소리가 들렸다. 사이론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 뒤를 이어 투르까지 가르딘을 잡았다. 결국 사이론이 꼴찌가 되어 버렸다. 필리언은 그렇다 치더라도 투르는 이길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어떻게?”

 “아직 기감수련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인생을 살면서 한 번에 실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했지, 그런 면에서 너는 아직 부족하니, 3번의 기회를 더 주마!”

 “감사합니다!”

 가르딘이 기회를 더 준다는 말에 사이론은 안심했다. 만약 자신이 벌칙을 수행했다면 자살할지도 몰랐다. 사이론은 필리언에게 물었다.

 “어떻게 찾은 겁니까?”

 “사람의 움직임에는 대기의 유동도 있다. 또한 세밀하게 오러를 운용해 보면 가르딘의 파동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아직 수련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이번에는 집중을 해보아라.”

 “그... 렇군요.”

 ‘찾기는 개뿔!’

 필리언은 고개를 돌렸다. 정작 자신도 가르딘의 기척을 찾지 못했다. 가르딘의 기척은 정말 유령 같았다. 그곳에 있는 지도 몰랐다. 오러 마스터가 되고 나서 기감이 상당히 예민해졌다. 그런데도 찾지 못하다니 유령에 홀린 기분이었다. 만약 가르딘이 전음을 주자 않았다면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사이론은 사기 도박단에 걸린 것이다. 서로 짜고 치는 판에 껴서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투르의 경우 기감수련을 했다고는 해도 다른 사람보다 예민하지 못하다. 더군다나 전투가 아닌 상황에서는 힘을 조절하기도 어렵다. 그렇기에 가장 늦게 걸릴 수밖에 없는 사람은 투르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사이론이 걸리는 것은 가르딘이 전음으로 자신의 위치를 두 사람에게 공개했기 때문이다. 사이론으로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게임에 걸려들었다.

 사이론은 연거푸 3번 다 꼴찌를 하고 말았다. 사이론의 기감수련은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기감을 열어 집중하면 할수록 필리언과 투르의 기운을 찾는 데는 어렵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의 기척은 아무리 집중해도 찾을 수 없었다.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시퍼렇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저 벌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집안 망신이었다.

 “못... 합니다.”

 “해야 할걸.”

 “차라리 자살할 겁니다!”

 “그래, 그럼 어쩌지.”

 가르딘이 포기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주머니 속에 수정구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죽은 후에 이걸 많이 복사해서 세상에 공개해버려야지.”

 “헛!”

 사이론이 했던 모든 영상이 찍힌 수정구였다. 저 수정구가 공개되면 사이론의 명예는 곤두박질친다. 광속의 용병 사이론은 죽은 후에도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다.

 “하... 지요.”

 다음날.

 아침이지만 사람들끼리 분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모두 밤 사이에 시끄럽게 들린 소리 때문에 밖을 내려다보고 말았다. 무언가 빠르게 지나갔다는 것과, 그놈이 시끄럽게 노래를 불렀다는 것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 고성방가를 하다니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예의 없는 놈이었다. 경비병들이 시끄러워서 쫓아갔지만 하도 빨라서 잡지 못했다고 했다.

 “속옷차림에 그런 노래를 부르다니!”

 “어떤 미친놈이야!”

 “자신이 영웅이라고 소리를 지르더라니까!”

 “미친놈이지만 무척 빨랐어.”

 “그러게 말이야! 얼굴을 본 사람이 없으니 잡을 수도 없겠어.”

 “경비병도 못 잡는 놈을 어떻게 잡나.”

 가르딘의 여관 주변에서도 어제에 벌어진 한밤의 고성방가에 대해 떠들썩했다. 미친놈이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가르딘과 필리언, 투르는 아침에 일어나서 사이론을 보았다. 사이론은 밤새 잠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밖에서 들리는 얘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신 차려라.”

 “정신 못 차리겠습니다.”

 “반항이냐.”

 “그럼 지금 제가 제정신으로 보입니까! 영주님하고 다니면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얼굴을 안 들켰으면 됐잖아. 더군다나 무척이나 빨랐다며! 아마 네 인생에서 가장 빠른 날이 되지 않았나 싶은데.”

 “다... 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이론은 어젯밤, 속옷만 입고 밖을 뛰어다니며 [영웅로드]와 [영웅찬가]를 불렀다. 누군가. 볼까 봐, 전속력으로 마을을 돌았다. 자신의 생애 이 정도로 전심전력을 기울여 달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로 인해 한 번에 각성을 했다. 한계를 넘어서는 달리기가 사이론의 실력을 한층 더 강화시킨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사이론은 정신적 공황을 벗어나지 못했다. 다시는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참지 못했을 것이다.

 “난 공평하게 했다. 네가 실력이 안 돼서 걸린 거지.”

 “알고... 있습니다.”

 뿌드득!

 이를 가는 사이론이었다. 다음에는 절대 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가르딘은 어젯밤 혼자 나가는 사이론을 미행했다. 그리고 그날 벌어진 일을 모두 수정구에 녹화했다. 만약 이 사실을 사이론이 안다면 심장마비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심한 것 아니냐?”

 필리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르딘에게 물었다.

 “괜찮아, 어차피 버려야 하는 자존심이야. 괜한 자존심보다는 실력을 쌓아야지.”

 “그렇기는 하지만, 안됐다.”

 사이론은 이로써 한 단계 벗어던졌다. 안면에 철판을 깔아야 한다. 가르딘의 모든 것을 이어받으려면 그 정도의 창피함을 극복할 줄 알아야 한다. 분명히 가르딘은 제자로 사이론을 맞아들였다. 그럼 실력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물려받아야 한다. 성격과 능력을 물려받았을 때 제자로서 완벽해질 수 있다.

 ‘이 정도 했으면 웬만한 일에는 충격조차 받지 않지. 크크크!’

 냉정함과 평정심의 유지.

 기사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냉정한 상황판단을 한다. 가르딘은 재미도 있고, 충격요법으로 정신을 강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다.

 전공 수여가 있기 하루 전날, 은밀하게 누군가 찾아왔다. 가르딘의 주변에는 감시자들이 여럿 생겼다. 어제만 해도 없던 감시자들이 생긴 것은 가르딘의 동태를 주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가르딘을 찾아온 사람은 타이가라 공작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르딘에게는 좋지 않은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무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상당히 꺼림칙했다.

 “발키리 영지에 가기 전에 보고, 시간이 꽤 흘렀군.”

 “그렇습니다.”

 “그때 말한 것이 지금도 유효한가.”

 타이가라 공작의 주변에 서 있는 기사들은 칼날 같은 기세를 담고 있었다. 어두우면서도 질척한 살기가 느껴졌다. 타이가라 공작의 말에 따라 분위기가 변하는 것 같았다. 가르딘은 잠시 고민을 하는 척했다. 생각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미 결정이 난 상황이었다. 미적거리는 것은 어느 쪽이나 좋을 수 없다.

 “같이 지낸 의리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현명하지 못하군.”

 “어떤 것이 현명한지는 앞으로 결정이 나겠지요, 하지만 현재 제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확고하군.”

 “대세는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변화를 원하지, 지금 한 말을 후회하게 될 걸세.”

 타이가라 공작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적이 될 자가 분명하다. 그런 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도 여기까지다. 당시에 가르딘은 타이가라 공작과 함께할 뜻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거절당했다. 타이가라 공작은 자존심이 상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직접 왔는데도 불구하고 원하던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이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네. 뜻이 변하지 않았다니 무척이나 유감이군.”

 “살펴 가십시오. 뜻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국을 위하는 제 마음은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그 마음 끝까지 갈 수 있나 지켜보겠네.”

 타이가라 공작은 두 기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타이가라 공작은 돌아보지 않았다. 뒤에는 분명 가르딘이 서 있을 것이다. 이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적을 향해 인정을 보이지 않았다.

 ‘같은 편이 되었다면 사이론을 구한 것을 용서하려고 했 건만, 안되겠군.’

 가르딘은 돌아가는 타이가라 공작을 보며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저런 인물에게 원한을 지면 무척이나 고달프다. 그냥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전이라면 이런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선택을 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식으로든 수를 쓰겠지.’

 대비를 하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되도록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에게 아부를 잘하면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전공 수여식 날이 다가왔다.

 카이로만 제국은 전공 수여식을 열기 위해서 엄청난 물량을 동원했다. 제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는 화려한 볼거리를 마련했다. 대륙최강국의 힘을 만천하에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국의 황도 오스란의 카이로만 광장에 보였다. 카이로만 광장의 중앙에는 초대황제인 카이로만 대 제의 모습을 형상화한 거대한 동상이 자리했다. 동상은 크고 웅장했지만 화려하지는 않았다. 카이로만 대제의 성품을 볼 수 있는 동상이었다. 오른손으로 하늘을 향해 검을 들고 있는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카이로만 광장은 제국에서도 가장 큰 광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파로 인해 서 있을 장소조차 좁아 보였다.

 광장의 중앙에 동상이 있고, 제국의 황성에 교차하는 지점에 거대한 단상이 마련되어 있다. 높이가 4미터에 달한다. 그 위에서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전공 수여식이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현공 수여식은 중요 전공을 이룬 인물에게만 이루어진다. 자잘한 전공을 황제가 직접 수여하지는 않는다.

 가르딘도 아침부터 분주하게 복장을 차려입었다. 라이젠이 준 마법주머니는 여러 가지 효용성이 있었다. 무엇을 넣어도 다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가볍고 들고 다니기에 편했다. 가르딘은 라이나가 심혈을 기울여서 마련해 준 옷을 입었다. 화려한 복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가르딘이었지만 오늘만은 꾸밀 필요성이 있었다. 모두에게 보이는 자리에서 평범한 차림을 하는 것은 권위를 떨어뜨리는 미련한 짓이었다. 형식적이지만 보여줄 때는 보여주어야 했다.

 완벽한 세팅을 위해서 사람까지 따로 불렀다. 옷을 입는데 부족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확실히 차려입어야 할 것이 많았다. 평상시에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세밀하게 챙겨야 했다.

 모든 세팅을 마무리 지은 가르딘이었다. 거울을 보며, 턱에 손가락을 대어 보았다. 상당히 건방진 자세를 취하며 폼을 한껏 내었다.

 “역시 멋있어! 잘 생겼다! 가르딘!”

 필리언도 차려입고 방으로 들어왔다. 가르딘보다는 못하지만 제법 공을 들인 흔적이 보였다.

 “나 어떠냐?”

 “싸 보인다.”

 “뭐야?”

 “넌 뭘 입어도 싸 보이니, 너무 개폼 잡지 마라. 그에 반해 날 봐라! 뭘 입어도 멋있지 않냐.”

 “제... 길!”

 인정하긴 싫지만 필리언의 말이 틀리지 않다. 가르딘이 못 난 얼굴은 아니지만 필리언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필리언은 한마디로 뽀대가 나는 놈이었다. 무엇을 입어도 잘 어울리고, 멋있다. 어떤 것을 입어도 폼 안 나는 사람들에게는 재수 없는 놈으로 보였다.

 “넌 뭔데 얼쩡거려!”

  “마실 물 가져오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이론이 보이자 괜한 불똥을 내리는 가르딘이었다. 돌아오는 대답에 할 말 없어진 가르딘이 신경질을 부렸다.

 “그럼 빨리 가져와야 할 것 아니야! 내가 목이 컬컬해서 죽기를 바란 거지!”

 “그런 말도 안 되는!”

 목이 컬컬해서 죽는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왜 죄 없는 애한테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다 녀석을 위해서 한 거야!”

 “웃기시네.”

 군대에서 고참이 신입을 갈굴 때 이런 말을 한다. ‘너 잘 되라고 갈구는 거야! 내가 왜 아무 이유 없이 갈구겠어.’라고 말이다. 이런 말하면 대부분이 거짓말이다. 이유 없이 갈군다. 왜냐 그런 놈들이 있다. 이유 없이 갈구고 싶은 녀석들이 있는 것이다. 면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기도 한다. 사이론이 그런 얼굴이다.

 가르딘은 사이론과 투르를 여관에 대기하라고 했다. 사이론 보고 투르와 잘 지내라고 명령했다. 뒤끝이 무척이나 길게 가는 가르딘이었다. 평소에 투르와 잘 지내기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사이론만 괴롭게 생겼다.

 카이로만 광장의 단상 위에 귀족들이 모두 모였다.

 귀족들 중에서 상급귀족들만이 자리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가르딘도 상급귀족들 사이에 껴서 있었다. 가르딘은 인사를 하면서도 웬만하면 조용히 있었다. 먼저 나서지 않고, 자리만을 지키고 있었다.

 가르딘이 대회전용 미사여구와 미소를 날릴 때 육중한 기운을 풍기는 인물이 다가왔다. 거친 황야의 타이거를 보는 듯한 기운이었다. 제국의 5대 공작이자, 북방의 타이거인 마이어 공작이었다.

 “오랜만이네.”

 “오랜만입니다. 건강한 모습을 보니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나도 반갑네.”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마이어 공작의 표정은 차가웠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는 질책성 눈빛이 작렬했다.

 “자넬 그렇게 안 봤는데, 위선자에게 손을 내밀다니 안타깝군.”

 “누가 위선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릅니다. 저는 제가 직접 보고 판단할 뿐입니다.”

 “같이 할 수 없다면 이제부터 나는 자네의 적이 될 걸세.”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요.”

 마이어 공작의 강렬한 눈빛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모습을 보이는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의 단호한 모습에 마이어 공작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지. 기사라면 응당 자신의 결정에 흔들리지 않아야하지.”

  “공작님이라면 제 뜻을 이해하실 줄 알았습니다.”

 “결정을 내렸다면 책임을 지게 될 걸세, 아무튼 아직은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으니 즐겁게 전공 수여식을 보내세.”

 “그럴 생각입니다.”

 마이어 공작은 호쾌한 사람이었다. 가르딘으로서도 적이 되었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마이어 공작만이라도 러쉬 황자에 가담한다면 내전은 반발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실제적으로 상대가 안 되기 때문이다. 마이어 공작이 가지고 있는 힘이 강하다는 것은 이번 전쟁에서 다시 한 번 상기되었다.

 ‘안타깝지만 적으로 만나면 가차 없이 손을 쓰겠습니다. 그것이 공작님에 대한 제 의리입니다.’

 가르딘은 상대방에 따라서 적절한 화술을 구사했다. 그렇기에 귀족들 간의 대화에서 무난한 편이었다.

 ‘응?’

 가르딘은 미심쩍은 기운을 느꼈다. 웬일인지 보고 싶지 않은 기운이다. 같이 있으면 짜증이 날 것 같은 기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가르딘의 앞으로 짜증나는 면상이 다가 왔다.

 “잘 지냈나! 이렇게 봐서 무척이나 반갑네.”

 “그렇습니까.”

 “어허, 전직 상관을 보고, 그딴 식의 면상을 하다니! 귀족 상식을 더 배워야겠어.”

 “흥! 후작님만 할까요.”

 상대는 바자바인 후작이다. 가르딘이 상대하기 가장 껄끄러운 상대였다. 주는 것도 없이 미운 사람 중에 대표 격이다.

 “호오! 그사이에 많이 컸네.”

 “키는 원래 제가 더 컸습니다만.”

 “이거 한번 해보자는 거지.”

 “그... 건 아... 닙니다.”

 바자바인 후작과 해봐야 가르딘만 손해였다. 후작하고 말장난하는 것을 다른 귀족이 보면 이제까지 노력한 품위가 모두 손상된다. 아무도 없는 곳이라면 담판을 지겠지만 현재로서는 불리한 위치에 처했다. 상대가 짜증나는 인물이라고 해도 후작이었다. 계급이 깡패라고 여기서 말해 봐야 가르딘이 모두 뒤집어써야 한다.

 “그보다 자네! 선택이 탁월했어.”

 “예?”

 “나도 같은 선택을 했으니 말이야.”

 “설마.”

 “맞아.”

  “그럴 수가!”

 저 인간하고 마이어 공작하고 바꿨으면 하는 가르딘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바꿔버리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 나았다. 천변만환술로 얼굴을 바꿔 버리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뭘 그렇게 놀라나, 당연한 것 아닌가!”

 “그... 렇죠”

 ‘하긴 저 인간이 약세를 보이는 쪽에 가담할 리 없지.’

 강한 쪽에 붙어야 오랜 산다는 가르딘의 성격과 똑같은 바자바인 후작이었다. 시세에 능하며 염치라고는 쥐똥만큼도 없는 인간이었다.

 가르딘은 바자바인 후작과 같이 있는 게 무척이나 껄끄러웠다.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은 되지만 쉽게 받아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상대 역시도 가르딘의 말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유사인종은 상대하기 힘들다. 때마침 황제의 등장을 알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 대륙의 영원한 제황이신 황제 폐하 납시오!

 드디어 전공 수여식의 피날레가 다가왔다.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 전공 수여식의 주인공은 전공을 세운 사람이 아니라 황제였던 것이다. 황제의 행차는 장대한 물결을 일으켰다. 좌우로 갈라지는 거대한 대로에 황금으로 치장한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태양빛에 빛나는 거대한 황금마차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제국민들 모두 황제의 등장에 무릎을 꿇었다.

 단상의 일정 거리 내에 도착한 코스트너 황제가 천천히 마차 밖으로 나왔다. 피곤에 지친 황제의 모습과는 달랐다. 나이가 들었지만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뿜어내었다.

 귀족들 또한 황제의 등장에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황제의 뒤로 황후와, 황자들, 그리고 공주가 따르고 있었다. 황제가 가장 맨 위의 상석에 앉아 식을 진행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바이멘 후작이 오늘 있을 진행 절차를 간단히 설명했다. 마법확성기를 틀어 놓았기에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었다. 역시나 이전의 전공 수여식과 별반 차이는 없다. 스케일이 전보다 커졌다는 것이 틀릴 뿐이다.

 가르딘은 묵묵히 진행절차를 듣다가 곁눈질로 아이시런 공주를 보았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성숙미를 발산하고 있었다. 다만, 얼굴이 많이 수척해 보였다. 아이시런 공주에게 지니언 황자는 같은 어머니를 둔 오빠였다. 지니언 황자의 죽음에 충격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가르딘이 딱히 위로해 줄 처지는 아니었다. 제국의 공주를 결혼한 중년남이 위로한다는 것 자체도 웃긴 일이었다.

 전공 수여식에서 제일 전공은 러쉬 황자가 되었다. 참모격으로 출전했다고는 하지만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러쉬 황자의 전공 수여식이 이루어지고 난 후, 바로 이어서 다마트 황자의 전공도 수여 되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너희들이 자랑스럽구나!”

 “모든 귀족과 기사, 병사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입니다.”

 전공을 수여하면서도 코스트너 황제는 복잡한 심경의 눈빛을 보냈다. 눈앞에 보이는 러쉬 황자와 다마트 황자 둘 모두 모자랄 것 없이 잘해주었다. 하지만 여기에 지니언 황자가 없었다. 지니언만 죽지 않았다면 코스트너 황제는 서슴없이 러쉬 황자를 황태자로 내세워 제국의 내정을 안정시켰을 것이다.

 황제는 복잡한 심경을 추스르고, 다음 전공 수여식을 진행했다. 지금부터 이어지는 전공 수여식이 진짜라고 할 수 있다. 공작들의 경우, 실제적으로 전술을 수립하고 진행시킨 인물들이다. 그들이 있어 카이로만 제국이 코카 제국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 제일 전공.

 파스트론 공작

 발리스타 공작.

 - 제이 전공

 네벨리언 공작.

 마이어 공작

 타이가라 공작.

 제국의 5대 마스터가 모두 최상위에 올라가 있다. 황제는 이들에게 막대한 황금과 영토를 수여하였다. 점령한 영토의 대부분을 이들이 나눠 가지는 형국이었다. 그렇다고 5대 공작이 모두 독식한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귀족이 5대 공작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공작은 받은 영토를 또다시 하위귀족들에게 분배하게 되어 있다. 제국의 전공 수여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 받게 되어 있다. 따라서 각 공작이 받은 영토의 중요성과 넓이에 따라 성과가 나뉘게 되어 있었다.

 5대 공작의 전공은 뚜렷한 성과를 내었기에 어떤 반발도 없었다. 물론 여기까지 오기 전에 전공 수여에 대한 회의는 이루어졌었다. 황제와 바이멘 후작이 객관적 정보를 토대로 전공을 인정하였다.

 “제국을 수호하고, 대륙을 제패한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 하노라!”

 “황제 폐하의 은혜에 보답할 따름입니다!”

 “와아아아아아!”

 제국민들의 떠나갈 듯한 함성이 카이로만 광장 안을 시끄럽게 울렸다. 5대 공작의 명성은 제국민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전공 수여식이 있었다. 5대 공작 다음으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나왔다.

 - 제삼 전공

 코워드 후작.

 ‘응?’

 반응이 모두 시큰둥하다. 제국민들 모두 코워드 후작을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후작쯤 되면 웬만한 사람들은 이름쯤 들어봤겠지만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환호성을 내지르던 광장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단상 위로 올라서는 코워드 후작이 민감할 지경이었다.

  가르딘은 뒤에 서서 코워드 후작의 존재감을 비웃어 주었다.

 ‘참 인기 없다.’

 어떻게 살아 왔기에 후작이나 되어서 이름조차 알리지 못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바이멘 후작이 그의 전공을 읽어나갔다.

 핵토르 왕국 공격을 방어하고, 침략한 왕국에 응징을 가했다는 것과, 마지막으로 사이너스 국왕을 죽인 전공을 크게 인정한다는 설명이었다.

 “제국의 후작으로서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제국의 위엄을 빛낸 그대에게 공작의 자리와 영토를 수여하노라!”

 “황제 폐하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코워드 후작은 횡재했다고 볼 수 있었다. 공작의 자리를 받음과 동시에 핵토르 왕국의 노른자위 땅을 하사받았다. 모든 귀족들이 그제야 코워드 후작이 제법 큰 전공을 세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르딘은 마지못해 박수를 쳐주었다. 전공을 떠넘겨주기는 했지만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저따위 놈이 공작이 됐으니 앞날이 훤했다.

 ‘얼마나 가나 보자.’

 비린스 자작과 버루거 자작은 손바닥이 닮도록 박수를 쳤다. 공작이 되었으니 떨어질 것이 많다고 본 것이다.

 - 제사 전공

 스필언 자작

 미토스 자작

 가르딘 백작

 제국의 떠오르는 신성 마스터(?)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연령대가 한 명 끼어 있기는 하지만 알려지기로는 신성으로 알려졌다. 가르딘도 마스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신성으로 인식되었다.

 “와아아아아아! 스필언 님! 미토스 님! 사랑해요!”

 함성이 컸다. 그에 반해 유난히 여인들의 함성이 커서 남성들의 소리가 파묻혔다. 스필언과 미토스에 대한 추종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꽃미남에 능력 있고, 배경 좋은 스필언과 미토스였다. 그들을 향한 여인들의 대부분은 넋을 잃고 있었다. 가르딘만 홀로 소외되고 있었다.

 ‘괜찮아! 난 라이나가 있으니까!’

 마음속에 한 명의 여인만 응원하면 되었다. 다른 여인의 응원 따위는 애당초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가르딘은 아무렇지 않았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가르딘의 의연한 모습에 감탄했다. 불쾌한 감정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스필언과 미토스는 오러 마스터이며, 큰 전공을 세웠기에 백작의 작위와 영토를 받았다. 가르딘은 그들이 백작 위에 오른 것보다 영토를 받았다는 것에 안심했다. 영토를 받았으면 영주가 되었다는 소리다. 가르딘의 영지에 올 이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제 오지 마라! 피곤한 것들아!’

 가르딘이 전공을 수여받을 차례였다. 가르딘은 제국의 영토를 수호하고, 핵토르 왕국을 도발을 막아내어, 제국전쟁에 기여했다는 것이었다. 가르딘에 대한 작위가 후작으로 상승했다. 그에 반해 영토를 받지는 않았다. 마지막까지 전투를 지휘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이다. 그에 따라 황금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가르딘이 생각하기에도 이 정도면 만족스러웠다. 영토를 받아도 다스릴 여유가 되지 못했다. 지금도 허리가 휠 지경이다.

 가르딘이 영토를 받지 못한 것은 모두 세 공작이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이제 백작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에게 후작위만 해도 엄청난 작위 상승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귀족들도 반대를 했었던 상황이었다. 영토는 힘을 상징한다. 가르딘의 힘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견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와아아아!”

 가르딘에 대한 함성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가르딘이 수여 전에 받은 인물들이 워낙 출중해서 그들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지만 소외되고, 외로운 자들에게는 빛이 되는 가르딘이었다. 가르딘과 같이 별 볼일 없는 자도 잘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전공 수여식은 계속되었다.

 10여 차례의 전공 수여식이 진행이 되고 난 후, 연회가 마련되었다. 귀족사회에서 행사 이후 연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르딘도 황궁에서 마련한 연회에 참석하계 되었다. 피닉스기사단 시절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연회에 참석한 가르딘이다. 모든 것이 화려하고, 웅장했다. 연회에 들어가는 비용만 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일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가르딘의 입장에서 모두 돈 낭비로 보였다. 쓸데없이 먹지도 않으면서 차려 놓은 음식들과, 실용성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장식품들. 귀족들의 사치는 하루 이틀 겪어본 것이 아니지만 감당이 되지 않았다.

 가르딘은 소외된 자들의 우상답게 필리언과 함께 한쪽 구석에 조용히 자리했다.

 가볍게 특급 와인 한잔을 마시며, 묵언수행했다. 겉으로는 말을 안 하는 것 같지만 필리언과 가르딘은 전음으로 무수히 많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쥐새끼가 공작이 됐잖아.]

 [아까 보니 좋아 죽으려고 하던데.]

 [세상이 말세지.]

 [야! 그 말세가 온다.]

 쥐새끼도 지 말하면 온다더니 구석에 처박혀 있는 가르딘에게 코워드 후작과 그를 따르는 똘마니들이 찾아왔다.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코워드 후작이었다. 옷은 어찌나 많은 치장을 했는지, 걸어 다니는 것이 거북해 보일 지경이다.

 “공작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후작이 된 자네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네 선택이 틀리지 않았나.”

 “무슨 말씀이신지.”

 “한 배를 탔으면 했는데, 안타깝군.”

 뜻을 간파하지 못했던 가르딘이 그제야 코워드 후작의 말을 이해했다. 아무래도 코워드 후작은 다마트 황자 진영에 손을 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타이가라 공작께서 나의 능력을 제대로 보신 거지.”

 “그... 렇습니까.”

 타이가라 공작의 말에 홀딱 넘어간 모양이다. 코워드 공작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 몰랐다. 러쉬 황자 진영의 귀족들은 모두 정통파 귀족들이다. 그에 반해 다마트 황자 진영의 귀족들은 반골의 기질이 강하거나 변방의 귀족들이 많았다. 코워드 후작의 경우 황도에 아는 귀족도 없을뿐더러, 능력도 검증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현재 가지고 있는 능력을 가지고서는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타이가라 공작의 감언이설에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다.

 “그럼 나중에 또 보세.”

 “그러지요.”

 다마트 황자에게 손을 들어준 이상 나중에 적이 될 확률이 높았다. 어찌 보면 차라리 잘된 것일 수 있었다. 저런 무능한 놈이 자신을 지휘한다고 생각해 보라, 무척이나 곤란할 것이다. 할 수 있으면 바자바인 후작까지 덤으로 넘기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잘됐다.]

 [그럴지도 모르지.]

 [저놈이 지휘하면 승리는 거저먹을 텐데.]

 필리언도 가르딘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괜히 같은 편이 되면 피곤한 놈이었다. 전공에 대한 욕심은 많아서 자기 맘대로 할 것이 분명했다.

 가르딘은 조용히 마시고 갔으면 했다. 주변 귀족들과 어울리기에는 거부감이 많았다. 그렇다고 매몰차게 대하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말을 하면 언제나 친절하게 상담해 주었다. 거절하지 않고 무난하게 넘어가는 것도 재주라고 할 수 있었다.

 ‘야! 저쪽 봐라!’

 ‘대단한데.’

 ‘이쪽도 아주 죽네, 죽어!’

 스필언과 미토스에게 시집 안 간 귀족의 영애들이 모두 달라붙어 있었다. 당연한 이치였다. 그 옆으로 소외된 녀석들이 질투의 시선을 보내다가 포기한다. 상대도 상대 나름이었다. 오러 마스터에 백작이 되었고, 최고 공작이라는 배경이 있다. 어떤 놈이 계속 질투할 수 있단 말인가! 미토스와 스필언의 여인독식을 막을 자가 아무도 없었다. 정작 당사자들인 스필언과 미토스는 별달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무뚝뚝하게 대답을 해줄 뿐이다. 그것이 더 못마땅한 사내들이다. 가진 자의 여유랄까! 못 가진 자의 절박한 심정을 전혀 고려해 주지 않았다. 한 명이라고 건지려고 있는 노력, 없는 노력 다 하는 저 처절한 궁상들을 보라! 얼마나 인간적인가! 그에 반해 스필언과 미토스는 인간미가 떨어진다. 원래 보통 사람은 10개를 가르치면 2개 정도 기억하면 제대로 배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놈들은 10개를 가르치면 30개를 아는 놈들이다. 이게 인간인가! 더군다나 자신을 철두철미하게 단련하는 놈들이다. 방심은 생각지도 않는다. 평범하게 노력하는 자들을 위해 약간의 방심도 가져주는 것이 미덕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단장님 오신다.’

 ‘그러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 가르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가르딘은 필리언에게 오러를 숨기도록 지시했었다. 괜히 실력을 들키면 귀찮은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군. 자네의 활약을 들었네.”

 “감사합니다.”

 “내 아들이 자네 칭찬을 하던데 듣던 대로구먼.”

 “과찬입니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 자리하니 자연스럽게 시선이 쏠린다. 더군다나 가르딘도 이제 조금씩 인지도를 쌓아 가고 있는 중이라, 세 명이 모이니 엄숙한 분위기가 잡혔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은 가르딘을 유심히 살폈다. 무엇을 가지고 있기에 아들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또한 이번 전쟁에서 핵토르 왕국을 어떻게 해서 막아냈는지도 궁금했다.

 가르딘은 눈총을 받으며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이런 자리가 어려운 이유는 말 한마디 잘못하면 꼬투리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조심해서 행동해야 나중에 탈이 없다. 가르딘은 두루뭉술하지도 그렇다고 세세하지도 않게 적당히 말을 해 나갔다.

 “핵토르 왕국을 막아내다니 자네를 다시 봤네.”

 “코워드 공작이 원군을 제때에 보내줘서 무리 없이 끝을 낼 수 있었습니다.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가르딘은 되도록 자신을 줄이면서,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만을 전했다.

 “그래도 애초에 도발을 막아낸 것은 자네가 아닌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겸손하게 보이는 가르딘이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은 마음에 들었다. 주변의 귀족들은 자신의 공적을 크게 부풀리려고 하는데, 가르딘은 달랐다. 객관적으로 보여준 사실만을 내세우고 있었다.

 “자네가 함께해 주어서 기쁘게 생각하네.”

 “두 분과 함께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끝까지 영광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두 공작과 담화가 거의 끝나 가는 시기에 누군가 쏘아보는 것이 느껴진 가르딘이었다. 멀찍이서 타이가라 공작과 네벨리언 공작이 가르딘을 노려보고 있었다. 발리스타 공작, 파스트론 공작과 함께 있는 가르딘이 못마땅해 보인 것이다.

 ‘그러다 뒤통수 뚫어지겠다.’

  가르딘의 감각은 예민하다. 연회장 안에 있는 대부분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었다. 솔직히 가르딘은 짜증이 났다. 자신들이 한 일은 생각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적의를 보이다니 무척이나 화가 난다. 생각 같아서도 모조리 다 쥐어 패고 싶지만 생각일 뿐이었다.

 [이제 만날 사람은 다 본 건가.]

 [아직이야.]

 [누가 남았는데.]

 [부단장하고 같이 오는 사람이 있잖아.]

 아니나 다를까 바자바인 후작이 누군가를 데리고 가르딘에게 오고 있었다. 가르딘이 상당히 껄끄러워 하는 인간들이었다.

 수척해진 모습이 사내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가는 길마다 사내들이 넋을 잃는다. 촉촉해진 눈망울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사내의 애간장을 모두 태워버릴 수 있는 마력을 지녔다.

 “역시나 구석에 처박혀 있었군요.”

 아이시런 공주가 가르딘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연회장의 가장 어두운 사각, 남들에게 잘 띄지 않는 지역을 거점으로 연회상에 차려진 음식을 맛보고 있었던 가르딘이다.

 “자네가 그럴 줄 알았지.”

 바자바인 후작이 한술 더 떠 아이시런 공주의 말에 호응했다. 말을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명색이 후작이 됐는 데, 구석에 처박혀 있다니 사실이라고 해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한마디 하려던 가르딘이 멈추었다. 가르딘은 공주의 모습에서 슬픔을 느꼈다. 웃어 보려고 한 말인 것 같았다.

 ‘참고 있군.’

 공주가 먼저 울 수도 없는 일이다. 누군가에 기대어 맘껏 울지 못하는 공주의 비애였다. 황제와 황후 모두 가장 슬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슬픈 모습을 더 보여주기는 싫었다.

 “잠시 창가에서 바람 좀 쐴까요.”

 가르딘이 아이시런 공주에게 제안을 했다. 뜻밖의 제안에 아이시런 공주가 새치름한 표정이 되었다. 사내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모습이지만 가르딘의 표정은 능글맞은 모습 그대로였다.

 “가르딘 경은 여전하네요.”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면 죽는다는데요.”

 “부인을 놔두고 먼저 죽을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요!”

 “당연하지요.”

 절로 미소가 나온다. 아이시런 공주는 근래에 웃음을 짓지 못했다. 지니언 황자의 죽음이 심적인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가르딘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편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잠깐! 둘이서만 가면 오해받을지 몰라. 내가 따라가 주마.”

  필리언이 따라올 태세였다. 아이시런 공주가 바자바인 후작에게 눈치를 주었다. 눈치가 빠른 바자바인 후작이 바로 나섰다.

 “너는 오랜만에 나와 대화 좀 하자.”

 “부... 단장님! 저는 화장실이 급해서!”

 “나도 급하니! 같이 가지.”

 “큰 겁니다!”

 “나는 더 크네.”

 “막힐지도 모릅니다!”

 나는 역류할지도 모르네!”

 대화를 해도 저런 더러운 대화를 하다니, 만약 저 말이 다른 귀족들의 귀에 들어갔다면 먹고 있던 연회음식을 토해버렸을 것이다.

 가르딘은 공주와 함께 사각을 가로질러 창가 쪽으로 갔다. 창가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또한 불빛이 들어오는 지역이 아닌, 사각지역이기에 약간은 어두웠다. 일반적으로 이런 으쓱한 곳에 데려오는 사람은 의심해 봐야 하지만, 아이시런 공주는 가르딘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내밖에 모른다는 것을 지겹도록 경험해 보았다.

 가르딘과 아이시런 공주는 말없이 창가에서 전경을 바라보았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기가 어색해 보였다. 가르딘은 먼저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재밌는 것을 보여드릴까요.”

 “뭔데요?”

 가르딘은 자신의 몸에 붙은 장식품 몇 개를 빼내었다. 떼어낸 것을 창가의 사각지역을 중심으로 일정한 방위에 놓았다. 그와 동시에 기를 인위적으로 불어넣었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기의 장막이 생겨 이질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내었다.

 “이게 뭐죠?”

 “공간을 잠시 차단하는 방법입니다.”

 “마법인가요.”

 “제가 마법을 알겠습니까. 그저 몇 가지를 책에서 읽어서 방법만 아는 겁니다.”

 아이시런 공주는 가르딘이 별걸 다 안다고 생각했다. 예전부터 쓸데없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밖에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가요.”

 “처음에 자리한 잔상만 남게 됩니다. 물론 마법사들이나 기사들이 작정하고 찾는다면 쉽게 들킬 수 있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네요.”

 연회장에서 마법사들이나 기사가 공주를 찾기 위해 난리 치지는 않을 것이다.

 “울고 싶다면 우십시오. 한 팔 정도는 내어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울 것 같아요.”

  “싫다면 저도 괜찮습니다.”

 라이나 이외의 여인에게 팔을 내주는 것도 무척이나 힘든 결정이었다. 아이시런 공주가 우울해하는 것 같아 속 시원하게 우는 장소를 마련해 주었을 뿐이다. 본인이 싫다는 데 강요하지는 않았다.

 가르딘이 진법을 해체하려고 하자 가슴속으로 아이시런 공주가 파고들었다. 가르딘은 순간적으로 밀치려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고비라는 것을 느낀 가르딘이다. 여기서 밀치면 정말 큰 사고 날지 모른다.

 ‘이거 대출혈인데.’

 팔 정도로 무마하려고 했건만, 가슴을 허락했다. 이것은 순결을 허락한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속으로는 라이나를 떠올리며 미안하다고 연신 소리쳤다. 라이나라면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이시런 공주의 어깨가 들썩였다.

 “어떻게 한 번만 권유할 수 있어요! 적어도 세 번은 권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

 “공주님은 예의를 별로 차리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무튼 이번 한 번 만이에요.”

 ‘뭘 한 번인지?’

 아이시런 공주는 가르딘의 가슴을 발판 삼아 울었다. 누구도 기대어 주지 않는 넓은 품이었다. 황제와 황후조차 스스로의 슬픔과 권위 때문에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시런 공주는 서럽게 울었다. 그러더니.......

 “으아아아앙!”

 “뭐 하는 거예요! 등 좀 토닥거려요.”

 “알... 겠습니다.”

 울면서도 할 말은 다하는 아이시런 공주였다. 진짜 시원하게 운다. 울라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가르딘이었다.

 ‘설마 토하는 것은 아니겠지.’

 심하게 울 경우 사래에 걸려 토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미리 대비를 해 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한참을 실컷 운 아이시런 공주는 답답했던 것이 뚫렸는지 시원해하는 눈치였다. 가르딘이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며 원래의 신색을 회복했다. 여자의 변신은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서비스가 괜찮았어요.”

 “그렇지요.”

 “하지만 설마 내가 아저씨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물론이지요.”

 만약 내 체면에 손상 가는 소문이 돈다면 모두 가르딘 경 탓으로 돌리겠어요.”

  “그런......”

 오늘 울었다는 소리를 다른데 가서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아이시런 공주의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가르딘이 미치지 않고서 그런 소문을 낼 리 없지 않은가! 오늘 있었던 것은 라이나에게도 비밀이었다.

 “그래도 제법 후련하네요!”

 “답답할 때는 우는 게 가장 좋습니다.”

 “다음에도 부탁해요.”

 “다음이라니요?”

 “내가 영지에 놀러 간다고 했잖아요.”

 “이런 혼잡한 시기에 시간이 나겠습니까?”

 “낼 테니 두고 봐요.”

 가르딘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내정이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기에 공주가 외출을 한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웬만하면 황궁에 혼기 찰 때까지 있다가 혼인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올 테면 어디 와봐라! 누가 허락이나 해줄까!’

 가르딘의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다. 제국의 공주에게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누구도 원치 않는다. 더군다나 발키리 영지는 최근까지 전쟁이 있었고, 다크랜드가 인접한 지역이다. 올 가망성은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현재는 문제가 있었다.

 “황도에 남는 시간 동안 놀아줘요. 쉴라가 없으니까 무지하게 심심하더라고요!”

 ‘허억!’

 공주와 신성제국으로 갔던 일들이 오마주처럼 떠오른다. 공주와 있으면 개고생은 각오해야 한다.

 공주와 놀기 싫다. 그렇다고 쉴라가 출관하기를 바랄 수도 없다. 쉴라가 세상에 나온다는 것은 대륙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쉴라야, 미안하지만 너는 그냥 신전에 처박혀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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