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황궁여정@@]
발키리 영지에 드디어 평온이 찾아왔다. 얼마 전까지 벌어 졌던 전쟁으로 인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발키리 영지에 활기가 흐리고 있었다. 영지민들도 부서졌던 건물을 다시 세우고, 일터로 나와서 열심히 일했다.
가르딘은 절반 이상 박살이 난 집을 바라보았다. 별로 큰 집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새로 생긴 집이 고작 1년 만에 박살이 나 버렸으니 착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르딘은 집을 다시 짓기 위해서 파이트너 상단의 지점장인 몬타나를 불렀다. 집을 짓기 위한 재료와 목수를 구하기 위해서는 몬타나가 필요했다.
몬타나는 전쟁 중에 잠시 출장을 갔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돌아와서 영업을 개시했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상당히 공교로운 시간에 출장을 간 것이다.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만 돌아간 비열한 행동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주님이 무사하셔서 무척이나 기뽑니다! 역시 영주님을 보통 사람이 아니십니다!”
“아부는.”
“아부가 아닙니다! 저는 항상 진심만을 말합니다! 제가 언제 거짓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내가 알기로, 자네는 전쟁 중에 영지에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건 순전히 일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남고 싶어 했습니다!”
“뭐 생존에 대한 것은 인간의 본능이니, 상관하지 않겠네.”
죽고 싶어 하는 인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보통 노인 중에 이제 죽어야지라고 하면서도 막상 죽을 때가 되면 죽기 싫어하는 것이 인간이다. 죽음은 인간 본연의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가르딘도 치사하게 그런 걸 가지고 따지고 싶지 않다. 나만 살겠다는 것도 본능이니 말이다.
“집이 부서져서 말인데, 수리하는데 얼마나 걸리지?”
몬타나가 집을 한번 둘러보았다. 부서 져도 너무 많이 부서 졌다. 이것은 수리하는 것보다 다시 짓는 게 더 나았다. 괜히 돈이 더 들어간다. 돈에 민감한 상인의 입장으로서 다시 짓는 것을 강력 추천했다.
“다시 지으라고.”
“그렇습니다. 일단 부서진 것을 고치려면 보통 기술자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똑같은 재료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고 말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지으면 돈이 더 절약될 것입니다.”
가르딘은 돈이 들어간다는 것에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순전히 공돈 나가게 생겼다. 돈이 더 들어간다는 것을 생각하자 핵토르 왕국에 대한 원한이 다시 회귀되었다. 그놈들만 아니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한 만행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 가르딘이었다.
“얼마나 들 것 같나?”
“영주님이 품위를 얼마나 따지시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원래 집이라는 게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 정도로 보는 관점이 있는데, 사실은 그보다는 삶을 투자하는 곳이라고 보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영주님은 이제 카이로만 제국에서 제법 명성을 날리시는 분입니다. 초라한 집을 짓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에 따라 최상급의 집을 짓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얼마?”
가르딘은 최상급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원래 집은 살 만하면 그만이지, 더 이상은 필요 없는 공간이라고 보았다.
그보다는 돈이 더 중요했다. 돈 없으면 구차한 것이 현실이다.
“3만 골드 정도는 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더 받아가려는 몬타나였다. 몬타나의 입장에서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가르딘은 오러 마스터이자 제국의 백작이다. 그에 걸맞은 품위 넘치는 집을 짓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가르딘은 3만 골드라는 말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3만 골드가 뉘 집 오크 이름도 아니고, 집 짓는데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드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이거 사기 치는 것 아냐?’
가르딘은 몬타나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얼굴로 봐서는 절대 사기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가르딘은 돈을 적게 들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3만 골드는 너무 비싸니 5천 골드 정도로 맞춰 보라고 말하려고 했다.
“왜 그렇게 많이 드는 거지?“
“우선은 주요 건물의 배치와 구성에 대한 설계에 들어가는 돈이 많습니다. 설계자에게 의뢰를 해야 하는데, 예술적 가치를 생각하면 절대 비싸다고 볼 수 없습니다.”
“고작 종이 쪼가리에 그린 그림 따위가 돈이 많이 들어간 다는 건가?”
“고작 그림이라니요! 설계도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집을 짓는데 그냥 짓는다는 그런 개념 없는 말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어디 가서 그런 말을 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 영주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감히 영주를 가르치려고 하냐는 식으로 위압감을 주는 가르딘이었다. 계급이 깡패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했다. 아무리 똑똑해도 상대가 상급귀족이면 고개를 수그려야 한다.
몬타나는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는지 설계도 중에서도 정면 배치도와 구상도를 가지고 왔다. 이것은 보여주기 위해서 마련된 것으로 실제와는 조금 차이가 존재했다. 원래 그런 것 아닌가! 그림과 실제가 완벽하게 똑같기 위해서는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든다. 그 돈을 모두 내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이윤을 내기 위한 상단이 쓸데없는 돈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저 보는 사람을 혹하게 만드는 수단일 뿐이다.
몇 장의 예시그림을 가르딘에게 보여준 몬타나였다. 그림은 총 10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처음이 가장 무난하고, 뒤로 갈수록 비싸졌다가 다시 최하 가격의 그림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때마침 라이나가 들어왔다.
라이나는 가르딘이 10장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을 보자 의아해했다. 그림을 취미로 보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여보! 뭐예요!”
“어! 우리 집을 어떻게 지을까 해서 보는 거야!”
“그래요! 그럼 저도 봐도 되나요?”
“물론이지.”
가르딘도 라이나가 보는 것이 나을 것 같기에 먼저 보라고 했다. 집은 역시 여자가 보는 것이 남자가 보는 것보다 나았다. 사내들이야 집을 그저 잠을 자는 공간으로 여기지만 여자는 아니다. 집이야말로 자신이 살아가는 목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혼한 여자가 흔히 자랑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집 자랑이다. 라이나도 좋은 집을 가지고 싶은 평범한 여인이었다.
라이나는 총 10장의 그림을 보다가 중간쯤에 있는 그림이 가장 낫다고 말해 주었다.
“이런 집이면 정말 좋겠네요. 무척 아름다워요!”
“라이나가 좋다면야 나야 좋지.”
몬타나도 기분이 좋은지 화답했다.
“역시 백작 부인께서는 안목이 탁월하십니다. 5번째 그림이야말로 가장 좋은 집입니다.”
라이나가 좋아하니 가르딘도 행복했다. 가르딘에게 라이나의 행복이야말로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었다. 가르딘이 손짓으로 손가락 3개를 들었다. 그러자 몬타나가 손가락 5개를 드는 것이 아닌가!
‘뭐야? 5만 골드라고!’
당연했다.
3만 골드가 보통이었고, 라이나가 고른 것은 최상급이었다. 10장의 그림 중에서 가장 비싼 집을 고른 것이다. 무척이나 만족해하는 라이나를 옆에 두고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가르딘이었다.
“그걸로 하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으실 것입니다.”
“라이나는 먼저 들어가지, 곧바로 따라갈게.”
“알았어요. 무리하지 말고 일해요.”
“나 튼튼하다니까 걱정 말아.”
남편과 아내 간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라이나가 나가고 난 후 가르딘은 몬타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움찔!
“왜... 그러십니까?”
“너무 비싸다. 4만 골드로 하지.”
“안 됩니다. 여기 보여준 그림 중에서 가장 비싼 집입니다. 원 가격만 해도 최소 4만 9천 골드입니다.”
“그런 말을 나보다 믿으라고! 4만 4천.”
“4만 7천! 그 이하는 안 됩니다!”
“4만 5천.”
“아! 정말 너무 하십니다! 저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4만 6천.”
가르딘은 눈빛은 철벽이었다. 몬타나의 사정조는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돈이 걸려 있었다. 한두 푼 하는 가격도 아니고, 너무 비쌌다. 가르딘의 집요하고, 질척거리는 위압감에 몬타나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제가... 졌습니다!”
엄청난 심력을 쏟아 부었는지 몬타나는 무척이나 지쳐 있었다. 가르딘이 라이나를 먼저 나가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가격을 깎기 위해서는 라이나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라이나에게 구차한 가장의 모습은 보여주기 싫었다. 언제나 든든한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가르딘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재료 면에서 질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야매로 해. 괜찮아! 부서지지만 않으면 돼.”
야매로 하건, 정품으로 하건 부서지지만 않으면 된다. 만약 부서지면 그 책임은 모두 몬타나가 물면 된다. 가르딘은 당연히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이다. 상당히 이기적인 가르딘이었다.
“그건 안 됩니다. 저희는 항상 정품만을 추구하는 파이트너 상단입니다. 상단의 기본 규칙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빡빡하긴. 그럼 자네가 알아서 하게.”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영주님의 대단함을 본 계기였습 니다.”
“그런가.”
가르딘이 상인이면 엄청난 성공을 했을 것이라고 단언한 몬타나였다. 가격경쟁과 더불어 영지에서 생산해낸 도기와 리베시 안 찻잎까지 뭐 하나 부족하지 않은 상인이었다.
가르딘은 몬타나가 나가고 난 후에도 별로 기분은 좋지 않았다. 생각지도 않은 돈이 많이 나가게 생겼으니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지출이 너무 큰데.”
전쟁에 소모된 병력 훈련과 병사들의 식량 등, 모든 것이 다 돈이었다. 들어간 돈만 해도 상상초월이다. 역시 전쟁은 기본적으로 경제력이 뒷받침되어 주어야 한다. 돈도 없이 전쟁을 치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물론 대부분의 일은 파멜라가 처리하고 있기에 서류를 읽어 보고 인장만 찍는 것이지만 그것도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평생 서류작성과 같은 일을 해보지 않은 가르딘으로서는 고역 중에 고역이었다.
“뭐 없나?”
돈 나올 곳을 찾아보았다.
마땅히 더 나올 곳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추가적인 사항을 줄이고, 나머지는 적자긴축재정으로 들어가야 할 것으로 보였다.
때마침 필리언이 들어 왔다. 돈 생각에 짱구를 굴리고 있는 가르딘은 괜히 들어온 필리언도 못마땅했다. 돈이 줄어드니 짜증만 커진다. 사내의 인심은 돈에서 나온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뭐냐?”
“친구가 왔는데, 그런 표정이라니 실례다.”
“넌 살아 있는 게 민폐다.”
“그것보다 이것 좀 해결해 줘라.”
필리언이 내어 준 것은 기사갑옷의 수리에 대한 비용이었다. 기사갑옷은 일반적인 병사들의 갑옷 가격과는 차이가 엄청나다. 한 벌의 가격이 보통 갑옷의 10배 이상, 많으면 30배 이상까지 간다. 갑옷뿐만 아니라, 손상된 검과 방패 등의 비용까지 적혀 있었다.
“너무 비싼데, 그리고 왜 이렇게 망가진 거야!”
“그건 네 탓이지.”
“왜 내 탓인데.”
“네가 부수라고 했잖아.”
‘음!’
“그렇구나.”
코워드 후작에게 지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갑옷을 부수라고 한 가르딘이었다.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한재로서는 비용부담으로 다가왔다 .
“젠장! 되는 일이 없네.”
“너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당시에는 너도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했잖아.”
“뭐, 내 일도 아니니, 어서 인장이나 찍어줘라.”
기사들에게 돈 주는 일은 영주가 알아서 하는 일이다. 요 번에는 월급까지 주어야 하는 날짜가 다가왔다. 이중삼중으로 돈에 대한 무게가 늘어나는 가르딘이었다. 필리언의 말이 오늘처럼 얄밉기도 근래에 들어 처음이었다.
“우리도 이제 오러 마스터니! 월급 좀 올려 주라.”
“뭐?”
“왜 틀린 말도 아니잖아. 오러 마스터 월급이 이게 뭐냐! 쪽팔리게! 우리도 품위 유지할 권리는 있다고.”
“너희들! 그냥 딴 데로 가라!”
“싫다. 데려왔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무책임한 놈아!”
“다음에 올려주마.”
“얼마나 올려줄지 기대하마.”
필리언이 계속 짜증나게 하는데, 덤으로 한 가지 더 짜증나게 하는 일이 있었다. 별로 보고 싶지도 않은 인물이 영지 내에 머물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왜 여기에 머물며 식량을 축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쥐새끼는 왜 안 가고 여기 있는 거냐?”
“널 감시한다나.”
“그놈의 전공이 뭔지, 내가 수작 부릴 것 같아서 감시하는 건가.”
“쥐새끼라서 그런지 속이 무척이나 좁아 보인다.”
가르딘이 말하는 인물은 코워드 후작이었다. 제국군은 대부분 돌아간 상태이지만 코워드 후작은 발키리 영지에 남아서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전공에 대한 확실한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 남아 있는 것이다. 핵토르 왕국을 감시하고, 발키리 영지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말을 잘도 갔다 붙이기는 했다. 결국은 가르딘이 공적을 가로채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까짓 전공 다 처먹고, 떨어졌으면 좋겠다.”
“먹고 떨어질 수준이면, 대군을 그따위로 몰살시키지는 않지.”
“떨어진 빵도 주워 먹지 못하는 놈이 의심은 많아 가지고.”
가뜩이나 짜증나는 가르딘의 말투는 상당히 거칠어져 있었다. 세상사 돌아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요즘에 더 힘들다. 황궁에서 벌어지는 일도 신경 써야 하지, 영지 내에 벌어지는 일도 준비를 해야 했다. 하나씩 천천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많은 것들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머리가 과부화가 되어 쥐가 나고 있었다.
똑! 똑!
“들어와.”
“영주님! 황궁에서 소식이 왔어요.”
파멜라가 들어와서 황궁에서 온 연락을 전했다.
오우거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고민하고 있을 때 연락이 온 모양이다. 황궁에서 연락이 올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제국전쟁이 끝났는데도 한참 있다가 연락 온 것이 더 이상할 따름이었다.
“전공 수여라고.”
“영주님의 이름도 거론이 되었으니, 빨리 황궁에 가야 할 것 같아요.”
“가기 싫은데.”
처리해야 할 일도 많고, 라이나와 헤어지기도 싫었다. 괜히 황궁에 가봤자 또다시 피곤한 머리싸움을 해야 한다. 라이나, 영지, 황궁, 걱정거리가 계속 쌓이고 있었다.
“안 가면 안 되겠지.”
“황제 폐하께서 직접 수여하는 전공 수여에 안 가면 어떡해요.”
“황제든, 신이든 가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야.”
다른 귀족들이 들었다면 미치고 팔짝 뛸 일을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는 가르딘이었다. 또한 그러한 말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파멜라와 필리언이었다. 점점 가르딘화되어 가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지고 싶어 하는 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이 철저히 무너지고 있었다. 여기에 계속 있으면 보통 사람도 다 가르딘처럼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가르딘이 필리언을 보고 말했다.
“네가 황궁에 갔다 와라!”
“미쳤냐!”
“그냥 대타로 왔다고 하고, 전공 받고 빨리 오면 안 되겠지.”
“물론.”
대리출석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대리수여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황제가 직접 수여하는 전공 수여식에 귀찮다고 다른 사람을 참석시키면, 과연 황제가 어떤 말을 할까! ‘그래!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맘 좋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가 가도 의심받지 않는 수가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라.”
“알려줄까. 잘 봐라!”
가르딘이 천룡무상진기를 이용하여 얼굴에 기를 집어넣었다. 그러더니 얼굴이 점차 누군가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신마의 무공잡기술 중에 하나인 천변만환술이었다. 신마는 무공뿐만 아니라 잡기에도 능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천재에게 잡기술은 눈으로 한 번 보면 배움이 가능했다. 신마가 천변만환술을 배우게 된 계기는 어느 날 공공신투 공효가 자신의 물건을 훔치다 걸렸을 때였다. 당시에 신마는 공공신투의 거적때기를 모두 털어 버렸다. 별로 쓸모는 없지만 하나의 책이 흘러나왔었다. 그 책의 이름이 천변술이었다. 책의 이름보다 첫 장을 넘겼을 때 볼 수 있는 글이 마음에 들었다.
- 어떤 여인도 꼬일 수 있다! 천상의 귀공자로 변했는데, 지가 안 넘어오고 배길 수 있겠는가!
신마는 당시에 ‘명언이다!’ 라고 생각했다. 한 번에 와 닿는 시원스러운 글이 아닐 수 없었다. 신마는 천변술을 읽으면서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내공을 조율하여 얼굴과 신체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기의 세밀한 쓰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정교하게 변할수록 기의 세밀함이 중요하다. 그로 인해 신마는 무적의 신공인 천룡무상신공을 탄생시키는 단초를 얻을 수 있었다. 별것 아닌 일이 일생일대의 기회가 된 것이다.
가르딘이 변신하자 파멜라와 필리언 모두 놀라고 말았다.
가르딘이 변신한 사람은 주먹을 부르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때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럴 수가!”
“쥐새끼!”
변신한 것은 코워드 후작이었다.
“어때, 이렇게 변신해서 가면 네가 가도 되잖아.”
가르딘의 천변만환술은 상대방의 얼굴도 일정시간 가량 변신시킬 수 있었다. 진기를 집어넣어 억지로 변하는 것이라 3개월 이상은 불가능하지만 그 정도면 황궁에 갔다 오고도 남았다.
“내가 직접 기를 집어넣어 네 얼굴을 내 얼굴로 바꿔주마.”
필리언이 표정이 핼쑥해졌다. 필리언은 가르딘보다 잘생겼다. 또한 남의 얼굴이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만약 가르딘의 얼굴이 되면, 황궁까지 가야 한다. 괜히 그 먼 거리까지 가서 고생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싫다.”
“영주가 시키는데 해라!”
“만약 그렇게 되면 황궁 가서 깽판 친다!”
“음, 역시 너를 믿을 수가 없군.”
“나도 나를 믿지 못하는데 당연하지.”
“알았다. 포기하마.”
“잘 생각했다. 그보다 그것 마법이냐!”
“아니.”
“그럼 어떻게 변한 거야?”
“오러룰 사용한 기술이지.”
“가르쳐 주라.”
“배울래, 그러면 지금까지 네가 배운 오러를 모두 포기하고 다시 수련해야 되는데, 그래도 배우겠다면 내가 생각해 보지.”
“아니, 난 됐다.”
간신히 오러 마스터가 됐는데, 지금까지 배운 오러를 포기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안 배우는 것이 나았다. 사실 가르딘의 말이 틀리다고 할 수 없다. 천변만환술은 천룡무상진기를 이용하여 변하는 것이다. 천룡무상신공을 익히지 않는 이상 사용하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필리언도 변신해서 여자 좀 꼬여볼까 해서 물어본 것이지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다. 지금도 인기 있는 외모를 가졌는데, 굳이 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파멜라는 전공 수여라는 것보다는 한 가지가 마음에 더 안 들었다. 전공 수여를 할 때는 전공의 성과에 따라 순위를 매기게 되어 있다. 그런데 가르딘이 코워드 후작보다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쥐새끼처럼 생긴 놈이 한 것도 없이 전공만 처먹는다고 보았다.
“그 쥐새끼가 더 커지는 게 마음에 안 들어요.”
파멜라도 코워드 후작을 쥐새끼라고 부르고 있었다. 가르딘을 비롯한 기사들 대부분이 쥐새끼라고 부르니, 자신도 모르게 쥐새끼가 입에 달라붙어 버렸다. 코워드 후작이 하는 짓도 쥐새끼 같아서 그런지 너무 잘 어울렸다.
“아니, 아주 잘됐다.”
“그래도 아쉽지 않아요.”
“내가 아쉬웠으면 쥐새끼한데 기회를 줬겠냐?”
“그렇기는 하네요.”
전공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면, 핵토르 왕국을 코워드 후작이 오기 전에 전멸시켜 버렸을 것이다.
코워드 후작이 앞에서 혼자 지랄을 하는 바람에 가르딘의 공적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코워드 후작이라는 인간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가르딘을 가리는 장막으로 사용할 도구로써는 잘 움직이고 있었다.
가르딘은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가장 서운한 것이 있었다.
“라이나와 또 헤어져야 하다니!”
필리언은 가르딘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어떻게 부인은 저토록 사랑할 수 있는지 의심이 든다. 사내라면 당연히 새로운 여인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이미 자신의 영역에 있는 먹이에 대해서는 절대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게 사내의 본성이다. 이것은 병이다. 같은 남자로서 깨우침을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다.
“너, 언제까지 이럴래.”
“뭐가?”
“너 그거 병이야! 팔불출도 정도가 있지!”
“뭐라고! 아내를 사랑하는 게 왜 병이야!”
“일단 사내라면 응당 수백 명의 여인을 만나고 사랑을 베풀어주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 불쌍한 여인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깨우침을 주게 되지. 너는 한곳에 너무 얽매여 있는 거다.”
“지랄하고 있네.”
“어허! 영주가 되어 가지고 말본새 하고는.”
“파멜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저는 영주님과 같은 생각이에요! 책임도 지지 않는 사내들의 무책임한 행동이 얼마나 많은 여인들에게 고통을 주는 지 필리언 경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무슨 소리! 사랑도 경험하지 못한 여인이 어떻게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냐! 사랑을 모르는 여인에게 내 스스로 온갖 위험을 감수하며 사랑을 전수하는 건데.”
서로 관념 차이였다.
여인들과 즐겁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필리언이었다. 그러니 가르딘과 파멜라의 관념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다. 가르딘과 파멜라도 마찬가지였다. 여인의 입장에서 사내의 바람기는 잡아야 하지만 잡기 쉽지 않다. 무엇을 해도 이 사회는 여인에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가르딘은 한 여인을 만나 지금까지 행복했기에 결혼 전의 생활을 후회하고 있는 처지였다.
“장난은 그만 하고, 어차피 필리언은 나와 같이 가야 돼.”
필리언은 자신이 왜 가냐는 듯한 질문을 피력했다.
“내가 가는데 너는 안 가냐?”
“아! 그렇지.”
영주가 가는데, 호위조차 없이 가는 경우는 없었다. 기사 단장이 영주의 호위를 위해 같이 가는 것은 기본관례였다.
가르딘은 필리언이 함께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되도록 사정을 숨겨야 한다고 보았다. 황궁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필리언이 오러 마스터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권력구도가 심각하게 뒤틀린다. 가뜩이나 가르딘은 오러 마스터가 되어서 상대 세력의 견제 대상순위에 올라 있다. 이런 시기에 오러 마스터를 한 명 더 보유하고 있다면 요주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오러를 숨기는 방법을 알려주지.”
“그게 무슨 소리야?”
“오러 마스터가 되어도, 상급의 마스터에게는 오러의 변화가 감지되기 마련이야. 네가 황궁에 가서 오러 마스터라는 것을 들키게 될 경우 상황만 심각하게 변하게 돼.”
“그렇겠지.”
“지금부터 오러를 갈무리히는 방법을 배워서, 되도록 기운을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연습을 해야 해, 이건 유타나 갈라 역시 마찬가지야.”
가르딘은 오러에 대한 세밀한 설명을 해주었다. 파멜라는 들어도 모르는 내용이기에 남은 서류를 작성하려고, 먼저 방을 나갔다.
가르딘이 가르쳐 주는 것은 오러의 운용이었다. 오러는 단순하게 강함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전자의 의념에 따라 무궁한 쓰임새가 가능하다. 이제 동기들도 오러 마스터가 되었으니 오러의 운용을 이전보다는 쉽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오러를 완벽하게 숨길 수도 있겠네!”
“몸 안의 오러를 활성화시키는 것에서 시작해서 숨기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야! 무리해서 완벽하게 통제를 하게 되면 오히려 상대방은 의심하게 되지. 익스퍼트 상급의 기사가 오러의 기운이 없다면 누가 믿겠냐?”
“그렇겠지.”
“하지만 상대방의 실력이 오러 마스터의 범주를 벗어나려고 한다면 아무리 숨겨도 알아차릴 수도 있어.”
“오러 마스터의 범주를 벗어난다는 것은 그랜드 마스터라는 소린데, 그런 놈이 있을 리 없잖아!”
‘눈앞에 있다! 이놈아! 다 보인다! 네놈의 실력이!’
가르딘은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참았다. 언젠가는 알려질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필리언은 가르딘이 너무 많이 아는 것 같았다. 오러 마스터가 되면 자연스레 알 수 있는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너는 참 아는 것도 많다. 어떻게 이런 것을 다 아는 거냐?”
가르딘은 속으로 흠칫했지만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해버렸다. 필리언과 동기들이 가끔씩 예리한 질문을 하는데, 주저하거나 망설이면 안 된다. 당당하게 말을 하는 것이 직빵이다. 괜히 주저하면 의심의 눈초리만 커진다.
“나는 천재니까. 범재 따위가 나를 따라올 수 있을 리 없잖아.”
“미친놈! 역시 싸구려야! 품위가 없어.”
가르딘은 황궁까지 가는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발키리 영지에서 황궁까지 천천히 가면 15일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이 된다. 왕복하면 30일 정도가 소요된다. 가르딘은 최대한 황궁의 전공 수여식에 맞추어서 갈 생각이다. 너무 일찍 도착해도 여러 가지 번잡한 일에 꼬일 수 있었다. 가르딘은 황궁의 복잡한 세력구도 속에 속하고 싶지 않았다.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황궁에서 별일이 없어야 하는데.’
아무런 일도 없이 돌아오기를 바라겠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바라는 대로 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언제 어디서 돌연한 변수가 발생하여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지 모른다.
황궁으로 가기 며칠 전에 라이젠이 찾아왔다. 가르딘은 라이나, 브리안과 함께 황도에 가기 전까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든 업무를 사실상 파멜라에게 넘겨 버렸다. 자신은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 황궁에서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다는 핑계였다. 파멜라도 가르딘의 생활을 알기에 암묵적으로 응해 주었다. 솔직히 아버지가 없는 파멜라는 라이나와 브리안이 부러웠다. 그래서 가르딘의 말을 받아 주었는지 모른다.
가르딘은 갑자기 라이젠이 찾아오든 말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현재 중요한 것은 가족과의 시간이었다. 라이젠의 하찮은 말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남지 않았다. 드래곤이 이토록 하찮게 취급받는 경우도 극히 드물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자네 내가 왜 왔는지 모르는 건가?”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입니까?”
라이젠은 기가 막혔다. 자신이 부탁하고도 잊어버리고 있다니, 이놈의 인간은 머릿속에 뭐가들었는지 궁금하다 못해 해부해 보고 싶었다.
“자네가 나에게 마법사들을 세뇌시키라고 하지 않았는가!”
“아! 그렇지. 그런데요.”
가르딘에게 별달리 중요한 일로 인식되지 않았다. 드래곤이 고작 세뇌를 하지 못해서 쩔쩔매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마법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아주 절실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바쁜 와중에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정신조작마법이 얼마나 위험하고, 손이 많이 가는 마법 인지 알고 하는 소리인가!”
“모릅니다.”
마법에는 관심도 없으니, 알 턱이 없는 가르딘이다. 원래 대화라는 게 상대방이 하는 말을 모르더라도 어느 정도 호응을 해주는 것이 예의였다. 대놓고, 모른다고 말해 버리니 대화 자체가 어렵게 되어 버린 라이젠이었다. 어떻게 된 게 이 놈의 인간과의 대화는 이길 수가 없었다.
“잘 들어보게, 정신조작마법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마법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는 9서클의 마력이 필요한 데다가 사람의 정신은 무수히 많은 혼돈 속에 자리하고 있네, 그 많은 혼돈을 모두 정리하게 다른 인격체로 만드는 것이 세뇌라고 할 수 있지, 따라서 정신조작마법은 고도의 집중력과, 마력의 세밀한 컨트롤이 필요하단 말일세!”
“그래서요.”
가르딘의 표정은 고룡 급에 속하는 드래곤이 그런 일도 못 했냐는 듯한 말투였다. 한 단어 속에 모든 생각이 함축되어 있었다. 라이젠은 말문이 턱 막혔다. 더 이상 말해 봐야 자신만 손해였다. 여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고, 안젤리카 좀 잘 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자마자 듣게 된 것은 무심함이었다.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은 인간에게 자랑하려고 했던 자신이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다.
“못했습니까?”
“했네.”
“그럼 됐네요. 잘 쓸게요.”
꿈틀! 꿈틀!
라이젠의 미간에 형성된 힘줄이 특 튀어나와 요동쳤다.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다. 가르딘의 표정이 압권이었다. 이제 용건 끝났으면 빨리 가보라는 듯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라이 젠이었다.
‘헬 파이어를 입구멍에 처박고 싶다!’
라이젠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성의를 보였으면 응당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이런 무성의한 대접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괴물 같은 능력을 가진 인간만 아니라면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가르딘은 붉으락푸르락하는 라이젠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지금 화났습니까?”
“자네 같으면 안 나는가!”
“왜 화가 납니까? 마법사들을 세뇌시키라고 한 이유는 안젤리카의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르딘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 렇군.”
“설마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겁니까? 물론 저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저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안젤리카의 편안한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서 제가 부탁드린 것이지, 다른 사심은 절대 없습니다.”
“화... 내서 미안하네.”
라이젠은 가르딘이 안젤리카를 이처럼 위하고 있는 줄 몰랐다. 사실 영지에 마법사가 혼자다 보니, 마법적인 모든 일을 안젤리카가 처리한다. 수하들이 있다면 일을 분담할 수 있기에 안젤리카가 하는 일이 줄어든다. 줄어든 시간에 무엇을 하는가! 라이젠과 놀 수 있다. 안젤리카와 오붓한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던 라이젠은 스스로도 조금 짜증이 났던 것이다. 가르딘의 말에 북풍한설 같은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럼 안젤리카에게 마법사들을 넘겨주십시오.”
“그러겠네, 그럼 나는 바빠서 이만 가보겠네.”
라이젠이 돌아가고 난 후 남아 있는 가르딘은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단순하긴.”
사람이나 드래곤이나 당근과 채찍을 주어야 한다. 너무 좋은 것만 주어서는 절대 잘 다스릴 수 없다. 필요할 때 당근과 채찍을 교묘히 섞어 능수능란하게 조율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게 통하자 가르딘은 라이젠의 단순함에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