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5/93)

   @@[제2장 전쟁 종결@@]

 공성전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싸이렌 성을 넘으려는 진영과 필사적으로 막아내려는 진영의 치열한 전투였다. 불화살이 하늘을 뒤덮었다. 싸이렌 성의 성벽은 대단히 견고했다. 곳곳에 마법 결계가 쳐져 있어, 마법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하이카인 황태자가 전쟁에 나와 진두지휘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전쟁을 지켜보던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은 쉽사리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이 답답했다. 상대하는 코카 제국의 황태자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까다롭기로 따지면 무르카인 황제보다 더한 것 같았다. 하이카인 황태자는 무모한 전략을 수립하지 않았다. 단단하게 걸어 잠그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병력의 차이가 현격했다. 카이로만 제국의 물량공세를 버티는 것도 한계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시간을 얼마나 소모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러쉬 1황자의 막사 안에 모여 다시 전략회의를 할 때 황궁에서 연락이 왔다. 2황자의 시신을 가지고 간 네벨리언 공작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의 경우 전선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네벨리언 공작의 움직임을 막아낼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 했다. 더군다나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까지 황궁 일에 참여하게 되면 혼란은 가중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악화 일로를 감수해야 한다.

 “이건 좋지 않아.”

  “아무래도 2황자님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군.”

 러쉬 1황자도 네벨리언 공작의 의중을 파악했다.

 전쟁 중에 벌어진 예상치 못한 사고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진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니언은 황태자위를 놓고 경쟁하는 상대였다. 지니언이 죽었을 때 가장 먼저 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억울하지만 네벨리언 공작의 오해를 푸는 일이 중요하였다. 자칫 제국전쟁보다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은 침중했다.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시기에 2황자가 죽는 바람에 제국전쟁이 어렵게 진행되게 생겼다. 외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내적으로 불완전해서는 절대 전쟁을 이길 수 없다. 안이 평안해야 밖이 완전해진다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네벨리언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는 게 어떨까요?”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네벨리언 공작이 황제 폐하께 뜻을 내비췄다는 것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서 움직이지 않으실까 걱정입니다.”

 “아버지가 설마 저를 의심한단 말씀입니까?’

 코스트너 황제에게 투정 한 번 하지 않았던 러쉬 황자였다. 이제까지 자신이 맡은 일을 수행하면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아 제국의 1황자로서의 위치를 지키려고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 러쉬 황자였다. 하지도 않은 일로 인해 의심을 받다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황제 폐하는 젊은 시절 대륙의 제황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엄청난 위엄과 지략을 가지신 분입니다.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전적으로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다만 폐하의 의중에 의심이라는 마물이 자리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래도 지금부터 황자님은 물론 우리까지 조심해야 할지 모릅니다.

 “발리스타 공작의 말이 맞습니다. 섣불리 움직이다가 황제 폐하에게 의심을 더욱 심어줄 수 있습니다. 황자님과 우리는 전쟁을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마무리 짓도록 노력하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러쉬 황자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속 시원하게 자신의 속생각을 말한다고 해도 세상은 믿어주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황궁 생활이다. 모든 것을 속고 속이는 곳이라,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사실을 말해도 믿지 않는다. 그것조차 간계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니언 황자의 죽음에 누구보다 슬퍼한 사람은 자신이 아닌가! 이것조차 연기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누가 감히 나를 모함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끌고 가는 것인가!

 “사실 지니언 황자님의 가슴에 난 상처는 일반적인 솜씨가 아니었습니다. 무척이나 예리하고 날카로웠습니다. 단순한 암습에 당할 정도로 지니언 황자님의 실력은 낮지 않습니다. 필시 대단히 뛰어난 자의 공격을 받았을 겁니다. 그것도 상당히 은밀하고, 집요한 자일 겁니다.”

 “응?”

 파스트론 공작의 말에 러쉬 황자가 놀라고 말았다. “왜 그 사실을 당시에는 말하지 않은 건가요?”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쟁 중에 죽는 것은 누구나 있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지니언 황자가 암습을 당했다고 한다면 가장 먼저 의심받는 사람은 1황자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전쟁 중에 당한 사고로 생각하기를 바랐습니다. 네벨리언 공작도 처음에는 조용히 있었기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음속에 분노를 감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점점 어려워지네요.”

 마음속에 칼을 가진 자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손 놓고 있지 않을 것이다. 러쉬 황자는 불안했다. 제국의 내정이 흔들려서 분열되지 않을까하는 염려가 들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구보다 황자님을 믿는 사람은 저희들입니다. 저희들이 끝까지 황자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두 분을 믿습니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 지지하는 이상 제국의 황태자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카이로만 제국을 구성 하는 5대 공작 중에서도 가장 많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 공작이 합심한다고 해도 절대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두 공작의 믿음을 보자 러쉬 황자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언젠가 제국의 황제가 되어야 한다. 이 정도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러쉬 황자는 나약한 외모를 가졌지만 마음만은 강했다. 나아가 대륙최강국으로서의 힘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싸이렌 성의 치열함은 여전했다.

 카이로만 제국의 파상공세를 막아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코카 제국으로서는 병력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카이로만 제국은 파상공세를 펼치면서도 병사들의 체력손실을 감안해서 돌아가며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파스트론 공작은 무리하게 공격하는 듯해도 사실은 모든 것을 감안해 두고 있었다. 노련한 공작의 전술운용이었다.

 공격을 받는 하이카인 황태자는 카이로만 제국의 전술을 보며 탄식했다. 쉽지 않은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결국 성이 무너지게 된다. 싸이렌 성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성이 아니었다. 이곳은 양쪽으로 산을 끼고 있어 최적의 요새라는 말이 있다. 싸이렌 성이 무너지게 되면 다음에 있는 베론 성은 있으나 마나한 성이 되어 버린다.

 ‘강하다.’

 왜 코카 제국이 졌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적 병사들의 사기뿐 아니라 그 뒤에서 웅크리고 있는 카이로만 제국의 웅대한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카이로만 제국은 비슷한 상황에서도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움직였다.

 또한 비밀리에 협상을 맺은 핵토르 왕국의 기습을 효율적으로 막아내었다. 전선에 모든 전력이 와 있는 상황에서도 여력을 남겨 두었다는 것이다. 카이로만 제국의 잠재력을 파악하지 못한 무르카인 황제의 완패였다.

 ‘그러나 나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하이카인 황태자는 여기서 무너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제국이 아닌 왕국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남아서 후일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하지 못하면 후대가 할 것이다. 영원불멸한 제국은 없다. 언젠가는 그 힘이 쇠락해 쓰러지기 마련이었다.

  “황태자 전하!”

 “무슨 일인가?”

 훌턴 공작이 하이카인 황태자 옆으로 다가왔다.

 “적국의 2황자가 죽은 것이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잘됐군, 그럼 카이로만 제국의 내정은 어떤가?”

 “네벨리언 공작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러쉬 황자가 속이 타겠군.”

 하이카인 황태자는 지금이 좋은 기회라고 보았다. 하지만 선뜻 항복의 뜻을 내비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아직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난 후 협상을 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이로만 제국의 내정도 불안해질 것이다.

 “최선을 다해 막는다. 시간은 우리도 카이로만 제국도 적이다.”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하이카인 황태자의 판단은 정확했다. 전투가 10일 동안 지속되는 가운데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코카 제국의 저항이 완강했기에 카이로만 제국도 쉽사리 뚫지 못했다. 코카 제국의 힘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투였다.

 러쉬 황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초조함은 냉정함의 적이었다. 판단력을 흐리고, 생각을 분산시킨다. 러쉬 황자는 복잡한 심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마음을 차갑게 식혔다. 최고의 자리에 위치한 러쉬 황자다.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 주지 않는다. 외롭지만 스스로 해결을 해야 했다.

 ‘나는 대카이로만 제국의 황자다!’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전장을 보았다. 그러자 코카 제국의 치열함이 느껴졌다. 그들은 살기 위해 마지막 힘을 뿜어내고 있다. 이대로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단단함을 보여 주었다. 역시 카이로만 제국의 숙명적인 적다운 기세였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도 스스로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 러쉬 황자를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두 공작이었다. 이 정도의 시련은 홀로 극복할 줄 알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순간 황제가 될 자질이 부족하다 할 수 있다.

 전쟁의 치열함과 잔인함이 한창일 때, 싸이렌 성에서 사신이 도착했다. 사신은 다른 누구도 아닌 코카 제국의 재상, 훌턴 공작이었다. 뜻밖의 인물이 사신으로 온 것에 러쉬 황자를 비롯한 파스트론 공작, 발리스타 공작도 놀라워했다. 일국의 재상이 전투 중에 사신으로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코카 제국의 로베리오 훌턴이 러쉬 황자님께 인사 올립니다.”

 훌턴 공작은 정중했으며, 당당했다. 적 진영에 단 두 명의 병사와 온 사람치고는 너무나 담담했다. 그 대담성과, 과감함에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무슨 일인가?”

 “이번 전쟁의 중요한 협상을 제의하기 위해 왔습니다.”

 “협상이라! 다 이긴 전쟁에서 우리가 왜 협상을 해야 하지.”

 러쉬 황자는 사신이 필요 없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 이번 전쟁은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재는 버티고 있지만 조금의 틈만 생겨나면 한꺼번에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코카 제국과의 협상 따위는 원치 않았다.

 ‘제법 노련하군.’

 홀턴 공작은 왜 러쉬 황자가 생각도 해보지 않고 단호하게 대하는지 알았다. 제국의 병사들에게 사기를 진작시키고, 적 제국의 사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를 알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홀턴 공작이 아니었다.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서 귀 제국 2황자 전하의 죽음에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흔들!

 러쉬 황자의 눈빛이 찰나지만 흔들렸다.

 ‘알고 있단 말인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그 사실에 대해서 계속 말했다가는 제국 진영의 오해만 커진다. 역시 코카 제국의 재상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또한 사신을 이곳에서 계속 세워둘 수도 없다. 대제국의 위엄을 보여, 사신의 예우를 해주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었다.

 “이렇게 있을 게 아니군. 우선은 코카 제국의 뜻을 듣겠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러쉬 황자와 두 공작이 뒤를 따랐다.

 훌턴 재상은 냉정함을 유지하며 안내를 받았다. 훌턴 재상 역시도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서슬 퍼런 칼처럼 단단한 두 공작의 모습을 보자 소름이 돋았다. 작은 빈틈이라도 보이는 날에는 칼날이 훌턴 재상의 목을 칠 기세였다.

 ‘저들이 제국의 5대 마스터 중에 두 명인가! 과연 대단하군!’

 직접 이토록 가까이에서 본 적은 지금이 처음인 훌턴 재상이었다. 전해지는 정보보다 더한 위압감을 받았다.

 러쉬 황자의 막사에 들어선 훌턴 재상은 안으로 들어가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결코 비굴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하였다.

 러쉬 황자는 굳은 얼굴을 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구차한 얘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을 해보라.”

 “알겠습니다. 우리 코카 제국의 하이카인 황태자 전하께서는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쯤에서 휴전을 하자는 뜻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휴전이라, 맘대로 먼저 전쟁을 벌이고 이제 와서 상황이 불리하니 휴전하자는 것인가! 그것이 코카 제국의 수법인가!”

 노골적으로 코카 제국의 행태를 비난한 러쉬 황자였다. 하지만 당연한 비난이었다. 전쟁을 벌이고, 패한 국가가 이제 와서 휴전하자고 하는 것도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제국은 아직 힘이 있습니다. 황자님께서도 봐서 알겠지만 백만에 달하는 병력이 견고한 싸이렌 성에 머물고 있는 상태입니다. 결사항전을 원하신다면 끝까지 갈 용의가 있습니다.” 

 “뭐라!”

 잠자코 있던 발리스타 공작이 나섰다. 지금까지 침착하게 듣던 모습과는 다르게 섬뜩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감히 카이로만 제국의 황자님께 협박을 한단 말인가! 우리가 네놈들의 항전 따위를 겁낼 것 같은가!”

 서릿발 같은 기세가 훌턴 공작을 압박했다. 오러 마스터 상급의 기사가 내뿜는 무형의 기운을 받은 훌턴 공작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제국의 재상답게 폴턴 공작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만 하세요! 발리스타 공작!”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놈들의 행태는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상대 공작을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같은 제국의 공작은 동등한 위치를 가진다. 그럼에도 가차 없이 상대했다. 상황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지껄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홀턴 재상은 이를 악물어야 했다. 오늘 받은 수모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참아내야 했다. 주도권을 가진 자는 카이로만 제국이지 코카 제국이 아니었다. 협상에서 이 정도의 수모는 감내해야 했다.

 “휴전을 한다면, 어떤 조건인가? 설마 이대로 여기서 휴전을 하자는 것은 아니겠지. 또한 휴전이라는 용어 자체가 맞지 않는 상황이지 않은가! 이 전쟁은 이미 기울었다. 코카 제국은 더 이상 예전의 힘을 갖추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 자, 이제 말해 보게.”

 과거의 코카 제국이라면 휴전이 될 수 있지만 현재는 항복이나 마찬가지인 휴전이었다. 항복한다는 것은 더 이상 제국이 아니라는 말이 되었다. 러쉬 황자는 상대방이 제국을 포기하면서까지 협상을 제의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라면 할 수 있을까!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을 듣게 된 훌턴 재상이었다. 사실을 냉정히 판단하면 러쉬 황자의 말이 결코 틀리지 않다.

 하이카인 황태자 전하의 전언을 전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코카 제국을 코카 왕국으로 낮추고, 제국의 절반을 무조건 포기하겠다고 했습니다.”

 ‘음!’

 무척이나 파격적이다.

 코카 제국의 사분지 일 정도를 진격한 카이로만 제국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완벽하게 제압했다고 할 수 없다. 싸이렌 성을 뚫고 진격하지 않는 이상 어려운 일이었다.

 “제국을 왕국으로 낮춘다라 좋다! 그럼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은 어디로 할 생각이지.”

 러쉬 황자는 들어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휴전한다고 해도 마음대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결정권은 없었다. 우선은 들어보고, 황궁에 연락해 코스트너 황제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물론 싸이렌 성을 중심으로 한 제국의 황성은 아닙니다. 지도를 보시면, 제국의 북쪽과 남쪽 지역에 해당합니다.”

 코카 제국의 지도를 보면, 발렌타인 성을 중심으로 각을 젠 후 사선으로 그어 버렸다. 긴 나팔 모양으로 제국의 영토를 양보한다는 것이었다. 코카 제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제국의 황성으로 들어가는 싸이렌 성을 양보할 경우,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꼴이 된다. 이럴 경우 마음이 바뀐 카이로만 제국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게 된다.

 “알맹이를 빼고, 넘겼군.”

 “우리 제국......”

 “이젠 왕국이겠지.”

 발리스타 공작의 말에 홀턴 재상은 비통하지만 정정해야 했다. 스스로 왕국이 되기로 했으니 그에 걸맞은 행동을 취해야 했다.

 ‘오늘의 수모는 결코 잊지 않겠다.’

 “우리 왕국으로서는 최대한 양보한 것입니다.”

 “협상의 내용은 알겠다. 황제 폐하에게 코카 왕국의 뜻을 전하지.”

 “감사합니다. 러쉬 황자님!”

 러쉬 황자는 황제 폐하의 뜻을 전할 때까지 훌턴 재상을 이곳에 머물도록 했다. 홀턴 공작이 이곳으로 옴으로써 싸이렌 성은 잠시간의 시간을 더 벌 수 있었다. 전투가 당분간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훌턴 공작이 나가고 난 후, 러쉬 황자는 두 공작의 뜻을 물었다.

 “저들의 의견을 따라야 할까요?”

 “조금만 더 전투를 벌이면 이길 수 있는 전쟁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황제 폐하의 뜻이겠지요.”

 러쉬 황자와 두 공작의 마음 같아서는 코카 제국을 대륙의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처럼 움직여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카 제국의 휴전협상이 바이멘 후작에게 전달이 되었다. 급보 중에 급보였다. 설마 제국이 항복에 가까운 협상을 보내올 줄은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무르카인 황제가 죽었다고 한다. 바이멘 후작은 지체하지 않고, 코스트너 황제에게 코카 제국의 협상안을 알렸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았다. 전투가 치러지고 있는 중요한 순간에 코카 제국에 여유를 주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라 할 수 없었다.

 협상내용을 전하러 간 바이멘 후작은 코스트너 황제의 노안이 더없이 황폐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자식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암투는 기력이 달리는 코스트너 황제에게 심한 압박감을 주었다. 얼굴의 주름이 더 늘었고, 피폐해졌다. 쉬고 싶은 코스트너 황제였지만 그럴 수가 없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세상은 노년의 자신을 너무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파격적이긴 하군.”

 “코카 제국으로서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 겁니다.”

 코카 제국과의 전쟁은 코스트너 황제 이전부터 수도 없이 이어졌다. 결국 누구도 완벽하게 이겼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팽팽했다.

 젊은 시절 코카 제국과 전투를 벌이면서 꽤 많은 성을 함락했다. 그럼에도 만족할 수는 없었다. 과거의 젊은 코스트너 황제였다면 협상을 거절했을지 모른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코카 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왜 놓치고 싶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왕국으로 격하시키고, 절반의 영토를 준다면 괜찮군.”

 “그러나 10년간의 휴전을 대륙에 공표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건 당연하겠지.”

 힘을 키우고, 왕국을 보전하려는 하이카인 황태자의 의중이었다. 휴전이 벌어지고, 모든 것이 체결된 후에 카이로만 제국이 약속을 어기고 계속 전쟁을 벌여 영토를 먹어치우면, 힘을 키우기는커녕 오히려 망할 수 있었다.

 “10년 안에 힘을 키울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게 만들겠습니다.”

 명실상부한 대륙최강국이 되었다. 최강국의 힘으로 코카 제국을 압박할 생각이었다. 물론 전쟁이 아닌 모든 것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직접적으로 협상안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면 안을 먼저 다스려야겠지.”

 내전의 분위기가 마련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코스트너 황제가 비밀리에 조사시켰다. 비밀정보원인 드윈이 가져온 정보를 볼수록 마음이 무거워지는 코스트너 황제였다.

 “협상을 하도록 하게.”

 “뜻을 전하겠습니다. 그럼 핵토르 왕국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국을 배반한 본보기를 보여주어야겠지.”

 핵토르 왕국 따위는 이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제국전쟁이 끝나는 대로 쓸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사이너스 국왕이 죽고, 군사력의 대부분을 잃은 핵토르 왕국이었다. 제국의 정예병 10만만 출병하면 대륙의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었다. “그보다 코우드 후작인가?”

 “코워드 후작입니다.”

 “그런가! 이름이 가물거리는군.”

 “그래도 이번에 큰 공을 세웠으니 이름 정도로 기억해 주시는 것이.......”

 “그렇군. 큰 공을 세웠으니 이름은 기억해 주지.”

 후작이면서도 코스트너 황제의 뇌리에 기억되지 않다니 무척이나 소외된 상급 귀족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이번에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바이멘 후작은 코워드 후작이 사이너스 국왕의 머리를 가져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제국의 후방 귀족 중에 상위 귀족이지만 능력은 부족하다고 판단했었다.

 ‘운이 좋았군.’

 어찌되었건 코워드 후작의 공은 인정해야 했다.

 황궁에서 코워드 후작의 이름 공방 사건이 벌어질 무렵, 트윈유니크 협곡의 전투는 아직도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하는 코워드 후작의 발악이었다.

 빨리 마무리 짓고, 핵토르 왕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맘대로 되지 않아 속이 탔다.

  “카카캉! 으아아악!”

 계곡 위와 아래로 사상자가 불어나고 있다. 다행히 제국군의 피해가 점점 줄어들었다. 오랜 전투로 인해 패전이 짙은 핵토르 왕국은 점점 힘에 부치고 있었다. 지휘를 맞고 있는 멜버른 후작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병력도 얼마 남지 않았다. 1만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7만의 병력을 막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포기는 하지 않았다. 끝까지 가는 것이었다. 병사들도 끝까지 갈려고 마음먹었다. 이제 와서 항복한다는 것은 죽은 병사들에게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쪽을 막아라!”

 뚫리는 곳을 집중적으로 마법사들을 투입했다. 마법사들이 돌아가면서 쉬고 있지만 오래 쉴 수 없었다.

 멜버른 후작이 소리를 질렀다. 병사들과 합심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트윈유니크 협곡 아래에서 지켜보는 코워드 후작은 속이 타 들어가고 있었다.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만큼 했으면 항복하는 것이 현명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더욱 독하게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욕이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다 죽이겠다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지치기는 코워드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답답한 마음에 전투가 벌어지는 앞으로 갔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놀라고 뒤로 물러났었다. 코워드 후작이 형편없는 귀족들을 나무랄 생각으로 나섰는데, 자신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꼴이었다. 한 병사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입가에 짓는 야릿한 표정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다른 병사들도 그런 표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사지를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병사들의 사기가 있으니 가만히 놔두었다.

 ‘나중에 두고 보자.’

 놈의 얼굴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속이 꽁한 코워드 후작이었다.

 지겨운 전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버루거 자작이 코워드 후작에게 다시 한 번 화공전을 해보자고 권유했다.

 “화공전을 다시 해보자고.”

 “그렇습니다. 놈들에게 천운이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번에는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기는 하겠군.”

 비가 오지만 않았어도 화공전으로 쉽게 끝을 냈을 수도 있었다. 그 당시에 비가 온 것이 모두 버루거 자작의 방귀소리 때문이라고 보는 코워드 후작이었다.

 “자네가 방귀만 뀌지 않았으면 이겼을 텐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시끄럽네.”

 버루거 자작이 입을 닫았다. 말을 해봤자 자신만 손해였다. 당시에 방귀 한 번 뀐 게 이토록 큰 앙금으로 남다니 억울할 따름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네가 오줌 싸서 홍수 났다고 말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코워드 후작이나 버루거 자작이나 하는 짓이 비슷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형제로 착각할지 모른다.

 “화공전이나 준비 잘하게.”

 “알... 겠습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자네의 뒷문을 막아주겠네.”

 ‘헛!’

 항문을 막다니, 그건 먹고살지 말라는 뜻이 아닌가! 버루거 자작은 기겁하며 정신 바짝 차렸다. 괜한 말이 아닐 수도 있었다.

 “흐아암!”

 늘어지게 하품하던 가르딘이 침상에서 일어났다. 2황자가 죽고 난 후 내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대낮까지 잠을 청한 가르딘은 찌뿌드드한 몸을 풀기 위해 천룡무상신공을 운기했다.

 기운은 작은 점에서 시작한다. 점은 점점 조그만 파장을 만들어, 기운을 넓힌다. 넓힌 기운은 틈에서 벗어나 온몸을 회전한다. 혈맥으로 퍼져 나간 기운이 한 번, 두 번 회전하여 전신의 기운을 북돋는다. 운기 행공은 하면 할수록 빨라지고, 단전에 기운은 더욱 강해진다. 일정수준의 경지에 오른 자는 내공보다는 깨달음이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운기행공을 하는 이유는 몸의 균형을 맞춰주고, 명상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불현듯 찾아온다. 찾아오는 시기가 정해진 것이 아니고, 차분히 쌓아가다 원하는 경지에 이르면 한 번에 폭발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 시기를 잡을 수 있는 것도 꾸준함이다.

 ‘후우우우우!’

 가르딘이 운기 행공을 한 이유는 몸의 균형과, 자신의 관조를 위해서다. 불균형한 정신의 불안정을 바로잡아, 차분하게 생각을 해보아야 했다. 현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는 가르딘이다. 가르딘이 바로 서지 않으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렇기에 결정은 신중하되, 신속하게 마무리되어야 한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 있는 한 1황자가 황태자가 될 확률이 높다. 심증이 간다고 해도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1황자를 몰아세울 수 없다. 그렇다면, 내 선택은 정해진 것이겠지.”

 강한 쪽에 붙는다.

 약한 것은 죄악이다. 가르딘에게는 명예보다 가정과 실리를 중요시한다.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질색이다. 대의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의 행복과 권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마왕의 강림이나 대륙의 위험으로부터 가족과 주변 사람이 위험해지는 일이 아닌 이상 권력 싸움에서 대의는 없다고 생각하는 가르딘이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자에게 붙어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면 되었다.

 “혼란한 제국은 내 안위를 위협하니,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하는가.”

 코워드 후작군의 전투가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리고 있다. 코워드 후작의 무능은 이미 알고 있다. 더 이상 전투가 오래 진행이 되면 제국전쟁이 끝난 후의 대비가 늦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가르딘은 즉시 기사단을 소집했다.

 병력의 도움이야 그다지 필요 없을 것이다. 핵토르 왕국군과 제국군과의 병력 차이는 메울 수 있는 간격이 아니었다. 전략적인 힘을 부여해 줄 필요성이 있었다. 명색이 후작이 되어서 전략이라는 것을 생각도 해보지 않은 것이 한심할 지경이다.

 가르딘이 소집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발키리 기사단은 모두 막사 밖에 대기했다. 마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날이 잔뜩 선 기사단의 모습은 잘 벼린 검을 연상시켰다. 단 몇 번의 전투로 인해 발키리기사단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다. 특히 오러 마스터가 된 필리언, 갈라, 유타가 뿜어내는 무형의 기운은 기사단에게 훌륭한 자극제가 될 수 있었다.

 100명으로 이루어진 발키리기사단의 최하급 기사가 벌써 오러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것만 봐도 놀라운 일이었다.

 가르딘은 발키리기사단의 발전한 능력을 보자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만들어 놓고 대견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트윈유니크 협곡으로 간다.”

 “그 빌어먹을 귀족들을 도와줘야 하는 거냐?”

 “그래, 빌어먹을 귀족들은 맞지만 전쟁이 너무 길어졌어. 이제는 끝내야겠지.”

 가르딘과 필리언의 대화에 발키리기사단 모두 이구동성으로 같은 생각을 했다. 코워드 후작의 무모함과, 무능력을 생각하면 도와주고 싶지 않지만 더 이상의 희생은 원치 않았다.

 “그럼 모두 간다.”

 “충!”

 가르딘의 명령이라면 지옥이라고 해도 뛰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강했다. 가르딘이 앞장서서 트윈유니크 협곡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 기사들이 줄을 이었다.

 활! 활! 활!

 불길이 거세게 치솟고 있었다. 트윈유니크 협곡은 다시 한 번 화공이 시작되었다. 가장 힘든 시기에 솟아오르는 불길은 핵토르 왕국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이제는 바람마저 핵토르 왕국군을 도와주지 않았다.

 “콜록! 콜록!”

 병사들의 호흡이 가빠지고, 시야는 메웠다. 마법사들의 마법력도 한계에 달해 더 이상의 마법은 사용이 어려웠다.

 멜버른 후작은 이를 갈았다. 병력의 차이가 이만큼이나 벌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정정당당하게 대결하지 않는 제국군의 행태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러나 멜버른 후작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올려야 한다. 그걸 잊었다면 전쟁은 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손에 든 마법스크롤이 있었다. 마법력이 떨어졌을 때를 대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다. 몇 개 없는 마법을 사용하고 나면 이제 사용할 무기는 아무것도 없다. 병사들을 독려하는 것은 한계가 보였다. 결국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크하하하!”

 “타올라라! 이 지독한 놈들!”

 지금까지 개고생시킨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 코워드 후작이었다. 불길이 타올라서 모든 것을 태우고 있자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자신의 전략이 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떠냐! 내 전략이!”

 “그건 제 전략인... 헙!”

 찌릿!

 버루거 자작이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가 호된 눈초리를 받았다. 버루거 자작은 또 한 번 억울했다. 자신이 세운 전략을 어떻게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어찌 보면 대단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누구 전략이라고.”

 “코... 워드 후작님의 놀라운 전략입니다!”

 “내 휘하 귀족들의 전략은 내 전략이고, 내 전략은 내 전략이다. 알겠느냐!”

 “물... 론입니다.”

 떨떠름하지만 버루거 자작과 비린스 자작은 힘없는 하급 귀족이었다. 자신들의 수장이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 더럽지만 현실이 그렇다. 아니꼬우면 네놈들도 승진하면 된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화공전에 대한 승리가 확실해지는 시기에 병사 한 명이 황급히 달려 왔다.

 “코워드 후작님! 후방에서 가르딘 백작이 기사단을 이끌고 오고 있습니다.”

 “뭐야!”

 승리감에 도취된 코워드 후작의 기분에 찬물을 붓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거의 다 이겨 놓은 전쟁이다. 남이 해 놓은 전쟁에 포크만 얻는다고 생각하게 된 코워드 후작이었다. 남이 해 놓은 연회상에 포크만 올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자신이 하면 훌륭한 업적이고, 남이 하면 훼방이었다. 코워드 후작과 그 휘하 귀족들만이 가진 독특한 특성이었다.

 “젠장! 서둘러 기름을 붓지 않고 뭐 하는 거냐!”

 빨리 전쟁을 끝내려고 서두르는 코워드 후작이었다. 휘하 귀족들에게도 서둘러 전쟁을 끝내도록 강요했다.

 “어서 움직이지 않고 뭐 하는 거냐!”

 “움직입니다!”

 버루거 자작과 비린스 자작도 빨리 움직였다. 괜히 가만히 있다가는 모든 불똥이 자신들에게 튄다. 잘되면 자신의 능력, 못되면 남의 탓이 되는 것이 코워드 후작의 논리다. 물론 이것이 실패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성은 있었다. 자신을 알아야 좀더 미래 지향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코워드 후작은 자신을 알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가르딘의 의도였다. 일부러 기사단의 출병을 코워드 후작에게 알려 동기를 부여하는 전술이었다. 어찌되었건 가르딘이 코워드 후작에게는 가장 걸끄러운 상대가 되었다. 백작이라고 해도 가르딘은 오러 마스터였다. 자신과는 비교가 안 되는 실력을 가졌다.

 “감히 내 전공을 가로채려 하다니! 네 뜻대로 될 성싶으냐!”

 가르딘이 오기 전에 서둘러 전쟁을 끝내야 했다.

 가르딘이 막 출병하려는 시간에 누군가 찾아왔다. 요 근래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노인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를 치르러 가는 상황에 나타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발키리기사단의 입장에서 영주가 출병하는데 일개 말 조련사가 앞을 막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모든 기사들이 분노를 표출했다. 라이젠이 보여준 말 조련능력은 기사들도 인정했다. 그러나 이것과 그것은 별개였다.

 라이젠은 은밀하게 나타나지 않고, 대놓고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다급한 빛이 역력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한 촉박함이 보였다.

 고트를 비롯한 고참기사가 라이젠에게 비키라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때에 필리언, 갈라, 유타가 나서는 것을 중지시켰다.

 “후우!”

 필리언, 갈라, 유타는 기사들의 도발을 막은 것에 감사했다. 갑자기 나타난 노인은 안젤리카의 아버지다. 드래곤의 아버지라면 과연 어떤 존재일까! 오크의 자식이 드래곤이 될 수는 없으니, 당연히 드래곤이다. 그것도 성룡 급 드래곤의 아버지이니 최소한 고룡 급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서 함부로 나대면 발키리기사단은 전멸이다.

 “저 불순한 노인을 그냥 놔둘 수 없습니다! 영주님의 체면이 있습니다!”

 “잠깐, 아직 가르딘이 아무런 뜻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들도 가만히 있어라!”

 필리언이 분노하는 기사단을 다스렸다. 기사단장의 말이니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기사단이었다. 그러나 분노한 표정까지 지우지는 못했다.

 가르딘이 라이젠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잠시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럼 얘기를 해라.”

 “단둘이 하고 싶습니다만.”

 “좋다.”

 가르딘과 라이젠이 기사단과 거리를 두었다. 일정 거리까지 떨어지자 가르딘이 기막을 쳤다. 소리를 차단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마나에 민감한 자신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기막을 치는 가르딘의 솜씨에 라이젠은 감탄했다. 역시 보통 인간은 아니었다.

 “무슨 일인데, 갑자기 나타난 겁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조금 곤란합니다.”

 “타이탄의 핵심기술을 알기가 어려워서 말이지.”

  “그걸 왜 저한테 물어 봅니까! 타이탄은 제가 라이젠님보다 더 모릅니다.”

 “어디 방법이 없겠나?”

 얼마나 초조했으면 타이탄을 골렘으로 착각하는 가르딘에게 부탁을 할까! 라이젠의 다급함을 느낄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조급합니까? 무슨 큰일이 있는 겁니까?”

 “그게 말이지.”

 라이젠은 우선 설명을 했다. 타이탄을 완벽히 재탄생시켜서 딸에게 자랑하고 싶어 했던 라이젠이었다. 일반적인 드래곤이나 인간이라면 라이젠의 다급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고작 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드래곤이 다급해지다니 말도 안 되는 일로 치부해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가르딘은 달랐다.

 “아니 그런 중차대한 문제를 어떻게 호언장담한 것입니까?”

 “면목 없네, 나도 모르게 딸 앞에만 서면 위대해지고 싶어서 말이지.”

 “그 마음은 저도 압니다. 하지만 너무 무모했습니다!”

 “그건 나도 인정하네!”

 가르딘은 라이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딸에게 가장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가르딘도 마찬가지였다. 라이젠의 고충을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보통 아버지의 마음은 보통 아버지가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이 보통 아버지는 아니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방법이 없겠나?”

 “잠시 생각 좀 해보고요.”

 가르딘도 라이젠의 다급함에 물들어 갔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섬광과 같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원래 타이탄은 핵토르 왕국의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핵토르 왕국의 마법사들은 작동원리와 구동방법을 알고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헛!”

 라이젠은 헛바람이 나왔다. 이런 쉬운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탄식이었다. 딸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강박관념으로 인해 생각의 폭을 넓게 보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가르딘에게 사정을 말했겠는가! 그것만 봐도 라이젠의 사고가 정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마법사들을 잡아다가 족치면 되는 것을 어렵게 고민했구먼, 자네 정말 고맙네.”

 “어차피 라이젠 님도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부족하지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마법사들이 어디에 있는 거지.”

 “저를 따라오시죠. 핵토르 왕국군의 현재 수장은 멜버른 후작입니다. 그가 핵토르 왕국의 궁정마법사이니 그를 잡으면 타이탄의 핵심기술을 획득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어서 가세.”

 한시가 급한 라이젠이었다. 심각한 것으로 따지면 가르딘이 더 급하지만 얼굴 표정만 보면 정반대였다.

 “트윈유니크 협곡으로 가시면 됩니다. 어차피 공간이동을 하면 되니 우리보다 빨리 도착할 것입니다.”

 “그럼 내가 먼저 가겠네.”

 “그전에 한 가지 부탁을 드렸으면 하는데.”

 “뭔가?”

 핵토르 왕국의 마법사들을 모두 잡아서, 세뇌시킬 수 있습니까?”

 “세뇌라! 별로 어렵지는 않네만.”

 인간의 정신력이 드래곤의 정신력을 이길 수는 없다. 또한 정신조작마법은 라이젠도 어렵지 않게 구사할 수 있다. 하지만 정신조작은 대단히 사악한 마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을 조작하여 마음대로 하는 일이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극악한 마법이다.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 것이 명예로울 수도 있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나.”

 “어차피 영지에 마법사는 필요합니다. 안젤리카뿐만 아니라 비밀병기로 마법사들을 데리고 있을 생각입니다.”

 가르딘은 적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를 찾지 못했다. 특히 멜버른 후작은 타이탄을 이용해서 가르딘의 가족을 위험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었다. 그에게 선택권은 없다. 새로운 인생을 살면서 반성하는 길만이 용서를 받는 일이라고 보았다.

 “정 그렇다면 알겠네.”

 “그들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는 줄 겁니다.”

 “그럼 바빠서 먼저 가겠네.”

 “잠깐!”

 “또 왜 그러는데!”

 한 시가 급한 라이젠의 발목을 또 잡자 짜증이 났다. 가르딘은 보내기 전에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모른 척 지나가기에는 사안이 컸다.

 “타이탄은 다 망가졌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크흠!”

 방심하다 허를 찔린 라이젠이 헛기침을 했다.

 “그... 렇지.”

 “그런데 어떻게 핵심동력에 대해서는 알 수 있었지요.” 가르딘이 오늘따라 예리해 보였다. 라이젠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감지했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날로 타이탄을 먹으려 다 들통난 꼴이 되었다.

 “내가 위대하고 현명해서라고 하면 안 믿겠지.”

 그렇게 현명하면 이따위 고민을 상담하지도 않는다. 가르딘은 드래곤도 하기 힘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물론.”

 “저기 메테오가 떨어지고 있네!”

 “그런 거짓말에 제가 고개를 돌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상당히 초보적인 수법으로 생각합니다만.”

 “에휴! 알겠네! 그럼 뒤에 라이나가 넘어졌네.”

 “아니!”

 휙!

 가르딘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라이나에 대한 즉각적인 신체반응을 가진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의 정곡을 찌르는 라이젠의 솜씨도 일견 대단해 보였다. 함께하다 보니 절로 능력이 상승했다.

 “그럼 이만!”

 사삭!

 “속은 건가.”

 라이젠은 곧바로 공간이동을 해서 사라져 버렸다. 발키리 기사단과는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그런고로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가르딘은 사라지는 라이젠이 귀엽기까지 했다.

 타이탄에 대한 일은 모두 라이젠의 뜻대로 하는 것이 나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어 봐야 비싼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처분하기도 힘들고, 후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라이젠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른다. 어찌되었던 라이나와 브리안의 생명을 구해준 분이었다. 절대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가르딘이 혼자 발키리기사단으로 돌아오자 필리언이 은밀히 물었다. 드래곤과 무슨 말을 했는지 엄청 궁금하기도 했다. 드래곤은 도대체 어떤 사고를 하는지 인간으로서의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왜 혼자 온 거냐?”

 “말이 애를 낳아서 빨리 가봐야 한데.”

 “그럼 왜 여기 온 건데?”

 “말 이름 좀 지어 달라고 하더라고.”

 “뭐?”

 그따위 시시껄렁한 말을 하려고 기사단의 출병을 지연시키다니, 기사들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솟았다. 필리언, 갈라, 유타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드래곤이 그따위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을 리 없다고 믿었다.

 “정말이냐?”

 “그렇다니까! 그래서 내가 이름을 좀 지어줬지.”

 “뭐라고 했는데.”

 “5마리를 낳았다고 해서 그중에 세 마리는 필리언, 갈라, 유타라고 지어줬지.”

  “뭐... 라고! 이게 정말!”

 “크크크! 하하하하!”

 가르딘의 말에 심하게 분노를 표출하던 발키리기사단 모두 배꼽을 잡고 말았다. 웃음을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웃겼다. 어떤 기사는 웃다가 말에서 떨어질 뻔하였다. 가장 크게 웃은 사람은 고트와 슈안이었다. 영주님의 농담이기에 더욱 웃긴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에 고트와 슈안은 웃지 못했다.

 “나머지는 고트, 슈안으로 지으라고 했지.”

 커억!

 말안장에 견고하게 달라붙지 않았다면 떨어질 뻔한 고트와 슈안이었다. 나머지 기사들은 그 모습에 더 웃었다. 가르딘의 이기주의가 모두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자신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말이다. 마치 복불복 놀이를 보는 듯 했다.

 필리언이 슬쩍 전음을 사용했다. 전음은 오러 마스터가 되면서 습득이 가능해졌다. 스필언과 미토스만큼 한순간에 익히지는 못해도 사용이 가능할 정도는 되었다.

 [정말이냐?]

 [아니.]

 [사실을 말해, 궁금하니까!]

 [말해도 믿지 않을 텐데.]

 [믿을 테니 말해 보라니까.]

 말하지 않는다고 하니 더 궁금한 필리언, 갈라, 유타였다.

 [너희들이 그토록 간절히 원한다면 말해 주지.]

 [간절하기까지야.]

 [그럼 말 안 해.]

 [간절하다, 이놈아!]

 전음으로 말싸움하는 것이 은근히 재밌는 동기들이었다. 한번 맛들이자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고단위의 수법인 전음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다니 익히지 못 하는 사람에게는 한탄만 나올 장면이었다. 이것이 익힌 자와 못 익힌 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가르딘은 라이젠이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를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동기들은 자신들이 들은 것이 사실인지 생각해 보았다. 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갑자기 나타났다는 결론이 아닌가! 이것은 흡사 가르딘의 모습이 오마쥬처럼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끼리끼리 모여도 정도가 있는 것이 아닌 가! 가르딘과 라이젠의 성격이 어떻게 이토록 똑같을 수 있단 말인가! 놀랍기까지 하다.

 [거짓말!]

 [사실이다.]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던 동기들이다. 아무래도 가르딘이 자신들을 놀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젤리카도 드래곤이 아닐 수 있다. 반면에 가르딘의 저택을 초토화시킨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참! 사람 애매하게 만들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뒤덮고 있는 트윈유니크 협곡은 불길이 아래에서 거세게 일고 있었다. 사물이 전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시야를 가렸다. 멜버른 후작이 마법력을 짜내듯이 윈드 마법을 걸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뚜렷이 보였다. 멜버른 후작은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대까지 모두 했다. 마법스크롤까지 다 사용한 상태였다. 병사들 모두 연기와 거센 불길로 타 들어가고 있었다.

 “이놈들! 내가 바로 핵토르 왕국의 대마법사 멜버른이다!”

 마지막으로 쥐어짜듯 거세게 소리를 질렀다. 자신을 다독이며,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옆에 있는 병사들조차 연기로 인해 질식하고 있었다.

 나머지 병사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냐. 찾기 힘들 줄 알았는데, 알아서 이름을 말해주니 고맙구나.”

 “헛!”

 “아니, 어떻게?”

 등 뒤로 누군가 접근했다. 그것도 바로 지척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를 누군가에게 내주다니 현실을 믿을 수 없는 멜버른 후작이었다. 아무리 마법력이 소모되어도, 마법사는 예민한 존재다. 주변의 기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좀 전에 누군가 바로 옆으로 워프했는데,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런 얼토당토한 일은 생애 처음이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놈!”

 돌아서서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는 인간이 아닌 드래곤이다. 고룡 급 드래곤 라이젠을 상대로 기운 빠진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새 다가와 멜버른 후작에게 마법을 거는 라이젠이었다.

 - 슬립 (수면).

 2서클의 슬립마법을 7서클 마법사에게 걸다니, 통할 리 없다고 본 멜버른 후작이었다.

 “아... 니......!”

 털썩!

 드래곤의 엄청난 마력으로 이루어진 용언마법을 인간이 버틸 수는 없었다. 버틸 수 있는 인간은 가르딘 한 명으로 족했다. 더 있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라이젠의 움직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력이 느껴지는 존재들 10명 정도를 더 슬립 마법으로 재웠다. 재운 마법사들은 모두 자신의 레어로 공간이동을 시켜 버렸다.

 핵토르 왕국군에게는 수장이 사라져 버리는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법사들이 사라지자 병사들은 우왕좌왕했다.

 핵토르 왕국군의 최후가 서서히 보였다. 이제는 더 이상 반항도 하지 못했다.

 “호오!”

 말을 타고 트윈유니크 협곡으로 향하던 가르딘은 불타는 협곡을 보았다. 화공전을 쓰다니, 코워드 후작이 제법 짱구를 굴렸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 해온 것만 보면 별로 신용을 주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제법 좋은 판단을 내렸다.

 가르딘이 도와줄 필요성은 없어 보였다. 개입하고 싶지 않았는데, 차라리 잘된 결과를 초래했다.

 가르딘은 말 속도를 줄였다. 시간을 조금 더 주기로 결정 했다. 때마침 왔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 자식 머리에서 나온 것치고는 제법인데.”

 필리언은 이제 대놓고 코워드 후작을 까 버렸다. 주인 없는 자리에서는 황제 욕도 한다는데, 하물며 무능한 후작 따위는 질겅질겅 씹어줄 대상밖에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키리기사단 모두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놈으로 봤기 때문이다.

 “아마 수하들 꽤나 족쳤을 거다. 결코 그놈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닐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타지만 화공전을 이제야 생각하다니, 다들 머리에 뭐가 든 거야.”

 “똥.”

 “똥 덩어리만 가득 찬 코워드 후작이라.!”

 “생각만 해도 웃긴데.”

 “그러게 말이야.”

 발키리기사단의 분위기가 이상할 정도로 화기애애했다. 누군가를 뒷담화 까는 것이 이토록 재밌는 것인지 오늘에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가르딘은 속력을 조절하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슬슬 움직이면 대충 화공전이 끝났을 때랑 얼추 비슷해질 것으로 예상 되었다.

 “짜식이 아주 좋아 죽겠지.”

 “모르지, 핵토르 왕국으로 간다고 할지.”

 “미친놈! 주제를 알아야지.”

 가는 동안 코워드 후작은 기사들의 간식거리가 되어 있었다. 어찌나 씹어대는지 단물이 모두 빠져나가 버리고 있었다. 만약 이곳에서 벌어진 대화를 코워드 후작이 들었다면 열받아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가르딘이 되도록 시간 맞추어 움직이려고 하자 무척이나 느렸다. 걸어가도 이보다 빠를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일정거리 내에 도달하자 가르딘이 소리쳤다.

 “지금부터 빠르게 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쉬엄쉬엄하다가, 보이는 곳에서 열심히 한다. 원래 사람은 보이는 것을 중요시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알고 판단하겠는가! 괜히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열심히 하는 놈은 미련한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세상 참 억울한 것은 노력했는데도 잘 알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바로 눈치가 없기 때문이다. 눈치 없이 행동하니 하는 행동마다 마음에 들 리가 없다.

  최대한 빠르게 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일부러 심한 먼지까지 날리도록 달렸다. 뿌연 먼지가 바람에 흩날려 멋있는 장면을 연출했다.

 가르딘이 최대한 빠르게(?)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내려 전장에서 가장 안전한 지대에 머물고 있는 코워드 후작에게 다가갔다. 코워드 후작은 가르딘이 오는 것을 무척 이나 껄끄러워했다. 하지만 전투가 거의 종료되는 시점이라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자신감 있게 가르딘을 대했다.

 이번 전투는 완벽하게 코워드 후작 본인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성이 있었다.

 “전투는 아직 입니까?”

 가르딘은 알면서도 다시 물었다. 눈으로 봐도 끝난 것 같은데, 미련이 남아서 물어보는 듯한 인상이 풀풀 풍긴다. 다 된 전장에서 검 하나 올려놓고 전공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허허!”

 “이런 미안하게 되었군.”

 마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가르딘에게 미안하다는 뜻을 내 비치는 코워드 후작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전장을 너무 쉽게 끝내서 미안하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전투를 벌써 끝을 내다니!”

 “아쉽지만 어떡하겠나, 내 작전이 이처럼 쉽게 먹힐 줄은 몰랐네.”

 ‘13만이나 쳐 죽이고, 얻은 전술이 고작 그거냐!’

 표정 변화는 없지만 가르딘은 속에서 열불이 나고 있었다. 쥐새끼같이 생긴 놈이 쥐똥 같은 짓을 잘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으니 면상을 한 대 쥐어박았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다 연발의 주먹을 부르는 얼굴을 가진 코워드 후작이었다. 가르딘의 입장에서 행동 하나 하나가 다 마음에 들지 않는 코워드 후작이다. 말하는 투도 마음에 들지 않고, 얼굴 생김새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단하... 군요!”

 속으로는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품고 있으면서도, 입에서는 칭찬이 흘러나온다. 가르딘은 양의심공을 익힌 사람처럼 완벽하게 두 가지 생각을 통제하고 있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이중성이었다. 또한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무척 이나 아쉽다는 듯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여운이 담긴 목소리 톤을 유지하였다.

 코워드 후작으로서는 무척이나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게 되었다. 가르딘의 아쉬운 표정이 통쾌함으로 다가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욕을 있는 대로 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코워드 후작이었다.

 “과찬일세.”

 별것 아니라는 말로 들리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의 공을 대단하게 여기는 코워드 후작이었다.

 “그런데 병력이 조금 줄어 보이는데......!”

 가르딘이 슬쩍 스쳐 지나가는 듯한 투로 말을 줄였다. 잘 듣지 않으면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말이었다.

 “크흠!”

 코워드 후작으로서는 가장 찔리는 일이기에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다. 코워드 후작이 생각하기에도 병력손실이 엄청났다. 만약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무척이나 난감했다. 13만이나 쳐 죽이고 나서 고작 10만을 죽였다는 것을 어떻게 입에 담겠는가! 절대로 인정해서는 안 되었다. 사실이 그렇다 해도 아니라고 우겨야 하는 것이 코워드 후작의 입장이었다.

 “생각보다 핵토르 왕국군이 강했네, 자네가 전투를 벌일 때와는 다르지 않나! 그때는 핵토르 왕국군의 주력이 독에 중독이 되어 힘을 발휘하지 못했지 않나! 그와는 다르게 나는 핵토르 왕국군이 온전한 힘을 회복했을 때 전투를 벌였네. 내가 아니었다면 이보다 더 전쟁이 길어졌을 것이 분명하네. 아닌가! 버루거 자작!”

 정곡을 찔리자 말이 많아지는 유형의 코워드 후작이었다. 그는 원조를 위해 가만히 있던 버루거 자작까지 서슴없이 동 원하였다. 버루거 자작도 코워드 후작의 말에 거듭 강조하듯 이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코워드 후작님의 뛰어난 전략전술이 아니었다면 이번 전쟁은 요번처럼 쉽사리 끝내지 못했을 겁니다!” 가르딘은 덤벙대는 버루거 자작의, 말이 한심하게 들렸다.

 ‘다 썩은 줄을 잡고 얼마나 갈 것 같으냐!’

 코워드 후작 밑에서 얼마나 오래 갈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물론 재수 없는 놈이 더 잘사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가르딘이 보기에 코워드 후작은 오래가기 글러 먹은 인간 유형이었다. 남보다 잘하는 것이 뭐라고 있어야 잘될 것 아닌가!

 화공전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화공전은 무척이나 잔인하다. 살아 있는 사람을 생체로 태우는 공격이었다. 엄청난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죽었을 것이다. 비참한 죽음에 동정은 가지 않는다. 전쟁 중에 죽음은 필연적인 일이다.

 가르딘은 전쟁이 마무리되고 난 후 어떻게 할 생각인지 코워드 후작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핵토르 왕국으로 진격해야지.”

 “남아 있는 병력으로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차라리 제국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원군과 합류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럴 필요가 있는 건가?”

 “핵토르 왕국은 왕국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합니다. 30만 대군이 이곳에 왔다고 해도 왕국에는 남아 있는 병력이 있을 겁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핵토르 왕국의 지형을 잘 알지 못 합니다. 함부로 진격하다 함정에 빠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르딘은 함정이라는 말을 유난히 강조했다.

 트윈유니크 협곡에 준비된 핵토르 왕국의 함정에 여지없이 걸려든 코워드 후작이었다. 그렇기에 함정이라는 말을 지나칠 수 없었다. 가르딘의 말이 현실적으로 들렸다. 지금까지 해 놓은 것만 해도 충분히 엄청난 전공이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진격하기보다는 제국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움직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핵토르 왕국을 코워드 후작 혼자서 점령한다면 이번 전쟁의 일등공신이 될 가능성이 컸다.

 “자네가 가진 병력과 합치면 10만이 되니 가능하지 않을까?”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말투였다. 가르딘은 이미 반쯤 넘어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말로써 가르딘을 상대할 수 있는 자는 피닉스기사단의 부단장인 바자바인 후작뿐이었다. 변방의 귀족 따위가 최상급 말발을 가진 가르딘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제가 가진 병력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적들이 성을 중심으로 공성전을 펼치면 답이 없습니다. 공성전에 대한 경험이 없는 제 병력 가지고서는 쉽지 않은 전투를 벌여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진격하신다면 많은 병력피해를 감소하셔야 할 것입니다.”

 “음!”

 가르딘은 코워드 후작의 아픈 부분만 찌르고 들어갔다. 협곡을 중심으로 벌인 핵토르 왕국의 공성전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봤다. 또한 현재까지 입은 병력손실도 만만치 않았다.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여기서 멈추고 기다리지.”

 “제가 이래 봬도 오러 마스터입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자네만 믿네.”

 ‘훗! 나도 나를 안 믿는데.’

 가르딘의 말에 의해서 코워드 후작이 끌려가고 있었다. 약점이 드러나는 시점부터 어쩔 수 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다. 가장 아픈 부분만 건드려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식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가르딘은 필요한 말만 하고 발키리기사단으로 돌아갔다. 남겨진 코워드 후작은 자신의 약점을 들키지 않도록 할 방법을 생각해 보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인 병력문제에 대해서는 적이 너무 강해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몰고 가야 한다.

 “내가 끌고 온 병력의 대부분이 늙고, 어리니 문제는 되지 않을 거야.”

 “그렇습니다. 이 정도의 병력으로 핵토르 왕국의 정예병을 이긴 것은 실로 놀라운 업적입니다. 더군다나 사이너스 국왕까지 처리했으니 후작님의 명성은 카이로만 제국을 떠들썩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그전에 병력손실을 최소화 할 필요성이 있겠지.”

 “제가 숫자를 줄이고, 이미 죽은 병사들을 처분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최대한 피해를 줄여야지.”

 죽은 병사들만 불쌍하게 되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코워드 후작은 공적을 위해 죽음조차 서슴없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슬픈 현실이지만 죽은 자는 억울함을 토로할 수 없다.

 “어떻게 됐냐?”

 “뭘 어떻게 돼! 말발로 나 이기는 사람 본 적 있냐?”

 발키리기사단으로 돌아온 가르딘에게 필리언이 물었다. 필리언은 되도록 진격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사실 가르딘이 코워드 후작에게 한 말 중에 한 가지는 사실이었다. 공성전을 하기 위해서는 공성전에 필요한 전술을 알고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공성병기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피해가 뻔히 보이는 전투를 치를 정도로 가르딘은 무모하지 않았다.

 “바자바인 후작님을 불러줄까!”

 “시끄러! 그 인간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안 풀려!”

 뿌드득!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린다. 그 인간 잘되는 것만 봐도 속이 뒤집히는 가르딘이었다. 다른 사람 다 잘되도 그 인간 잘되는 것은 정말 봐줄 수 없었다. 가르딘과는 상극 중에 상극이 아닐 수 없다. 평온한 가르딘의 일상을 이처럼 머리 아프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조르크 바자바인 후작이었다.

 ‘그 당시 지랄 같은 공주의 성인식만 가지 않았어도!’

 괜히 영지를 얻고, 지위가 높아지는 바람에 라이나와 함께 하는 시간마저 줄어들어 버렸다. 그게 가장 마음에 아팠다. 이제 막 성장하는 브리안에게도 아버지의 정을 듬뿍 줄 여과 시간도 부족했다.

 모든 것이 바자바인 후작 때문이다.

 ‘다 당신 때문이야!’

 가르딘도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게 모든 책임을 널길 수만 있다면 넘기는 인간이었다.

 “에이취!”

 기침을 하는 인간이 있다.

 완장이 유난히 잘 어울리는 바자바인 후작이었다. 그는 황궁에서 황궁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제국의 황궁을 지키는 막중한 임무이기는 하지만 전쟁에서 빠져 버리는 바람에 무척이나 한가하다. 남는 시간에 완장을 빛이 나도록 닦았다. 윤이 나다 못해 광이 번쩍거린다.

 “누가 내 욕하나! 이거 아무래도 가르딘이 욕하는 것 같은 데!”

 귀신 같은 바자바인 후작이다. 그의 감각은 가르딘만큼이나 예리하며, 날카로웠다.

 바자바인 후작도 가르딘과 생각이 비슷한 면이 많았다. 후작까지 올라가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올라갈 생각은 별로 없어 보였다. 지금 이 자리에 만족하며, 한가롭게 보내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황궁을 지키는 일이 가장 원만한 일이 되어 있었다. 귀찮은 전쟁 나가지 않은 것에 만족했다.

 카이로만 제국과 코카 제국이 본격적으로 협상을 벌이게 되었다. 카이로만 제국의 황제로부터 휴전에 대한 제의를 윤허받았기 때문이다. 러쉬 황자로서는 아쉽지만 황제의 명령을 이행해야 했다.

 협상은 카이로만 제국군 진영과 싸이렌 성의 중심에 급조된 막사 안에서 이루어졌다. 모든 내용은 이미 협조가 되어 있기에 마지막으로 각 진영의 수장이 모여 내용에 대한 증명만을 남겨 두고 있는 상태였다.

 카이로만 제국의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이 러쉬 황자의 뒤를 받쳐주었다.

  코카 제국에서는 하이카인 황태자와 훌턴 공작, 이지마하 공작이 협상 대상으로 나왔다.

 전장의 중심에 마련된 막사 안에 모인 그들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미묘한 기류는 숨 막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누구 하나 쉽사리 말을 열기에는 모호한 상황이었다.

 하이카인 황태자가 먼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찌 되었건 협상의 열쇠를 지닌 쪽은 카이로만 제국이었다. 불리한 입장에 처한 하이카인 황태자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코카 제국의 하이카인입니다.”

 “러쉬 카이로만이다.”

 부릅!

 이지마하 공작의 표정이 굳었다. 제국의 황태자에게 존대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발리스타 공작이 노려보는 이지마하 공작에게 한마디 했다.

 “이제 그대들은 왕국에 불과하다. 그 사실을 인지했으면 좋겠군.”

 제국이 아닌 왕국이 되었으니, 카이로만 제국의 황자에게 굽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이었다. 이지마하 공작은 분하기 짝이 없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륙최강국을 놓고 다투던 코카 제국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보잘 것 없는 국력을 유지해야 하는 코카 왕국뿐이었다.

 “그만 하시오, 이지마하공작!”

 “하지만...!”

 “그만 되었소.”

 하이카인 황태자가 이지마하 공작을 다독였다. 여기서 화를 내봐야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만약 협상이 잘못되는 날에는 코카 제국은 대륙에서 사라질 수 있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자에게 맞춰주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러쉬 황자를 비롯한 두 공작은 하이카인 황태자가 보통은 넘는다고 판단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판단을 내렸고, 불필요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러쉬 황자가 존대를 하지 않은 것은 하이카인 황태자의 심기를 파악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일국의 수장은 자존심만으로 유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하이카인 황태자는 시세를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의 두 눈이 예리하게 빛을 내었다.

 ‘후일 골칫거리가 될지도 모르는 자구나!’

 미소 짓는 얼굴 속에 칼을 숨겨 두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런 자는 쉽게 화를 내지도, 쉽게 포기하지도 않는다. 인내하면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순간 살심이 드는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었다. 제국에 위험을 주는 자를 뒤에 두고 싶지 않은 것이 이 유였다. 하지만 곧 살의를 거두었다.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 협정서를 교환하겠습니다!”

 훌턴 공작이 협정서를 꺼내 러쉬 황자에게 건네주었다. 발리스타 공작 역시 작성된 협정서를 하이카인 황태자에게 전했다.

 말없이 협정서의 내용을 살폈다. 중요한 5가지 요지가 분명하게 명시되었는지를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협정서에 쓰인 단어 하나에 의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다. 특히 하이카인 황태자는 신중했다. 강자가 아닌 약자가 되었으니 그에 맞는 처신을 했다.

 “맞군.”

 “앞으로는 좋은 관계를 유지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들이 전대황제처럼 안하무인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만일 또다시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본 제국을 능멸하는 날엔 코카 왕국은 주춧돌 하나 남지 않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이카인 황태자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러쉬 황자의 모욕적인 말은 오히려 뒤에 서 있는 훌턴 공작과 이지마하 공작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무척이나 참기 힘든 모욕이었든지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럼 빠른 시일 내에 협정서를 이행하길 바란다.”

 “10일 안에 모든 것을 처리하겠습니다.”

 카이로만 제국과 이제는 왕국이 되어 버린 코카 왕국의 협정이 맺어졌다. 지금까지 벌인 손해배상과 더불어 영토까지 빼앗긴 코카 왕국으로서는 엄청난 손실을 보며 치러진 굴욕적인 협정이 아닐 수 없었다.

 “허억!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한순간에 아군이 적군이 되는 상황에서 방심하게 된 인물은 허탈하기 짝이 없는 결과를 얻었다. 코카 제국이 이처럼 쉽게 패퇴를 하다니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나운 이빨을 벌린 사자 무늬를 가슴에 그린 인물은 전신에 피칠갑을 한 듯한 모습이었다. 검에서 떨어지는 핏물은 아직도 식지 않고 뜨거운 기운을 뿜어내었다.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셀 수도 없다. 그는 살았지만 같이 도주했던 라이언기사단 20명은 모두 죽었다. 자신을 도주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막다가 산화하였다. 간신히 도주하기는 했지만 그는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도주하면서 얻은 옆구리의 부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받은 고통이 너무 컸다.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 지쳐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크윽!”

 저기 닷!

 1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포위하듯이 움직여 나갔다. 가물거리는 정신을 다 잡은 라이언기사단의 부단장 가딩스타 후작은 적들을 노려보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국의 힘 앞에서 빌빌거리던 놈들이 배신한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는다. 이번 전쟁이 시작될 때만 해도 복수의 칼을 갈았다. 가르딘에 대한 원한이 대단히 컸다. 제국전쟁을 이기고 난 후 가르딘과 정식으로 대결을 벌여 목을 잘라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코카 제국은 패했다. 더군다나 발키리 영지의 영주가 된 가르딘은 핵토르 왕국의 공격까지 막아내었다고 전해졌다. 가르딘만 생각하면 이를 가는 가딩스타 후작으로서는 절대로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르딘을 생각하자 여기서 무너질 수 없다는 오기가 차올랐다.

 “덤벼라! 나는 대코카 제국의 가딩스타 후작이니라!”

 “놈은 지쳤다! 죽여랏!”

 100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들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가딩스타 후작은 오러 마스터다. 지쳤다고 해도, 일개 병사들에게 죽을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병사의 창을 피하며 목을 잘라내었다. 그와 동시에 회전하여 4명의 허리를 분시해 버렸다. 병사들은 순식간에 벌어진 엄청난 광경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지쳐 있어도 쉽사리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신중을 기할 필요성이 있었다. 병사들은 차륜전을 준비했다. 한 사람이 치고 난 후 물러섰다 다른 한사람이 다시 또 치는 전술이다. 한 사람을 포위하는 전술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차륜전이다.

 주르륵!

 가딩스타 후작의 옆구리에서 핏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도주 직전 마지막에 받은 일격이 아직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여기서 죽을 수 없다!’

 가르딘을 죽일 때까지 멈출 수 없게 된 가딩스타 후작이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겨났는지 무섭도록 빨라지며, 광폭해졌다. 가딩스타 후작의 엄청난 공격에 병사들은 차륜전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차륜전을 하기 위해서 물러서던 병사들이 도리어 검에 당했다.

 “사아악! 크아아악!”

 일 검에 서너 명의 병사들이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40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죽는 시간은 별로 걸리지 않았다.

 “물러서라!”

 포위된 병사들의 뒤로 누군가 나타났다. 그는 왕궁이 처참하게 불타 버린 볼테인 왕국의 제일공작 골드만 공작이었다. 또한 가딩스타 후작의 옆구리에 참혹한 검상을 남긴 인물이기도 했다. 카이로만 제국의 공격에 유린당한 골드만 공작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공적을 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상대로 라이언기사단의 부단장인 가딩스타 후작을 잡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었다.

 “여가까지 도주하다니 과연 코카 제국의 기사답구나! 하지만 여기까지다!”

 “닥쳐랏! 감히 제국을 배신하고 무사할 성싶으냐!”

 “훗! 이미 코카 제국은 끝났다! 힘을 잃은 제국에 충성을 할 왕국이 얼마나 있겠느냐! 현실을 직시해라!”

 “시끄럽다! 배신자는 죽어야 한다!”

 “그 말은 내가 하고 싶구나! 코카 제국의 무모한 전쟁으로 인해 우리 볼테인 왕국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연맹왕국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제국 따위는 망해 버리는 게 낫다!”

 “네놈을 죽여주마!”

 “지쳐 있는 네가 날 이길 수 있을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가딩스타 후작이었다. 평상시였다면 모를까 지금은 승산이 전혀 없었다. 

 가딩스타 후작은 필생의 여력을 검에 불어 넣어 휘둘렸다. 전신이 모두 불타오른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는 최후의 일격이었다. 골드만 공작도 경시하지 않고 검을 받았다. 그도 볼테인 왕국을 위해 최선을 다한 일격을 출수했다.

 카카카캉!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 검이 휘둘러지고 난 후 수십 번의 검격이 충돌을 일으켰다. 가딩스타 후작의 검법은 코카 제국의 독문삼대검법 중에 하나인 라이언 검법이다. 사납고, 광폭한 야성을 드러내었다. 그에 반해 골드만 공작의 검법은 무척이나 표홀했다. 플라잉 검법이라고 이름 붙여진 검법의 대가다운 움직임이었다.

 강맹함은 언제까지나 지속적이지 않다. 가뜩이나 지쳐 있는 가딩스타 후작으로서는 몇 번의 검격에 힘을 싣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파격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허허헉!

 “나의 플라잉 쉐도우 검격을 이 정도로 막아내다니 대단하군!”

 “닥쳐!”

 “그러나 여기까지다!”

 가벼운 바람처럼 날아오던 골드만 공작이 어느새 무섭도록 빠른 폭풍이 되었다. 바람을 타고 빠르게 안으로 치고 들어온 골드만 공작의 검격에 예리함이 빛을 뿜었다. 순간적으로 세 번의 검격이 시전되었다.

 슈슈슉!

 타탕!

 푸욱!

 살 속을 파고드는 차가운 금속음이 들렸다.

 세 번의 검격 중에 2번은 가로에서 세로로 움직여 사선방향으로 막아내었다. 그러나 마지막 세 번째 연격이 오른쪽 어깨 바로 아래를 가격하자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생명이나 다름없는 검을 떨어뜨리고 나니 무방비가 되어 버렸다.

 “이.. 런! 제길!”

 욕이 입 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다시 이어지는 골드만 공작의 검날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최악의 수단으로 뒤로 굴러야 했다. 가딩스타 후작으로서는 무척이나 굴욕적인 회피동작이 아닐 수 없었다.

 “잘도 도망치는구나!”

 피하는 것도 한도가 있었다. 한번 기세를 잃자 뒤로 피하다가 끝이 날 것만 같았다.

 탓!

 발뒤꿈치가 바닥에 나 있는 돌부리에 걸렸다.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가자 더 이상의 움직임이 불가능해졌다. 다가오는 검을 무방비 상태로 맞아야 했다. 가딩스타 후작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쿠아아아앙!

  시끄러운 소리가 울리고 나자 지면이 심하게 요동쳤다. 무언가 거대한 물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200명의 병사들 뒤로 우뚝 서 있는 거대한 기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골... 램이닷!”

 “피햇!”

 골램이 휘두르는 병장기는 엄청나게 컸다. 막아내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이 나서 터져 버리는 잔인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골램은 1기가 아니었다. 3기나 되는 골램이 어느 사이에 병사들 사이로 파고들어 잔인한 학살극을 벌였다. 일반 병사들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무인지경의 상태에서 아수라장을 만들어 버리는 골렘들이었다.

 “아니! 왜 갑자기 골램이 나타난 거지?”

 골드만 공작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골램으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죽게 생겼다. 이대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한 골드만 공작은 서둘러 가딩스타 후작을 처리하고, 골램을 상대하기로 결정했다.

 가딩스타 후작은 숨을 몰아쉬며 골드만 공작의 마지막 일 검을 바라봐야 했다.

 “응?”

 무언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기운이 느껴진다. 섬뜩한 기운에 골드만 공작이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일직선으로 뻗어 나오는 지옥의 광선이 골드만 공작이 자리한 곳을 뚫어버렸다. 헬버스터를 응축한 기운이었다. 뚫린 흙덩어리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녹아 내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 낭패를 당할 뻔하였다.

 펄럭!

 갑작스럽게 나타난 자는 오른팔의 소매가 힘없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한쪽 팔만 남았지만 엄청난 마력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헬버스터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을 정도 면 최소한 7서클은 되어야 했다.

 가딩스타 후작은 나타난 인물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벤투스!”

 “다시 만나게 됐소이다.”

 공주납치사건이 미수로 끝나고 난 후 벤투스 역시 심각한 부상을 당했었다. 마력을 다시 회복하고, 골램을 수리하기 위해서 전쟁조차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마력을 모두 회복해서 다시 전쟁에 참여했을 때는 이미 끝이 난 것과 같았다.

 “난 이미 끝났다!”

 “아직 끝나지 않았소이다! 공동의 적을 놓고 이대로 죽고 싶은 것이오!”

 7서클 대마도사 벤투스와 오러 마스터 가딩스타 후작의 공동의 적이 누군가! 바로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을 상대로 복수하지 않고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적들이 오기 전에 이곳을 피합시다!”

 “그러지!”

 벤투스에게는 최후의 병기가 존재했다. 아직까지 실험에서 계속 실패했지만 조만간 완성을 눈앞에 둔다. 최후의 병기를 작동하기 위해서는 가딩스타 후작이 필요했다. 자신의 팔을 앗아간 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제국전쟁이 종결됐다는 것이 공표되었다.

 공표된 내용을 보면 코카 제국이 절반이나 되는 영토를 카이로만 제국에 넘기고, 왕국으로 격하되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대륙에 제국이 2개밖에 남지 않았다. 카이로만 제국이 명실상부한 대륙최강국이 되었다는 것이 선언되었다.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륙최강국이 된 카이로만 제국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핵토르 왕국의 징벌이었다. 황궁의 내부적인 일로 인해 5대 공작이 모두 황도에 머무는 상태였지만 전쟁 수행 시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코워드 후작이 지금까지 황궁에 보낸 전공을 인정받아 핵토르 왕국의 징벌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가르딘은 부사령관이 되었지만 실제적으로 전쟁이 벌어졌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가르딘으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괜히 전쟁을 벌이면 전공만 쌓여간다. 지금까지 한 것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넘치는 전공은 입지를 높여주기만 한다. 점점 올라 갈수록 떨어질 때 너무 위험해진다.

 핵토르 왕국은 제국전쟁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는 바람에 별다른 반항을 하지 못했다. 핵토르 왕국 내부적으로 항복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리고,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했다. 항복을 선언함과 동시에 속국이 되었고, 공국으로 전환되었다. 공왕으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제국의 귀족 중에서 선택이 되질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가르딘은 오랜만에 전쟁이 끝나고 한가하게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정원의 긴 의자에 앉아 라이나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얼마 안 있으면 또 황궁으로 가야 한다. 전공 수여라는 것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르딘으로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다. 그냥 아무나 가서 황제에게 받아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게 말처럼 되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황제 모욕죄라는 말도 안 되는 벌을 내릴지 모른다. 귀찮은 일이 발생하기 전에 한 번 찾아가서 상을 받고 잽싸게 돌아와야 했다.

 후비적! 후비적!

 “왜 그래요?”

 “요즘에 자꾸 귀가 가려워, 누가 내 욕하나!”

 “그럴 리가요! 당신처럼 착한 사람을 누가 욕해요! 그런 사람 있으면 천벌 받을 거예요!”

 “그렇지. 역시 라이나뿐이라니까!”

 “아빠! 그럼 나는!”

 “브리안도 천사지!”

 가족들과 화기애애하게 차를 마시는 이 시간이 가르딘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데 가르딘은 무언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떤 것을 빠뜨린 것 같은 찜찜함이 자리했다.

 ‘뭐지?’

 가르딘은 별로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아서 바로 잊어버렸다. 다시 생각하기에는 가족과의 오붓한 분위기를 낭비하는 것이 되었다. 그런 자잘한 것들을 기억하는 것보다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판단했다.

 ‘별거 아니겠지.’

 아무러면 어떠냐는 식으로 잊어버렸다. 그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받는 자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설마 이런 꼴을 당할 줄 몰랐다. 아니 누구도 그런 황당한 상황은 겪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고민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으음!’

 잠들었던 의식이 이제야 돌아왔다. 엄청난 마력에 대항은커녕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7서클의 마법사가 고작 수면마법에 당했다고 하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잠들어 버렸다. 가장 먼저 일어난 멜버른 후작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10명의 마법사들이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냐?”

 동굴 같으면서도 보통 동굴 같지는 않았다. 섬세하게 만들어진 집의 구조는 거대한 성을 방불케 하였다. 멜버른 후작은 우선 마법사들을 깨우기 위해 노력했다. 마법사들은 아직도 수면마법에 의해 잠들어 있었다.

 - 디스펠(마법해제).

 마법력을 사용하여 마법사들을 깨우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마법을 건 시행자가 해제하지 않는 이상 마법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멜버른 후작은 무척이나 놀라고 있었다. 자신의 마력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태였다. 수면마법을 당할 당시를 생각해 보았다. 그 당시에 자신은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는 채 당했다.

 “도대체 누구냐?”

 7서클 마법사를 애송이처럼 가지고 노는 상대였다. 현 세상에 8서클 마스터는 한 명이 존재한다고 한다. 하지만 8서클 마스터라고 해도 7서클 마스터를 이처럼 쉽사리 제압한 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저벅! 저벅!

 멜버른 후작이 심각한 고민을 할 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들릴수록 멜버른 후작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온몸을 소름 돋게 만드는 소리였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멜버른 후작은 잔뜩 긴장했다.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은 무척이나 젊었다. 젊은 청년임에 틀림 없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압도적인 위압감을 내뿜었다. 멜버른 후작은 마법사다. 마법사는 자신보다 강력한 마법사에게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지게 되어 있었다. 고개조차 제대로 들어올리기가 힘들었다. 함부로 반항하면 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깼냐?”

 “당... 신은 누구시오?”

 반말하는 청년의 말투보다 상대가 누구인지가 궁금한 멜버른 후작이었다. 전쟁 중에 나타난 인물에 의해 납치를 당했으니 궁금증은 배가되었을 것이다. 라이젠은 별달리 자신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태연하게 대답해 주었다.

 “내가 누굴 것 같으냐?”

 “그... 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여기는 내 레어다. 이럼 답이 됐나.”

  주춤!

 저절로 뒤로 물러서게 된 멜버른 후작의 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자신의 생애 이토록 놀란 적은 단연코 없었다. 레어라는 말은 인간이 사용하지 않는다. 인간보다 상위의 존재이자 무적의 생물체. 즉 드래곤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평생을 살면서도 드래곤을 본 적이 없다. 청년의 대답에 신빙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본능은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

 “드... 래곤!”

 “맞아., ’

 “그럴 리가!”

 “맞다니까.”

 “드래곤은 사라졌다고 했는데!”

 “네놈들 맘대로 죽었다고 하지 마라! 살아 있는 드래곤 기분 나쁘다.”

 “증... 거를!”

 마법사라 그런지 호기심과 의심이 많았다. 직접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라이젠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마법을 시전했다. 그깟 증거는 맘껏 보여줄 수 있었다.

 - 헬 파이어(지옥의 불길).

 활! 활! 활!

 극한의 열기가 주변의 대기를 뜨겁게 달군다. 지옥의 불길이 타오를수록 방안의 기온이 올라갔다. 자고 있던 마법사들은 더운지 옷을 벗어젖히려고 했다. 멜버른 후작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간단한 말 한마디로 9서클 화염계 최강의 마법을 쉽사리 시전하는 자를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되지 않았다.

 “용... 언!”

 덜! 덜! 덜!

 눈앞의 존재가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의 포악함은 인간 세상에 널리 퍼졌다. 중간계의 조율자이자 관조자라는 말이 있지만 그보다는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실험체로 쓰는 광폭한 생물체라는 말이 더 많았다.

 “저희...를 왜 잡아오신 겁니까?”

 이유라도 알고 싶은지 물어보는 멜버른 후작이었다. 라이젠도 충분히 그 맘을 이해하기에 차분하게 대답해 주었다. 부연설명이 필요하면 충분히 해줄 용의도 있었다. 앞으로 겪을 일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과한 것이 아니었다.

 “정신조작마법을 사용해서 세뇌시키려고.”

 ‘허억!’

 대놓고, 세뇌시킨다고 말을 하는 라이젠이었다. 듣고 있는 멜버른 후작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정신조작마법은 9서클 마법이다.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므로, 인간이 말을 했다면 미친놈으로 취급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드래곤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왜... 입니까? 저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잔혹한 짓을 하는 겁니까?”

 “부탁받았어.”

 “누... 구의 부탁입니까?”

 “가르딘.”

 ‘크윽!’

 마법서클이 무너져 버리는 공황상태에 들어가 버리는 멜버른 후작이었다. 전혀 생뚱맞은 인물의 이름이 드래곤에게서 흘러나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닌가! 왜 인간의 부탁을 드래곤이 들어준단 말인가! 드래곤은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하물며 전쟁터에, 왜 드래곤이 나타나서 개 같은 놈을 도와준단 말인가!

 “그럼 설마! 가르딘 백작이 드...래...!”

 “아냐”

 멜버른 후작의 말을 바로 잘라 버리는 라이젠이었다. 드래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 멜버른 후작은 또다시 의문이 들었다. 세뇌당하는 상황에 처하고서도 할 말은 하고 있었다.

 “왜 그놈의 부탁을 들어주는 겁니까? 드래곤이 인간의 전쟁에 참여해도 되는 겁니까? 그놈 때문에 핵토르 왕국이 멸망하게 생겼습니다. 하필이면 그런 놈을 도와주다니! 이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멜버른 후작은 상대가 드래곤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소리를 질렀다. 지금까지 모든 전략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핵토르 왕국을 끊임없이 농락한 가르딘이었다. 그에 대한 원한은 죽어서도 잊^ 수 없었다.

 “훗!”

 라이젠이 약간은 어이 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직 가르딘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서 모르니까 저런 되도 않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르딘의 엄청난 실력을 알고 있다면 감히 저런 말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멜버른 후작은 그런 말할 자격이 없는 놈이었다.

 “전쟁을 먼저 일으킨 주제에 말은 잘도 하는구나.”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의 일입니다! 드래곤이 간섭할 권리는 없습니다!”

 “아주 막 나가네! 어디 그럼 나도 말해 줄까! 네놈은 설마 이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그놈이 어떤 놈인 줄 알고 그런 과대망상을 꿈꾸고 있는 거냐?”

 “정면대결했다면 이렇게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그놈은 비겁합니다!”

 “전쟁은 원래 비겁한 놈이 이기는 거야! 그리고 대군을 이끌고, 소군을 못 이긴 놈들이 하는 말치고는 어이없다고 생각하지 않냐.”

 멜버른 후작은 할 말이 없어졌지만 분했다. 확실히 30만 대군을 가지고 3만의 병력을 못 이긴 것은 핵토르 왕국의 무능력을 보여준 꼴이었다. 어느 누구에게 말해도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그놈은...”

 “설사 네놈들이 정면대결을 했다고 해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냐!”

 “그럴 리 없습니다!”

 30만 대군이 정면대결로 이길 수 없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놈이 그랜드 마스터가 아닌 이상 아무리 당신이 드래곤이라고 해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랜드 마스터야.”

 “그... 럴 리가!”

 “맞아.”

 “거짓말!”

 “맞다니까!”

 “증거를!”

 “내가 졌거든.”

 “말도... 안 되는!”

 “짜식이 쪽팔리게 이런 말까지 하게 만들어.”

 드래곤이 인간에게 지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멜버른 후작은 드래곤과 조우한 것보다 더 놀라고 있었다. 드래곤을 이기는 인간이 왜 고작 변방의 영지에 살고 있단 말인가! 1천 년 전 카이로만 대제처럼 제국을 건설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럼 당신은 성룡이 되지 않은 겁니까?”

 “뭔 소리야! 내 나이가 벌써 8천 살이다! 골드 드래곤 중에서도 고룡에 속하는 나를 애 취급하는 거냐.”

 “그런 터무니없는.”

 상대가 성룡이 되지 않은 드래곤이라면 이해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보통 드래곤도 아닌 드래곤 중에서도 레드 드래곤을 제외하고 가장 강하다는 골드 드래곤의 고룡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고룡 급 드래곤은 이기는가!

 “미안해서 대충 오해를 풀게 해줬으니 이제 그만 말하고 세뇌당하게. 그놈 부탁도 있고, 덤으로 나도 연구 좀 해야 하니 말이야!”

 “안... 돼!”

 “안 되긴 명색이 내가 고룡 급 드래곤인데, 그런 말하면 실례야! 안 아프게 세뇌시킬 테니 걱정하지 말게.”

 아프든 안 아프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세뇌당하면 본래의 성격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은 죽는 것과 진배없었다. 멜버른 후작은 도망치기 위해서 발악했다.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상당히 어이 없는 라이젠이었다.

  라이젠은 망설임 없이 마력을 개방해서 멜버른 후작을 제압해 버렸다. 발악하든 말든 정신조작마법을 걸어 버렸다. 9서클의 마력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마법사라면 꿈에서라도 이룩하고 싶은 경지이긴 하지만 멜버른 후작은 미칠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현실을 감당하기에는 심력이 너무 약해졌다. 차라리 이성의 끈을 놓고 싶었다.

 ‘꿈이야!’

 ‘아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멜버른 후작에게 마지막으로 메시지 마법을 들려준 라이젠이다.

 “크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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