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딘 전기 7 건드리고고 @@[Title [email protected]@]
@@[제1장 내전의 조짐@@]
- 싸이렌 성.
코카 제국에서 두 번째로 커다란 성이다. 제국과 제국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는 요충지로 여기가 뚫리게 될 경우, 제국의 문을 적에게 헌납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코카 제국은 제국전쟁에서 밀리게 되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고, 모든 전력을 성벽 방어에 주력해야 했다.
훌턴 재상과 이지마하 공작이 최선을 다해 병사들을 다독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 때마침 하이카인 황태자가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했다.
하이카인 황태자는 주변 상황과 시세에 능한 인물이었다. 전쟁 상황이 불리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미리부터 대비를 했다. 하이카인 황태자의 등장으로 인해 불안했던 병사들의 사기는 약간이나마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하이카인 황태자는 도착 즉시 병사들에게 지원 병력이 있음을 알려 안심시키고, 곧바로 부상당한 무르카인 황제의 방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심장에 꽂힌 화살로 인해 심각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마법사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며칠 휴식을 취한 후 무르카인 황제는 겨우 의식을 회복했다.
그러나 아직은 몸을 움직일 정도로 회복하지 못했다. 육체 적인 고통도 문제지만 정신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전쟁의 후유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불과 며칠 전 까지만 해도 패도적이었던 황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무척이나 지친 황제만이 남았다.
황제의 방으로 들어온 하이카인 황태자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도 별달리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리도록 싸늘하기까지 했다.
“왔느냐?”
“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치고는 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남보다 못한 듯한 태도였다. 하이카인 황태자는 아버지의 병환보다 전쟁 상황이 더 급했다. 지금 당장 지원 병력을 데려오기는 했지만 카이로만 제국 연맹군을 막아낸 다는 것은 사실상 힘들었다. 엄청난 국력소모를 예상해야 했다.
아들의 싸늘한 표정에 무르카인 황제의 표정도 굳어졌다.
“아직 진 게 아니다.”
“졌습니다.”
“뭐라!”
“2백만이 넘는 병력을 손해 봤으면 전쟁은 이미 끝이 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카이로만 제국의 5분의 1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네놈이 감히 나를 질책하는 것이냐?”
“윽!”
무르카인 황제가 노기를 터뜨리다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열을 올리자 심장에 충격이 가해졌다. 무르카인 황제는 아픈 것보다들의 냉정한 말에 충격이 더 컸다.
전쟁 전까지 무르카인 황제의 앞에서 웃음을 보이며, 꼭 승리할 것이라고 말을 한 황태자였다. 황태자의 돌변한 모습은 낯설기까지 했다.
“제국의 힘을 모두 쏟아 부은 전쟁이었습니다. 모든 힘을 쏟아 붓고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설마 이러고도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보시는 겁니까?”
“네가 감히 나에게!”
“감히는 힘이 있을 때나 하는 말입니다. 지금 당장 아버지를 보십시오. 고작 며칠 만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패자는 말이 없습니다. 또한 황제는 모든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보니 방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 주변에 어느 누구도 자신과 황태자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조용한 방안에 두 사람이 들어 왔다.
이지마하 공작과 훌턴 재상이 들어온 것이다. 무르카인 황제가 급히 두 사람에게 황태자를 잡으라고 소리쳤다.
“이놈을 잡아라! 감히 짐에게 반역하는 놈이다!”
훌턴 재상과 이지마하 공작은 황제의 말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르카인 황제의 말에는 언제나 복종했던 이들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두 공작의 변심에 무르카인 황제는 이가 갈렸다.
“네놈들도 나를 배신하는 거냐?”
“배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닥쳐랏! 네놈들 모두 죽여 버리겠다!”
무르카인 황제의 노기가 폭발해 버렸다. 비록 병자이기는 하지만 자신은 아직 황제였다. 아들놈이 반역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믿었던 수하들이 그의 뜻을 거역하고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오늘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뭐... 라!”
“화살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습니다. 적들의 비겁한 수법에 결국 오늘 일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네... 놈이 감히!”
하이카인 황태자는 냉정했다. 지금 당장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현재 병사들의 사기를 그나마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은 적들의 교묘함을 파고드는 것이다.
황제의 죽음, 그로 인해 오열하는 황태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싸우는 황태자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무르카인 황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느꼈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태자는 슬픈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 모든 일을 자초한 것은 모두 무르카인 황제였다. 시작을 했으면 수단이 어찌되었건 결과를 얻어야 했다.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진 게 아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배웠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형과 동생들 모두 유배를 간 상태입니다. 형제들은 모두 지옥 같은 생활을 합니다. 아버지의 심기에 누가 되지 않도록 살기 위해 발악하고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떠는 사람의 마음을 아버지는 알지 못합니다.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버지는 결코 자식의 투정을 받아주지 않는 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방식이 잘못됐다고는 하지 못하겠습니다. 황제가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니 저의 판단에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네놈의 뜻을 알겠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아버지의 죽음을 딛고 일어서고 싶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왕국의 보존을 위해서 노력해야겠지요.”
쿵!
“제국이 아니라 왕국이라고! 안 된다! 어찌 코카 제국이 왕국이 된단 말이냐!”
무르카인 황제의 심적인 충격이 엄청났다. 대륙을 양분하는 제국이 이제는 왕국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것이 말이 되는 일인가! 인내할 수 없는 모멸감과 수치심이 들었다.
“아직도 상황판단이 안 되십니까! 왕국의 보존도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복수는 후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항전을 해봤자 전멸입니다. 설마 그런 결과를 바라시는 겁니까?”
“차라리 멸망을 각오하고 싸워라!”
무르카인 황제는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왕국이 될 바에는 제국전쟁에 모든 힘을 쏟으라는 태도였다. 그에 반해 황태자의 생각은 최악의 경우라도 생존이었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존심을 팔았다고 욕을 먹어도 상관없었다. 모든 것이 끝난다면 다시 시작해 보지도 못한다. 미래를 위해 황태자는 최후의 선택을 해야 했다.
“이노옴! 네놈은 그저 살기 위해 발악하는 놈일 뿐이다! 제국의 황제 중에 네놈 같은 놈은 없다!”
“제국을 말아먹은 아버지께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닙니다.”
황태자는 여전히 음성의 고저가 똑같았다. 말투만 들어보면 화를 내는 사람 같지 않았다.
하이카인 황태자가 이지마하 공작과 훌턴 재상에게 눈빛을 주었다.
“편안히 보내드리게.”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는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듯이 방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남게 된 훌턴 재상과 이지마하 공작이 무르카인 황제에게 다가갔다.
“언제부터냐? 감히 짐을 배신하고 무사할 성싶은 것이냐?”
홀턴 재상이 안타까운 눈으로 황제를 보았다. 세상을 모조리 불태울 정도로 야심이 강했던 황제는 이제 사라졌다. 그저 힘없이 소리를 지르는 나약한 인간만이 남았다.
“힘을 잃었으면 깨끗하게 끝내야 합니다. 이제 그만 쉬십시오.”
“닥쳐... 헛!”
화살촉이 어느새 황제의 심장을 가격했다. 이지마하 공작이 빠르게 손을 썼다. 무르카인 황제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을 치켜뜨다가 절명해 버렸다. 한 세대를 풍미했던 패황의 죽음치고는 무척이나 초라했다.
하이카인 황태자는 무르카인 황제의 죽음을 그 즉시 귀족, 기사, 병사들에게 알렸다. 카이로만 제국이 무르카인 황제를 죽이기 위해 비겁하게 독을 사용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이카인 황태자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내비췄다.
모든 병사들은 황태자의 결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 무너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위축되었던 사기가 다시 살아 올랐다.
황태자는 곧바로 전략회의를 수립하기 위해 훌턴 재상과 이지마하 공작을 불렀다. 하이카인 황태자는 지도를 펴서 반으로 갈라 보았다. 코카 제국을 반으로 갈랐다. 그럼에도 여전히 거대한 제국이었다. 반이라고 해도 일반 왕국의 서너 배는 족히 되었다.
“한번은 전투를 치를 필요가 있겠지.”
“그렇습니다. 아직 우리가 힘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결국 무너지게 될 거야. 그보다 왜 놈들의 진격이 늦어졌지.”
싸이렌 성까지 병사들이 모두 도착할 정도로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카이로만 제국이 추적했다면 싸이렌 성이 함락되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카논 능선에서 벌어진 기습공격에 의해 카이로만 제국의 2황자가 죽었다고 합니다. 사실인지 확인이 되지 않아 조사 중이었습니다.”
“2황자라면 지니언 황자를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적 제국의 황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검술 실력과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입니다.”
‘음!’
카논 능선에 매복한 전력 가지고는 급습했던 적 제국의 황자를 죽일 수가 없다. 승패가 기울어 가는 전투에서 황자가 죽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하이카인 황태자는 무언가 내막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내분이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아주 좋은 기회야!”
적의 내분은 아군에게 당연히 유리하다. 최대한 전투를 치열하게 만들어 놓아서 적 제국의 내분을 공론화하는 것도 필요할지 몰랐다. 협상을 유리하게 만들어 가기 위해서 하이카인 황태자는 끊임없이 고민을 했다. 쉽게 나서지 않는 신중한 성격의 황태자다웠다.
카이로만 제국의 다마트 3황자는 카논 능선에 다다랐다. 제국의 모든 전력이 벨로인 강을 넘어 싸이렌 성으로 가 있는 상황이었다. 현재 이곳에는 다마트 황자와 네벨리언 공작이 조사 중이었다. 다마트 황자는 조사에 신중을 기하면서 철저하게 분석을 해나갔다. 카논 능선에 매복한 병사들의 상태와 능력을 철두철미하게 검토하였다.
“이상하군요! 이 정도의 병력에 어떻게 형님이 당했죠?” 다마트 황자의 말에 네벨리언 공작이 그때의 상황을 생각 하며 분노했다. 일급의 어쎄신들이 병사들 사이에 숨어서 황자를 노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 사실을 말할 때가 아니었다.
때마침 타이가라 공작이 조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타이가라 공작은 각 왕국의 협조를 얻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3황자님! 코카 제국의 중요 지점에 대한 지도를 항복한 왕국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일부러 지도를 왕국에 흘렸다는 뜻인데, 코카 제국이 과연 그런 일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을까! 이건 설마!”
다마트 황자와 타이가라 공작은 네벨리언 공작이 듣는 장소에 거리낌 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상황이 심각함을 보여주었다. 사실이라면 이것은 절대 평범한 일이 아님을 강조했다.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증거가 너무 명확합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다마트 황자는 그럴 리가 없다고 분명하게 못을 박았다. 그러면서 더 이상 조사를 할 수 없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대로 더 파고들게 되면 제국의 기틀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네벨리언 공작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됩니다! 3황자님도 이제 사실을 알 때가 됐습니다!”
네벨리언 공작은 그때의 상황을 모두 3황자에게 설명했다. 어느 정도는 3황자도 의심을 하고 있었던 네벨리언 공작이었다. 그러나 조사를 이처럼 정확하게 하는 인물이라면 그렇지 않다고 확신을 했다. 자신이 벌인 일을 굳이 들춰내는 사람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네벨리언 공작님! 이 사실을 밝히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설마 제국이 분열되기를 원하시는 겁니까?”
“그렇더라도 위선에 가득찬 자가 황제가 되는 것은 막아야합니다!”
네벨리언 공작의 의지는 너무 확고했다. 다마트 황자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조사를 하되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전혀 몰랐다는 듯했다. 모든 정황을 확실하게 조사한 자의 표정치고는 이상하기는 했다.
“안 됩니다! 사실이라고 해도 증거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러쉬 형님은 단 한 분밖에 없는 형님이십니다! 동생인 제가 그 사실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다마트 황자 역시 불행한 일이지만 형제간의 일을 폭로할 수 없다고 단정을 지었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사실이 제국에 흘러 들어가면 내분은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제국을 지탱하는 공작가들이 반목하는 일이다. 결코 그냥저냥 끝나지 않을 것이다.
네벨리언 공작의 말에서 불을 뿜었다. 분노가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럼 지니언 황자님은 다마트 황자님의 형님이 아니십니까! 억울하게 돌아가신 지니언 황자님의 한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연로하신 황제 폐하께서 아시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습니까! 폐하께서 큰 충격을 받으실 것입니다!”
“썩은 살은 도려내야만 합니다. 이대로 놔두면 모든 것이 썩어갈 뿐입니다! 다마트 황자님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3황자님마저 외면하시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립니다!”
“저는 권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건 저도 압니다. 그저 조용히 살아가고 싶으신 황자님에게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저도 괴롭습니다. 하지만 다마트 황자님은 제국의 황자이십니다. 이대로 위선자에게 대륙의 운명을 맡겨야 하겠습니까!”
다마트 황자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네벨리언 공작의 말에 공조를 하는 듯한 인상을 보였다. 하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표정이었다. 네벨리언 공작은 다마트 황자가 어느 정도 넘어 왔다는 것에 다소 안심했다.
다마트 황자가 3명의 황자 중에서 가장 적은 세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동안 전쟁에서 보여준 모습을 보면 절대 자질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네벨리언 공작은 2황자가 죽으면서 3황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병사들에 대한 신뢰와 작전 수행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부디 올바른 결정을 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혼자 있고 싶군요.”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네벨리언 공작이 바로 자리를 떴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마이어 공작에게도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2황자를 지지하던 마이어 공작과, 네벨리언 공작, 그리고 타이가라 공작의 세력까지 합치면 결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네벨리언 공작이 가고 난 후 타이가라 공작과 남게 된 다마트 황자는 비통한 표정에서 점차 신색을 회복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단순하군.”
“손자처럼 아끼던 것이 사라졌으니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겠지.”
“네벨리언 공작을 수중에 넣었으니 이제 3황자님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조용! 아직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시기는 아니다. 적어도 고민하는 척은 해줘야겠지. 준다고 덥석 무는 것은 모양새가 나지 않거든.”
3황자는 여유로웠다. 그와 동시에 섬뜩한 한기를 머금고 있었다. 사람의 심리를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는 다마트 황자의 무서운 심기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진면목은 타이가라 공작을 제외하고 아무도 알지 못한다.
트윈유니크 협곡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전쟁이 점점 장기전이 되는 것은 협곡의 위에 자리한 핵토르 왕국의 저항이 너무 거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적인 열세를 쉽게 만회하지는 못했다. 점점 줄어드는 병사들과, 떨어지는 체력, 소모 되는 식량 등 열악한 환경에 의해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전쟁의 양상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코워드 후작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 같았다. 그렇기에 더욱 열을 올렸다. 자신이 계획하고, 실행한 일들이 모두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실패했다. 따라서 결과만을 얻기 위해 집착하고 있었다.
전쟁이 장기전이 되고 무능력한 것이 까발려지자 초조해 지는 코워드 후작이었다. 물론 자신의 옆에 있는 누구도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스스로 알고 있을 뿐이다.
“지겨운 놈들!”
핵토르 왕국 놈들이 지겹기까지 했다. 살길을 열어 주겠다는 데 죽을 때까지 항전하다니 정말 앞뒤가 꽉 막힌 놈들이었다. 속전속결로 끝날 것 같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피해가 장난 아니었다.
“죽겠다면 끝장을 내주마!”
코워드 후작도 오기가 있었다. 전쟁 수행능력은 떨어질지 몰라도 자존심만큼은 하늘을 찔렸다. 물론 그 자존심이 더 높은 자에게는 한없이 약해지지만 약자에게는 끝도 없이 강해지는 능력이 있었다.
어차피 사이너스 국왕을 죽인 공적을 세웠다. 여기서 핵토르 왕국군을 전멸시켰다는 공적만 쌓는다면 코워드 후작의 미래는 탄탄대로다. 잘하면 핵토르 왕국을 함락해서 대공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었다. 대공이란 한나라의 왕을 뜻한다. 물론 제국의 속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엄연히 왕이었다. 대접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누구도 함부로 자신을 대할 수 없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다.
협곡 위에서 수성하는 멜버른 후작은 상당히 지쳐 있었다. 육체적인 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병사들에게 죽을 때까지 싸우라고 했지만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핵토르 왕국이 정비할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을 버는 것이 다였다.
“남아 있는 병력은?”
“1만 6천이 조금 넘습니다.”
“허!”
탄식이 절로 나왔다. 발키리 영지에 들어오기 전까지 30만 대군이었다. 30만에 달하는 대군이 이제는 1만이 조금 넘게 남았다.
전멸이라는 말이 전혀 틀리지 않은 상황에 처했다. 대륙 전쟁사에 길이 남을 망신이었다. 고작 2만의 병력을 어찌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이런 치욕적인 결과를 얻었다. 사이너스 국왕이 죽기 전까지 가르딘을 원망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 또한 멜버른 역시 가르딘에 대한 원한이 컸다. 가르딘만 아니었다면 이 전쟁은 이겼을 것이다. 대핵토르 제국을 건설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았다.
“가르딘! 네놈은 끝까지 핵토르 왕국을 우롱하는구나!” 트윈유니크 협곡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가르딘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핵토르 왕국을 궁지로 몬 장본인이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농락당했던 핵토르 왕국으로서는 분통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했다. 이제는 핵토르 왕국을 맞상대로 인정하지조차 않는다는 뜻으로 여겨졌다.
“놈이 나타날 때까지 항전한다. 핵토르 왕국이 아직 건재 하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주마!”
가르딘이 나섰다면 전투는 금방 끝났을 수도 있었다. 가르딘이 나서지 않자 핵토르 왕국의 결의만 더 높아지는 결과가 나왔다. 코워드 후작으로서는 결코 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애꿎은 자신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멜버른 후작이 밖으로 나왔다. 전투는 여전히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죽고 죽이는 전투 속에 병사들은 혼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미친 듯이 휘두르고, 찌른다. 이대로 죽는 다고해도 고통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전쟁이라는 마약에 취해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모두 결사항전해라! 우리는 대핵토르 왕국이다!”
채채챙! 채챙! 채채채챙!
병장기와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치열하게 울릴 때 가르딘은 막사 안으로 돌아와서 쉬고 있었다. 며칠 동안 라이나의 지극 정성을 맛보아서인지 무척이나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코카 제국과의 전쟁이나 코워드 후작의 똥줄 타는 상황과는 대조적이었다. 누가 이 사람이 전쟁을 하고 있는 제국의 기사라고 보겠는가! 실없어 보이는 중년남이 되어서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크하하하!”
“이거 정말 멋있는데, 재미도 있고.”
배를 잡고 웃는 가르딘이었다. 얼마나 재밌는지, 발을 동동 구른다. 백작의 작위를 가진 귀족치고는 상당히 저급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귀족이라는 직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가르딘이 보는 것은 수정구였다. 보통의 수정구가 아니라 마법적인 요소가 부여된 마법아이템이었다. 수정구는 보이는 장면이나 상황을 저장해 주는 영상수정구였다. 영상수정구는 7서클 마법 아이템이다.
실제적으로 위력을 가진 마법아이템이 아니기에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살아 움직이는 영상을 저장하는 놀라운 마법 연구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7서클 마법수정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보다 상위의 마력을 가져야 한다.
현실적으로 아무런 위력도 없는 마법수정구를 누가 힘들여서 만들겠는가! 그것도 만들기가 쉬운 것도 아니고 7서클이라는 엄청난 마법력을 쏟아 붓고 말이다. 드래곤처럼 마법력이 한도 끝도 없고, 시간이 남아도는 존재들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처럼 유한하고, 욕심만은 존재들은 만들 엄두도 내지 못한다.
“역시 드래곤이 만들어서 그런지 엄청나군!”
가르딘은 수정구를 보며 정말 신기해했다. 영상을 저장하다니 정말 놀랍고, 획기적인 일이 아닌가! 더군다나 영상수정구의 용량도 엄청났다. 최소 7일간의 영상이 저장 가능하며, 마법 인첸트 부분을 몇 번 누르면, 다시 지우고, 복사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용도로 사용이 가능한 복합마법 영상수정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니 라이젠님이 요즘에 안보이네.”
다크호스를 관리하는 역할을 마무리하고 난 후 레어로 돌아갔다. 그 뒤로 라이젠을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안젤리카를 위한다고 유희생활까지 따라온 노인네가 너무 조용하니 그게 조금 수상하기는 했다.
가르딘이 혼자서도 잘 놀고 있을 때 막사 안으로 필리언, 갈라, 유타가 들어왔다. 가르딘이 누워 있기만 하자 모든 일을 동기들이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스필언과 미토스가 없자 투르에 대한 통제까지 자신들이 해야 했다. 무척이나 고단한 일의 연속이었다.
차라리 전투를 치르는 게 투르를 관리하는 것보다 쉬울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이 모든 일의 주관자인 가르딘이 막사 침상에서 데굴거리며 놀고 있자 분통이 터졌다. 평소 노는 일에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동기들이었다.
가르딘과 같이 놀았으니 그 습성이 어디 가지 않았다.
“야, 인마! 고생하는 우리가 불쌍하지‘않냐?”
“전혀.”
“네놈은 양심도 없어! 어떻게 우리들만 고생시킬 수가 있는 거나! 네놈이 그러고도 사람이냐!”
“당연.”
가르딘은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동기들을 부려 먹는 것에 대해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태도였다. 가르딘의 대답도 너무 성의 없었다. 입가에 살며시 짓는 미소가 어찌 나 가증스러운지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동기들이었다.
“주먹을 부르는 얼굴을 가진 놈이!”
“내가 주먹을 부르는 얼굴이면, 너희들은 브레스를 부르는 얼굴이냐! 안젤리카가 요즘에 브레스 연습하고 싶다고 하던데!”
“뭐야!”
“따뜻한 브레스 한 방 맞고 싶으면 연락해.”
브레스가 따뜻하면 용암은 미지근하냐는 말을 하고 싶은 동기들이었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역시나 가르딘은 간신의 대가였다. 상대의 약점을 정확히 파고들어 어찌하지 못하게 만드는 데는 도가 텄다.
“그리고 나는 너희들이 오러 마스터가 되게 해준 위대한 마스터다! 그런 나에게 이 정도의 봉사는 당연하지.”
“생색은!”
가르딘은 아니꼬울 정도로 생색을 냈다. 그리고 효과는 있었다. 가르딘의 말대로 위험이 있기는 했지만 오러 마스터가 되게 해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잊지는 않았다. 필리언, 갈라, 유타도 가르딘이 농땡이 피는 것이, 일부러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웬만하면 들어주었다.
“그보다 이것 좀 볼래.”
가르딘이 수정구를 동기들에게 보여주었다. 수정구 안에서는 사람과 배경이 움직였다. 동기들도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이런 것은 필리언, 갈라, 유타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와! 이건 네 저택이잖아!”
“어때! 신기하지 !”
“그러네.”
“이거 어디서 났냐?”
“안젤리카한테 부탁했지.”
“우리도 달라고 할까.”
“안 돼! 이미 늦었어, 하나밖에 없는 한정수량판매였거든.”
“쳇! 치사하게.”
“그것보다 여기서부터 재밌는 장면이다. 한번 봐라!”
가르딘이 다음 영상을 틀어 주었다. 영상에는 4명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옷을 갈아입는 모습에서 전투를 치르는 모습까지 찍혀 있었다. 언제 이것을 찍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수정구 안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이 모두 자신들이라는 것에 있었다.
필리언, 갈라, 유타의 표정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그날의 일이 생생하게 다시 떠오른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것은 자신들이 옷을 입기 전부터 입을 때까지 그리고 활동하는 움직임이 모두 저장되어 있었다. 사이너스 국왕과 일전을 벌인 파이브 스타즈의 기록 영상이었다.
“어떻게?”
“어때 아주 흥미진진하지.”
“개자식!”
“어허! 영주에게 개자식이라니!”
“미친놈, 죽어랏!”
“하극상이야!”
“닥쳐!”
“왜 이래! 너희들의 영웅담 일대기를 담아 놓으려는 나의 정성을 몰라주다니!”
“시끄러! 이놈 밟아!”
영주고, 백작이고 뭐고 없었다. 동시에 달려드는 동기들이었다. 가르딘은 잽싸게 한곳으로 방향을 잡고, 튀었다. 동기들은 처음부터 가르딘을 노리지 않았다. 동기들이 노린 것은 영상수정구였다. 우선은 저것을 박살내는 게 먼저였다.
“어!”
가르딘은 흠칫하는 사이에 영상수정구가 부서질지 몰랐다. 7서클 마법 수정구의 가치는 값을 따질 수 없다. 또한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파이브 스타즈의 원본이었다. 가르딘은 순간적으로 짱구를 돌렸다.
“그거 박살내면 후폭풍은 책임 못 진다.”
“뭐야?”
“내가 믿을 만한 사람에게 복사본을 넘겼지. 나의 신상에 이상이 있을 시 복사본을 너희들의 가족과 모든 사람에게 공개하게 되어 있지. 더불어 안젤리카가 공들여서 만든 것을 너희들이 박살내었으니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지는 않겠지.”
“커억!”
필리언, 갈라, 유타 모두 오러 플로전(주화입마)에 걸린 것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가르딘의 수법은 정말 놀라웠다. 동기들이 미처 대처하기도 전에 기습한 꼴이었다. 필리언이 얌전히 수정구를 가르딘에게 건네었다.
가르딘은 수정구를 받음과 동시에 자신의 등 뒤로 유타와 갈라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에서 몸을 잡은 유타와 갈라로 인해 가르딘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랜드 마스터의 힘을 발휘하면 풀려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우선은 수정구의 안전을 확보해야 했다.
“뭐... 하는 거야?”
“알잖아! 우리가 그냥 넘어갈 것 같아!”
“신발 벗겨!”
“너... 설마! 그런 극악한!”
가르딘의 치명적인 약점.
가족 이외에 가장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발바닥, 간지럼에 대한 면역력 부족이었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 없는 무척이나 극악한 수법이었다.
“크... 하... 하....!”
“이... 대로... 내가 굴복할 것 같아!”
“어디 참아 봐라!”
“아! 웁! 하하하하하하! 그만! 그만!”
참지 못하고 항복하고만 가르딘이었다. 일단은 수정구를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절대 보여주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라이나와 브리안을 걸고 한 약속이라 가르딘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말았다.
가르딘과 동기들의 노닥거림이 끝나고 난 후였다. 동기들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가르딘과 말장난을 하느라 왜 막사 안으로 들어왔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본질을 잊어버리고 여기서 왜 개지랄을 했는지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역시나 가르딘 때문이었다. 가르딘의 이상한 짓거리에 휘말리니 빠져나가지 못하고 동조해 버리고 만 것이다. 이건 모두 가르딘탓이었다. 동기들 모두 책임은 전혀 지지 않으려고 하는 무사안일주의의 나태한 녀석들이었다.
“2황자가 죽었데.”
“뭐?”
순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가르딘이었다.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면 천리를 내다볼 수 있다고 한다. 쥐새끼가 작게 방귀 뀌는 소리까지 모두 들을 수 있는 가르딘이 헛소리를 들었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르딘은 다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멀쩡한 황자가 죽을 리 없다고 보았다. 2황자라면 건강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어린 시절 우량아 귀족선발대회에 나갔을 당시 가장 건강한 황자로 꼽히기도 했다.
그런 황자가 다 이겨 놓은 전쟁에서 왜 죽는단 말인가! 죽을 정도의 위험한 전투에는 절대 나가지 않는 것이 상식을 가진 황자들의 태도였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2황자가 죽었다고.”
동기들은 별달리 심각하지 않았다. 황제가 죽건. 황자가 죽건 자신들하고 무슨 상관인가! 누가 죽든지 말든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죽고 난 후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동기들은 권력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권력에 관심 없는데, 황제고 나발이고 뭐가 문제이겠는가! 그래서 별달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제국에 충성하고, 황제에게 목숨을 초개와 같이 걸어야 하는 기사의 정신으로서는 절대 추천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무관심이 얼마나 무서운 일을 초래하는지 한번쯤은 호되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걸 왜 이제 말해!”
“말하려고 했는데, 네가 먼저 말했잖아!”
“이렇게 중요한 일을 내가 먼저 말했다고, 지금 말해! 아이고! 뒷골이야!”
띠잉!
뒷골이 무지하게 당기는 가르딘이었다. 동기들의 무관심이 가르딘의 허용 수준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그것보다 왜 2황자가 죽었는지를 알아내야 했다. 죽음에도 종류가 있다.
그냥 자연사라면, 별다른 문제는 없다. 당연한 수순으로 1황자가 황위를 물려받게 된다.
하지만 자연사가 아닌 누군가의 개입으로 인한 죽음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더군다나 가장 의심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2황자 죽음 당시의 정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가르딘도 쉽사리 눈치 챌 수 있는 일이었다. 하물며 2황자를 보필하는 공작들의 경우 어떻게 생각할까! 결론은 쉽지 않게 흘러갈 수 있다.
“어떻게 죽었는데?”
“그걸 왜 우리한테 물어.”
“소식을 전달한 놈들이 알지, 그럼 내가 아냐!”
“우리도 몰라. 그냥 2황자가 죽었다고 연락이 왔을 뿐이야.”
“젠장! 되는 일 없네.”
“뭐가 문젠데?”
“생각 좀 해봐라! 2황자가 죽고 나서 1황자가 물려받으면 문제가 없지만 2황자가 만약 암살당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2황자를 따르던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내전이 발생할지도 모르잖아!”
“듣고 보니 그렇네.”
동기들도 그제야 약간은 심각해졌다. 내전은 더러운 진흙탕 싸움이다. 같은 제국 내 귀족들끼리 피를 흘리고, 싸우는 전투가 깨끗할 수는 없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제국의 귀족과 병사들이 죽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도 선택을 해야 하는 건가?”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 우선은 정보를 모으며 기다려 봐야지.”
내전에서는 먼저 나대면 불리하다. 내전이 치사하고 더러운 이유는 명예보다는 자신들의 권한 유지에 혈안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불리한 상황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배신도 서슴없이 하게 된다. 따라서 먼저 나섰다가 잘못되면 모든 귀족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물론 너무 늦게 움직여도 안 된다. 상황파악 제대로 못 하고, 계속 기다리다가는 가장 먼저 당할 수도 있다. 내전에서는 서로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눈치싸움을 해야 한다.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륙정벌을 위해 싸우는 것은 대의와 제국의 이익을 위한다지만 제국의 내전은 서로 출혈만을 요구하게 된다. 잘못해서 내전이 장기전이 되고,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될 경우 제국의 기틀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나 좀 나갔다 와야 겠다.”
“어디 가게.”
“정보를 모을 수 있는 곳이 우리 영지에서 어디뿐이겠냐.”
“듣고 보니 그렇군.”
여인은 앞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인간을 보자 서서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한참 전투 중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한가한 면상이었다. 어떻게 자기 영지 내에서 전쟁을 벌이면서 저런 태평한 모습을 할 수 있는지, 뇌를 한번 열어 봤으면 하는 심정이다.
테이란은 제법 뛰어난 여인으로 평가받는다. 인포메드에서 사상 최연소로 지부장에 오른 것만 해도 대단한 능력을 가진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직관력과 상황판단, 사람의 성격과 능력을 평가하는 데는 탁월한 테이란이 눈앞에 있는 인간에게는 어떤 평가도 내리지 못했다.
후르르록! 후르르특!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소리를 내는 가르딘이었다. 테이란은 왜 자꾸 찾아와서 비싼 차를 내주어야 하는지 이해를 못 했다. 그렇다고 제국의 백작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열불 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차를 마실 때 찻잔을 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은 테이란이었다. 그걸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가 제집이야! 왜 저렇게 느긋한 거야!’
가르딘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동기들에게 2황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냥 산책 하다 들른 것처럼 보였다.
“영주님! 여기는 무슨 일이신지요?”
“그냥.”
빠직!
테이란의 고운 미간에 힘줄이 불쑥 솟았다. 제국의 백작이 전쟁 중에 놀러 나왔다는 것을 어떻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는가! 더군다나 핵토르 왕국을 상대로 무서운 심계를 부린 인물이었다.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를 못했다. 조사해 본 정보에 의하면 부인과 딸에게는 팔불출 그 이상이 아니었다. 한 단면만 보면 능글맞은 아저씨가 맞지만 그가 해온 일을 보면 그건 또 아니었다. 사람 참 판단하기 애매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차가 괜찮군.”
“그 말씀은 얼마 전에도 했는데요.”
“그런가! 나이가 드니 기억력이 떨어져서.”
“오러 마스터가 되면 청년의 건강으로 되돌아간다고 하던 데요.”
오러 마스터가 되면 젊어진다. 그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왜 사람들이 오러 마스터를 부러워하는가! 그것은 압도적인 강함도 중요하지만 회춘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기도 하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반증이었다.
“한 가지 비밀을 알려줄까.”
넌지시 말하는 가르딘이었다. 테이란은 한순간이지만 진중함이 묻어나오는 가르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말았다. 집중하여 대답을 들으려는 테이란에게 가르딘이 한마디 했다.
“무슨 비밀인데요.”
“그냥 말하면 재미없고, 내가 먼저 말할 테니 지부장도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좀 해주지. 물론 어려운 부탁은 아니야.”
“그냥 안 들을래요.”
“어허! 이제까지 내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나만의 비밀이야. 이런데도 듣고 싶지 않아.”
테이란은 듣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렇지만 아주 조금 궁금하기는 하다. 능글맞은 영주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지만 한번 들어보기로 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말해드릴게요.”
“편할 대로.”
“그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비밀을 말해 보세요.”
“나 말이야! 아무래도 그랜드 마스터인 것 같아.”
띠잉!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안 나온다. 오러 마스터도 아니고, 그랜드 마스터라고 말한다고 그게 사실이 될 수 있는가! 말로는 무슨 말을 못 할까! 가르딘으로서는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신위를 발휘하기 전까지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서 탈이지만 말이다. 물론 사실이 밝혀지기를 원해서 하는 말도 아니었다.
“그럼 저는 드래곤인데요.”
“농담이다.”
“저는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알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거니, 말해 줬으면 좋겠어. 2황자님의 죽음이 어떻게 된 일이지?”
역시 그냥 놀러올 사람은 아니었다. 분명히 숨은 뜻이 있었다. 테이란도 이미 집히는 바가 있었다. 2황자의 죽음은 현재 비밀도 아니었다. 전쟁 중에 벌어진 사고로 죽은 것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인포메드에서 2황자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진행했다. 알려진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제국에서 공표한 정도의 정보를 모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전말에 움직이는 귀족들의 분위기가 달라졌기에 사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하고 있기는 했다.
테이란은 전해진 정보만 알려주었다.
“전투 중에 사고로 돌아가셨다고만 전해졌어요.”
“그럼 전적으로 사고인 건가.”
가르딘은 전투 중에 죽었다는 것이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2황자의 곁에는 네벨리언 공작이 버티고 있다. 네벨리언 공작은 무사한데 2황자만 죽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건 알 수 없어요. 아직도 그 부분에 대해서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사고가 아닐 수도 있겠군.”
“그건 모르죠.”
아직은 전쟁 중이었다. 전쟁 중에 벌어진 일을 공론화해 봤자 제국으로는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모든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조사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컸다. 제국의 논공행상이 모두 끝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좋은 정보 고맙다. 나중에 식사나 같이 하지.”
“유혹하는 건가요?”
“그럴리가! 난 이미 대륙제일의 미인을 아내로 두고 있으니. 아무리 내가 잘생기고, 위대해 보여도 그 마음 접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거야.”
“영주님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게 오히려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네요.”
몇 번의 만남으로 인해 가르딘과 테이란은 꽤 가까운 말투를 보이고 있었다. 전에는 테이란이 가르딘을 조금 두려워했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모습에서 절대자의 기운을 느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당시에 느꼈던 것들이 모두 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중에 보지.”
가르딘이 나가고 난 후 테이란은 좀처럼 마음을 다잡지 못 했다. 공공연히 대륙제일의 미인이라고 말을 하는 가르딘이었다. 아내를 그처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니 그 배짱 한 번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부인은 좋겠네.’
어느 여인이라도 좋아할 말이다. 대륙제일의 미인이라는 말이 낯간지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여인은 항상 그 말을 좋아한다. 테이란도 마찬가지였다.
가르딘은 인포메드 지부에서 막사로 돌아오는 내내 찜찜함을 느꼈다. 2황자가 죽음으로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1황자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3황자의 경우, 1황자와는 세력경쟁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3황자를 지지하는 타이가라 공작만으로는 대륙최고의 공작인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을 견제할 수 없다.
“타이가라 공작은 결코 쉽사리 물러날 사람이 아닌데.”
발키리 영지에 오기 전에 만난 타이가라 공작은 숨기는 게 무척이나 많은 인물이었다. 뒤가 구릴수록 숨기는 게 많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몸 안에 오러 마스터 상급의 기운을 숨기고 있을 정도였다. 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타이가라 공작이기에 더욱더 의심이 가는 가르딘이었다.
‘2황자를 죽이고, 그 죽음의 흑막에 1황자가 있음을 알려서, 2황자의 세력을 3황자가 흡수하게 되면.’
가르딘은 그냥 한번 유추해 보았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현명하다. 권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에 자연스러운 예측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억측인가!’
유추를 하고서도 참 황당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3황자의 모습을 평가하면 절대 아니었다.
“모르겠다. 내가 머리 아프게 생각해 봤자지.”
내전이 발생하면 어느 쪽이 강한가를 생각해 보고, 강한 쪽에 붙을 생각이었다. 이유가 어찌되었던 살아남아서 라이나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했다. 현재로서는 가르딘이 선택할 수 있는 곳은 1황자였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라는 압도적인 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두 신성이 함께하고 있다. 1황자의 세력이 다른 두 황자의 세력보다 훨씬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타이가라 공작과 네벨리언 공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시각 라이젠은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고철 덩어리를 놓고, 분석해 놓은 자료를 옆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가르딘의 발키리 영지에 타이탄의 침입이 있은 후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자지 않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드래곤의 놀라운 집중력은 인간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수면기가 길고, 나태하다는 인간의 시각을 뒤집는 놀라운 일이었다.
“오! 마법력을 이런 식으로 움직일 수도 있단 말이지.”
연구하면 할수록 더없이 어려운 타이탄의 기술이었다. 특히 핵심동력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마법력의 사용은 라이젠으로서도 상당히 어려웠다. 타이탄의 힘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중추적인 능력 또한 컨트롤하기 힘들었다.
인간의 자율적인 힘만으로는 거대한 기계체인 타이탄을 완벽하게 움직일 수 없다. 더군다나 오러전이라는 특수한 능력은 어떤 방식으로 이용이 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인간의 상상력이 놀랍기만 하구나!”
인간의 탐구력과 상상력은 드래곤의 상식을 뛰어넘고 있었다. 사실 인간의 몸은 드래곤이나 엘프, 기타 몬스터보다 약하다. 어쩔 수 없이 강해지기 위해 주변 사물을 이용하거나, 자신의 힘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수련을 한다.
살기 위해서 노력했던 인간들은 드래곤의 힘을 초월하는 병기까지 만들어내었다. 그것이 마로 마도병기의 최종 진화 형태인 타이탄이었다.
물론 인간 본연의 힘만으로 드래곤을 능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타이탄이라는 병기를 이용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외적인 인물이 라이젠의 옆에 있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강인함. 이성을 잃었을 때 보여주었던 그 힘은 고룡의 드래곤조차 떨리게 만들 정도였다. 가르딘이 팔불출이 아니라 야망을 가진 인간이었다면 대륙의 드래곤은 씨가 말랐을지도 모른다.
‘나랑 같은 과라 다행인 건가!’
잠시 타이탄을 연구하다 다른 길로 빠져들은 라이젠이었다. 그렇다고 가르딘을 자신이 임의적으로 제어할 수도 없다. 그저 옆에서 가르딘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다. 그가 불순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유사인종(?)은 아니고, 유사성격을 가졌기에 믿고 싶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고, 여기의 핵심동력은 왜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거지.”
드래곤의 체면이 있지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웬만하면 스스로 해결하고 싶은 열망을 느꼈다. 왜냐! 드래곤의 체면은 무엇보다 소중하니까! 드래곤이 모른다고 하면 체면 손상이었다.
“아! 정말 모르겠다!”
머리를 부여잡고, 한탄을 해보는 라이젠이었다. 인간도 만드는 것을 드래곤이 못 만든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라이젠이 간과한 것은 마도시대의 연금술사들은 드래곤의 영역을 초월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가르딘이 부숴 놓은 타이탄, 가이안은 보통의 타이탄이 아닌 플레튬급의 타이탄이다. 일반적인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쉽사리 풀 수 있었으면, 마도시대의 드래곤들도 만들었을 것이다. 현재의 라이젠이 간단히 풀 수 있다면, 그 시대의 드래곤은 멍청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말도 안 되는 억지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슈피리어 급의 타이탄도 아니고, 고작 플레튬 급을 분석하지 못하다니 말이 되지 않아!”
생각하는 급이 다른 라이젠이었다. 실력을 떠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최강의 병기를 다시 한 번 재현해 보고 싶었다. 자신의 실력은 생각하지 않고, 목표가 너무 높았다. 차라리 노멀 급부터 차근차근했으면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타이탄 분석에 목을 매는가! 이유는 체면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안젤리카 때문이었다.
딸 앞에서 타이탄을 완벽 분석하여 아버지의 위대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해 버렸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다. 드래곤의 체면뿐만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체면도 중요했다. 가끔씩 안젤리카가 찾아와 “분석 다했어요?”라고, 그냥 한번 물어보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째쯤 되니까 엄청난 부담이었다.
“안 돼!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지켜야 돼!”
여기서 아버지의 권위가 훼손되면 다시 회복하기 힘들어 진다. 딸에게는 가장 멋지고, 훌륭한 아버지가 되고 싶다. 그것이 라이젠의 소망이었다.
“반드시 해결한다!”
다짐 또 다짐했다.
휘청!
“황제 폐하!”
“괜찮다.”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리는 몸을 파이니 수목에 기대는 코스트너 황제였다. 그는 지니언의 죽음을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카이로만 제국의 기사다운 기상을 지닌 아이였다. 이대로 허망하게 죽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황궁으로 지니언의 시신을 가지고 온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네벨리언 공작이었다. 제국전쟁에 참여해야 하는 그였지만, 현재 전쟁보다 2황자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2황자의 죽음을 코스트너 황제가 알아야 했다.
코스트너 황제는 2황자를 보필하는 네벨리언 공작을 보았다. 아들을 곁에서 보필해 줘야 하는 사람이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이 괘씸했다.
“그대는 멀쩡하군!”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지은 죄는 어떻게 해도 씻을 수 없습니다!”
네벨리언 공작은 서슴없이 머리를 바닥에 찍었다. 황제의 앞이기는 하지만 제국의 5대 공작 중에 한 명이었다. 그의 힘과 명성을 생각하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코스트너 황제는 네벨리언 공작의 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네벨리언 공작의 행동에 차분하게 사건의 진위를 캐묻는 코스트너 황제였다. 2황자의 죽음에 무언가 다른 흑막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벨리언 공작은 카논 능선 습격 당시의 전말을 올렸다.
최대한 분기를 삭이며 차분하게 설명을 해 나갔다.
“어쌔신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코카 제국의 어쌔신인가?”
“코카 제국으로서는 절대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네벨리언 공작은 그동안 자신이 모은 정보와 2황자의 죽음에 관련한 일들을 코스트너 황제에게 전했다. 코스트너 황제는 설명을 들을수록 깊은 수렁에 빠진 듯했다. 힘없어 보이는 노안이 더 없이 흔들렸다.
“갑자기 나타난 지도, 그리고 특급에 해당하는 어쌔신의 출현 모두 2황자님을 노렸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건 자네의 심증일 뿐이네.”
코스트너 황제는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함부로 결단을 내리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대했다.
“사고일 수도 있으니 아직은 단정을 내리지 않겠네. 그러니 이만 물러가게.”
네벨리언 공작은 코스트너 황제의 말에 조용히 물러났다. 더 이상 강조를 하면 수상하게 들릴 수 있다. 일단, 심증을 말해 의심을 증폭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네벨리언 공작이 물러간 후, 코스트너 황제의 심기에 일말의 의구심이 들게 되었다. 사람의 심리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의심을 하면 한도 끝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심이 든다. 본능에 가까운 일이라 코스트너 황제도 의심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전쟁이 끝나고 난 후 황태자위를 정하려고 했다. 그런데 일이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네벨리언 공작의 말대로라면 패륜을 벌인 자식을 황태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 되었다. 사실 규명을 정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드윈.”
“예! 폐하!”
정원의 한쪽 모퉁이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평상시에는 모습을 숨기며, 황제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는다. 이들의 이름과 소속은 모두 비밀에 부쳐졌다. 아는 사람은 황제뿐이다.
“비밀리에 지니언의 죽음과 연관된 정보를 모아라.”
“명을 받듭니다.”
황제의 의심은 다른 사람들과는 무게가 다르다. 작은 의심이 커지고, 커져 결국에는 모든 것을 의심하게 만든다. 믿었던 신뢰가 클수록 반작용이 크기 마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