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장 헥토르 왕국과의 전투@@]
가르딘의 저택 부근으로 영지민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를 치우고, 다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 사이로 생소한 사람들이 같이 섞여서 작업을 도와주고 있었다.
영지민들은 전쟁이 시작되어 불안감이 감돌고 있는 상태였다. 이전의 평온한 마음과는 완전히 달랐다. 언제 어디서 적들의 습격이 있을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영주가 살아 있고 병력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영지민들이 많이 죽었어도 영주가 굳건하다면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었다.
“영주님이 무사하신 게 그나마 다행이지. 안 그래!”
“이번에 영주님 가족도 위험했었대! 놈들이 비겁하게 대군을 이끌고 와서 뒤를 친 거라는 소문이 있어!”
“영주님이 잘 막아내고 있어서 그런 건가!”
“맞아. 그럴 거야!”
영지민들은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면서, 나름대로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전쟁의 승패에 따라 자신들의 위치가 달라지기에 말이 많았다.
영지민들 사이로 접근한 인물들은 모두 인포메드의 인포머들이었다. 테이란 지부장의 명령에 따라서 가르딘의 저택에서 벌어진 일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저택은 반 이상이 부서져 있었다.
곳곳에 격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인포머들은 세세하게 상황을 살폈다. 흔적들 사이로 무언가 있을지 모르기에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괴장한 격돌인 것 같은데.”
“그런데 타이탄기사단은 다 어디로 간 거지?”
“다시 돌어간 흔적은 없는데.”
“우리가 영지를 조사하면서 이토록 어려운 경우가 있었나?”
“공작의 영지도 아니고, 이런 변방 영지의 정보수집이 이렇게 어렵다니!”
“그러게 말이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아무튼 지금까지 모은 정보를 가지고 지부장님에게 가자.”
인포머들은 몇 명을 이곳에 남겨두고, 지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정부수집은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그렇기에 사람을 남겨둔 것이다.
지부에서 테이란은 들어온 정보를 토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발키리 영지에서 벌어진 상황과 카이로만 제국, 코카 제국의 상황을 분석했다.
“전쟁은 백중세. 발키리 영지가 문제였는데.”
발키리 영지가 막아내지 못했다면 카이로만 제국으로서는 큰 화를 당할 수 있었다. 발키리 영지의 선전이 카이로만 제국에게는 승패를 커다란 분수령이 될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어떻게 막고 있는 거지?”
가장 궁금한 것을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정보수집을 나갔던 인포머들이 돌아왔다. 정보원들은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를 테이란에게 전해주었다. 빠짐없이 객관적인 정보만을 넘겨주었다. 주관적인 생각은 나중에 하면 되었다. 우선은 가장 사실적인 정보만이 필요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알아내지 못한 거지.”
“그렇습니다.”
“가르든 영주는 과연 어떤 사람이지? 그가 가진 능력을 감지할 수가 없어.”
테이란은 답답한 심정이었다.
정보를 모아서 상부로 보내는 일을 하는 테이란으로서는 발키리 영지에 일어난 것을 정확하게 알아낼 의무가 있었다.
“너희들은 계속 조사를 해.”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지부장님!”
인포머들을 내보내고 난 후 테이란은 반드시 가르딘을 알아내겠다고 다짐했다.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 조금 더 접근해야겠어.”
아무래도 이번 전쟁은 발키리 영지가 승리할 것 같았다. 이유는 조금만 더 헥토르 왕국을 막아내면 후방의 지원 병력이 도착하기 때문이었다. 고작 3만의 병력으로도 30만 대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병력만 충당이 더 된다면 압도적인 승리도 무리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마법진이 흔들렸다.
공간의 뒤틀림이 잦아지면서 앞으로 진군할 수 있는 영역이 확보되었다. 기회는 자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헥토르 왕국의 사이너스 국왕이 전군 진격 명령을 내렸다.
“모두 공격하라!”
사이너스 국왕의 명령에 따라 모두 앞으로 진격했다. 병사들을 이제까지 숨 막히고 지지부진한 전투를 마감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는 듯했다. 너무 답답한 전투였던 것이다. 마치 유령과 결을 하는 것 같았다.
“와아아아아!”
착! 착! 착!
22만의 대군이 모두 일직선으로 펼쳐졌다. 진 안으로 들어가서도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한 방법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군의 열은 장관을 연출했다. 모두 발을 맞추어 앞으로 나아갔다.
마법사들이 22만 대군의 열기 속에 움직였었다. 그들은 모두 얼굴이 조금씩 창백해져 있었다. 공간을 열기 위해서 마법력을 있는 대로 소모한 결과였다. 마법사들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이너스 국왕의 분노로 인해 지체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모든 분노가 마법사들의 무능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공간을 여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중앙으로 사이너스 국왕이 지휘를 하며, 양쪽 대군의 진영은 뱅가너 공작과 멜버른 후작이 맡고 있었다.
마법진이라고 생각하는 진법 안으로 대군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대군을 안으로 감쌀 정도로 진법은 크고 넓었다.
사이너스 국왕은 안으로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다. 마법진이 한순간 변화하여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진격을 하면 발키리 영지였다.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짧은 거리를 두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었다.
“모두 적을 향해 진격한다!”
헥토르 왕국의 대군이 진법 안으로 완벽하게 들어갔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중, 삼중으로 되어 있는 진법의 효용을 말이다. 그 무서움을 알았다면 이처럼 무모한 돌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법진과 다르게 대군을 상대로 효용성이 극대화되는 것이 진법이었다. 작음 힘만으로 큰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진법의 목적 때문이기도 했다.
방향은 제대로 잡고 가는 것처럼 보였다.
헥토르 왕국은 전면을 향해 계속 진군하며 상황을 살피는데 주력했다. 그들도 아직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느꼈다.
슈슈슈슈슝! 슈슈슈슝!
소리가 들려왔다.
정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는데, 위에서 내리꽂는 빗방울 같은 것들이 있었다.
정면에서 화실이 빗살처럼 날아와서 대군의 요소요소를 정확하게 가격해 나갔다. 화살은 한 번에 1만 발 이상이 날아왔다. 하늘을 새까맣게 수놓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슈욱! 푸욱!
푸우욱
화살을 맞은 병사들이 쓰러져 나갔다.
대부분은 방패로 막는다고 해도 모든 화살을 다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이유는 방향 때문이다. 앞에서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전후좌우에서 날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화살공격에 대비하는 첫 번째는 방향의 파악이다. 정면이라면 방패를 앞으로 내세우고, 옆이라면 옆으로 방패를 움직인다. 그러나 방향을 파악하지 못하면 반응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지기 마련이다.
화살에 맞은 헥토르 왕국의 대열이 조금씩 균열을 일으켰다.
사이너스 국왕은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깨달았다. 그러나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궁수병은 날아오는 화살 방향을 향해 쏴라! 어차피 화살이 날아올 정도면 가까운 거리에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화살을 날려 놈들의 화살을 분쇄하는 것뿐이었다.
헥토르 왕국의 5만 궁수병이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더 많은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화살의 거리는 최고 150미터를 넘지 않는다. 지근거리에 놈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는 말은 아직도 진법 안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사이너스 국왕은 정면을 바라보다 표정이 심각했다.
점차적으로 안개가 형성이 되어 주변을 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건 또 뭔가?”
주변에 호수나 강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안개가 형성되고 있었다. 허허벌판의 경우에 안개가 형성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것도 이처럼 시기적절하게 형성이 된다면 문제가 있었다.
발키리 영주가 또다시 수작을 부리는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아니, 분명할 것이다. 지금가지 우연으로 치부되었던 것 들이 모두 놈의 수작이었다. 이번에도 무언가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이 컸다.
파팟! 파팟! 파파팟!
하늘을 까맣게 덮는 화살비가 내렸다.
그전에 가르딘은 모두에게 방패를 들고 자세를 낮추도록 지시를 내렸다. 화살을 쏘면 헥토르 왕국이 대응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쏘는 것과 모르고 쏘는 것은 차이가 있었다. 또한 대군의 경우 숫자가 많으니 아무 데나 날려도 맞는 경우가 생긴다. 그에 반해 소군의 경우는 아무리 쏴도 맞지 않을 수 있었다.
가르딘은 밀집대형으로 부대를 운용했다.
각자 맡은 지역으로 이동한 시점에서 가르딘은 5천의 병력을 이끌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병력 운용 훈련을 해왔고, 전쟁이 시작되는 시점에서도 훈련은 계속 되었다. 이제는 3만의 정예병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수준에 올라서 있었다. 헥토르 왕국의 병력 숫자가 대당하다면 정면으로 붙어도 지지 않을 자신감이 생겼다.
밀집대형은 행여나 눈먼 화살에 맞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감싸는 역학을 할 수 있도록 만든 대형이다.
화살은 모두 방패에 맞았다. 방패는 미리 이곳에 마련해 놓은 것이다. 방패의 크기를 일반적인 크기보다 크게 만들어서 하나 더 여벌로 준비했다. 전투에 쓰일 방패는 아니라는 것이다. 방패가 너무 크면 들고 다니기 불편하다. 전면전에서 불필요한 물건은 목숨을 잃는 것으로 돌아올 수 있다. 사소한 것이지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이 여러 번의 전쟁을 통해서 경험했다. 작은 것이 큰 틀을 무너뜨린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쯤 당황하고 있겠군. 그나저나 파멜라의 진법 수준이 이 정도로 높아졌을 줄은 몰랐는데. 아주 감쪽같아!”
가르딘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놀랐을 것이다. 어디부터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탄탄했다. 굳건한 방패를 연상시키는 파멜라의 진법이었다.
“그럼 조금 더 기다려볼까나.”
방향을 분리시키기 위해서 함정을 몇 개 설치해 놓았다. 평상시라면 보았을 함정이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눈먼 장님을 상대로 마음것 농락하며 기다릴 뿐이다.
“어어어!”
쿠쿵! 푸우욱!
“으아아아악!”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이 꺼진 바닥에 빠져 꼬챙이에 끼인 고기가 되었다. 단숨에 죽지 않은 병사들이 비명성을 내질렀다.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전진은 멈춰지지 않았다. 뒤에서 밀려오는 대군의 진격에 앞에 있는 병사들은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했다. 또한 앞이 보이지 않는 무방비 상태에서 바닥이 꺼졌으니 속수부책이 아닐 수 없었다. 돌아가고 싶어도 때는 이미 늦었다.
“으아악! 내 다리! 아아아악! 내 눈!”
몸과 다리, 팔, 머리까지 꿰뚫린 병사들이 내지르는 고통스러운 소리는 전장의 비정함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런!”
뱅가너 공작은 대열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앞으로만 진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방향을 일었다. 감자기 생겨난 안개로 인해 방향감각을 상실한 결과였다.
“대열을 흐트러트리지 마라!”
뱅가너 공작이 오러를 실어 소리를 질렀다. 그럼에도 병사들은 분열이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22만 대군이라고 하지만 열 개의 방향으로 흩어졌을 때 숫자는 고작 2만밖에 되지 않는다.
대열이 무너지는 것을 알면서도 제대로 된 방비를 하지 못하는 뱅가너 공작은 답답함을 느꼈다.
“발...키리 영주! 네 이놈!”
헥토르 왕국군의 사분오열을 조장한 원인. 즉 가르딘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뱅가너 공작은 어떻게 해서든 놈만은 죽여버리고 싶었다. 헥토르 왕국의 숙원을 방해하고, 국왕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며, 갈슈타인 공작을 죽인 놈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점점 이성을 잃어가고 있는 뱅가너 공작이었다.
“진군한다!”
지금 가진 병력으로 안개를 뚫고 앞으로 가기만 하면 놈들을 섬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주 우둔한 생각이었다. 자신의 실력과 상대의 실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뱅가너 공작은 사고를 전혀 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함정에 빠져 죽어가고 있으며, 적은 눈에 띄지도 않는다. 분노가 이성을 넘어설 만했다.
뱅가너 공작과 마찬가지로 멜버른 후작도 뾰족한 방법이 보이지 않아다.
멜버른 후작은 진법이 와해되면서 더 이상의 악화는 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상황은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지금까지의 마법진보다 더욱 강력한 마법진이 앞을 막고 있었다.
마법을 이용하여 흐름을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어떻게 이런 마법진이 있을 수 있지?”
한 개의 마법진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두 개도 아니고 세 개 이상이었다. 마법진을 중첩하여 이처럼 광대한 영역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놈들에게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가 있다는 것인가?”
최소 8서클 마법사가 있다고 생각이 되었다. 현재 자신의 실력이 7서클 마스터라고 추정해 보면 적어도 한 단계 위라고 보았다. 마법사들 간의 격차에서 한 단계는 엄청난 차이였다. 끝과 끝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무서울 지경이다!”
마법을 익힐 수 없는 체질을 타고난 파멜라의 오기와 집념이 만들어낸 진법은 7서클 마법사조차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가르딘의 예상대로 헥토르 왕국의 병력이 분산되었다.
진법의 생문만으로는 놈들의 방향을 조정할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한 가르딘은 미리 함정을 팠다. 교묘하게 진법의 생문으로 연결이 될 수 있도록 함정을 설치한 것이다. 놈들은 방향을 잡고 오는 줄 알지만 가르딘이 계산한 방향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수십 개의 방향으로 퍼진 헥토르 왕국의 대군은 이제 대군이라고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가르딘은 병사들을 돌려했다.
“지금부터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첫 전투를 치르는 만큼 훈련과 차이가 많을 것이다. 두려움도 더 크게 다가오게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명심해라. 두려움으로 인해 같이 훈련한 동료, 그리고 가족이 죽을 수 있다. 자신의 섣부른 행동 하나가 위험한 상황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영지는 우리가 지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앞장서서 너희들과 함께할 것이다. 나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반드시 헥토르 왕국을 처단하고 나의 영지, 우리의 영지를 지킬 것이다!”
“영주님 만세!”
역시 말발은 어디 가서 빠진다는 말을 듣지 않는 가르딘이었다. 말로서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가르딘다웠다. 말 한마디로 병사들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영주가 함께 한다는 것에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영주는 오러마스터였다. 오러마스터가 물러서지 않는 이상 전투는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취익! 가르딘, 나와라. 오버!
통신구로 필리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섯 개의 통신구를 모두 나누어준 상태였다. 드래곤이 만든 통신구라서 그런지 진법의 영향을 받지 않고 통화 음질이 상당히 좋았다. 잡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것만 봐도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지하에서도 잘 터지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통신구에도 종류가 있다.
각 통신구를 관리하는 마탑의 경우 총 세 개로 구분된다.
가장 좋은 품질을 제공하는 마탑의 경우 브랜드 이름이 에이스테이텔콤. 두 번째로는 케이텔콤이 있었다. 사실 원래는 두 개의 마압이 있었는데. 에스테이텔콤이 너무 큰 통신구망을 가지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하나로 합병 한 결과였다. 다음으로는 가장 품질이 떨어지지만 가격 경쟁력에서 간신히 턱걸이를 하는 레지텔콤이 있었다.
아무튼 에스테이텔콤보다 훨씬 좋은 성능을 가진 드래곤의 통신구로 연결이 되었다.
“나왔다.”
-준비 완료.
전투준비를 완료했다는 보고였다.
전쟁을 치를 준비를 완료했으니 놈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헥토르 왕국의 병력이 분산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많은 수의 병력이었다. 한 번의 전투로 끝이 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에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하라!”
가르딘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헥토르 왕구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헥토르 왕국의 조르지오 백작이 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조르지오 백작은 엄밀히 말해서 뛰어난 실력을 가진 귀족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후작이어서 백작의 작위를 덤으로 얻은 귀족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실력 그렇게 떨어지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어중간하게 하는 편이다. 실력이 출중하지는 않아도 시세를 알고 편승하는 능력이 탁월해서 아직까지 무능하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
조르지오 백작은 이번 전쟁에서 쉽게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처럼 전쟁에 나와서 기사 정복을 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드시 이길 수 있는 확신이 섰기에 전선에 나왔다. 그런데 상황은 만만하지 않았다. 카이로만 제국 변방 영지의 영주는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았다 이와 같은 신기 막측한 대응은 자신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제기랄! 뭔 영주가 대군을 상대로 이렇게 잘 싸워!’
보통 군대도 아닌 왕국의 정예병 30만을 농락하는 발키리 영주가 사람 같지 않게 느껴졌다.
조르지오 백작은 신중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병사들의 보는 앞에서 두려움에 떨 수는 없지 않은가!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없기에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도록 노력했다.
속생각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나타나지 마라!’
별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병사들의 상태는 사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체력적으로 너무 많이 소진이 된 상태였다. 이 상태로 전투를 벌이면 십중 팔구 당할 것이 분명했다. 전투에 그다지 많이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는 무려 22만 대군이다!”
현재 모여 있는 병력은 8,000명이지만 옆에 든든한 아군이 있다는 말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가장 불안한 사람은 자신이면서 말이다.
“오!”
앞으로 진입하다 보니 안개가 옅어지는 부근이 보였다. 이제 저곳만 통과하며 안개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저곳으로 천천히 진격한다!”
조르지오 백작은 조심성이 많았다. 좀 전에 당한 함정에 또다시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성급하게 행동하다 병사들이 다치면 더욱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으로 예상한 명령이었다. 천천히 진군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있다면 당장 멈추어야 했다.
‘응?’
앞에 무언가가 보였다.
안개가 바람에 일렁이며 수상한 그림자를 형성했다.
조르지오 백작이 시력을 집중하여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앞에 적군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흉흉한 기세를 한껏 뿜어내는 적군이 독아를 드러내고 있었다. 날카로운 기세가 눈앞을 따끔하게 만들었다. 조르지오 백작은 순간적으로 찔끔했다.
갑작스러운 적군의 등장에 놀랐지만 그럴 틈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조르지오 백작이 공격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는 조르지오 백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격하고 있었다.
“공...격하라!”
늦은 타이밍을 극복하기 위해서 서둘러 소리를 지른 조르지오 백작이었다.
조르지오 백작을 맞이한 것은 스필언이 이끄는 부대였다.
스필언은 적에게 빈틈을 주지 않았다. 조르지오 백작의 부대가 다가온다는 것을 감지하자마자 돌진 명령을 내렸다. 스필언의 검에는 눈부시게 새하얀 검의 형상이 솟아올랐다. 오러마스터의 전유물이자 검의 절대 경지에 이러러야만 형성 할 수 있는 오러볼레이드였다.
조르지오 백작은 눈가를 비추는 오러블레이드의 강렬한 기운에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느꼈다.
‘아...망할!’
하필이면 상대하는 적이 오러마스터였다. 척 봐도 어린놈이 분명한데 저토록 선명한 오러블레이드라니! 현재 조르지오 백작의 경지는 고작 오러익스퍼트 초급이었다. 상대가 될리 없었다. 쥐꼬리만 한 오러를 보여주는 것 자체가 창피하게 여겨졌다.
‘개자식! 잘생긴 놈이 오러마스터라니!’
쥐새끼처럼 생긴 자신과는 상당히 비교되는 인상이었다. 저런 면상으로 태어났으면 자신의 부인도 좀더 아름답지 않았을가라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자신의 딸로 태어난 딸도 포함해서 말이다.
‘저놈은 카이로만 제국의 두 신성 중에 하나겠지!’
스필언과 미토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름다우 빛을 자랑하는 오러블레이드는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푸아아앙!
오러블레이드는 그냥 휘들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폭발적인 힘이 서려 있어 검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 가운데 있는 병사들 수십 명이 한꺼번에 즉사해 버렸다. 병사들은 죽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했다. 그러나 상대는 오러마스터였다. 실력 차이가 극명하게 보였다.
“저...럴 수가!”
새삼 오러마스터가 왜 무서운 존재인지 인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고작 몇 번의 부딪침만으로 1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8,000명 중에 100명이라면 별것 아니겠지만 전체적인 사기가 바닥을 치게 된 상황이었다. 자신도 순이 부들거리고 몸이 떨리는데 병사들이라고 별수 있겠는가!
체력도 저하된 상황에서 사기마저 바닥을 치다 못해 지하로 파고 들어간 상황이었다. 이건 이길 수 없는 전투였다. 그러나 조르지오 백작은 물러서지 못했다. 이대로 도망친다고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기...랄! 내 이생이 여기서 끝나는 건가! 그래, 좋다! 죽도록 싸워보자!”
그다지 못된 인생은 살지 않았지만 전쟁은 그런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어느 한쪽이 죽고 사느냐가 걸린 전쟁에서 개인의 사정을 봐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헥토르 왕국의 8,000의 정예병이 스필언이 이끄는 5,000의 병력에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전멸당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조르지오 백작이 검을 휘둘러보았다.
병사들 몇 명은 죽였지만 그게 다였다. 스필언이 어느새 다가와서 조르지오 백작의 목을 잘라내었다. 적장의 수장을 베자 상황은 종료가 되어갔다.
전투를 끝낸 스필언이 돌아보았다.
“피해는?”
“사상자 120명에 부상자가 302명입니다.”
발키리기사단의 고참기사 고트가 전투 상황을 파악하고 스필언에게 보고했다. 8,000명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린 것치고는 격미한 피해라고 할 수 있었다.
“꽤 손실이 크군.”
“첫 전투라서 확실히 몸이 덜 풀렸을 것입니다.”
“바로 다음 전투를 진행해야 한다. 그러니 전사자와 부상자를 수습하고 다음 전투를 기다린다.”
“알겠습니다.”
전투는 정해진 지점에서만 이루어지도록 약속이 되어 있었다. 장소의 이동은 위험했다. 자칫 진법의 영향 아래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법의 무서움을 몸소 체험한 스필언은 그와 같은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스필언이 첫 전투를 무사히 끝낼 때 미토스도 전투를 종료시키고 있었다. 미토스도 스필언과 비슷한 전과를 올렸다. 다만 피해가 조금 더 컸다. 상대하는 숫자가 더 많았고, 지휘자가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조르지오 백작과 같은 명분만으로 출전한 귀족과는 다르게 상대는 헥토르 왕국을 이끌어가는 다음 대 후기지수였다. 당장은 자작의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검술 실력만 놓고 본다면 익스퍼트 상급의 기사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토스는 앞에 쓰러진 귀족을 내려 보았다. 그가 바로 헥토르 왕국의 다음 대를 이끌어 가는 인물로 꼽힌 브론드 자작이었다. 좀더 시간이 지난 다면 멋진 승부를 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미토스 앞에서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미 오러마스터 중급을 넘어선 상태였다. 가르딘이 전수해 준 항마멸사신공의 화후가 8성을 넘어섰다. 조금 더 지나면 10성에 이르러 전대미문의 경지를 밟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아쉽군.”
미토스는 조금 아쉬웠다. 이런 자를 자신의 손으로 베어야만 하는 전쟁이 새삼 무섭게 다가왔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결정을 믿고 따르는 병사들의 생사가 결정된 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미토스와 스필언의 전투가 끝나기가 무섭게 필리언, 갈라, 유타도 첫 전투를 모두 마쳤다. 필리언, 갈라, 유타의 실력은 이미 오러마스터라고 해도 쉽사리 상대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조금 더 지나면 오러마스터가 되고도 남았다. 필리언, 갈라, 유타의 눈부신 실력과 지휘 능력 덕분에 전투는 미토스와 스필언보다 손쉽게 끝이 났다. 실력면에서는 뛰어나다 해도 전투 경험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번의 전투로 5만의 헥토르 왕국군을 전멸시키는 전투 성과를 올렸다. 첫 전투에서 가장 눈부신 역할을 한 것은 크레이지드레곤 창기병이었다. 투르는 적진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지정된 곳으로 돌진을 하며 적들이 모일 수 없도록 방해를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적들은 대군을 쪼개고, 쪼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모두가 첫 전투를 끝내는 동안 이제 막 전투를 개시하려는 곳이 있었다. 바로 가르딘의 진영이었다.
가르딘은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들 중에서 가장 강한 기운을 가진 인물이 이곳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감지했다.
가르딘은 안개로 옅어지는 곳을 투영했다.
거칠고 흉폭한 기세를 뿜어내며 진격하는 인물이 있었다. 선두에서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보아 거침없는 위인이 아닐 수 없었다.
“성급하군.”
가르딘은 냉정했다.
적장에 대한 평가는 가혹할 만큼 냉정하게 평가를 내렸다.
전투에서 가장 금기시해야 하는 것이 성급함이다. 성급함은 용기가 아니다. 어리석은 만용일 뿐이다.
한 단체를 이끌 때에는 항상 냉정해야 한다. 그 어떤 상황이 있더라도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분석하며 최선의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다가오는 적장은 수준 미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르딘은 가족 이외의 일에는 냉철하고 객관적인 위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순간 분노는 사라졌고, 상황을 냉철하게 보게 되었다.
뱅가너 공작은 느낄 수 있었다.
안개가 옅어지는 부근을 기점으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것의 존재를 말이다. 놈들은 헥토르 왕국을 농락하며 지금까지 기다린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제까지 뒤에서 수작만을 부린 발키리 영주에 대한 응징만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진격한다!”
뱅가너 공작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병사들도 공작의 신형에 따라 앞으로 돌진했다.
안개가 사라지는 지점으로 병사들이 포진해 있는 것을 뱅가너 공작이 보았다. 뱅가너 공작이 달려 나가려 할 때 가르딘이 전면에 섰다.
“나는 발키리 영지의 영주 가르딘 카이로스라고 한다.”
부릅! 멈칫!
눈을 부릅뜬 뱅가너 공작이 달려가다 멈추었다. 상대가 바로 그토록 찢어 죽이고 싶었던 놈이었다. 분노가 갑자기 서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차갑게 식어갔지만 안에서는 더욱 강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네가 바로 그놈이구나!”
“말이 심하군. 일국의 귀족이라는 자가 통성명도 없이 욕을 하다니.”
지금까지 자신이 한 짓은 전혀 고민 대상이 아닌 듯 말을 하는 가르딘이었다. 얼굴에 이중 삼중의 철판을 깔아놓은 듯했다. 오러블레이드라고 해도 튕겨낼 가르딘의 철판안면이었다.
“뭐시라!”
“나는 이미 내 정체를 말했다.”
가르딘의 입꼬리가 살포시 올라갔다.
사람 염장 지르는 데에는 일가견 있었다. 어떻게 사람의 속을 그처럼 잘 뒤집어놓을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고작 입꼬리 말기로 말이다.
부글! 부글!
“나는 대 헥토르 왕국의 자돌린 뱅가너 공작이다! 네가 감히 헥토르 왕국을 농락하고 무사할 줄 아느냐?”
“헥토르 왕국이라고 해봤자 카이로만 제국의 20분지 1도 안 되는 조그만 나라로 알고 있는데, 꽤나 지존광대하군. 그런 조금 나라에서 카이로만 제국을 상대로 덤빈다는 것 자체가 주제를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뭐라! 네...이놈!”
가르딘은 뱅가너 공작을 속을 잘도 뒤집고 있었다.
남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내용을 끝까지 다 까발리는 가르딘이었다. 술자리에서 꼭 남의 기분 상하게 하는 놈 같았다.
“나를 격분시키겠다는 것인가! 좋다! 네 수작에 넘어가 주마! 일기토를 신청한다!”
‘오호!’
“제법 용기가 있군.”
“용기라, 이제 막 오러마스타가 된 주제에 감히 날 상대로 용기라고! 주제를 모르는 것은 네놈이다!”
“그런가.”
가르딘이 뱅가너 공작을 보지 않고 뒤쪽의 병사들을 보았다. 가르딘은 뱅가너 공작이 아닌 병사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한마디 톡 던졌다. 듣든지 말든지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모두 똑똑히 들었고,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병사들이 꽤나 지쳐 보이는군.”
마치 전면전을 하면 금방 이기는 것을 왜 쓸데없이 일기토를 하냐는 듯한 인상이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가르딘의 목소리는 울려 퍼져 모든 병사들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보냈으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제야 뱅가너 공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까지 전진만 생각하고 앞으로 돌진했다. 그로 인해 병사들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뱅가너 공작이 보기에도 병사들은 매우 지쳐 있었다. 수적으로 그다지 차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이건 매우 치명적이었다.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가르딘의 지적으로 인해 아군의 병사들은 더욱더 사기가 떨어졌다. 또한 가르딘의 병사들은 사기가 더욱더 충천했다. 차라리 처음 돌진으로 공격을 했으면 나았을 것이다. 갑자기 가르딘이 정체를 밝히는 바람에 돌진을 멈춘 게 도리어 화근이 되었다. 이제 보니 놈이 일부러 자신의 정체를 밝혀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기를 진작시키는 방법은 이제 한 가지밖에 없었다.
무조건 일기토를 성사시켜야 했다. 놈이 귀족이라면 반드시 하게 될 그런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네가 기사라면 결투 신청을 거절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고도 제국의 기사라고 할 수 있는가! 제국의 기사치고는 겁이 많구나!”
‘음!’
“제국을 걸고 넘어가다니 결코 용서할 수 없구나!”
가르딘이 짐짓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도 화가 났는지 언성이 높아졌다.
가르딘의 표정과 화난 목소리를 듣자 뱅가너 공작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넘어올 것 같았다.
“비겁하게 숨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제국의 기사 중에 비겁한 자는 없다!”
“그럼 증명해 보아라!”
“좋다. 감히 제국의 기사를 비웃는 네놈에게 진정한 기사가 무엇인지 알려주마!”
뱅가너 공작은 상대가 도발에 막혀 들어갔다는 것에 내심 안도가 되었다. 놈의 목적이 무엇이든 이 기회에 죽여버린다면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하늘이 내려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이 기회에 네놈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죽음을 선사해 주마!“
뱅가너 공작은 자신이 있었다. 가르딘과 차이가 극명하게 난다고 생각했다. 세월의 차이와 경험. 모든 면에서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보았다.
제국의 기사를 가장 수치스럽게 만들어서 죽여버릴 계획인 뱅가너 공작이었다.
뱅가너 공작이 검을 겨누었다.
기사로서의 예의를 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반응하여 가르딘도 검을 들어 예를 표했다. 일기토를 하게 될 경우 지켜야 하는 예의였다. 서로의 목숨과 명예를 존중한다는 표현이다. 실상 전투의 사기 진작을 위한 목적이 다분히 있는 생사투에서는 형식적인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시작하지.”
“그러지.”
뱅가너 공작의 전신에 서린 기운이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그의 독문 오러심법은 익스플로젼 오러심법이다. 전신의 오러를 회전시켜 폭발적으로 기운을 상승시키는 것이었다. 상승된 기운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다. 순간적인 힘은 오러마스터 상급에 이른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강력하다. 다만 그 힘에 비해 지속적인 힘이 부족한 편이다. 진정한 오러마스터 상급의 기사로서는 손색이 있는 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경시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기운이었다.
그에 반해 가르딘은 평온함 그 자체였다.
나른한 오후 한가하게 강가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사람처럼 편안했다. 거친 기운을 정면으로 맞으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가르딘의 편안한 모습에 뱅가너 공작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좀 전에 익스플로젼 오러심법으로 형성된 강력한 기운을 가르딘을 향해 쏘아 보냈었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상대 역시 그에 비견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제법이군.”
“제법이라, 그건 내가 할 말인데.”
가르딘의 빈정거림은 여전했다. 상대의 도발에도 전혀 충격을 받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간간 쏘아내는 말은 뱅가너 공작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데 충분했다.
"말은 잘하는구나! 지금부터도 그렇게 여유롭게 말을 할 수 있는지 보겠다!“
“얼마든지.”
가르딘이 검을 앞으로 들이밀며 먼저 공격해 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까닥! 까닥!
검지손가락으로 건방지게 움직이는 것과 비슷하게 검으로 표현을 하는 가르딘이었다. 검으로 하나 손가락으로 하나 어디 하나 부족하지 않는 가르딘의 염장질이었다. 이것은 일정 수준을 넘어 가히 일대종사의 반열에 든 경지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뱅가너 공작의 화를 극도로 끓어올리기에 충분했다.
“이놈!”
파팟!
뱅가너 공작의 신형이 가르딘을 향해 뻗어나갔다. 지면을 박차자 흙먼지가 폭풍처럼 형성이 되었다.
뱅가너 공작의 검법은 와일드 검법이라고 하여, 패도에 기초를 둔 검법이다. 야성으로 울부짖는 짐승의 강력한 포효를 보는 듯했다.
크아아앙!
거친 포효가 들림과 동시에 가르디의 바로 앞에까지 나타난 뱅가너 공작이었다. 와일드 검법의 강력한 일검이 휘둘러졌다. 야성으로 똘돌 뭉친 거친 짐승의 발톱을 연상케 하였다. 일순간에 가르딘이 찢겨 나갈 것 같은 상황이었다.
쌔에에앵!
검이 휘둘러지자 바람을 갈랐다. 아니, 바람을 찢는다는 표현도 부족했다. 무섭도록 빠르며 강력한 일검이었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병사들 모두 긴장한 채 대결에 주시했다.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은 공간을 압도하는 뱅가너 공작의 모습을 보자 반색했다. 반드시 이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앙! 타앙! 채채챙!
피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딘도 정면으로 맞아주었다. 와일드 검법에 대응하는 스톰 검법이었다. 무극칠검식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다.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무공은 결국 하나로 귀일된다는 뜻이다. 그 말은 여러 형태의 검으로 발전이 되었지만 그 본질은 한 가지의 뜻으로 일치된다는 말 이였다. 여러 개의 강물도 바다로 모여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하나, 그런 경지에 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검의 형태를 모두 잊고 검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한은 어림도 없는 경지였다. 적어도 가르딘과 같은 그랜드마스터에 들지 않고서 만류귀종이라는 말을 했다가는 어디 가서 칼 맞아 죽기 딱 좋았다.
타타탕! 파아아앙!
폭풍과 야성의 격돌이었다.
누가 더 센지는 힘이 누가 더 강한지에 의해 결정될 것 같았다.
오러블레이드와 오러블레이드의 대결이었다. 눈부시게 새하얀 오러블레이드였지만 검과 검이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귀를 찢는 듯한 파공성이 들렸다. 충격파가 반격 3미터 안으로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병사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눈으로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저게 인간인가 외심이 되었다. 또한 깨달았다. 오러 마스터는 병력이 많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이럴 수가!’
뱅가너 공작은 믿을 수가 없었다. 오러마스터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놈이 자신과 정면대결을 하며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자신도 오러마스터 초급에서 중급이 되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가르딘의 경우 고작 1년 만에 중급 이상으로 올라섰다는 말이 아닌가! 뱅가너 공작의 마음속에 가르딘에 대한 경계심이 자리하게 되었다. 보통 놈이 아니었다.
와일드 검법은 칼슈타인 공작의 드래곤 검법과 함께 헥토르 왕국의 2대 검법으로 통하는 강력한 검법이었다.
폭발적인 힘으로 상대를 물어뜯거나 찢어발기는 능력이 발휘되고 있지 않았다. 가르딘이 시기적절하게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공격의 클라이맥스(정점)가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강력한 일검이 가르딘의 검에 상충이 되어 제 위력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제 다 했나?”
“닥쳐랏!”
“흥분하기는.”
검과 검을 부딪치면서도 가르딘이 염장질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뱅가너 공작은 흘려듣지 못했다. 가르딘의 검격이 변화를 일으켰다. 좀 전의 상충되는 힘과는 반대로 압도적인 힘이 형성되었다.
“여흥은 끝났으니 이제 그만 사라져주어야겠다.”
“과연 네놈 뜻대로 될 듯싶으냐!”
이를 악물며 소리를 지르는 뱅가너 공작이었다. 가르딘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힘을 배가시켰다. 속도와 힘이 빨라지자 뱅가너 공작의 전신이 무척이나 바빠졌다.
슈슈슉! 파팡! 채채챙!
가르딘의 공격 속도가 정확히 두 배 더 빨라졌다. 뱅가너 공작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과는 확연히 다른 가르딘의 공격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움찔!
숨이 차오를 정도로 빠른 검속의 대결 속에서 뱅가너 공작은 가르딘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에 본 가르딘의 눈동자는 지극히 차가웠다. 가벼운 입과 방정맞은 행동과는 다르게 한기가 서려 있었다. 가르딘의 눈빛을 본 순간 뱅가너 공작은 눈동자를 통해 들어온 빛이 뇌를 관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느꼈다. 등골이 오싹하며 소름이 돋았다.
‘이놈은 보통 놈이 아니다!’
가르딘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 순간이었다. 가르딘의 진실 된 실체를 조금이나마 본 뱅가너 공작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가르딘은 그럴 틈을 주는 위인이 아니었다.
처음보다 두 배의 힘과 속도에서 다시 또 두 배의 힘과 속도를 더했다. 이제는 막아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버린 뱅가너 공작이었다.
‘치잇!’
가르딘의 오러블레이드를 막다가 뱅가너 공작이 실수를 하고 말았다. 발이 뒤로 미끄러지면서 몸이 흔들렸다. 초급기사나 하는 실수를 하고 만 뱅가너 공작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다. 가르딘이 일부러 뱅가너 공작의 다리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가르딘의 공격을 보지 못했다. 허공을 격해서 공격하는 격공장의 수법을 발로 사용한 가르딘이었다. 일명 무영격각이라고 할 만한 수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없는 빈틈도 파고들어 집요하게 공격하는 가르딘이었다. 틈을 만들었으니 물샐틈없이 공격하여 해치우면 되었다.
가르딘이 파공세는 무서웠다.
뱅가너 공작은 방어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신형을 유지하려다가 방어를 제대로 하지 못 한 것이다.
사아악!
“크윽!”
가르딘의 오러블레이드가 뱅가너 공작의 옆구리를 뜨끔하게 만들었다. 핏물이 오러블레이드를 스치고 지나가자 금세 타서 증발되어 버렸다. 강렬한 기운을 내포하는 오러블레이드에 당한 상처는 평범한 상처가 아니었다. 몸속으로 침투하는 오러의 기운으로 인해 전신이 불규칙적으로 변하게 된다. 불규칙성은 오러심법을 익힌 자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었다.
“이얍!”
뱅가너 공작은 고통을 참고 횡으로 검을 출수했다. 다가오는 가르딘을 베어버리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가르딘은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세 바로 다가갔다. 예전에 스필언과 미토스에게 신법을 가츠쳤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신형이 곧추세워져서 움직이지도 모를 정도로 빨랐다.
뱅가너 공작은 허상을 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러블레이드가 횡으로 그어져 좌측 끝으로 움직였을 때 가르딘이 뱅가너 공작의 안으로 파고들어 검으로 찔렀다.
정확히 심장을 노렸다.
푸우우욱!
오러블레이드가 뱅가너 공작의 심장을 찔러 등을 뚫고 나왔자. 심장에 오러블레이드를 맞은 뱅가너 공작은 믿을 수 없는 듯이 눈이 치켜떠졌다.
“으으윽! 네......!”
추욱!
말을 하기도 전에 몸은 이미 식어버렸다. 차가워진 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온몸에 힘이 사라지자 들고 있던 검도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가르딘은 가차없이 뱅가너 공작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행가너 공작의 잘려진 수급은 바닥으로 볼품없이 뒹굴었다. ㅤㅁㅗㄺ을 잃은 몸 역시 힘을 잃고 쓰러졌다.
“제국의 기사는 강하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놈들에게 왜 제국이 강한가를 보여주어라!”
발키리 영지의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에 반해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은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었다. 가뜩이나 체력적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뱅가너 공작이 죽었다.
방금 오러마스터의 무서운 능력을 보았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오러마스터의 능력보다 훨씬 대단했다. 일반 병사에게 오러마스터는 괴물과 같았다. 두려움이 번져가고 있는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이었다.
가르딘의 공격 명령에 의해서 일제히 공격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았다. 사기가 떨어지고 두려움을 가진 병사는 힘이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가르딘이 직접 뱅가너 공작을 죽인 이유는 바로 첫 전투를 치르는 병사들의 사기를 더욱더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전투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헥토르 왕국군을 전멸시켜 버릴 수 있었다.
믿을 수도, 믿고 싶지도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이너스 국왕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힘들었다. 패왕의 자질을 가졌으며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 가르딘의 지저분한 수법에 흔들리기 시작하자, 거침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뿌득!
“아직도 놈의 손바닥에서 놀고 있단 말인가!”
발키리 영주란 놈의 면상을 봤으면 했다.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기에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얼마나 많은 병력이 손실됐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안개만 벗어나면 바로 코앞이 발키리 영지라는 것을 알지만 갈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초조함과 불안감이 사이너스 국왕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뾰족한 방법이 보이지 않는 수렁에 빠진 것 같았다.
“앞이 아직도 보이지 않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병사들은?”
“22만의 병력이 모두 흩어졌습니다.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병력은 5만 정도입니다.”
포르테 백작이 현재 직면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듣고 있는 사이너스 국왕은 심기가 점점 더 불편해졌다.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뭐시라! 왕국의 정예병이 고작 이따위 안개를 두려워한단 말이냐!”
차마 안개뿐이 아니라고 말을 할 수 없는 포르테 백작이었다. 그 말을 했다가는 화가 난 사이너스 궁왕의 심기에 기름을 붙는 격이 될 수 있었다.
앞으로 전진이 어려워졌다. 안개가 문제가 아니라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이 가장 컸다. 현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뒤로 가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군이 모두 철벽과 같은 안개 속에 같힌 꼴이 되었다.
사이너스 국왕의 병력이 한곳에서 자리하고 있을 때, 도 다른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한쪽으로 흩어졌던 멜버른 후작이 이끈 병사들이었다. 멜버른 후작이 병사들의 정면에서 나아갈 방향을 잡고 있었다.
멜버른 후작은 클라우드(구름) 마법의 한 종류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공적으로 구름과 안개를 형성시킨 것이었다. 클라우드 마법은 5서클 마법에 속한다. 멜버른 후작은 디스펠(해제) 마법을 걸면서 안개를 해체시켰다. 하지만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안개를 모두 해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겨우 바로 앞에 있는 안개를 해체한 것이 전부였다. 안개를 해체했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형성이 되었다. 정말 지겹도록 놀라운 마법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너스 국왕에게 멜버른 후작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이대로 안개 속에 있다가는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확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병력도 급격히 준데다가 나머지 병력이 어떻게 됐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멜버른 후작!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가?”
멜버른 후작은 할 말이 없었다. 마법진의 축을 무너뜨리고, 해체하면 된다고 한 사람이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또 다른 마법진에 걸렸다고 어떻게 말을 한단 말인가!
“왜 말이 없는 것인가?”
“죄송합니다.”
“그따위 말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야. 방법을 생각하라고!”
“우선은 마법진을 벗어나야 합니다. 이대로는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도다시 후퇴하자는 말인가!”
“죄송합니다!”
“명색이 7서클 마도사가 이따위 마법진도 해체하지 못하고 번번이 놈들에게 당하다니 말이 되는 상황인가!”
모용적인 말이 이어졌지만 멜버른 후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답답한 사이너스 국왕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도저히 그냥은 물러설 수가 없었다.
“전진한다! 무조건 전진한다!”
“하지만 국왕 전하!”
“닥쳐라! 짐이 명령하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도 당하다 보면 현실을 냉정히 보지 못한다. 사이너스 국왕이 그와 같은 상황이었다.
가르딘과 병력은 대부분 우문진 밖으로 나왔다. 가르딘은 병사들의 체력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 전투를 치르게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전투를 하면서 세 번 정도는 밖으로 나와서 휴식을 취했다. 그동안 파멜라는 바쁠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이 돌아가서 쉬는 시간에 생문을 닫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면서 생문을 열고 닫는 것은 세밀한 작업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파멜라의 뛰어나고 정교한 머리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르딘은 안개로 가듣한 운무진을 보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테지.”
“그렇겠지.”
필리언도 전투를 끝내고 병사들과 휴식을 취하러 나왔었다. 병사들에게 휴식을 줄 수 있을 정도면 굉장히 편한 전투라 할 수 있었다.
“아군의 피해 상황은?”
“400명이 죽고 700명이 부상당했다.”
“그렇군.”
가르딘은 담담하게 피해 상황을 들었다. 그들의 죽음이 보잘것없어서가 아니었다. 적의 피해가 더 컸기 때문이었다. 헥토르 왕국의 10만 대군을 죽인 상황이었다. 숫자적인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이긴 상황에서 우울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사이너스 국왕이 피해 상황을 알고 있다면 계속적으로 진군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냉철히 보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더 줄이고 나면 운무진을 개방하고 진을 해체해.”
“왜?”
“진법은 아직 알려지면 좋지 않아.”
“어차피 헥토르 왕국은 알잖아!”
“그것과는 별개로 알아서는 안 되는 자들이 오잖아.”
“아! 그렇구나!”
뒤이어 올 자들에게 진법의 위력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이 되었다. 가르딘의 선택에 필리언은 동의를 했다.
“놈들에게 공을 주지, 뭐.”
“아깝지 않냐?” “아니. 전혀!”
별로 공을 탐하고 싶지 않았다. 가르딘으로서는 알려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귀족들에게 공은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이다. 자신의 지위와 명예, 명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거저 주는 공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 귀족들의 불문율이다.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자기 몫을 챙기려는 놈들일 가능성이 컸다.
가르딘은 이번 전투로 인해 헥토르 왕국의 주력을 절반 이상 분쇄시켜 버렸다. 지원군이 비록 정규균과는 거리가 먼 오합지졸이라고 하나 승산이 충분히 있었다.
“헥토르 왕국의 주력을 줄이고 나면 우리 병력을 뒤로 빼.”
“알았어.”
별력을 뺄 명분은 충분히 있었다.
30만 대군과 싸우느라 지쳤을 테니, 병력을 쉬게 하는 것이라는 핑계 정도면 되었다. 가르딘이 이번 전쟁에서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또 있었다.
‘쉽게 끝나면 안 되지.
가급적 장기전으로 갈 생각이었다.
코카 제국과 카이로만 제국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말이다. 어차피 일찍 끝난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었다. 끝나고 나면 바로 전쟁에 투입될 수도 있었다. 괜한 고생은 사서 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르딘의 철칙이었다. 라이나와 브리안이 여기 잇는데 어딜 간단 말인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이번에 위험에 처했던 라이나와 브리안을 생각하면 절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 바로 라이나와 브리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