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4/93)

   @@[ 제4장 카이로만 제국과 코카 제국의 접전@@]

  발키리 영지와 다크랜드 인접 성벽에서 시작해서 가르딘의 저택까지 일직선으로 폭풍이 들어닥친 것처럼 무너졌다. 타이탄기사단의 침입으로 인해 부서진 것은 건물뿐이 아니었다. 영지에 살고 있는 영지민의 인명 피해 역시 만만치 않았다. 사실 건물이야 부서지면 다시 지으면 되지만 사람이 죽은 것은 심각한 일이었다.

  타이탄기사단의 무차별적인 살육 행위로 인한 인명 피해 숫자가 족히 1,500명은 되었다. 보이는 족족 살아 있는 생명채는 모두 죽었다는 말이 되었다.

  발키리 영지에서 이처럼 많은 피해를 낸 것은 초기 개척시대와 전번 몬스터 대침공 때뿐이었다. 또한 몬스터와 마수가 아닌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헥토르 왕국과의 전쟁이 벌어지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발키리 영지민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었다. 전쟁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생활을 했던 발키리 영지민들에게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가르딘은 타이탄기사단을 정리하고 난 후, 가족을 다시 데려왔다.

  일단 가족이 무사한 것에 무척이나 안심이 되었다.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영지민이 죽는 것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였다. 새삼 인간의 이기심이 얼마나 큰지 깨닫는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이 돌아왔을 때 저택의 주변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라이젠과 안젤리카가 수고를 해주었던 것이다. 마법으로 마무리를 다 지었으니 건물 피해와 망가진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가르딘은 최전선에 위치한 병력을 일부 영지로 뺐다. 우선적으로 영지에 대한 피해를 확인하고 난 후, 흉흉한 인심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가르딘에게는 시간을 많이 투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지민들의 인심을 다스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헥토르 왕국과의 전쟁이었다. 문제의 비중이 달랐다. 원인일 따지자면 헥토르 왕국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다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가르딘의 집무실은 영망이 되어 있었다. 칼슈타인 공작이 가르딘의 집무실을 뒤지면서 망가뜨린 것이다. 또한 가이안의 소환을 이곳에서 했기 때문에 힘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가르딘은 우선 저택 중 멀쩡한 곳을 임시로 집무실로 사용했다.

  파멜라와 필리언도 소식을 듣고 돌아와 있었다. 그들은 사태를 냉정하게 판단하려고 노력했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우선을 정보를 모아봐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가르딘은 홀로 생각을 해야 했다.

  “피해가 만만치 않군.”

  사실 가르딘이 발키리 영지로 오지 않았다면 이보다 더 엄청난 피해를 봤을 것이 불을 보듯 자명했다. 가르딘이 아닌 다른 영주라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한순간 자만으로 입지 않아도 될 피해를 봤다는 것에는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죽은 자는 죽었기에 의미가 없지만 죽게 된 동기와 원인, 사람의 결정과 판단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가르딘은 현재 안정을 찾은 상태다.

  칼슈타인 공작을 죽이고 난 후의 상황을 생각하자 끔찍했다. 스스로도 믿지 못할 정도의 분노였다. 가르딘은 자신이 우유부단하며 넉넉한 인심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내면의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가족에 대한 상처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랜드마스터에 들려면 최우선적으로 마음을 관조하고, 심성이 강철같이 강하고 곧아야 했다. 인간의 모든 감정을 극복하여 강철 같은 마음을 가졌다고 자부했던 가르딘의 마음이 한순간에 붕괴했다. 그 이유는 명백했다. 가족이었다. 라이나와 브리안이 죽었다는 그것에 의해 강철같은 마음이 모래처럼 허물어졌다.

  “천룡무상신공이 광룡무상신공으로 변할 때를 조심하라는 말이 그 말이었던가!”

  새삼 천룡무상신공이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순간 뒤틀린 감정의 기복으로 인해 억누를 수 없는 폭발적인 분노가 일어났다. 신마의 마지막 말을 다시 한 번 새겼다. 또한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가르딘의 생각은 방으로 들어오는 인물로 인해 중지되었다.

  “오셨습니까! 앉으십시오!”

  가르딘은 과도한 예를 차리고 있었다. 눈앞의 인물이 라이젠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족을 구해주었다는 것데 대한 예의였다.

  “그만 하게. 지금 나는 라이젠 크라이스가 아니라 평범한 말 조련사인 라이젠이네. 그러니 편하게 대하게!”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은혜를 입었으면 갚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자네의 그 말은 나보고 이제 더 이상 유희를 하지 말고 가라는 말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아야지.”

  영주가 고작 일개 말 조련사를 깍듯이 대한다.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이는 관계처럼 보인다. 상식적인 사람들이 그와 같은 광경을 이해할 리 없지 않은가!

  “그렇군요. 그럼 알겠습니다.”

  가르딘의 과도한 친절은 오히려 라이젠을 압박하고 있었다. 참 상황을 유리하게 만드는 재주를 타고난 녀석 같았다.

  순식간에 아무렇지 않은 듯이 대하는 가르딘이었다.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나자 평소의 사리분별이 강한 가르딘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그렇습니다. 참 저도 아직 어린가 봅니다. 천지구분 못하고 화를 내다니! 새삼 제 정력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합니다.”

  “입심이 들어온 것을 보니 제정신을 차리긴 했나 보구나.”

  “그보다 헥토르 왕국에서 가져온 골렘은 어떻게 됐습니까?”

  ‘헛!’

  자신이 싸우고 부서뜨린 것을 아직도 골렘으로 말하다니! 듣고 있던 라이젠의 입에서 헛바람이 나오기에 충분했다. 골레과 타이탄을 구분 못 하는 놈이 여기에 있었다. 가르딘은 칼슈타인 공작이 그토록 타이탄이라고 강조했지만 무시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죽은 칼슈타인 공작이 화를 낼만했다.

  가르딘이 생각하기에 콜렘은 돈이 된다. 피해를 입었으니 피해복구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냉정을 찾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피해보상과 무너진 건물의 수리였다. 부서지긴 했지만 골렘을 야시장에 내다 팔면 제법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을지 몰랐다.

  “자네 그게 골렘으로 보이나?”

  “골렘 아닙니까?”

  “타이튼을 아나?”

  “타이탄이요? 음! 그게 그거 아닙니까? 아차피 고철덩어리가 거기서 거기지.”

  “참 무식하군.”

  “무식하디니요! 제가 이래봬도 킹덤나이트를 졸업한 사람입니다. 기초학문과 마법도 제법 배웠습니다. 물론 D등급을 받기는 했지만 무식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닙니다.”

  킹덤나이트에는 기초수양 과목이 있다.

  기사라고 해서 무조건 기사수업만 받는 것이 아니다. 제국의 기사가 무식하다는 말을 들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기초교양 과목에 해당하는 수업을 받는 것을 의무적으로 수행한다. 물론 고급 학문은 어림도 없지만 말이다. 가르딘이 받은 D등급은 말 그대로 가장 기초과목을 수업 받았다는 증명이었다. 속된 말로 그냥 훑고 지나갔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만 핥았다고 해도 안 배운 사람보다는 훨씬 교양 수양이 높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런데 타이탄과 골렘을 구분하지 못하냐? 어쩐지 그러니 그럴 수밖에.”

   일전에 드래곤나이트를 본 일을 회상하는 라이젠이었다. 고대 삼신기라고 불리는 가드너 급 타이탄 드래곤나이트를 보고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가르딘이었다. 고작 주변에 널린 이끼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니 말해서 무엇하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골렘과 타이탄은 다르다는 말이네.”

  “그래서요.”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다. 다르면 다른 거지 그깟 고철덩어리를 구분해서 무엇에 쓴단 말인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타이탄과 골렘의 구분에 대한 가르딘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라이젠을 다르게 말을 했다. 라이젠도 가르딘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돈 안되고, 시간 뺏기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 없는 것을 말이다.

  “골렘의 최하등금의 가치가 50만 골드라고 하지.”

  ‘허억! 땡잡았다!’

  이번에는 가르딘의 입에서 헛바람이 나왔다. 최소 등급이 50만 골드라니 엄청났다. 그렇다면 이번에 칼슈타인 공작이 가져온 것이 더 나갈지도 몰랐다.

  전번 아이시런 공주 습격 당시에 코카 제국의 연금술사이자 마법사인 벤투스가 사용한 골렘보다 이번 골렘이 더 강했다. 가르딘이 전번보다 힘을 더 많이 사용한 것을 계산해 보자 산술적 계산이 되지 않는 액수일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얼마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그런데는 반론의 가치가 있다. 가르딘은 불현듯 불안한 감정이 들었다. 컬슈타인 공작과의 일방적인 대결 당시에 약간 맛이 갔었던 가르딘이었다. 맛 간 상태의 기억이 흐릿하다.

  ‘이기고 난 후 박살을 낸 것 같은데! 설마?’

  “부서져서 가격이 안 나가는 것입니까?”

  “그게 아닐세.”

  “그럼 뭡니까?”

  “타이탄의 가치는 골레의 가치보다 적어도 10배의 가치를 더 가지지”

  쿠쿵!

  가르딘은 심장이 철렁했다.

  ‘50만 골도의 열 배라면 500만 골드! 이게 뭐야?’

  500만 골드라면 왕국의 예산에 버금가는 액수였다. 고작 고철덩어리가 부르기에는 터무니없는 액수였다. 그것도 최소등급의 타이탄이 말이다.

  ‘이거 고철덩어리라고 부른 내가 미안해지려고 하네!’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은 가르딘이었다. 죽은 영지민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500만 골드라면 충분히 만회하고도 남았다. 500만 골드를 받게 된다면 영지민에게도 충분히 보상을 해줄 생각이었다. 혼자 먹고 죽을 정도로 사악한 가르딘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환상에 젖어 있는데 환상을 깨는 라이젠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너무 부서졌어.”

  “부서져서 가격이 많이 떨어졌나요?“

  “조각조각 내버렸으니 네 말대로 진짜 고철덩어리라고 할 수 있지.”

  “라이젠 님의 마법이라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요?”

  “내가 무슨 신이냐! 다 부서진 것을 고치게.”

  연금술은 사실 드래곤보다 인간들의 의해서 발전이 이루어진 학문이다. 드래곤의 압도적인 마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절대 마법력 가지고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간들은 알았다. 그래서 고대의 마도시대 마법사들은 다른 학문을 파고들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마도공학이라고 불리는 연금술이었다. 연금술을 집대성하여 만든 최첨단의 병기가 타이탄이었다. 타이탄의 핵심기술은 인간들만이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 시대의 마도시대 공학자가 직접 오지 않고서는 고치기가 어렵다. 그나마 라이젠은 인간의 연금술을 연구해서 어느 정도의 지식은 있었다.

  ‘아이고!’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지 가르딘이었다. 그때 조금 더 이성을 차리고 있을걸이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후회를 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에 가르딘은 잊어버렸다.

  담담하게 잊어버리려는 가르딘의 미련을 붙잡고 늘어지는 라이젠이었다.

  “네가 부순 게 최소 플레튬 급은 될걸.”

  “플레튬 급? 그게 뭡니까?”

  “타이탄도 골렘과 마찬가지로 등급이 있지.”

  타이탄은 성능에 따라 세세하게 10단계로 나뉘지만 간단하게 보면 타이탄의 등급은 총 5단계로 구분이 된다. 현재에는 거의 잊혀진 구분법이다. 왜냐 지금에 와서 타이탄은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있다고 해도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다.

  최하단계인 엑서스 급은 기초적인 연습용으로 이용된 타이탄이다. 타이탄을 타고 수행해야 하는 기사들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것이지만, 이것만 해도 오러마스터에 비견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다.

  다음으로 노멀 급이 있다. 노멀 급은 엑서 급으로 역습을 한 후 타게 되는 타이탄으로 기본적인 전투력이 일국의 기사단과 맞먹는다는 말이 있다. 전투 능력으로 따지면 엑서스 급의 다섯 배 이상이라고 추정이 된다.

  그러나 다음 등급부터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진다. 플레튬 급은 당시 마도시대에도 100대가 되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최소 일국의 전투력과 맞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소유한 마병길로 불린다.

  인간이 만든 최강의 병기에 속하는 슈피리어 급은 드래곤과 일대일 대결이 가능하다고 전해진다. 사실 전설이기에 믿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만큼 압도적인 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이 만든 최강병기를 넘어서는 급의 타이탄. 고대의 마도시대에도 거의 본 적이 없는 병기다. 인간이 만들었다는 설도 잇고, 인간이 만들고 신이 힘을 부여했다는 설도 떠도는 병기, 즉 가드너 급의 타이탄이다. 딱 한 번 그 힘이 발휘된 적이 있다고 한다. 마족의 침입으로 세상이 무너져 내려갈 때 가드너 급 타이탄이 베일에 감춰진 위용을 발휘하여 무찔렀다는 전설이다.

  라이젠의 장황한 설명을 듣고 난 후 가르딘은 멍했다.

  ‘타이탄이 그렇게 강했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럼 플레튬 급은 얼마나 합니까?”

  역시 속물인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이 생각하기에 돈은 좋은 것이다. 돈 없이 생활해 봐양 그 맛을 알 수 있다.

  “그게 가격 측정이 될까! 일국의 전투력과 맞먹는 병기야! 어느 누가 탐이 나지 않을까! 보르는 대로 그 값에 돈을 주고 사겠지.”

  이것이 말로만 듣던 그것이었다.

  “설마 백지골드!”

  백지골드.

  대륙 최고의 상단이라고 불리는 제너럴상단이 공증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제너럴상단이 생기고 나서 딱 세 개만이 만들어진 것이다. 백지골드는 액수가 적혀 있지 않다. 다만 그것을 가진 자는 제너럴상단의 모든 돈을 무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 전해질 뿐이다. 대륙의 절반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을 돈을 가지고 있다는 제너럴상단이 공증하는 것이니,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 제일 부자가 부럽지 않다.

  “저 조금이라도 돈이 안 될까요? 그 정도면 돈이 조금은 나올 텐데.”

  “너무 부서졌어. 이미 사용가치는 굴러다니는 돌덩이만도 못해.”

  “그...렇군요.”

  “자네가 안정이 됐다니 이만 나도 가보겠네. 요새 다크호스가 제법 피곤한 것 같아서 말이지.”

  가르딘의 안정된 마음을 마음껏 유린하고 유유히 사라지려는 라이젠이었다. 그런 라이젠을 가르딘이 붙잡았다.

  “그래도 그냥 가면 안 되죠.”

  “왜 그러나?”

  “파이럴은 제법 비싼 광물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플레튬 급인지 팔레튬 급인지 모르겠지만 제법 단단하더군요! 전신을 파이럴로 무장했으니 말입니다.”

  “역시 자네는 변하지 않았구먼. 얼마면 되는가?”

  “최소 10만 골드는 주셔야.”

  “알았네.”

  ‘응?’

  대답이 너무 쉽다. 뭔가 속은 것 같은 가르딘이었다. 최대한 크게 불렀는데 아무렇지 않게 준다고 대답하니 가르딘은 이상함으로 인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만, 파이럴이 비록 귀중하다지만 드래곤에게 필요할까!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게 산다.’

  충분히 의심이 되었다.

  가르딘의 의심스러운 눈치를 금세 파악한 라이젠이 한마디 했다. 역시 세월의 힘은 무서웠다. 눈치가 어찌나 빠른지 속으로 생각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된다.

  “라이나와 브리안은 이제 괜찮은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가 자제 가족을 위해 유희의 금기를 어기고 구했네만. 그런 나를 의심하려 하다니 너무하는구먼.”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노인. 라이젠의 모습에 할 말 없어진는 가르딘이다. 사실 원래의 라이젠은 금발의 잘생긴 얼굴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노인의 안쓰러운 표정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좀 전에는 편하게 대하라고 했으면서.’

  알지만 이번에는 당해주는 것이 당연했다. 무엇을 요구하든 가족을 구한 것은 맞았다. 가르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족을 구해준 라이젠이라면 무엇을 들어준다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최소한 받을 것은 요구했다.

  “그럼 10만 골드라도 좀!”

  “기분이 상해서 싫네.”

  “알...겠습니다.”

  괜히 말 한 번 잘못했다 돈도 못 받고, 입맛만 버린 가르딘이었다.

  뒤돌아 가는 라이젠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말로써 이긴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 가르딘이 타이탄을 완전히 부순 것은 맞다. 하지만 핵심동력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만은 온전히 보전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라이젠은 그것을 연구해 볼 생각이었다. 드래곤도 제대로 마들지 못한 타이탄을 어떻게 인간이 만들 수 있었는지 연구해 볼 가치가 있었다. 연구해서 자신도 반드시 슈피리어 급 이상을 만들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라이젠에게는 드래곤나이트가 있다. 그러나 드래곤나이트는 고대 삼신기이며, 선조 드래곤 때부터 지켜온 보물이었다. 함부로 분해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랬다가 완전히 부서지면 아무도 책임질 수 없었다.

  라이젠이 나가고 난 후 가르딘은 먼저 해야 할 일을 처리 하기라 마음먹었다.

  헥토르 왕국의 진영은 조용했다.

  산발적으로 공격을 하기는 하지만 주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소식을 기다리는 사이너스 국왕국 괴족들은 초조했다.

  3일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초조함이 극에 달해가는 상황이었다.

  초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소식이 없는 것도 그렇고, 가르딘의 진영에서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이었다. 헥토르 왕국의 정예기사단인 타이탄기사단500명이면 웬만한 영지는 하루아침에 박살 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또한 마도시대 병기인 타이탄 가이안까지 보낸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조용하다.

  사이너스 국왕의 심기가 점점 더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평소의 사리분별 강하고, 현명한 사이너스 국왕일지라도 지금은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기 어려웠다.

  슈슈슝! 슈슈슝!

  평소처럼 또다시 적 진영에서 발리스타가 날아왔다. 늘상 있어왔던 일이라 별다른 동요는 없었다. 이전처럼 막대한 피해도 발생하지 않았다. 놈들은 애초부터 보고 쏘는 것이 아니었다. 일정한 거리 내에서 무작위로 발사할 뿐이었다. 따라서 중요 지점을 산개해서 놈들이 쏠 지점을 예측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또 쏘는군. 그렇다는 말은 아직 아무런 피해도 없다는 말인가?”

  사이너스 국왕은 가르딘의 생각을 예측하기 무척이나 어려웠다. 놈들이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으면서도 위장하기 위해서 발리스타를 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발리스타 공격을 받은 후 조금 있다가 급하게 누군가 들어왔다. 그는 왕의 막사를 호위하는 기사였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

  호위기사가 가지고 들어온 것을 본 모든 귀족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수급이었다. 일반 병사의 수급을 가지고 들어왔다면 불경죄로 호위기사의 목을 쳐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나,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금의 주인공을 귀족들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헥토르 왕국을 떠받드는 기둥 중 하나인 칼슈타인 공작이었다.

  칼슈타인 공작의 수급을 본 사이너스 국왕은 일어서려다가 휘청거렸다.

  “전하!”

  “괜찮다.”

  사이너스 국왕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칼슈타인 공작이 죽어서 머리만 돌아올 수가 있는가! 그는 헥토르 왕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이자 사이너스 국왕의 친구였다.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칼슈타인 공작이 죽은 것이다. 말도 안 되는 현실을 인정하기에는 괴리감이 너무 심했다.

  “이리로 가져오너라.”

  “예, 전하!”

  바로 앞에서 보는 칼슈타인 공작의 수급이었다. 그의 표정은 불쌍하기까지 했다.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한 듯한 억울한 죽음이었다.

  부들! 부들!

  사이너스 국왕은 참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결국 이번 일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발키리 영지에 무엇이 있기에 헥토르 왕국의 정예기사단이 실패하고, 내 친구까지 죽냔 말이다!”

  누구하나 속 시원하게 말해 주는 이가 없었다.

  사이너스 국왕의 울부짖음은 귀족들도 궁금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장막이 가로막힌 것처럼 꽁꽁 숨겨진 발키리 영지였다.

  호위기사가 수급 이외에 서신을 하나 더 사이너스 국왕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뭔가?”

  “칼슈타인 공작의 수급과 함께 온 서신입니다.”

  사이너스 국왕이 서신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서신은 가르딘이 친필로 써서 보낸 것이었다. 마지막의 사인까지 열심히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목은 잘 받았나. 타이탄은 잘 받았다. 약간 고장이 난 것 같지만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이더군. 플레튬 급의 타이탄을 공짜로 주다니 그대의 마음 씀씀이를 고맙게 받겠다. 그럼 다음에 보지. 가르딘 카이로스>

  “이...놈!”

  찌지지직!

  화를 참지 못한 사이너스 국왕이 서신을 갈기갈기 찢었다.

  이번에는 농담조로 글을 쓰지 않은 가르딘이었다. 그저 사실만을 적어서 보내주었다. 그것만 해도 사이너스 국왕은 참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더 화가 날 만한 내용이었다.

  “전하! 고정하시옵서서!”

  뱅가너 공작과 멜버른 후작이 분을 참지 못하는 사이너스 국왕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사이너스 국왕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귀족들은 모두 나가고 뱅가너 공작과 멜버른 후작만 남게.”

  사이너스 국왕의 말에 귀족들은 모두 썰물이 빠지듯이 나갔다. 국왕의 노기를 받을까 두려운 듯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마땅치 않게 보는 사이너스 궁왕이었다.

  사이너스 국왕이 귀족들을 내보낸 것은 서신에 적신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놈들이 무엇을 가지게 된 줄 알게 되면 사기가 급격히 저하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국왕 전하! 서신에 무엇이 적혀 있었던 것입니까?”

  “놈들이 가이안을 빼앗았다고 한다.”

  ‘허억!’

  뱅가너 공작과 멜버른 후작 모두 놀랐다. 칼슈타인 공작이 죽은 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었다. 이로써 명백해졌다. 타이탄기사단은 모두 죽거나 잡혔을 것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병기인 가이안마저 빼앗긴 상태였다.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게 된 헥토르 왕국이었다.

  멜버른 후작은 놀라움을 삭이며, 곰곰이 따져보았다. 가이안은 빼앗는다고 해도 바로 작동시킬 수 있는 병기가 아니었다. 뛰어난 기사뿐만 아니라 연금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마법사도 필요했다. 발키리 영지에서 그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예측일 뿐이었다. 만약 마법사가 있다고 가정하면 정말 큰일이었다. 상대도 오러마스터가 있는 상황이었다. 가이안을 타고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헥토르 왕국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놈들은 아직 작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가이안을 제대로 움직이는 연습을 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니, 최대한 빠르게 공격을 하거나 후퇴하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후퇴는 멸망이었다. 방법은 이미 정해졌다고 해도 무방했다.

  생각을 정리한 멜버른 후작이 말을 이었다. 멜버른 후작의 말을 들은 사이너스 국왕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역시 공격뿐인가! 그렇겠지!”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강요받고 있는 꼴이었다.

  사이너스 국왕은 궁지에 몰리게 되어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불리하게 될 것이 자명했다.

  “전면전을 한다.”

  마법진을 파훼할 수 없었던 헥토르 왕국이었다. 멜버른 후작조차 힘을 소진하고 난 후에도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딱히 뚫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제는 전면공격뿐이 없었다.

  동시다발적으로 공략을 하여 적의 마법진을 격파하는 것이었다. 사실 통할지 안 통할지는 알 수 없었다. 대군의 희생을 강요하는 진법이라 최후의 수법으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카이로만 제국과 코카 제국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발렌타인 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전투만이 아니었다. 북쪽과 남쪽으로 이어지는 광범위한 지영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물론 가장 치열한 곳은 발렌타인 성이었다.

  성벽이 아무리 튼튼해도 공성무기의 집중포화를 견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곳곳에 부서진 잔해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부서진 곳을 수리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공격에는 공격으로 대응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어였다.

  발렌타인 성에 배치된 공성무기 역시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다. 공격하기 위해 접근하는 코카 제국군의 병사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5일간 쉴 새도 없이 벌어졌던 전투로 인해 양쪽 진영에서 입은 피해가 족히 10만이 넘어갔다.

  발렌타인 성을 중심으로 남쪽 지역을 맡고 있는 지니언 2황자는 네벨리언 공작과 더불어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카스아이 왕국과 실베니아 왕국의 공작인 스타만 공작, 에뜨앙 공작이 보조를 맞추었다.

  상대하는 코카 제국군 역시 만만치 않았다. 서로의 우열이 쉽사리 판가름 나지 않았다.

  마주보는 평원을 상대로 우열을 가리기 위해서 여러 번의 접전을 펼쳤다.

  카이로만 제국군의 힘은 강했다. 그 중심에 지니언 황자가 있었다. 지니언 황자는 기사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놀라운 능력과 카리스마에 제국의 병사들과 각 왕국과 공국의 병사들 역시 사기가 충천했다.

  지니언 황자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 제법 뛰어났다. 경험이 부족한 것은 옆에서 네벨리언 공작의 조언으로 충분히 보완이 되었다. 네벨리언 공작은 연륜과 경험이 풍부했다. 그는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지니언 황자를 보좌하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며, 전장의 상황을 살폈다.

  지니언 황자가 앞으로 나아가 적들을 섬멸하는 것도 중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선두에서 지휘하는 역할이었다. 황자가 강하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황자는 기사가 아니다. 기사로서의 역할은 신하에게 맡기면 되었다. 네벨리언 공작은 그 점을 중점적으로 말해 주었다.

  “지금 놈들을 추격하면 되지 않습니까?”

  “안 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놈들을 막아내는 것이지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하루아침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간을 두고 기다리다 보면 반드시 큰 공을 세울 시기가 올 것입니다.”

  “음!”

  지니언 황자는 공격하고 싶었다.

  코카 제국군과의 10여 차례가 넘는 전투 끝에 이길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놈들이 물러서는 것이 이상하긴 하군요.”

  “사실 10여 차례의 공격이 있기는 했지만 각 진영의 병력수를 비교하면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물러난다는 것은 유인하고 있다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훗!”

  “코카 제국이 나를 애송이로 보고 있군요. 가히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전쟁은 경험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기만술과 유인책에 쉽사리 속아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지니언은 제국의 황자였다.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은이 있기는 하지만 제국의 중요한 전쟁을 개인적인 일로 그르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놈들은 아직 2황자님의 진정한 능력을 모릅니다. 때가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제 옆에 네벨리언 공작이 있다는 것이 든든합니다.”

  지니언 황자와 네벨리언 공작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볼 수 있었다. 둘의 유대관계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코카 제국의 전략은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남쪽 지역은 잠시 전쟁을 쉬는 공백기를 맞이했다. 적이 물러섰고, 쫓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공백기는 잠시간의 휴식기에 불과했다. 조금 있으면 다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북쪽 진영은 발렌타인 성과 남쪽 진영과는 다르게 차분하게 전투가 이루어졌다. 협곡과 능선의 굴곡이 험한 지역이라, 대규모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엇다. 오히려 적들의 침입을 방심하지 않고 막아서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북쪽 진영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다마트 3황자와 타이가라 공작은 전쟁을 냉철하게 관철하고 있는 듯 보였다.

  협곡과 능선 사이에 병력을 배치하고, 적들의 공격을 대비하는 형상이었다. 그렇기에 공격을 할수록 손해 보는 곳은 코카 제국군이었다.

  지형적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는 곳이기에 위험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마트 황자의 화약상을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또한 다마트 황자는 외부적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막사 안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역할을 하기만 했다. 애초부터 공적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놈들이 협곡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비밀리에 뒤쪽 능선을 타고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그럼 예상대로군요.”

  다마트 황자와 타이가라 공작이 예상한 대로 코카 제국은 방심을 유도하고 있었다. 그런 반면에 공격을 느슨하게 하여 역공을 취하도록 만들었다. 역공을 하는 순간에 뒤와 앞에서 공격을 하려는 수작이었다.

  “무르카인 황제가 나를 무시하고 있었군요. 상황이 재밌게 흐르고 있습니다.”

  코카 제국의 황제가 무시하고 있다는 데에도 다마트 황자는 즐거운 듯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직은 알려질 때가 아니었다.

  “암습조는 처리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움직임을 파악해 놓고, 매복해서 섬멸한 상태입니다.

   뒤로 암습을 가하려는 코카 제국군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해서 함정을 만들어 전멸시켰다.

  다마트 황자는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상당히 치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베일 속에 가려져 있어 능력이 의심 되었지만 북쪽 진영을 무리 없이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내 역할은 수비입니다. 그 부분만 명심하세요.”

  “물론입니다. 적들의 침입에 대해서만 철저하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보다 전쟁 후의 일을 위한 준비는 끝이 났습니까?”

  “준비했습니다.”

  “전후의 상황이 무척이나 기대가 됩니다.”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를 할 것입니다.”

  “큰형님이 꽤날 놀라겠군요.”

  “그렇습니다.”

  다마트 황자의 눈동자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어둠의 존재가 그 안에 서려 있는 듯이 소림이 끼쳤다.

  발렌타인 성에 소식이 전해졌다.

  되도록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을 알고 준비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감춘다고 해서 숨겨질 수 있는 사실이 아니었다. 이미 대충은 모두 알고 있었다.

  중요 동맹국인 헥토르 왕국이 아직도 전선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결국 헥토르 왕국이 배신을 했군요.”

  “그렇습니다. 발키리 영지를 시작으로 제국의 후방을 어지럽히려는 수작입니다.”

  “코카 제국과 협상을 한 것이겠지요.”

  러쉬 황자의 한숨 섞인 말이었다. 그 말에 파르스톤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 모두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카이로만 제국으로서는 코카 제국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한 대 맞은 격이었다.

  “발키리 영지는 어떻게 됐습니까? 공작의 아들이 그곳에 있지 않습니까?”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도 걱정이 되었다. 사실은 스필언과 미토스, 가르딘을 비밀리에 불러서 공습조를 만들어 내려고 하였다. 오러마스터 세 명이 이끄는 공습조에 피닉스기사단을 붙여 적의 측면을 공격하려고 했었다.

  비밀리에 수행하기 위해서 일부러 가르딘, 필리언, 미토스를 전쟁 중에 부르지 않았다. 가급적 적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헥토르 왕국이 공격을 해온 것이다. 아무리 오러마스터가 강해도 30만 대군을 막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현실은 막아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제법 잘 막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변 영지의 병력이 모일 때까지 버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

  러쉬 황자가 감탄했다. 다른 귀족들도 모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제국을 떠받드는 두 기둥의 아들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면은 가르딘이 모든 일을 다 한 것이지만 이들은 모두 스필언과 미토스의 출중함만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만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대단하군. 역시 공작님들의 아들입니다.”

  “과찬입니다. 제국을 위해서 몸을 아까지 않는 것은 기사로써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제국의 귀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파스트론 공작은 아들이 희생해서 제국이 산다면 그 길을 택할 사람이었다. 자신의 목숨이라고 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와 같은 말에 귀족들은 모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아서 정신 차리고 최선을 다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파스트론 공작은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진 전형적인 기사였다. 그럼에도 사람을 다스리는 능력은 탁월한 인물이었다.

  “발키리 영주의 서신에 따르면 최대한 시간을 끌고 있다고 합니다. 타 영지의 병사들이 올 때까지 막아내겠다고 하더군요.”

  “발키리 영주가 가르딘 카이로스라고요?”

  “그렇습니다. 이번에 오러마스터에 올랐으며, 영지를 제법 잘 다스리는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헥토르 왕국의 공격을 미리 예상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럴 정도의 인물은 아닐 겁니다.”

  러쉬 황자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유약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상황을 분석하고 파악하는 능력만은 다른 황자들보다 뛰어났다.

  아무 준비도 없이 30만 대군을 막아낸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리 준비를 하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다음 기회에 한 번 봐두는 게 좋겠지.’

  러쉬 황자의 마음에 가르딘이라는 작은 존재가 인식이 되었다. 그 전까지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지금도 잘 막고 있으니 병력 원조가 있으면 전쟁 중에 후방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이로써 무르카인 황제는 제법 심기가 어지러워졌을 겁니다.”

  “지금쯤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겁니다. 아마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전면전을 펼치려 할 것입니다.”

  “산발적인 전투를 한 이유가 시간을 끌기 위한 술책이었던 거군요.”

  “그렇습니다, 황자 전하!”

  “동생들도 잘해주고 있으니 저도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산발적인 전투에 6만의 병력이 손실된 것을 생각하면 많을지 몰라도 전면전에 비하면 그다지 큰 손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은 자신들이 선택한 황자의 현명함이 흐뭇해졌다. 유약해 보이는 것도 2황자가 패기만만해서 벌어진 격차일 뿐이지만 결코 일반적인 인물에 비해 유약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쨍그랑!

  들고 있던 물잔을 거칠게 집어 던진 무르카인 황제였다.

  황제의 노기가 커졌다는 것을 안 대신들이 몸을 떨었다. 황제의 분노 한 줌으로 인해 모라가 될 수 있었다.

  예상대로 10일 정도 지나면 전쟁의 상황이 뒤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쟁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투의 피해로 본다면 카이로만 제국에 비해 병력 손실이 1만이나 더 되고, 공성무기의 피해도 더 많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왜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이냐?”

  헥트로 왕국의 후방 공격이 시작되고 난 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였다. 후방이 공격받고 있는데도 카이로만 제국은 굳건했다. 이게 어떻게 말이 되는 일이란 말인가!

  휼턴 재상이 들어온 정보를 분석해서 무르카인 황제에게 전했다.

  소식이 더해지자 무르카인 황제의 화는 더 커졌다. 아직도 헥토르 왕국이 발키리 영지에 머물고 있다는 것에 말이다.

  “아직도 발키리 영지라니! 이런 병신 같은 것들! 어떻게 고작 빈 영지 하나를 점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냐?”

  “저항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예상이 되옵니다.”

  “저항이라고! 빈 영지를 점령하지 못하는 놈들이 무능한거지.”

  무르카인 황제는 헥토르 왕국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놈들의 병력이 30만에 달하고 정예병이라고 하기에 제법 강할 줄 알았건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르카인 황제는 헥토르 왕국의 존재를 무시해 버렸다. 시간을 이만큼이나 할애했는데도 불구하고 점령하지 못한다면 놈들의 원조는 기대하기 힘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전술로서 카이로만 제국을 정면으로 뚫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조급했던 마음을 가라앉힌 무르카인 황제가 물었다. 화는 나지만 아직은 이내할 때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남쪽과 북쪽은 진전이 있나?”

  “예상과 다르게 유인책에 넘어오지 않습니다. 남쪽에서는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습니다만 적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상황입니다. 또한 북쪽의 험한 능선을 따라 기습조를 보냈는데 놈들이 눈치를 채서 오히려 당했습니다.”

  회심의 전술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헥토르 왕국의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자 정면대결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카이로만 제국과의 전면전은 어려울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완전히 진흙탕 싸움이 되고 말았다. 누가 이기나 끝까지 해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애송이라고 해서 너무 과소평가를 했구나.”

  “전투를 통솔하는 인물들이 모두 노련한 공작들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공을 세우기 위해서 성급하게 공격하는 황자가 아무도 없었다. 허영심을 부풀려서 공적을 세우기 위해 앞뒤 재지 않고 덤벼들길 바랐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일 밤이 어둡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이맘때쯤에는 달도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바람도 심해서 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겁니다.”

  “내일 밤에 전면전을 벌인다. 어차피 놈들의 위치는 알고 있으니 어둠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다가올 것이다.”

  수성하는 입장에서 어둠은 적이었다.

  적의 접근을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공성전의 경우 접근이 얼마나 이루어졌는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 코카 제국군 진영에서 발렌타인 성으로 바람이 부는 시각이었다. 바람 때문에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뿐더러 공성무가의 비거리도 차이가 생기게 된다. 전적으로 코카 제국군 진영에 유리한 상황이었다.

  “곳곳에 놈들이 펼쳐놓은 장치들은 모두 처리하고, 숨어 있는 쥐새끼들은 이 기회에 처리해 버려.”

  “예, 황제 폐하!”

  어차피 카이로만 제국이 비밀리에 세작을 파견했다는 것은 이미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지금까지 전쟁에 큰 승패를 좌지우지하지 않기에 그냥 놔두면서 역 정보를 흘렸지만 내일 밤부터는 달랐다. 하나의 틀이 망가지면 전체적인 틀이 무너질 수 있었다.

  공백기.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한 템포 쉬어 가는 타임이었다.

  각 진영의 수뇌들이 전투의 상황을 다시 분석하고 새로운 전략을 짜는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제 공격이 끝나고 난 후 하루 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산발적인 움직임도 모두 정지한 것처럼 조용했다.

  휘이이잉! 휘이이잉!

  거센 바람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바람과 함께 구름이 몰려와 대지를 그림자에 잠기게 만들었다. 정오가 되는 시간이 갓 넘었지만 구름이 해를 가려 우중충한 날씨를 만들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파스트론 공작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눈은 곧으며, 어떠한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굳건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파스트론 공작이었다. 그는 정면을 바라보다가 하늘과 바람을 주시했다. 하늘은 구름이 많이 끼어 있었다. 또한 바람도 뒤에서 부는 바람이 아니라 맞바람이었다. 성벽위에서 쏘는 공성무기의 이점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이 고비군.”

  “그렇겠지.”

  발리스타 공작이 어느새 다가왔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알아도 막기 힘든 찬스였다.

  “세작들의 보고가 끊겼더군.”

  “그런가.”

  “예상하고 있었군.”

  “코카 제국군의 정보력은 우리 못지않아. 어차피 우리 쪽도 세작들을 걸러냈으니 놈들도 걸러내는 것이 당연하겠지.”

  “그보다 자네의 아들이 잘해내고 있어 다행이야.”

  “자네는 아닌가!”

  스필언과 미토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식들이 생각대로 잘 커준다. 이것만큼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있겠는가! 아닌 척하지만 누구보다 자식들을 위하는 두 공작이었다.

  “아니면 발키리 영주가 뛰어날지도 모르지.”

   “요즘 들어 발키리 영주를 다시 보게 되었어.”

  자식들이 그토록 따라가려는 인물이 가르딘 카이로스였다. 그가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두 공작의 마음속에서도 가르딘이라는 이름이 새겨지는 계기가 되었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은 나이 차가 약간 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이 차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는 인정하고 있었다. 제국의 기사로서의 역량과 공작으로서의 역량 모두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제국에서 인정하는 천재라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서로가 지향하는 권력의 정점이 조금 달랐다. 그래서 약간은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스필언과 미토스의 관계와는 차이가 있었다.

  밤이 다가왔다.

  달빛과 별빛이 구름이 가리자 지상은 횃불만이 빛을 낼 뿐이었다. 횃불이 아무리 밝아도 어둠을 모두 몰아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횃불조차 강력한 칼바람에 흔들리니 그림자조차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쌔애애앵! 쌔애애애애앵!

  어둠을 뚫고 무언가 날아온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백 개가 삽시간에 하늘을 뒤덮었다. 뒤덮은 것은 바로 확인이 되었다. 불덩어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람이 부는 것을 알고 화공으로 전환한 것이다.

  쿠아아앙! 파파파팡!

  사방으로 불 기름이 퍼져나갔다.

  발렌타인 성의 병사들이 지척까지 접근한 코카 제국군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시야를 확인하기 어려웠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으아아아악!”

  불 기름에 닿은 병사들 100여 명이 비명을 지르며 성벽 아래로 떨어져 나갔다.

  “적의 공격이다!”

  댕! 댕! 댕!

  비상종이 울리며 대기하고 있던 카이로만 제국군의 병사들이 맞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1황자 러쉬 카이로만이 직접 나왔다. 그 옆으로 파스토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 호위를 했다.

  “공성무기를 전부 사용하고, 병사들은 활을 쏴라!”

  카이로만 제국의 황자와 공작이 나와 소리를 지르자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적의 공격에 대응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준비는 제대로 하고 있었던 사황이라 코카 제국군의 처음 공격에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코카 제국군을 정면에서 이끌고 있는 이지마하 벨트런 공작은 병사들을 독려했다. 전쟁은 기선제압이었다. 한 번의 기선제압으로 전투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적들은 당황하고 있다! 모두 공격하라!”

  어둠은 사라지고 치열함만이 남았다. 이제까지의 전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화력과 병력 운용이었다. 삽시간에 양진영의 백만 대군이 부딪치고 있었다. 일직선으로 늘어서 병력의 끝이 보이지도 않았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고함 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고, 병력의 이동으로 인해 지진이 난 듯한 소리가 울렸다.

  쿠쿠쿠쿵! 다다다다다다닥!

  슈슈슈슉! 슈슈슈슉!

  파팟! 털석! 파팟! 털썩!

  발렌타인 성을 향해 달려가던 코카 제국의 병사들이 화살에 맞아 바닥을 뒹굴었다. 쓰러진 병사들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앞으로 전진하는 데 방해물이 될 존재는 밟고 지나갈 뿐이었다.

  “성문을 부숴라!”

  브로큰웨폰을 사용하는 코카 제국이었다.

  브로큰웨폰은 성문을 부수기 위해서 마련한 거대한 마차 형태의 병기였다. 마차에 거대한 통으로 된 나무를 싣고, 그 앞을 삐죽하게 만들어서 쇠를 덧씌운다. 이동 후 성벽에 다가갔을 때 고착시키기 위한 장치가 되어 있고, 나무통이 움직일 수 있도록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게 구성되었다.

   또한 그 위에는 적의 화살과 공격을 대비하기 위한 방패를 만들어서 부착시킨다. 병사들의 이동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전체적인 무게는 보는 것만큼 무겁지는 않다.

  위이잉! 쿠쿵! 위이잉! 쿠쿵!

  발렌타인 성의 성문은 나무를 삼중으로 교차되게 만들었으며, 중간중간의 이음새에 쇠를 이용하여 사용하였다. 그로인해 웬만한 공격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는 단단함을 자랑한다. 일전에 카이로만 제국에서 발렌타인 성을 빼앗을 때도 성문을 부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단단한 성문이 브로큰웨폰의 공격으로 틈이 생기고 있었다. 아무리 단단해도 여러 번의 충격을 계속 버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성문을 막아라!”

  “기사단은 성문 아래로 내려가서 병사들을 돌려하라!”

  전투는 이곳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삽시간에 남쪽 진영 앞의 평야를 뒤덮은 병사들이었다. 어중간한 전투와는 비교가 될 수 없는 병력 수였다.

  전면을 바라보는 지니언 황자도 생에 처음 보는 대전의 위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리기는커녕 두근거렸다. 앞으로의 전투를 생각하자 온몸에 희열이 감돌았다.

  타고난 기사이자 전사가 확실한 지니언 황자였다.

  “내가 함께 있다! 적들을 모두 섬멸한다! 가자!”

  “와아아아아!

  활발한 전투와는 반대로 북쪽 진영을 맡고 있는 다마트 황자는 여전히 조용했다. 공격이 시작된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놈들의 공격은 어차피 이전과 비슷한 수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습만 대비하면 그다지 어려움이 없는 지형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막사 안에서 나와 전쟁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도 능선을 타고 기습을 하려나.”

  다마트 황자의 모습에 군사들은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너무 평온했다. 마치 전쟁과는 전혀 상관없는 듯한 인상이었다.

  “타이가라 공작님, 코카 제국군의 기습조의 이동은 확인 됐나요?”

  “이번은 전면전이라 기습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하긴 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한 번 쓴 전술을 또다시 쓰지는 않겠지요.”

  “이곳만 제대로 막아내면 별다른 피해 없이 전쟁을 수행 할 수 있습니다.”

  다마트 황자가 전면을 바라보았다.

  협곡을 중심으로 포진한 카이로만 제국군과는 다르게 적들은 계곡 밖에서 넓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수십만이 넘어가는 병력이 발 디딜 곳 없어 가득 메웠다. 무척이나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적당히 막아내고, 무리하게 공격하지는 마세요.”

  “물론입니다.”

  “타이가라 공작만 믿고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저 한번쯤 여흥을 느끼려고 나와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들어가면서 한마디 말을 남겼다.

  “제가 지켜보고 있으니 열심히 싸워주세요.”

  낮은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병사들은 다마트 황자의 힘없는 말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싸워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3일간의 치열한 대결.

  상상할 수 없는 물량고세와 병력대결이었다. 산술적인 계산으로 나오지 않는 엄청난 피해를 양쪽 모두 보았다.

  쉬지 않고 퍼붓는 공성무기와 활.

  적군을 죽이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병사들, 그들 모두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결과적으로 양쪽 진영은 80만이라는 엄청난 병력손실을 보았다.

  고작 3일 만에 벌어진 참상치고는 대단한 피해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코카 제국군의 피해가 압도적으로 컸다.

  3일간의 치열한 대결이 끝나고 도다시 공백기가 찾아왔다. 그동안 양 진영은 죽은 병사들과 무기를 다시 수거해 갔다.

  휘이잉!

  핏물이 플러 강이 되고, 강이 모여 다시 평야를 모두 붉게 적셨다.

  평야는 비릿한 혈향을 풍기고 있었다. 곳곳에 죽은 시체를 막으려는 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

  황폐한 평야에 불어오는 바람소리는 마음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루의 공백기가 지나가고 또다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전쟁은 아직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끝이 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양쪽의 사활이 걸렸으니 한쪽이 완벽하게 무너지지 않은 이상 끝은 나지 않는다.

  헥토르 왕국의 전면전이 시작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남아 있는 공성무기가 얼마 되지 않지만 모든 화력을 퍼붓기로 했다.

  사이너스 국왕이 진두지휘를 하고 있었다.

  “마법진이라고 하면 마정석이 위치한 축이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이처럼 대규모의 진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정석을 이용한 축이 있어야 합니다.”

  “위치는 찾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마나의 흐름을 파악해 볼 때 대지의 양 끝에 축이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또한 양끝을 축으로 잡고, 내부적으로 군데군데 설치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흐름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도록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멜버른 후작은 자신이 간파한 내용을 설명하며, 마법진의 축이 되는 지점을 가리켰다. 마법력을 완벽하게 회복하고 난후 진법의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을 한 멜버른 후작이었다. 진법은 마법지노가 달랐다. 하지만 대기의 흐름, 즉 마나의 흐름만은 비슷한 효과를 가졌다. 그에 따라 접근을 해보니 마나가 일시적으로 모아졌다 풀어졌다를 반복하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모아진 부분이 마나를 흡입했다가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축인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대기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좋다. 그럼 공성무기를 자네가 지정한 지점으로 발사한다.”

  멜버른 후작이 지정한 지역은 꽤 넓었다. 무작정 발사한다고 해서 반드시 효과가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너스 국왕의 전략은 괜찮은 방법이었다. 진의 축이 흔들리게 되면 연속적으로 무너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마법진은 세밀한 작업이 필요하다. 세밀한 만큼 충격에는 그다지 강하다고 볼 수 없었다. 그 점을 집중적으로 노린다고 볼 수 있었다.

  “뱅가너 공작, 공성무기를 사용해서 놈들의 축을 공격하시오. 또한 마법진이 흔들리게 되면 마법사들은 넓게 퍼져 축이 되는 지점을 해체하시오. 마법진이 와해가 될 시점에 전면 공격을 하게 될 것이오!”

  “명을 이행하겠습니다.”

  사이너스 국왕의 지시에 의해 공격이 시작되었다.

  뱅가너 공작이 남아 있는 40대의 공성무기를 조준하도록 명령했다. 명령에 의해 병사들이 공성무기를 진법의 축을 향해 조준해 놓았다.

  “모두 발사하라!”

  타앙! 퓨우웅! 타앙! 퓨우웅!

  헥토르 왕국이 자랑하는 공성무기였다. 일반적으로 만들어진 집 정도는 다 한 방에 모두 부서뜨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자랑한다.

  쇳소리가 나자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공성무기였다.

  쿠아아앙! 쿠아아앙!

  사방으로 지면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일시에 쏘아대는 공성무기의 화력은 성 하나를 초토화시킬 정도로 엄청났다.

  공성무기의 공격은 쉼 없이 이루어졌다. 누가 이가나 끝까지 해보자는 식이었다. 무식한 방법이지만 공격이 효과가 있었다.

  앞을 가로막던 진법이 조금씩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멜버른 후작의 말대로 축을 건드리자 완벽한 장벽을 자랑하던 진법에 균열이 생겼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멜버른 후작이 마법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마법사들은 모두 퍼져서 진법을 마법력으로 와해하라!”

  흔들린 흐름이 다시 이어지기 전에 맥을 끊어놓으려는 것이다. 적절한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헥토르 왕국 진영의 반대쪽에 위치한 발키리의 영주 가르딘은 진법이 흔들리는 것을 간파했다. 흐름의 변화는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놈들의 마법사들이 마법력을 회복하고 나서 벌어질 일은 예상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의 마법력을 소모시키게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는데, 제법 시간을 벌었다고 할 수 있으니 다음 작전으로 넘어가야 했다.

  파멜라가 만들어낸 진법은 하나의 진법이 아니다.

  놈들이 발견한 것은 고작 조화진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것이 몇이 된다는 것은 들어왔을 때 깨닫게 될 것이다.

  “파멜라 다음 진법은 완벽하게 진행이 됐겠지.”

  “물론이에요. 어차피 이 정도는 간파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역시 파멜라야. 대단해.”

  “아니에요, 모두 영주님의 가르침 덕분이에요!”

  가르딘은 파멜라를 칭찬함에 주저하지 않았다. 잘한 것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냥 넘어가서는 절대 수하들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 또한 말하는 게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고작 말 한마디에 파멜라 같은 유능한 인재를 다스릴 수 있는데, 마다할 리 없지 않은가!

  “그보다 괜찮으세요?”

  “뭐가?”

  “헥토르 왕국의 기사단과 전투를 벌이셨잖아요.”

  “음, 난 또 뭐라고! 괜찮다. 그런 일에 흔들릴 정도로 난 나약하지 않아요. 나 못 믿니, 나 이래봬도 카이로만 제국의 오러마스터야! 그런 내가 당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가르딘의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믿으라고 강요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자신감을 내비춰주는 가르딘이었다. 파멜라는 그 모습에 자신감을 얻었다.

  많이 흔들리고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가르딘이지만 수하들과 병사들에게는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직 누구도 가르딘의 흥분한 모습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사람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드래곤이나 기타 종족은 제외하고 말이다.

  군주가 흔들리게 되면 수하들도 흔들리게 된다. 전쟁은 전략과 전술, 병력 수, 병기의 질등 많은 부수적인 것들에 의해서 지배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기라고 할 수 있다.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믿음과 용기가 전쟁에서 중요한 성패로 다가올 수 있었다.

  파멜라가 진법을 운용하기 위해 나가고 난 후 필리언, 갈라, 유타가 들어왔다.

  “부대 편성은 다 이루어졌지?”

  “물론이야.”

  “창기병은 단일 독립부대로 지정해 놓고, 3만의 부대를 여섯 개의 부대로 나누었다.”

  이제부터 진짜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놈들이 1차 진법을 무너뜨린 후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때 파멜라가 구상한 회심의 진법이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병력과 병력의 전투가 진행이 되기에 미리 준비를 시킨 것이다.

  놈들의 주력이 움직이는 위치에 따라서 분산이 되게 만들어졌다. 계획대로만 되면 놈들은 큰 손실을 보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런데 우리가 진법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방향을 잃지 않을까?”

  “이번 작전은 정해진 위치에서만 하게 될 거다. 그 위치로 적을 유인하는 거지. 그러니 너희들도 그 위치를 벗어나서는 안돼.”

  진법의 생문을 열어놓을 생각이었다. 놈들의 병력도 생문의 이동 경로를 따라서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부대를 여섯 방향으로 나눈 이유는 생문이 여섯 개이기 때문이다. 그 지점을 중점적으로 지키는 것이 이번 전투의 핵심이었다.

   “상대는 헥토르 왕국의 정예병이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지금까지의 전투와 소모전으로 인해 상당히 지쳐 있을 것이 분명해. 아무리 강한 강군이라도 정신과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다면 이길 수 없을 거다. 너희들의 실력을 보여주도록 해. 우리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 말이야, 물론 지지 않을 자신은 있겠지?”

  “물론이다. 우리 실력은 이미 오러마스터에 근접했어. 더군다나 스필언과 미토스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다.”

  각 부대에 필리언, 갈라, 유타, 스필언, 미토스를 부대장으로 선임해 놓았다. 나머지 한 부대는 가르딘이 직접 맡게 될 것이다.

  필리언은 전투보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가르딘!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다.”

  “뭔데?”

  가르딘의 저택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모든 상황이 벌어지고 난 후 저택에 갔을 때는 무너진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공성무기를 수도 없이 퍼부은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영지민의 사상자도 1,500명이나 나온 것은 보통 전투라고 할 수 없었다. 영지민의 경우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상대의 실력이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필리언이 제대로 살필 시간이 없다고 해도 무수히 많은 전장을 경험했다. 대충 어느 정도의 병력이 쳐들어왔는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적어도 500명 이상의 기사급 실력을 가진 놈들이 쳐들어 왔을 것으로 추정이 되었다. 또한 도망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격전의 흔적은 지운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러블레이드의 여파로 인해 벌어진 흔적들을 필리언이 모를 리 없었다. 500명의 기사급 실력을 가진 놈들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결론은 가르딘의 저택에서 격전이 벌어졌고, 그로 인해 놈들이 모두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저택에는 가르딘과 안젤리카뿐이었다. 가르딘의 실력이 오러마스터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안젤리카가 6서클 마법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두 명이서 오러마스터가 포함된 500명의 기사단을 막을 수 있냐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다. 대륙제일기사라고 불리는 파스트론 공작이라고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경황 중이라 가르딘에게 물어보지 않았지만 지금은 알고 싶었다. 동기들끼리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한 거냐?”

  “뭘 어떻게 해?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딱 잘라서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우리가 바보는 아니잖아. 그냥 그렇게 덮어버리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너도 알잖아.”

  가르딘도 필리언이 무엇을 알려고 하는지 알았다. 가르딘은 고민이 되었다. 사실을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끝까지 숨기느냐! 결론을 내리기 위해 가르딘은 심사숙고했다.

  “주신 라이니언께서 나으 갸륵한 마음을 기특하게 생각해서, 놈들을 벌주었다고 하면 안 믿겠지.”

  “당연.”

  역시나 믿지 않았다.

  하긴 그런 허무맹랑한 얘기를 믿는다고 한다면 그건 미치광이나 병신이었다. 더군다나 피닉스기사단의 복무기간을 모두 채운 노련한 기사들에게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이었다.

  “네가 뭘 잘했다고 신이 너를 기특하게 생각하냐!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로 우리를 농락하지 마라!”

  “그렇긴 하지. 무신론자인 내가 말하고서도 조금 찔린다.”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을 해.”

  가르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가르딘의 자신의 실력을 까발리느냐, 아니면 거짓을 말할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무엇을 말해도 놈들은 사실대로 믿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가르딘은 심사숙고했다.

  “모여.”

  누가 들을까 겁나는지 가르딘은 동기들을 아주 가까이 오게 만들었다.

  “내가 한 말 절대 누구에게도 하면 안 돼. 우리 모두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우리 못 믿냐?”

  “별로 믿을 만하지는 않았잖아, 너희들.”

  “뭐야? 이게 우리를 뭘로 보고.”

  “정말 듣고 싶냐? 이 말 듣고 나중에 후회할지 몰라.”

  “우리 궁금한 것 있으면 못 사는 것 알잖아! 왜 이래, 초보기사처럼!”

  동기들은 궁금한 것은 절대 참지 못한다.

  놈들의 눈빛에서 반드시 알아내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

  가르딘의 동기들의 귀에 속삭였다.

  헬쑥!

  동기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들으면 들을수록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결국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야?”

  “당연.”

  “말도 안 돼!”

  "한번 가서 물어보든지.“

  가르딘은 가서 얼마든지 물어보라고 했다. 그럼에도 동기들은 절대 그런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가서 ‘저 혹시 드래곤 아니세요?’ 그럼 상대가 ‘예, 저 드래곤 맞아요! 바로 알다니 똑똑하시네요!’ 라고 칭찬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희를 망쳤다고 덤비면 그때는 정말 끝장이었다. 사실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전설로만 알려져서 신빙성이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다크랜드라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아리따운 마법사가 드......!”

  쉿!

  갈라와 유타가 즉시 필리언의 입을 막았다. 함부로 발설했다가는 그대로 골로 가는 수가 있었다. 아니면 드래곤의 입에 잡혀먹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가르딘은 결국 안젤리카를 팔았다.

  유희를 하는 동안 말을 하면 안 되지만 결국 자신을 위해서 말해 버린 가르딘이었다. 그렇다고 그래드마스터의 실력을 만천하에 공개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동기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믿지만 최선의 방어책은 있어야 한다는 주의였다.

  동기들의 표정은 가르딘을 원망하는 투로 변했다.

  왜 끝까지 버티지 않고 말을 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목숨을 걸고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어쩔 수 없지. 동기들이 하도 말하라고 가요했으니 말이야. 나중에 들키면 나는 사실대로 말을 할 거다.”

  동기들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말했다고 자기만 쏙 빠지려는 가르딘의 의도가 보였다.

  “안 돼! 그렇다면 목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말하지 말았어야지! 남자가 지조가 없어! 지조가!”

  “어떻게 너만 쏙 빠지겠다는 거냐?”

  “우리는 오늘 못 들은 거야!”

  필리언, 갈라, 유타는 오늘 이야기를 못 들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로 다짐했다. 만약 이 사실이 밖으로 퍼지게 될 경우 어떻게 될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이미 들어놓고 못 들었다고 하면 사실이 아니게 되나. 너희들, 세상 참 편하게 산다.”

  가르딘은 여유만만했다.

  필리언, 갈라, 유타가 오히려 궁지에 몰렸다. 괜히 물어봐서 덤터기를 제대로 씌우게 된 상황이었다.

  “어떻게 하면 되냐?”

  “모른 척해.”

  “어떻게 모른 척해. 보기만 해도 살 떨리는데.”

  안젤리카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안 이상 평소처럼 대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어색한 연기가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생각만 해도 끔찍 그 자체였다.

  “그건 너희 사정이고.”

  “이런 냉정한 놈.”

   “그러게 우리는 네가 걱정돼서 물어본 것뿐이라고.”

  “맞아, 저런 냉정한 놈을 믿고 이곳으로 왔다니 내가 정말 미친놈이다!”

  가르딘은 웃겼다.

  사실 과장되게 말을 하면서도 정작 동기들은 별로 떨고 있지 않았다.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기는 했어도 그게 다였다. 다들 오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다 보였다. 가르딘과 동기들 모두 미친놈 소리는 자주 들어서 그게 이상하지 않고, 평법해져 있었다.

  차라리 드래곤인 게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만약 가르딘 혼자서 5백의 기사단을 몰살시켰다고 하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사살이라면 비참해질지 모른다. 실력 차이가 너무 나지 않은가! 아무리 동기라고 해도 경쟁심이 없다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믿고 싶은 감정이 무럭무럭 솟아나고 있었다.

  “그냥 평소처럼 대해. 그럼 되니까.”

  “말은 쉽지.”

  “역시 지일 아니라고 편하게 말한다니까!”

  “그게 가르딘이야! 가르딘이라고!”

  결국 의심은 모르쇠로 변해버렸다.

  웬만하면 안제리카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기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네 명으로 늘어난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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