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몬스터와 마수의 재침@@]
탕! 타타탕!
돌을 부수는 소리와 더불어 망치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산 전체를 소란스럽게 하는 드워프들이었다. 드워프들은 작은 다리로 발 빠르게 움직였다. 약간은 뒤뚱거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묘사가 되기도 하지만 상당히 빨랐다. 또한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150명이 쉬지도 않고 움직였는데,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드워프는 나이가 일정 수준 이상 차게 되면 바로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근력이 뛰어나다. 그렇기에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곧 자연스럽게 장인의 반열에 들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루인돌프 촌장이 맨 앞에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드래곤레어의 설계도는 드워프장로들이 모여서 고심 끝에 마련한 것이었다.
맨 처음 시작이 굴 파기였다. 레어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크기보다 훨씬 크다. 일단 보통의 성만 한 크기를 자랑한다. 또한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은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드래곤의 레어는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안에서 아래로 들어가서 수면기를 취할 수 있는 지역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아무리 빨리 만들어도 반년을 투자해야 했다. 물론 다음으로 이어지는 내부공사는 더욱 오래 걸린다. 만약 드워프가 아닌 인간들이 했다면 같은 인원수로 몇 십 년이 걸려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라.”
“예! 촌장님!”
루인돌프도 라이젠이 딸인 안젤리카를 얼마나 끔찍이 위하는지 지켜볼 수 있었다. 일족을 구해준 라이젠을 위해서 짓는 레어였다. 빈틈이 허용될 수 없다. 드워프 생애 최고로 멋진 레어를 만들기 위해서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한 달 정도 걸리자 레어의 입구를 시작으로 100미터를 파고 들어갈 수 있었다. 엄청난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입구의 크기와 좌우 폭을 생각하면 입이 쩌억 벌어질 정도로 대단했다.
루인돌프가 지휘를 하는 동안 서쪽으로 정찰 나갔던 엔돌프 장로가 돌아왔다. 같이 갔던 30명의 드워프들이 모두 돌아왔다. 그들은 모두 적철과 청철을 굉장히 많이 채석해 왔다.
“구해왔구나.”
“촌장님, 그것보다 서쪽으로 가보니 엄청난 양의 철광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주변으로 마을을 형성해도 괜찮을 정도로 넓은 분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엔돌프는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철이 많은 것은 둘째 치고, 희귀한 철들까지 많이 있었다. 드워프들에게 최적의 장소임에 틀림없는 곳이었다.
이미 마들랜드 산맥 주변에는 더 이상 철광이 없는 상태였다. 이주해야 하는 상황에서 발견한 최적의 장소는 놓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흥분한 엔돌프 장로는 한 가지 문제를 거론했다. 이곳은 대륙에서 암흑의 대지로 불리는 다크랜드였다. 안젤리카의 레어 근처는 드래곤의 영향력이 다시 발휘되기에 안전하지만 엔돌프 장로가 발견한 곳은 레어와는 거리가 상당히 먼 편이었다. 몬스터와 마수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만약 라이젠이 붙여준 골드윈이 아니었다면 몬스터들의 먹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안전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몬스터와 마수들이 우글거립니다.”
“몬스터와 마수를 몰아내지 않는 한 마을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군.”
루인돌프도 고민이 되었다.
일단 마을을 만들어 놓으면 어느 정도 방어는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의 몬스터와 마수는 수가 너무 많았다. 한도 끝도 없이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고작 180명의 드워프로 막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라이젠님에게 부탁을 드리는 것이.”
엔돌프 장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드래곤이 도와준다면 그까짓 몬스터와 마수들 정도는 순식간에 몰아낼 수 있다. 하지만 은혜를 갚기 위해서 온 것인데, 도리어 더 큰 은혜를 바라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었다.
“지금 우리는 라이젠님에게 부탁드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 않나!”
“그렇지만 일족의 장래가 걸린 일입니다. 지금부터 태어나는 자손들에게 철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술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엔돌프 장로가 과장을 섞어 말을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꾸준하게 철을 다루어야 커갈수록 뛰어난 장인이 될 수 있다. 드워프라고 해도 선천적인 것만으로 뛰어난 장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꾸준히 노력을 하며 경험을 해야 한다.
루인돌프를 비롯한 각 장로들의 골이 깊어졌다.
모든 결정은 장로들의 의견을 조율한 촌장이 하게 되어 있었다. 결국 칼자루는 루인돌프에게 달렸다.
“촌장님, 어차피 레어와 더불어 호수를 만들려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 시간 동안 마을도 없이 지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빨리 끝나는 공사는 아니었다.
루인돌프는 장로들의 열의를 받아들었다.
“부탁을 해보겠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말게."
“옳은 결정입니다.”
드래곤은 중간계의 조율자이지만 약간은 제멋대로인 성격이 있다. 어찌 보면 쉬운 부탁이 지만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강요할 수는 없다.
루인돌프는 즉시 라이젠을 찾아갔다.
라이젠은 자신의 레어 안에서 안젤리카와 놀고 있었다. 오랜만에 깨어난 수면기를 딸과 함께 오붓하게 지냈다.
루인돌프가 정중히 라이젠과 안젤리카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면서 공사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잘됐군.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는 표정인데 말을 해봐.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지원해 주지.”
안젤리카의 레어를 짓는 일이었다. 라이젠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들어주고 싶었다.
루인돌프는 약간 망설였다. 그렇지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것은 레어공사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저희 일족의 미래와 관련이 있어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드워프의 미래라......”
안젤리카의 레어공사라면 다 들어주겠지만 드워프들의 개인적인 부탁이라면 생각을 해봐야 했다. 아무거나 다 들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우선 들어나 보지.”
“안젤리카님의 레어에서 서쪽으로 한참을 가다보면 분지가 나옵니다. 그 일대에는 희귀한 철광이 많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현재 마들랜드 산맥 주변에는 철광이 거의 다 소모가 되었습니다. 만약 저희가 이곳으로 이주할 수 있다면 앞으로 라이젠님과 안젤리카님을 위해서......”
루인돌프의 말은 길어졌다.
일족의 안위를 위한 일이니 세세하게 설명해 나갔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오면 많은 세공품을 올리겠다는 말까지 했다.
한참을 이어지는 루인돌프의 말을 라이젠이 잘랐다.
“그만, 알아들었다."
“염치없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데, 고민을 많이 했군.”
라이젠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다크랜드에는 드워프가 없는 실정이었다. 이곳에 드워프가 있다면 딸을 위한 마법물품이나 세공품을 쉽게 얻을 수 있다. 또한 도움을 주었으니 부탁이 아닌 것이 된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등가교환의 법칙이 확실하게 적용되었다.
“부탁을 들어주겠다. 대신에 지금 한 약속을 절대 잊지마라. 알겠느냐.”
“물론입니다.”
“그럼 돌아가 봐라.”
“예, 라이젠님!”
루인돌프는 라이젠의 응답에 표정이 밝아졌다. 라이젠이 한다고 하면 이미 해결이 된 것이나 진배가 없었다.
“아빠, 잘됐네요.”
“그러게 신께서 우리 딸을 축복해 주나 보다.”
“아빠도 참!”
“아이고, 귀여운 우리 딸! 얼마나 자랐나 볼까? 본체로 헌신해 보아라.”
“알았어요!”
폴리모프(변신)마법 상태에서 벗어나 본체로 헌신해 보는 안젤리카였다. 사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안젤리카지만 내면에 숨겨진 힘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기보다는 무섭도록 강력하다.
황금빛의 골드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라이젠의 레어 안은 드래곤이 본래 모습으로 변해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였다.
라이젠이 그 즉시 안젤리카의 키와 몸무게를 쟀다.
“오! 그새 1cm나 자랐구나!”
수면기에서 깨자마자 딸의 크기를 쟀던 라이젠이었다. 성장기에 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호들갑 떠는 것이 제정신 가진 드래곤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어쩜, 꼬리 흔드는 것도 이리 귀여울까!”
딸이 커 가는 모습에 흐뭇한 라이젠이었다.
한동안 딸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기분 좋아진 라이젠이었다. 어차피 루인돌프의 부탁은 나중에 들어주어도 되었다. 루인돌프가 말한 지점에 가서 드래곤피어(용의 공포)를 한번 뿌려주면 몬스터와 마수들은 모두 도망칠 것이다.
영지의 성 주변을 돌아보던 가르딘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몬스터들이 계속 침범하는 이유가 발키리 영지의 사람들을 먹이로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계속적으로 막아 내기는 하겠지만 소모적인 전투였다. 몬스터들은 번식력이 대단히 뛰어나기에 한번 막아냈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이 앞으로 진법을 설치하면 좋겠는데.’
진법은 마법진과는 다르다. 마법진은 마법사가 직접 설계한 진에 마나를 불어넣는 것이다. 그에 반해 진법은 마법사가 없어도 가능한 방법이다. 대기 중에 떠도는 기운을 변형 시켜 이용하는 것이 진법이기 때문이다. 주변의 지형지물과, 토질을 잘만 이용하면 진법을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소규모, 대규모의 경우 진법의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몬스터들에게 강력한 진법은 필요 없다. 그 정도로 똑똑한 놈들이면 사람이라고 해야 마땅했다. 진법은 일반 사람도 풀기 힘든 것이다. 하물며 몬스터가 풀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진법도 마법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연산능력이 필요하다. 가르딘의 경우 검술과 기타 신법 잡기에는 능하지만 유독 약한 것이 있었다. 바로 연산법이다. 보통의 연산법이 아닌 고등연산법이기에 이미 포기한 학문이기도 했다.
성벽 앞, 다크랜드로 뻗어나가는 평야.
발키리 영지의 평야보다 더욱 비옥하다. 왜냐? 수많은 몬스터와 마수들이 피를 흘렸으니 땅이 비옥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용할 수 없다. 몬스터와 마수들의 위협으로 너무 위험했다.
‘저 땅을 개척하면 세수가 더 늘 텐데. 아쉽다!’
영지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이 많이 필요하다.
“우선은 돈이 나가지 않도록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때마침 가르딘은 파멜라를 생각하게 되었다. 마나와의 친근성이 부족해서 마법을 익히지 못한 불운의 천재. 확실히 파멜라는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한순간에 모든 계산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을 보면 가르딘도 감탄성을 내지른다.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한 달 동안 영지의 모든 경영, 행정을 파멜라가 처리하고 있었다. 가르딘은 그녀를 행정관으로 선택하고 가족들과 놀고 있는 처지였다. 그나마 간간이 스필언과 미토스가 기사단을 조련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 정도가 다였다.
기사단은 확실히 전보다 많이 달라졌다.
불과한 달 만에 검이 더욱더 날카로워지고, 예리해졌다.
죽도록 수련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올 때가 됐군."
가르딘은 동기들이 올 때가 됐다는 것을 기억했다. 아마 여기 오면 아주 피똥 싸게 될지 모른다. 그걸 생각하자 오히려 웃음이 나는 가르딘이었다.
‘와라, 지옥이 기다릴 테니!’
가르딘은 성벽을 순찰하고 난 후 다시 집무실로 들어갔다. 한 달 동안 가족들과 놀다 보니 파멜라 보기에 미안했다. 한번쯤은 관심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또한 풀어지고 나태해진 마음을 다잡을 필요성도 있었다.
가르딘은 집무실로 들어가서 앉았다.
파멜라가 서류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녀는 깔끔하게 정리를 해서 가장 중요한 것들만 가르딘에게 설명해 주었다.
사실 영주는 중대사에 대한 것만 처리하고 아랫사람을 잘 다루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일 처리였다. 가르딘 자체가 일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한몫 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제대로 된 운용처리라고 할 수 있었다.
“세수를 전과 동일하게 했습니다.”
“잘했다. 하지만 여길 보니 성벽 방어비와 군량미 등이 꽤 많이 나가는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어요. 이것은 예전부터 유지되어 온 것이고, 앞으로도 유지가 되어야 해요. 발키리 영지 내의 방어를 위한 필수조건이에요.”
“영지 내 상단이 파이트너 상단이라고 했지.”
“예, 대륙 십대 상단 중에 하나예요. 유일하게 발키리 영지에서 밀을 사가는 곳이기도 해요.”
“너무 싸게 파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아요. 파이트너 상단의 지점주인 몬타나는 대륙시세와 같이 쳐주고 있어요.”
밀농사로 많은 밀을 생산하는 것은 좋지만 가격 자체가 다른 작물에 비해 싼 편이었다. 영지 내 소득이 많이 들어올 수 있는 작물을 하나 정도는 더 생산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여기에 대안이 적혀 있어요.”
‘오! 과연!’
영지의 소득을 늘릴 대안을 이미 파멜라가 생각하고 마련해 놓았다. 한 달 동안 영지 경영을 하면서도 앞으로의 일까지 마련했다. 놀랍도록 철두철미한 파멜라였다. 역시 잘 고용했다고 생각한 가르딘이었다.
'나의 선견지명에 내가 더 놀랍구나!’
파멜라가 있기에 머리 아픈 일을 모두 떠넘길 수 있어서 좋았다. 아니었다면 고민하느라고 피똥 쌀지 몰랐다. 스스로 칭찬을 한 가르딘이 대안을 살펴보았다.
“토질을 검토해 본 결과 리베시안 찻잎 생산에 적합한 곳이 몇 군데 있어요."
“이런 곳을 어떻게 찾았니.”
“스필언경에게 부탁을 해서 같이 조사를 했어요."
좀처럼 표정에 변화가 없었던 파멜라에게 유일하게 표정 변화를 일으키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스필언이었다.
삼촌 된 입장에서 밀어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했다. 그러나 어쩌랴 사회는 신분과 계급이라는 막강한 벽이 가로막고 있으니 말이다.
‘나처럼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지.’
생각하다 보니 또 자신을 칭찬하는 가르딘이었다.
스필언의 경우 루벤 영지에서 생산하는 리베시안 찻잎을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어렸을 적 재배하는 모습까지 봐왔기에 적임자 중에 한 명이었다.
“브리안의 공부를 도와주어서 고맙구나.”
“별것 아니에요. 그것보다 브리안이 굉장히 똑똑해요. 가르치는 대로 모두 흡수하는 것 같아요!”
파멜라의 브리안 칭찬에 가르딘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식칭찬을 하자 어쩔 수 없이 표정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파멜라의 말은 결코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파멜라는 가르치는 내내 브리안에게 감탄했다. 과거의 자신보다 더 똑똑할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가르딘은 오전에 둘러본 성벽을 보고, 생각한 진법을 말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파멜라는 믿을 수 있는 아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한 달 동안 그녀를 지켜본 것은 그녀의 숨겨 진 성품까지 알아내려는 가르딘의 노력이었다. 물론 귀찮은 것이 한몫 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것보다 너 나한테 진법을 배워보지 않겠느냐?”
“진법이요7”
들어본 적도 없는 학문이었다. 가르딘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잘 돌아가는 머리로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써보았지만 결론은 모른다였다.
파멜라가 다시 물었다.
“진법이 무엇인가요?”
‘말보다는 직접 보는 게 좋겠지’
“잠깐 밖으로 나가지.”
“예, 영주님!”
가르딘은 저택의 뒷문으로 파멜라와 나왔다. 나와서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을 찾았다. 그곳에서 기초적인 진법을 보여주었다. 가르딘에게 고등진법은 무리였다. 간단히 알고 있는 오행진을 선보였다.
오행진은 수, 금, 목, 토, 화의 특징을 서로 상생하여 조합하는 간단한 진법에 속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상생의 조화를 이루어낼 수밖에 없는 자연의 법칙에 속한다. 불은 물에 약하고, 물은 나무에 약하며 나무는 불에 약하다. 또한 모든 것은 땅에서 형성이 된다.
진법은 범위가 작을수록 위력적이다. 범위가 크면서도 위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가르딘은 아주 작은 범위에 오행진을 설치했다. 설치한 오행진은 주변의 기운을 흡입하여 이질적인 기운을 내포했다. 반면에 겉으로는 전혀 변화한 것을 알아내지 못한다.
“이리 한 번 와보아라.”
“예?”
가르딘과 파멜라의 거리는 불과 2미터였다. 짧은 거리에서 와보라는 뜻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좀 전에 무언가를 설치한 것 같은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가르딘이 시키는 것이기에 순순히 따랐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아니!”
바로 앞에 서있던 가르딘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는 물과 불, 그리고 땅, 이상한 것들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것도 어려웠다. 멈추어 있던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현기증이 나서 제대로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앞으로 갈 수도 뒤로 움직일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갑자기 공간이 열리더니 가르딘이 나타났다.
가르딘은 오행진과 금쇄진을 같이 혼용하였다. 그러다가 파멜라가 어지러워하자 생문을 열었다. 사실 금쇄진이라고 하지만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게 다였다. 그것도 가장 쉬운 금쇄진 중에 하나인 일문금쇄진이었다. 8방위와 12방위를 모두 차단할 정도의 진법이 아니었다. 만약 파멜라가 진법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그녀의 뛰어난 머리로 금세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다.
파멜라는 놀라서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가르딘이 보여준 것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다. 마치 마법진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떠냐?”
“영주님은 마법도 하시는 건가요?"
“내가 설마!”
“그럼 아니라는 건가요. 하지만 이런 것은 마법사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
파멜라의 의혹은 당연했다.
마법사도 아니면서 이와 같은 신기한 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나는 마법사가 아니다. 마법사는 마나와의 공명을 통해 자신의 마법력을 높인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마법사라고 할 수 없지. 마나를 수련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마법을 할 수 없지. 좀 전에 나는 마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설마, 이것이 진법이라는 건가요!”
“맞다. 지금 펼친 것이 바로 진법이다. 마법사가 자신의 가슴, 즉 심장에 서클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과는 다르게 진법은 대기 중에 있는 마나의 성질을 이용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마나와의 친근성과는 전혀 상관없지."
마법의 개념과는 다르지만 놀라운 위력을 선보이는 진법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아니 배우고 싶다는 무한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마나와의 적응성 부족으로 마법사의 길을 포기해야 했던 비운의 천재, 파멜라의 가슴에 격동이 소용돌이쳤다.
“그런데 어떻게 영주님은 이것을 아시고 계시는 건가요?”
파멜라 입장에서 당연한 질문이었다. 평생 검을 수련해도 오를 수 없는 검의 절대경지가 바로 오러 마스터였다. 오러 마스터에 올라서면서도 이런 기술까지 익히고 있는 가르딘이 대단하기까지 했다.
가르딘은 자신의 능력을 모두 내비추지 않았다. 물론 진법은 가르딘이 가장 취약한 종목 중에 하나다. 다른 것에 비해서 한참이나 미숙하다. 그저 머릿속에 들어있는 정도다.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우연히 책에서 봤다. 내가 좀 전에 보인 것이 네 눈에는 대단해 보이겠지만 사실 지금 보여준 것은 기초나 다름없어. 책에 있었던 내용은 더욱 대단했지.”
“지금 보여준 것이 기초였어요?”
“지금부터 기초를 조금씩 가르쳐주마. 그것을 가지고 활용하는 것은 순전히 네 몫이다. 나는 그저 내가 아는 내용을 설명해 주는 것에 불과해. 좀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이 정도 했다면 너는 훨씬 더 대단한 성취를 보일 것이다."
파멜라는 주체할 수 없는 감동에 휩싸였다. 가르딘이 하찮은 것이라고 하지만 파멜라에게는 절대 하찮을 수 없는 것이었다. 포기했던 꿈을 다시 꾸게 해주는 일이었다.
“진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글을 배워야 한다. 내가 가르쳐 주는 글을 외우고, 그 뜻을 대륙공용어와 일치시켜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어요!”
파멜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가르딘은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파멜라를 시험했다. 그녀의 글 습득능력에 따라 진법을 배우는 속도까지 빨라질 수 있었다.
가르딘과 파멜라의 진법수련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는 순간이었다. 대륙최강의 진법가가 탄생하는 계기였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기괴무변한 진법을 탄생시킨 전무후무한 여 인을 말이다.
정확하게 15일이 지났다.
발키리 영지는 예전으로 점차 돌아가고 있었다. 확연하게 티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밀농사가 시작된 시기도 아니고 해서 그저 분위기가 점차 개선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바꿀 정도의 시간은 아니었다.
가르딘도 획기적인 계획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솔직히 영지민을 위해서 세금을 깎아주고, 모든 것에서 편의를 봐줄 수는 있다. 백작이 되었으니 그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영지가 분열될 수 있다. 모두가 편하자고 한순간 잘못된 결정을 하면 결국 모두가 어려워진다.
가르딘이 책임을 갖기 싫어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가족은 작은 울타리지만 영지는 큰 울타리에 속한다. 범위가 넓어질수록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가르딘은 급격한 개선보다 조금씩 개선방향을 모색하며,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발전시키기로 마음먹었다. 한 번에 크게 먹다가 탈나는 것을 여러 번 보아온 가르딘이기에 할 수 있는 결정이다.
가르딘은 기사단 교육을 스필언과 미토스에게 전적으로 맡겨 놓고, 여전히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가족의 단단한 믿음을 보전하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 잘해야 한다. 나중에 잘해주어야지 라는 마음은 가족의 붕괴를 초래하는 시초가 된다. 한순간, 또한 매순간 최선을 다해 가족 을 위해야 한다. 그것이 가르딘의 원칙이었다.
가족과 정해진 시간을 꼭 보내고 난 후 일과를 시작했다. 백작이 되었으니 따로 할 일은 별로 없다. 다만 한 가지 추가로 할 일이 있었다. 바로 파멜라에게 진법에 대한 것을 가르쳐주는 것 말이다.
가르딘은 15일 동안 상당히 많이 놀랐다. 파멜라가 원래 천재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정도일 줄 몰랐다. 가장 기초인 천자문을 2일 만에 독파해 버렸다. 대륙공용어의 뜻과 일치시켜서 정확하게 외워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진법에 들어가는 단어들을 설명했는데, 그것 역시 모두 외우고 뜻을 되새김했다. 글을 습득하는 시간으로 6개월을 예상했는데 고작 10일 만에 대부분을 독파해 나갔다. 상상 초월이었다.
파멜라의 열의가 생각 이상으로 놀랍다는 것을 말해 주는 반증이었다.
‘인간의 잠재력이 무한하다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는 모양이다.’
사실 글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말과 글자, 그리고 중원의 문화까지 모두 배우는 것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법에 필요한 단어와 뜻을 파악하는 것 정도로만 가르쳐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5일이 지나자 파멜라는 단어와 문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완벽하다고 하면 거짓이었다. 뜻을 파악하고 그 뜻을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많이 사용해 주어야 한다. 언어는 시간에 의한 망각의 존재다. 시간이 필요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습성이 있었다.
“너의 열정이 대단하구나."
“영주님의 가르침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아직 저는 배가 고파요! 배고픔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어요."
“젊고 열의에 가득 찬 네 모습을 보니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르는구나!”
가르딘은 자신도 한창 젊은 시절에 열의를 불태웠다고 하는데, 사실 뻥이었다. 가르딘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고, 커가면서 능구렁이가 되는 기술을 배웠을 뿐이었다. 세상에 타협하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고 보면 되었다.
“그럼 오늘부터 진법에 대한 기초를 배워보자.”
“예,영주님!”
가르딘은 오행, 팔괘, 구궁에 대해서 설명을 해나갔다. 가장 간단한 진법을 만들었던 기초들이라 우습게 생각하면 큰코다친다. 이것이 간단하지만 진법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행은 만물을 구성하는 다섯 개의 환경을 설명한다. 하여 물, 쇠, 땅, 불, 나무 이 다섯 가지의 기운을 어떻게 활용 하느냐에 따라 가장 기초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가장 복잡 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진법은 하나의 진법요소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여러 가지를 알아둘 필요성이 있다. 또한 그러한 가운데 연산이 필요하지. 정확한 측량이 필요한 진법 설계에서 연산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 점에서 너는 특출한 능력을 보이니 나보다 더욱 뛰어난 진법가가 될 것 이라고 생각한다.”
가르딘은 진법의 핵심을 파멜라에게 정확히 알려주었다. 다른 것은 부족하더라도 핵심을 집고 넘어가는 능력만큼은 가르딘을 따라올 자 없었다.
파멜라의 열의와 놀라운 습득능력에 시간 가는 줄 모를 지경이었다. 가르딘은 4시간 정도를 가르치고, 난 후 방에서 나왔다. 파멜라는 지금 자신이 배운 것을 다시 되새김하고 있기에 조용히 놔두었다.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며, 답을 내 놓아야 진정으로 자신이 아는 것이 된다. 남이 가르쳐준 지식을 그저 배우는 것에 안주하게 되면 결국 아류작에 불과한 것이다.
가르딘이 집무실에서 나오자 시녀인 미네가 소식을 들고 왔다.
“무슨 일이지?”
“영주님이 기다리시는 기사님들이 오셨습니다."
“오, 그래 이제 왔단 말이지. 어디 있나?”
“영접실에 계십니다."
“그럼 가야지."
예정보다 조금 늦게 왔지만 때마침 잘 와주었다.
가르딘은 즉시 저택 내 영접실, 즉 접대하는 장소에 필리언, 갈라, 유타를 보러 움직였다. 가르딘은 와준 동기들이 고마웠다. 귀족서약이라고 해봤자 농담이었다. 그걸 가지고 진
정으로 까발릴 생각은 전혀 없다. 이제까지 함께한 동기들이기에 앞으로도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작용한 것뿐이었다. 녀석들도 가르딘의 그 마음을 알기에 흔쾌히 와준 것이라 생각했다.
가르딘이 영접실에 가자 이미 차를 마시며,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저택은 굉장히 화려한 편이다. 백작급에 맞추어 보조적인 설비를 갖추고 있는 편이지만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가르딘이 동기들과 동기가족들에게 인사를 했다.
“이제 온 거냐?”
“너 때문에 이런 변방에 다 와보고, 정말 우리의 고생을 생각하면 네가 잘해야 하는 것 알지.”
“걱정 마라. 하지만 일에도 순서가 있으니 할 말은 해야겠다.”
“무슨 할말......."
“남들이 보는 데서 반말은 가급적 하지 마라. 발키리 영지를 오면서 봐서 알겠지만 내가 한 카리스마 한다는 것을 알거다."
“너 어떻게 했기에 영지민들이 그런 표정을 져?”
발키리 영지에 들어서자 별다른 것은 없었다. 영지가 제국에서 세 손가락에 들어가는 곡창지대라기에 밀 농지가 넓은 것은 알 수 있었다. 오면서 영지민 중에 한 명에게 살짝 물었다.
가르딘에 대한 평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영지민들은 나름 영주를 존경하는 눈치였다. 또한 그러면서 두려워하기도 했다. 둘 다를 모두 가지기는 쉽지 않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일이기도 하다. 영주민들이 영주에 대해서 너무 편하게 생각하면 그것도 골치 아프다.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잘해야 영지와 영지민을 위해서 올바른 일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와줘서 정말 반갑다. 오늘은 다시 한 번 회포를 풀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네놈들의 자리를 봐주마. 기대해도 좋을 거다!”
필리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기사단장인 것 잊지 마라!”
“아냐, 나야!”
“인마, 너희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고 내가 한 살 더 많잖아!”
필리언, 갈라, 유타는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통일이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르딘은 동기들의 분열을 막기 위해 미리 못을 박았다.
“우선은 필리언이 맡아, 그리고 유타, 갈라가 부단장을 해라. 어차피 단장이니 부단장이니 형식적인 거야, 너희들이 언제 위아래 제대로 알아봤냐. 예의 없는 것들이 언제부터 직위 따졌다고. 날 봐라 벌써부터 백작의 풍모가 보이지 않냐!”
가르딘이 가슴을 내보이며 자랑을 하자 필리언, 갈라, 유타의 표정이 어이없다는 식으로 바뀌었다.
“저 미친놈은 아직도 미쳐 있구나!”
“주민들이 이걸 알면 발키리 영지를 모두 떠날 텐데!”
“백작의 품위는 개뿔, 상급귀족이 너처럼 싸 보이는 경우도 드물 거다!”
“뭐야, 이것들이 백작을 모독해! 모두 대가리 박아!”
“못해! 인마!”
결국 개판이 되어버렸다.
영접실 안에 모두 아는 사람들뿐이니 다행이었다. 이 안에서 벌어졌던 대화나 상황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발키리 영지도 개판이 되어버릴 수 있었다.
가르딘은 그날 필리언, 유타, 갈라와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동기들의 가족들과 가르딘의 가족들 역시 같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 부인들끼리 수다를 떨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모두 남편과 자식들에 대한 수다라는 것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또 하나의 만남들이 있다.
바로 동기의 자식들과 브리안의 만남이다. 동기들 대부분이 결혼을 일찍 했기에 이미 15살을 넘은 아이들도 있다. 그 아이들은 모두 킹덤나이트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 에 발키리 영지에 오지 못했다.
킹덤나이트는 제국기사 양성소이기에 혼자 들어가서 생활하는 기숙사 생활이다. 실력만 받쳐준다면 자식들도 능히 피닉스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보낸 것이다.
브리안과 아이들의 만남은 예전부터 이어져 왔다.
모두 브리안보다 많은 나이를 가지고 있지만 서열이 엄연히 존재했다. 모두는 브리안의 성정을 알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귀엽고 깜찍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누구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그렇지만 싫어하지는 않았다. 잘못된 것에는 철저하지만 다른 것에는 누구보다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녀석들을 철저하게 눌러준 것이 바로 브리안이었다. 또한 브리안의 머리가 상당히 뛰어나기에 오히려 배울 점이 많았다.
“잘 있었어.”
“응, 브리안도 잘 있었지."
“나야 물론 잘 있었지."
브리안은 발키리 영지를 아직 나가 보지 않았다. 발키리 영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들도 왔으니 다시 밖으로 나가서 즐겁게 놀 수 있다는 것에 반가웠다.
동기들이 어제 왔기에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려고 하니 가르딘을 빼고 필리언, 갈라, 유타는 속이 좋지 않았다. 가르딘이야 주정을 밖으로 모두 배출해 버렸기에 이 상이 없다. 또한 그랜드 마스터쯤 되면 술에 취하지 않는다. 몸 자체적으로 정화를 해버린다.
가르딘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발키리기사단을 연무장으로 소집시켰다. 발키리 영지에 올 때 약속했던 것을 시행하기 위한 일이었다. 동기들에게는 기사단장과 부단장을 주겠다고 말했지만 발키리기사단에게는 다른 말을 했기 때문이 다. 이 사실을 알면 동기들이 가르딘을 죽이려고 할지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르딘은 어차피 치러야 할 일이기에 시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똥줄 타는 동기들의 모습을 마음껏 감상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미네, 어서 가서 필리언, 갈라, 유타를 연무장으로 데려 오겠니.”
“예, 영주님!”
미네가 동기들을 부르기 위해 나서자 가르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제 엄청나게 술을 마셨으니 몸이 깨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술은 반응을 느리게 하고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하지만 명색이 피닉스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이정도의 핸디캡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기사딱지 떼어놓은 것이 나았다.
하아함!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연무장으로 가는 필리언, 갈라, 유타였다. 어제 먹었던 술과 안주가 버무려져서 나올 것만 같았다. 잘 만들어진 수프를 만들 것 같았으나 품위를 생각해서 참았다. 명색이 이제 자작이었다. 자작이 되었으니 그만한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래?”
“낸들 아냐?"
“머리도 아프고, 짜증나네."
미네가 연무장으로 안내를 했다.
연무장으로 들어간 필리언, 갈라, 유타는 짐짓 표정을 똑바로 했다. 그 앞으로 발키리기사단이 잘 벼린 검처럼 서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굳건한 눈빛에 제법 수련한 티를 보여 주었다. 변방의 기사단치고는 제법 단련이 되어 있었다.
“음, 좋군!”
“기사단에 우리를 소개시켜주려나 보다."
“그러게, 하긴 이런 일이라면 해야지.”
명색이 기사단장과 부단장들인데, 자신의 기사단과 서로 안면을 트지 않는 것은 맞지 않았다.
술기운을 오러로 조절한 후 위엄 있는 자세로 연무장 안에 들어갔다. 이미 그 앞으로 가르딘이 나와 있었다.
가르딘은 동기들에 게 앞으로 오라고 했다.
“아침부터 불러서 미안하게 됐다.”
“괜찮습니다.”
기사단이 있는 상태이기에 동기들도 함부로 말을 놓지 않았다.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어수룩한 기사들이 아니었다.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녀석들이기에 알아서 상황파악을 했다.
“이 앞으로 나온 기사들은 나와 같이 피닉스기사단에서 생활을 한 동기들이다. 모두 피닉스기사단에서 오랜 생활을 하고 제대를 한 백전노장들이지.”
가르딘의 소개는 길었다.
장황하게 필리언, 갈라, 유타와 실력을 설명해 나갔다. 동기들도 가르딘의 소개에 흡족해했다. 좋은 점을 부각해서 말해 주는데 싫어할 리 없지 않은가!
“해서 이번에 제대를 하고 나를 따라 발키리 영지에 오게 되었다. 필리언 자작, 유타 자작, 갈라 자작은 순수하게 실력으로 피닉스기사단에 들어간 실력자이기에 허울 좋은 명예 보다 순수한 실력을 더욱 존중한다. 발키리 영지에 오면서도 확실히 한 것은 바로 실력을 보여주어 이곳에 남겠다고 한 것이다.”
말이 이상하게 산으로 가고 있었다. 그저 제대하고 비빌 구석을 찾아왔을 뿐이었다. 모두 제대하고 편한 생활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실력을 운운하며 실력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동기들은 가르딘을 보았다. 가르딘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발견하고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파악했다.
‘저...저 놈이!’
‘어찐지 쉽게 가더라!’
‘내 그럴 줄 알았어, 처음부터 칭찬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렇다고 여기에서 가르딘의 말을 자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말을 들어보면 결코 나쁜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말을 자르고,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백작이자 영주의 말을 함부로 자를 수 없는 것이 동기들의 불운이었다.
“기사단장과 부단장도 실력으로 뽑는다고 결정을 했으니 자신 있는 기사들은 나와서 여기 세 명에게 실력을 보여라.”
보통의 기사들은 피닉스기사단의 기사에게 도전하는 것 자체를 망설인다. 실력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키리기사단의 기사들은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가르딘이 던져 놓은 떡밥을 제대로 받아먹었기 때문이다. 발키리기사단이 가르딘에게 보내는 신뢰가 보통이 넘었다. 완전하게 가르딘의 수중에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설마 지지는 않겠지.’
가르딘의 눈빛에서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 동기들이었다.
빼도 박도 못하게 된 동기들은 똥씹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가르딘의 의도가 불순하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력이 없는 자를 기사단장과 부단장으로 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50명에 달하는 기사들이 모두 도전을 해올 태세였다.
술기운이 확연하게 달아난 필리언, 갈라, 유타의 표정이 달라졌다. 대련에 임하는 동기들은 어제 밤까지 웃고 떠드는 기사들이 아니다.
"어서 덤벼 보아라."
유타와 갈라가 먼저 나서서 대련이 시작되었다. 그 다음으로 필리언이 나갔다. 한 달 반 동안 실력이 일취월장한 발키리기사단은 자신감에 차있었다.
열의를 가지고 덤벼드는 기세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상대는 피닉스기사단의 노장들이었다. 기세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기사들이 아니었다. 한 번의 검으로 기사를 쓰러뜨리고, 다시 한 번 이어지는 검으로 기사들을 또다시 쓰러뜨렸다.
놀랍도록 매끄러우면서도 유연했다. 유연함에 있어서는 오러 마스터에 이른 미토스와 스필언보다 더 뛰어날 수 있었다. 기사짬밥을 밑구멍으로 먹은 것은 아니었나 보다.
미토스와 스필언이 좌우 양쪽에서 지켜보았다. 행여나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대련은 1시간이 넘게 되었다.
“허억! 허억! 허억!”
발키리기사단 전원이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고작 3명인데 이기지 못했다. 역시 피닉스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실력이 월등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가르딘은 대련을 보면서 흡족해했다.
‘30분을 넘기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괜찮군.’
비록 동기들이 전쟁에서처럼 살수를 노리지 않았다고 해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동기들은 모두 오러 익스퍼트 상급이었다. 이 정도의 기사들은 좀처럼 구경하기 힘들다. 이제 막 오러 익스퍼트급에 오른 기사들에게는 무리가 가는 대련이었다.
“이제부터 이들이 기사단장과 부단장이다. 이의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상황으로 끝이 났다.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기사가 기사단장과 부단장으로 왔으니 앞으로 더욱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에 충분히 만족했다.
“기사단은 잠시 쉬고, 필리언, 유타, 갈라는 나를 따라오도록.”
가르딘이 기사단은 쉬게 하고 동기들을 따로 불러 집무실로 데려갔다. 집무실로 가는 동안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혁! 헉! 헉!”
땀이 삐질 거리듯이 나오는 필리언, 갈라, 유타였다. 발키리기사단의 기사들이 보고 있기에 지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사실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오러 익스퍼트 상급이라고 해도 기사들 50명을 상대하고 전혀 지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것도 전투가 아니고 대련에서 말이다. 대련이 어찌 보면 더욱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전투는 죽여도 되는 것이기에 인정사정 봐주지 않지만 대련은 상대를 죽일 수는 없었다. 봐주는 게 죽이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다.
“너 이럴 수 있는 거냐?”
“그러게 미친놈 밑에는 미친놈들뿐이라더니!”
“오자마자 사람을 개고생시키냐!”
“다 너희들을 위해서 한 행동이야, 설마 내가 아무 이유 없이 그랬겠냐. 날 너무 모른다, 너희들."
“시끄러, 너라면 충분히 그럴 놈이야!”
동기들은 가르딘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가르딘이 무슨 의도로 그런 줄을 알지만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안다고 무조건 그래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일 사람 이 얼마나 있겠는가!
가르딘은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거 안 되겠네, 내가 오러 마스터에 이른 심득을 조금 베풀어줄까 했는데! 싫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주지 뭐. 나야 아쉬울 게 없으니까.”
심각하게 쏟아 붓던 비난일색의 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제대하고 느긋하게 살고 싶어 하는 기사들이라고 해도 오러 마스터는 꿈이자 목표였다. 그런 목표에 이르려면 혼자서 모든 것을 이루기 힘들다. 주변 상황이 받쳐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항상 널 믿고 있었다!”
“위대한 가르딘 마스터님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좀 전까지 비난했던 녀석들이 누구더라."
“누가 비난했다고, 너야! 그럼 너야!”
“물론 아니지.”
“나만 아니라고!”
사람들 다스리는 데 타고난 가르딘이었다. 상대가 무얼 원하는지 훤히 알고 있는 만년 묵은 구렁이었다. 동기들도 백년 묵은 구렁이지만 비교자체가 되지 않았다.
가르딘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검술을 처음부터 알려줄 생각이었다. 이곳까지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녀석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몰염치였다. 또한 이 녀석들이 라면 믿을 수 있었다. 20년 동안이나 같이 생활했던 녀석들을 믿지 못한다면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이 되었다.
드워프들이 마을로 선택한 장소로 이동한 라이젠이었다. 라이젠이 처음 수면기에서 깨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마나폭풍이 일어나고 피어가 발생했다. 이것은 수면기에 들어서면서 응축된 힘이 발산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평상시에도 드래곤피어를 사방에 뿌리고 다니지는 않는다. 내부적으로 마나를 완벽하게 숨기고 있는 상태였다. 만약 피어를 계속 뿌리고 다닌다면 인간사회에서 유희를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드래곤의 피어는 모든 종족에게 두려움을 주는 기운이었기 때문이다.
“여기군."
확실히 대량의 몬스터와 마수들이 주변에 우글거리고 있었다. 이만한 수의 몬스터와 마수들을 드워프들이 견뎌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드워프가 선택한 장소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자신들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을 만들어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선택한 것이다. 무리한 욕심을 내지 않았다는 것에 라이젠은 만족했다. 지키지도 못하는 곳을 무리하게 선택했다면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드워프는 유용한 존재들이었다. 그것은 인간들뿐 아니라 드래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모두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드래곤은 미적 감각이 제법 뛰어나다. 아무거나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을 싫어하기에 드워프들이 꼭 필요했다.
강제적으로 하지 않아도 알아서 귀공품을 만들어준다고 했으니 만족한 상황이었다.
라이젠이 피어(공포)를 드러내지 않자 몬스터들이 냄새를 맡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은 대부분 두뇌라는 것이 없어 보였다.
“하찮은 미물들을 상대하기는 귀찮군.”
다 죽인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공포를 되새겨 줄 필요가 있었다. 라이젠의 몸에서 압도적인 마나의 파워가 형성이 되었다. 드래곤의 공포는 몬스터와 마수들에게는 극약이나 마찬가지였다. 본능적으로 두려움에 떨며 다시는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우우우우우우웅!
드래곤피어가 발생하자 라이젠을 중심으로 파장이 일어났다. 드래곤피어의 기운으로 인해 사방으로 퍼져있던 몬스터와 마수들이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항거불능의 상대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타타타타탁! 타타타탁!
“크아앙! 크아앙!”
시끄러운 발소리와 몬스터와 마수들의 울음이었다. 뒤도 보지 않고 앞으로 더 멀리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자리했다.
엄청난 수라서 그런지 바닥을 밟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라이젠이 자신의 기감을 열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나중에 또 올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모두 쫓아낸 것을 확인했다.
“골드윈을 가디언으로 주어야겠군."
여러 개의 가디언 중에 하나인 골렘이었다. 드워프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주어도 무방했다.
라이젠이 일을 끝내고 나서 다시 자신의 레어로 공간이동을 했다. 안젤리카에게 절대마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가 잠시 짬을 낸 것이다.
자식교육에 있어서는 드래곤도 인간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우르르르| 우르르르르!
시꺼먼 먼지를 형성하며 발키리 영지로 달려오는 것들이 있었다. 뒤로 이어지는 새까만 존재들 모두가 인간들이 아니었다.
인간들을 보는 족족 잡아먹는 몬스터와 마수들이었다.
성벽에서 망을 보고 있던 피터슨은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전번 몬스터, 마수 침입 때 살아남아 여전히 수비병을 하고 있었던 20년차 베테랑 피터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야! 제기랄!”
당분간은 조용할 줄 알았는데, 세 달을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피터슨은 즉시 경고음을 울렸다.
땡! 땡! 땡!
“몬스터와 마수들의 습격이다!”
피터슨이 소리치며, 경고음을 울리자 자동적으로 사방에서 신호가 울렸다. 발키리 영지의 신호체계는 단계별로 되어 있었다. 각 성에서 성까지 거리를 계산해서 소리가 들리는 지점에서 다시 신호가 울려 연속적으로 먼 거리에 신호를 전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단계마다 울리는 신호음이 발키리 영지의 주인, 즉 가르딘의 집으로까지 가는데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 가르딘의 저택은 다크랜드의 몬스터들을 막기 위해서 최소거리에 있는 편이었다.
땡! 땡! 땡!
연속적으로 세 번, 쉬고 다시 연속적으로 세 번이 몬스터와 마수의 침입을 알리는 신호음이었다.
가르딘은 그 시각에 집무실에서 파멜라가 작성한 서류들을 체크하고, 확인해 주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파멜라는 이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침입했나 봐요!”
파멜라에게 몬스터 침입은 아버지를 죽게 한 일이었다.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 아닐 수 없다. 3달이 지나 겨우 다잡은 마음이 흔들렸다. 다시 또 한 번 누군가를 잃기는 싫었다.
가르딘도 짜증이 치밀었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몬스터들이 쳐들어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균적으로 이맘때는 공격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파멜라가 있는데 불안한 말을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우선은 파멜라를 안정시켜주는 것이 나았다.
“걱정하지 마라. 명색이 삼촌이 오러 마스터다. 몬스터 따위에게 당할 것으로 생각하느냐! 너는 아직 어리지만 똑똑한 아이다. 너보다 더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니냐.”
가르딘의 말에 파멜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보다 더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인 록산느였다.
“지금 즉시 기사단으로 갈 테니, 너는 어서 어머니에게 가보아라. 되도록 내 가족에게 가서 같이 있도록 해라.”
“알겠어요, 영주님! 부디 조심하세요!”
“물론이다.”
라이나와 브리안의 성격은 가르딘이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약해 보이지만 강한 마음을 가진 아내와 딸이었다. 가르딘을 무조건 믿고 있을 것이다.
가르딘은 그 즉시 저택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이미 발키리기사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발키리기사단의 앞으로 필리언, 갈라, 유타가 짜증 섞인 눈빛으로 가르딘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가르딘과 별반 차이 없었다. 필리언, 갈라, 유타의 경우 짜증날 만했다. 발키리 영지에 와서 기사들과 대련한지 3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조금 여유가 생겨 쉬려고 하니까 몬스터와 마수들이 침입한 것이다. 쉴 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가르딘은 그런 동기들의 마음을 무시하고 스필언과 미토스를 보았다. 지금 믿을 수 있는 녀석들은 스필언과 미토스였다.
“영지를 위협하는 존재는 이유고하를 막론하고 쓸어버린다. 이것이 내가 정한 법이다. 가자!”
“충!”
발키리기사단의 수가 전보다 반으로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전력 자체는 몇 배나 상승해 있었다. 거기다가 오러 마스터가 3명이나 존재했다. 몬스터들이 아무리 많아도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가르딘이 선두에 서고 그 뒤로 필리언과 유타, 갈라가 섰다. 동기들이 뒤에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너 그러는 거 아니다.’
‘맞아, 오자마자 너무 부려먹는 것 아니냐!’
‘차라리 피닉스기사단에 있을 때가 더 편했던 것 같잖아!’
아주 작은 소리로 말을 하고 있지만 가르딘은 모두 들었다. 가르딘도 그 마음 잘 알고 있었다. 편하고 조용하게 잘 살고 싶어서 왔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가자 불평이 나올 만했다.
가르딘은 동기들의 불평을 들었으나 모른 체했다. 자금 중요한 것은 몬스터들을 막아내는 것이다.
슈슈슉!퓨융!퓨융!
수천 개의 화살이 성벽 위에서 쏟아져 내려갔다. 화살이 날아가서 몬스터와 마수들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몬스터와 마수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마치 뒤에서 더 무서운 것에 질려있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하는 것 같았다.
일반사람에 비해 몬스터의 회복력과 체력은 대단히 강했다. 화살 한두 대 맞아 가지고서는 죽지도 않는다.
수백 마리를 죽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가 줄기는커녕 더 많아지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가르딘이 도착했을 때 이미 공성전이 시작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르딘이 발키리기사단을 이끌고 성벽에 올라섰다. 아무리 많은 화살을 쏴도 꿈쩍도 않는 놈들이 있었다. 덩치가 사람의 5배나 되는 오우거까지 모습을 보였다. 특이한 몬스터와 생전 보지 못했던 마수들까지 나타났다. 가르딘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전번 몬스터의 습격으로 성벽 곳곳이 아직 불안정했다. 그동안 수리를 하고는 있지만 3개월 만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수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화살이 얼마나 남았지?”
“한 차례에서 두 차례 정도 소모하면 더 이상 없습니다.”
1만에 달하는 병력이 소모하는 화살이었다. 한 번 날리는 데만도 1만 개의 화살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최소 10만발 이상의 화살이 필요한 상황인데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이대로는 성벽이 모두 무너질 수 있었다. 화살이 없으니 나머지는 공성전으로 되어간다.
“마을주민들에게 기름을 끓이라고 해.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돌을 나르라고 해.”
“예, 영주님!”
1차 성벽에서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2차 성벽이라고 해봐야 1차 성벽보다 더 약했다. 이제까지 1차 성벽이 가장 단단한 보호막이 되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몬스터와 마수들이 지르는 소리는 시끄러우면서도 사람들의 공포를 자극했다. 공포는 실수와 망설임을 만들어낸다. 가르딘은 병사들과 영지민들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맨 앞에서 진두지휘하면서 독려했다.
가르딘은 검에 오러 블레이드를 형성시켰다.
사람들은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을 알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때론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오러 블레이드에게 압도적인 힘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이 사방으로 퍼지자 기사들과 병사들이 힘을 내었다. 오러 마스터가 이래서 중요하다. 기사와 병사들의 사기진작에 오러 마스터만큼 좋은 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몬스터와 마수는 지성이 없다. 돌진하는 것밖에 모르는 몬스터에게 진다는 것 자체가 수치다.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와아아아!”
막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싸우는 것보다 반드시 막을 수 있다고 마음먹고 싸우는 것이 이기는 지름길이다. 때론 인간의 불가사의한 능력이 발휘되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다.
가르딘은 지휘권을 4개로 나누었다.
필리언과 갈라, 유타가 있는데 혼자 지휘를 모두 내리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한 사람이 판단을 내리고 지휘를 하는 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에 따라 각 구역에 따라 기사단을 나누어서 동기들이 지휘할 수 있도록 분배해 주었다.
당연히 정중앙은 가르딘의 몫이다.
쿠쿵! 쿠쿵!
몬스터 중에서도 대형의 몬스터인 트롤이 성벽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해서 부딪쳤다. 돌로 된 성벽을 두드리는 트롤의 공격이 무식하게 느껴졌지만 그것으로 인해 조금씩 성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쿠쿠쿠쿵! 쿠쿠쿵! 쩌저저적!
금이 가기 시작한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 필리언이 그 즉시 기사들과 병사들을 이동시켰다. 무너지는 성벽에 깔려 버릴 수도 있었다.
“뒤로 피하고, 기사들과 병사들은 아래로 내려가서 방어한다!”
뚫린 곳을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즉시 성벽 아래로 내려가 방어진형을 갖추었다. 그 앞으로 나무로 된 창을 엮어 역으로 세워 놓은 구조물을 곳곳에 배치하여 몬스터와 마수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성벽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약하겠지만 기사들과 병사들이 막아서기에 어느 정도는 방어가 가능했다.
가르딘도 무너진 곳을 보았다. 필리언이 알아서 대처를 잘 하고 있는 편이었다. 몬스터들의 수가 상당히 많아서 위험한 곳이 곳곳에 보였다.
“기름을 붓고, 돌을 던져라!”
주르르룩! 주르르록!
크어어어어엉! 크어어어어영!
펄펄 끓는 기름이 쏟아져 내리자 몬스터와 마수들이 비명성을 내질렀다. 사람이건 몬스터 건 뜨거운 것을 참을 수 있는 존재는 되지 못했다. 뜨거운 기름이 쏟아지고 돌덩이를 머리통과 몸에 맞은 몬스터와 마수들이 죽거나 비명을 질렀다.
가르딘은 마법사가 있다면 더욱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저 서클의 마법사라면 별 소용없겠지만 고 서클의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해 주는 것만으로도 상황은 더욱 손쉬울 것처럼 보였다.
가르딘이 잠시 상념에 찰 때, 또다시 성벽에 균열이 일어났다. 이미 오랜 시간 충격에 노출되었던 성벽이었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받은 충격으로 인해 더욱더 많은 곳이 무너지고 있었다.
도노반 자작이 숨을 거둔 것은 한곳이 무너진 곳을 필사적으로 막다가 벌어진 것이다. 전번보다 더욱더 위험한 상황이었다.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군."
위험하지만 아직 여유는 있었다. 지금까지 인명피해가 일어난 것도 아니고, 막아내는 데 무리가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인간과 몬스터들의 지구력 싸움이었다. 누가 이기나 끝까지 가보자고 하는 것 같았다.
가르딘은 문득 이상하다고 생각됐다.
‘몬스터들이 이토록 필사적일 수 있는 건가?
먹이를 향해 덤비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가르딘이 보기에 그저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하는 것 같았다. 몬스터들의 지능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생존본능까지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에 쫓기듯이 달려드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여겨졌다.
‘다크랜드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군.’
다크랜드는 암흑의 대지라고 불리며 인간의 발길을 거부 하는 마의 지대였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지도 않고 판단할 재주는 가르딘에게 없었다. 일단 눈으로 봐야 상황을 알 것이 아닌가! 답답하기만 한 가르딘이었다.
'나중에 한 번 들어가 봐야 하나.’
계속적으로 몬스터들에게 시달릴 수는 없었다. 공격을 방어하는 것 자체는 상관없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성벽을 보수해야 하고, 화살과 무기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수리, 보수에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목숨이 죽어나간다는 것에 있었다.
아무리 풍족한 발키리 영지라고해도 군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면 문제가 되었다. 편안한 영지생활을 위해서 문제의 원인을 반드시 찾아야 했다.
휘이잉! 뎅강!
털썩! 쿠쿵!
무너진 성벽을 둘러싸고 그 안에서 젊은 기사가 검을 휘둘러 오우거의 목을 베어버렸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대형몬스터인 오우거를 절단 내는 무섭도록 빠르고 강력한 검술이었다. 바로 스필언이었다. 스필언이 윈드 스텝을 이용해서 검을 휘둘렸다. 물론 오러 블레이드보다는 오러를 검에 주입하는 정도로 사용했다. 장시간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상황에서 오러 블레이드는 사치였다. 그만한 상대도 아닌데 무리하게 오러를 낭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스필언이 대형 몬스터를 막고, 일반작은 몬스터들을 병사들이 막아내었다.
스필언이 활약하며 몬스터들을 막아내고 있을 때 미토스 역시 바쁘게 검을 휘둘렸다. 스톰 검법과 일렉트릭 검법을 능숙하게 펼쳐 내며 여유롭게 막아내었다. 미토스도 오러의 낭비를 줄이기 위해 최소한의 움직임과 최소한의 오러를 사용했다.
“대...단하다!”
“강하다!”
오러 마스터가 왜 강한지 피부로 느끼게 된 병사들은 더욱더 사기를 끌어올렸다.
가르딘은 스필언과 미토스의 오러 운용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보았다. 가르쳐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항마멸사신공의 운용이 매끄러워지고 있었다. 몬스터들을 상대하면서 배운 것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학습능력과 운용능력이었다. 실전에서 배운 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만약 배운 것이 10이라고 하면 처음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힘은 3내지 5를 넘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스필언과 미토스는 10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강해지고 있었다. 강해지는 것이 점점 보였다. 무섭도록 빠른 진전이었다.
‘내가 괴물을 양성하는 것 아닌지 몰라.’
오러 마스터 초급에서 벌써 중급에 다다르고 있었다. 신입인 미토스와 스필언이 활약하는데 영주인 가르딘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왜냐? 다른 곳은 무너지는데 이곳은 제법 단단했다. 또한 가르딘이 병사들을 직접 관리하기에 몬스터들을 무리 없이 막아내고 있었다.
‘무너지지 않는데 어쩌라고!’
결국 스필언, 미토스만 뺑이 친다는 말이 되었다. 물론 두 천재 녀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가르딘을 제외한 필리언, 유타, 갈라 역시 뚫린 성벽을 막느라 정신없었다. 몬스터와 마수들이 그곳만을 집중적으로 달려들어 오기에 더욱 힘들었다.
날이 어두워지는 상황에서도 계속적으로 쳐들어왔다. 군대의 경우 한 번 공격이 진행이 되지 않으면 쉬고 다음 날 다시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반면에 몬스터들은 달랐다. 막강 체력과 무식함을 무기로 덤벼드니 이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허억! 허억!”
필리언, 갈라, 유타의 입에서 단내가 흘러나왔다. 친구 따라왔다가 개고생하고 있었다.
‘이거 잘못 온 것 아닌지 몰라.’
몬스터의 대량침입은 하루가 고비였다. 낮부터 시작해서 다음 날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진행이 되었다. 그 뒤로는 산발적 공격이 다였다. 공격이 올 때는 폭풍해일처럼 몰아쳐 서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막상 막아내고 나자 인명피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가르딘은 백작의 위엄을 선보이며 기사들과 병사들을 위로했다.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병사들과 기사들에게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영지는 너희들이 지켜야 하는 곳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희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다. 우리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도 영지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
“와아아아!”
“영주님 만세!”
보통이 다 이렇게 끝이 난다. 대승을 거두고 한마디 잘 해주면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환호를 받는 것이 보통이다. 가르딘도 그것을 알기에 한마디 해준 것이다. 수고와 보람이 없다면 무엇을 보고 목표를 이루어 나가겠는가! 인간의 원초적이며, 기초적인 것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가르딘은 죽은 병사들과 부상당한 병사들에게는 따로 적절한 보상을 해주기로 약속을 했다. 이미 죽었다고 하지만 영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죽은 가족들에게 보상을 해주어야 하는 의무가 영주에게는 있었다.
가르딘은 기사들 중에서 가장 멀쩡했다.
필리언, 갈라, 유타, 미토스, 스필언을 비롯한 모든 기사들이 땀과 몬스터들의 피로 갑옷이 얼룩져 있지만 가르딘의 갑옷은 처음과 같이 빛이 번쩍 번쩍했다.
사실 가르딘의 경우 처음에 사기충천을 위해 오러 블레이드를 형성시킨 것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입 밖에 없었다. 입으로 나불거리며 사기를 끌어올리고, 적절한 대응방법을 마련한 것이 다였다.
가르딘이 필리언, 갈라, 유타에게 다가가서 한마디를 해주었다.
“수고했다. 다음에도 부탁한다."
부글! 부글!
동기들의 화를 자극하는 한마디였다.
“나는 이만 돌아가서 몬스터 침공에 대한 서류를 작성해야 하니, 여기서 남은 일을 처리해 주기 바란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 사라지는 가르딘이었다. 다른 기사들이 있기에 속으로 화를 삼켜야 하는 필리언, 갈라, 유타였다.
전후처리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사람들의 인심이 달라진다. 최소한의 예의를 가지고 처리를 해야 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가장 어려운 일이 된다.
가르딘이 서류작성이라고 하지만 그 일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가르딘은 집무실에서 황궁에 보낼 서신을 검토하고 있었다. 말을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황궁에 보내는 서신에 쓰이는 단어 하나의 선택이 자칫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기에 사전에 검토를 철저히 해놓아야 한다.
서신의 경우 가르딘보다는 파멜라가 작성하게 했다. 가르딘은 전날 벌어진 침공에 대한 것을 파멜라에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 당시에 있었던 사실과 더불어 피해 상황 등을 검토해서 작성해야 한다.
파멜라의 무섭도록 빠른 연산능력이 발휘가 되어 금세 피해상황이 파악되어 있는 상태였다.
“피해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되는 거냐?”
“최소 2만 골드가 필요하겠어요.”
1천 골드만 해도 눈이 뒤집힐 판인데, 그 액수가 상상초월이었다. 1골드만 가지고도 일반 가정집이 1년 동안 근근이 먹을 수 있는 액수였다. 생전 만져보지도 못한 돈이 허공으로 날아간다고 생각하니 배가 아파서 미칠 지경이었다.
“전에 본 피해까지 환산하면 4만 골드 이상이 필요해요, 더군다나 성벽수리에 들어가는 돈은 더욱 많이 필요할 거예요.”
“그...것참 곤란하구나. 현재 남아 있는 예산이 얼마나 있지?”
“1년 영지의 재정은 20만 골드예요. 그 중에서 군비로 7만 골드가 들어가고, 영지 내의 발전을 위한 기금으로 3만 골드가 들어가요. 또한 황궁으로 가는 세금으로 5만 골드예요. 이번에 4만 골드가 소비가 되었으니 남아 있는 여유 액수가 1만 골드라는 말이 되요."
“빡빡하게 돌아가는구나."
“이번 전투로 벌어진 손실액이 예상보다 커서 1년 예산을 타이트하게 조여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유비용이 없다는 것이 이처럼 힘들다니 가르딘이 생각하기에 액수가 커지자 허용범위를 어디에서 조절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소 만지던 돈이 아니라는 것이 가르딘의 발목을 잡았다.
“전번에 말한 대로 리베시안을 재배해야겠구나!”
“모종을 비롯해서 찻잎을 말리고 다듬는 작업 일꾼이 필요해요.”
“얼마...나 드는 거냐?”
차마 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느껴진다. 액수는 컸지만 정작 남는 게 별로 없어 보였다.
“다 합치면 최소 5천 골드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커 억!”
숨이 턱 넘어갔다. 리베시안이라는 모종을 심어 기르는 데 1년이 걸리고, 그 모종에서 나온 찻잎을 말리고 다듬는데 사람이 필요했다. 이것들이 다 돈이었다. 세상사 쉽게 돈을 버는 게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가르딘이다.
“그럼 어렵다는 말이냐?”
“원래 영지발전기금이라는 것이 밀 농지 개간과 더불어서 도로와 집을 짓는 것에 들어가는 돈이에요. 이 돈에서 쓰면 되니 걱정하실 것은 아니에요.”
“음, 다행이구나.”
남아 있는 돈까지 모두 소모한다고 했으면 머리가 너무 아플지 몰랐다. 돈이라는 것이 쓰기는 쉬워도 벌기는 어려운 것이 세상이다.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갈지도 모르는데 낭비하며 쓸 수도 없는 일이다. 나중을 대비해서 돈을 모아놓아야 하기에 영지수입을 늘리기 위한 방법을 계속적으로 모색해야 했다.
“우선은 황궁에 보낼 서신을 작성이나 하자구나!”
“서신을 잘만 작성하면 황궁에서 위로금이 올지도 몰라요."
“그렇겠구나. 하지만 적당히 써야 한다. 나는 별로 튀고 싶지 않거든.”
할 수 없이 이곳에 오기는 했지만 여기서 터를 마련할 생각이다. 황궁과 멀어질수록 가르딘에게는 나은 일이었다. 영지를 다스리는 것도 머리 아픈데, 권력투쟁까지 해야 한다면 머리가 아파서 깨질지 모른다.
가르딘은 파멜라가 작성하는 서신을 보며 여러 차례 수정을 가했다. 필요한 것도 있지만 너무 무리한 요구는 탈이 난다. 재정이 너무 없어 보여도 문제였다. 타 영지의 놀림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무난하게 막은 것이기는 하지만 피해가 있기에 그에 따른 위로금 정도면 되었다.
서신이 모두 작성이 되고 난 후 바로 전령을 통해 황궁으로 가도록 했다.
“진법은 얼마나 성취했느냐?”
“영주님이 가르쳐주신 오행진과 삼재진, 팔괘진, 금쇄진에 대해서는 대부분 파악했어요.”
“진전이 빠르구나!”
“모두 영주님의 가르침 덕분이에요.”
“아니다. 너의 열의와 노력이 아니었다면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르딘은 신마의 사념에 남아 있는 진법에 대한 것을 모두 파멜라에게 가르쳐주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신마의 경우 진법에 대해서 잘 안다고 볼 수 있었다. 신마가 천기자가 만들 어 놓은 역천무한진을 우습게 여기고 덤벼든 것은 진법을 알고 있기에 들어간 것이었다. 또한 언제든지 부서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자만이 큰 화를 불러 일으키기는 했지만 신마의 진법지식이 결코 낮다는 것은 아니었다. 천기자가 신마보다 뛰어난 진법가였기에 당했을 뿐이다. 뛰는 자 위에 언제나 나는 자가 있음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기본적인 진법을 안다면 다음으로 응용진을 들어가겠다. 오행진과 팔괘진을 섞어 팔괘오행진이 되고, 삼재진과 오행진을 혼용하여 삼재오행진이 된다. 하나의 진법이라고 해도 여러 가지 진법의 묘용을 안다면 전혀 다른 진법이 될 수 있다. 공공환상진이라는 것도 허상이지만 허상으로 느껴지지 않는 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등진법도 모두 기초진법을 응용해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소리가 된다.”
가르딘은 파멜라가 어서 빨리 고등진법가가 되었으면 하기에 필사적이었다. 돈을 아낄 수 있는 방법으로 진법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파멜라만 잘 따라와 준다면 근시일 안에 대규모의 진법도 꿈이 아니었다.
‘어서 빨리 배워라!’
황궁에 가르딘이 보낸 서신이 도착했다.
서신의 내용은 곧바로 바이멘 후작에게 다다랐다. 모든 중요한 서신은 바이멘 후작이 검토하게 되어 있었다. 황궁의 중요한 의사결정은 모두 바이멘 후작의 입에서부터 시작된다.
바이멘 후작은 서류의 내용을 검토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결론적으로 자신이 한 결정이 제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훌륭하군.”
가르딘은 더도 덜도 말고 진실만을 서신에 적어 놓았다. 자신의 신위보다 기사들과 병사들의 노력으로 발키리 영지를 막아내었다고 전했다. 그것이 바이멘 후작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공을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돌리다니 예상 이상으로 겸손하군.”
오러 마스터에 이르렀고, 변방으로 갔다는 것에 불만을 품을 수 있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맡은바 일을 충실히 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몬스터가 침입하다니 큰일이군.”
한 번도 아니고 벌써 두 번씩이나 대규모 몬스터 침입이 발생했다. 어지간한 기사들로는 막아내기 힘들었을지 몰랐다.
“미토스와 스필언이라는 출중한 기사들이 있으니 막아낸 것이겠지.”
오러 마스터가 3명이나 되었다. 가르딘을 따라 스필언과 미토스가 간 것이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 되어버렸다.
훌륭한 일을 한 것은 맞지만 다른 귀족들이 가기 어려운 지역이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되었다. 가르딘이 발키리 영지에 제격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만들었다.
바이멘 후작은 즉시 황제 폐하에게 갔다.
황제 폐하와의 독대를 위해 움직였다.
오랜만에 맑은 햇빛을 맞으며 정원에 앉아 있는 코스트너 황제였다. 앞에는 리베시안 차가 마련되어 있었다.
앉아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정원의 한가운데 커다란 수목인 파이니가 자라고 있었다. 파이니는 대륙의 탄생년도와 맞먹는 시간동안 자라왔다. 오랜 시간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과 다르지 않다.
코스트너 황제가 황태자인 시절에 해놓은 낙서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늙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원하던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상실해 나가니 말이다. 불같은 투지는 사라지고 앞일을 걱정해야 하는 늙은이만 남았다.
자식들이 그나마 잘 자라 주었지만 황제이기에 함부로 정을 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 사람에게 정을 주면 다른 하나가 서운하다. 그 일이 일반적인 가족이라면 다시 정을 주면 되겠지만 황실은 달랐다. 서운한 감정이 정치적인 일과 섞이게 되어 파벌이 형성될 수 있었다. 파벌은 망국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코스트너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변함없이 맞아주는 것은 너뿐이구나.”
잠시 상념에 빠져 있는 코스트너 황제였다.
바이멘 후작이 찾아오자 상념에서 깨어 나왔다. 자신은 황제이기에 아무에게나 나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무슨 일인가?”
“발키리 영지에서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새로 임명된 영주에 대한 소식인가?”
“다시 몬스터들이 침공했다고 합니다.”
“큰일이군, 어떻게 됐다고 하는가?”
“큰 무리 없이 막아내었다고 합니다.”
“다행이군. 자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이야.”
“아닙니다. 모든 것은 황제 폐하의 뜻이 올바로 펼쳐진 것이옵니다.”
코스트너 황제는 충성하는 바이멘 후작의 마음을 알았다. 이제 와서 파스트론 공작을 제외한 바이멘 후작이 황제에게는 버팀목이 되고 있었다.
“적절한 보상을 해주어야겠지.”
“그렇습니다. 성벽을 보수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 필요하니 지원을 해줄까 합니다.”
“자네의 뜻대로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