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9/93)

   @@[제4장 발키리 영지로@@]

  험준한 산등선 아래로 중턱에 마을이 자리했다. 마을은 작은 집들이 오밀조밀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마을의 외곽은 빼곡한 나무와 숲으로 가려져 있었다. 사람들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그 마을을 중심으로 먼 산들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인적이 없는 그곳에 사람의 손길이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타탕! 땅! 타탕! 땅!

  마을에서는 망치질 소리가 연이어서 울렸다. 박자를 맞추어서 퍼지는 소리에 절로 흥에 겨워지고 있었다.

  반면에 망치질을 하고 있는 인물은 고민을 감추지 못했다.

  탄탄한 근육과 얼굴을 덮고 있는 융성한 털.

  거대한 망치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근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하체가 유난히 짧고, 굵었다. 몸 전체적으로 뚱뚱해 보이는 형상이지만 결코 살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단련된 몸이었다.

  인물은 사람이 아닌 이종족이었다.

  이종족 중에서 타고난 신체조건이 물품을 만드는데 가장 알맞은 장인의 종족. 즉 드워프였다. 땅의 정기를 물려받은 드워프들은 광석을 채광하고, 제련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들은 만드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만들어 낸 작품들을 존중한다.

  드워프가 만들어낸 하급물품이라고 해도 인간사회에서는 없어서 팔 수 없는 희귀하고 진귀한 물품으로 취급받을 정도다.

  따라서 인간들은 드워프를 잡으려고 애를 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무기와 예술품들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그 결과 드워프는 애초에 인간사회에서 멀어지기 위해 외진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인간들이 드워프를 보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망치질을 하고 있는 드워프는 이곳 마을의 촌장이라고 할 수 있는 루인돌프였다. 그는 500살이 넘은 드워프 마을의 최고어른이었다.

  드워프의 평균수명이 500살에서 600살인 것으로 보면 거의 죽을 때가 다된 나이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힘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자기 관리에 철저한 것으로 보인다.

  루인돌프의 옆으로 마을의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도 루인돌프의 망치질이 끝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옆에서 거들어 주지 않는 모습이 특이하게 다가왔다.

  탁!

  망치를 바닥에 내려놓는 루인돌프였다.

   “서쪽으로 가본 결과 어떠한가?’

  마을의 서쪽 방향으로 산맥을 타고 넘어가는 지역까지 돌아보라는 루인돌프의 명령이었다. 그에 대한 대답을 엔돌프 장로가 했다. 드워프들은 성이 모두 같았다. 이름만 바꾸어 서 사용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마을의 모든 성이 돌프였다.

  “광석이 얼마 없습니다.”

  “큰일이군.”

  드워프들의 삶의 낙이 바로 채광과 제련이었다. 채광을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광물의 종류와 양이었다. 가장 중요한 광물이 없는데 어떻게 채광을 하고 제련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오랜 시간 한곳에서 자리를 마련하고 살아가던 드워프 마을의 최대 위기였다. 그렇다고 여기 마들랜드 산맥을 벗어나기도 힘들었다. 마들랜드 산맥을 따라 다른 산맥으로 이동하려면 인간사회를 거쳐 가야 한다. 인간들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는 드워프들에게 그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마들랜드 산맥에서 광석이 제일 많은 곳이 여기였습니다. 다른 지역은 광석이라고 해봐야 청철이 전부입니다.”

 청철은 일반적으로 검을 만드는 재료로 쓰이는데, 가장 하급인 재료였다. 청철은 제련하기 쉬운 편에 속하지만 일단 만들어 놓으면 장기간 사용이 불가능하고, 다른 철로 만든 검에 부러지기 쉬웠다.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로 이름난 드워프라고 해도 철의 성질을 바꾸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청철도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정녕 여기를 벗어나야 한단 말인가?”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말을 한 자인돌프 장로도 입을 닫았다. 방법이 하나라는 것을 알지만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인간들에게 들켰다가는 잡혀서 노예로 끌려갈 수 있었다. 마들랜드 산맥은 코카 제국 안에 포함이 된 지역이었다. 코카 제국은 아직도 노예제도가 확실하게 존재했다. 이종족에 대한 피해는 더욱 심한 곳이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더 탐색을 해보지. 아직 서북쪽은 확인하지 않았지 않나.”

  “지형과 지물에 따라 광석의 특성을 파악하는 능력은 저희 드워프만이 가진 능력입니다. 서북쪽이라고 해도 가망이 없습니다.”

  “그래도 해보게, 우리가 어떻게 일궈낸 곳인가!”

  적색드워프족으로서는 선택하는 폭이 극히 좁게 되었다. 루인돌프는 마을에 존재하는 180명의 드워프에 대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들의 안전과 앞으로의 삶을 유지시켜 줘야 한다는 말이다. 책임을 쉽게 떠넘길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섣부른 결정을 할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드워프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 마을의 외곽 상공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순식간에 공간을 뚫고 나온 인물은 금발의 잘생긴 청년이었다.

  “여긴가.”

  마을로 서서히 내려간 청년이 천천히 걸어 드워프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갔다. 금발의 청년은 존재감을 지운 상태였다. 드워프들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다크랜드의 주인인 골드 드래곤, 라이젠 크라이스였다.

  드래곤은 존재감을 지우지 않으면 저절로 압도적인 기운을 내뿜는다. 그 기운은 보통의 종족들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기운을 뿜어내며, 도움을 청할 수는 없지 않은가!

   라이젠이 루인돌프를 비롯한 마을 장로들이 한곳에 자리 한 곳까지 걸어왔다. 아무도 그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유는 드워프들이 중요한 일을 의논하기 위해 집중하고 있어서이다.

  “크흠!”

  아는 척을 하지 않자 라이젠이 헛기침을 해서 드워프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갑작스러운 기침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뒤로 돌아갔다. 그 앞에 인간이 버젓이 서 있자 드워프들 대부분이 놀라고 있었다. 이곳은 인간이 올 수 있는 장소 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욱 놀란 것이다.

  엔돌프 장로가 급히 그를 막아서며 소리를 쳤다.

  “어떻게 여기에 들어온 것이냐?”

  “하하!”

  “그것참 성미 급한 것은 여전한 놈들이라니까.”

  다짜고짜 고함부터 지르는 것은 예전부터 있어온 일이라는 말투였다. 하지만 듣는 드워프들에게는 무례한 발언 중에 하나였다. 아직 라이젠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드워프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런 무례한!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침입한 것이냐?”

  드워프들은 라이젠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앞과 뒤, 사방을 가로막았다. 그가 어떻게 온 것인지를 알아내고, 그 이외에 누가 더 왔는지를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드워프들의 일대일 실력은 결코 인간들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 굳건한 체력과 근력을 바탕으로 하는 도끼질 한 방이면, 건장한 사람이라고 해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진다. 그런 드워프가 왜 인간들에게 멀어지려고 하는가! 그건 전적으로 수적 열세 때문이었다. 드워프의 수가 많아봤자 1만이 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인간들의 수는 그것의 수백 배가 넘는다. 아무리 강해도 수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혼자 온 것이냐?”

  라이젠은 드워프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태연했다. 드래곤의 입장에서 타 종족의 투기는 애교에 불과했다. 드래곤의 포효와는 질적으로 다른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베론돌프는 아직 살아 있나, 내가 수면기에 들어간 게 2천 년이니까! 아직까지 살아 있지는 못하겠지.”

  작은 소리로 말을 하는 라이젠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드워프가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2천 년 전, 그리고 수면기.

  이 둘을 가지고 내릴 수 있는 공통적인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위대한 존재이자 대륙의 조율자인 드래곤이었다. 그것을 듣고 모른다면 지능적으로 의심을 해봐야 했다.

  부들! 부들!

  드워프들은 앞에 태연하게 서 있는 존재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엄청난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드워프들이 모두 덤벼도 이길 수 없는 공포의 존재 말이다. 몸이 저절로 떨려오고 있었다.

  모든 드워프가 두려워할 때 루인돌프만이 태연했다. 그는 앞에 있는 존재를 알고 있었다. 오랜 시절부터 드워프의 촌장에게 전해져 오는 내용이 하나 있었다.

  -위기에 처한 우리 일족을 구해주시고, 마들랜드 산맥에 터를 잡게 해주신 분이 계신다. 그분의 이름은 골드 드래곤, 라이젠 크라이스님이시다. 그분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글을 남긴다. 그분이 찾아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은혜를 갚도록 해라.

  “위대한 존재를 뵙습니다. 혹시 골드일족의 고룡이신 라이젠 크라이스님이십니까?’

  루인돌프가 예를 차리며 라이젠의 존재를 물었다.

   “그렇다.”

  “좀 전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됐다. 모르고 한 일을 가지고 따질 생각은 없다.”

  라이젠은 함부로 생명을 죽이는 드래곤은 아니었다. 일의경중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 정도일 가지고 드워프들을 죽일 이유는 되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루인돌프를 비롯한 드워프들이 모두 안심했다. 작정하고 따진다면 배겨날 수 없는 것이 자신들의 처지였다. 사실 드래곤이 이유 불문하고 죽이겠다고 하면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드래곤은 그런 존재였다.

  “감사는 되었고, 도움이 필요한데 날 따라오겠나?”

  라이젠은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절한다면 상당히 실망할 것이다. 예전에 도와주었으니 은혜를 갚으라는 말은 구차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섭섭할 수 있었다.

  루인돌프는 망설이지 않았다.

  “일족을 지켜주신 분이십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들어 드리겠습니다.”

  “흠! 좋군, 배인돌프가 후손을 잘 키웠어.”

  “아닙니다. 그분은 일족의 조상 중에서도 마을을 구한 분입니다. 어찌 비교가 되겠습니까?”

  “좋아, 그럼 바로 가지. 되도록 많은 드워프가 필요할 거야.”

  “일족이 모두 필요하다고 해도 하겠습니다.”

  배인돌프는 라이젠의 마법물품을 만드는 데 함께했던 드워프족이었다. 나중에 그의 마을이 위험할 때 손을 쓴 것은 친분이 있었기에 한 일이었다.

  가르딘의 집은 지금 초상집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도 모자라서 지진까지 일어난 꼴이었다. 가르딘은 작위와 영지를 받은 날, 라이나와 브리안을 꼬옥 끌어안고 잠을 취했었다.

  발키리 영지로 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정리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우선은 정식으로 피닉스기사단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나올 수는 없지 아니한가. 가르딘은 오전 중에 피닉스기사단으로 가서 파스트론 공작과 바자바인 후작에게 신고를 하고 나왔다.

 신고는 별것 아니지만 걱정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브리안의 교육이었다.

  “여보, 브리안은 어떡하지요?”

  오스라인은 제국제일의 우수학교였다. 명망 높은 귀족의 자제들과 더불어서 뛰어난 학생들, 최고의 역량을 가진 선생, 모든 것이 최고로 좋은 학교였다. 그런 학교에 이미 등록을 하고 다니고 있는 실정이었다.

  가르딘은 즉시 가족회의를 열었다. 가족이라고 해봐야 라이나와 브리안이 다였다. 단호하게 결정을 내린 가르딘이기에 모두는 그의 의견에 따라 회의를 열었다.

 라이나의 가게 문 앞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오늘 하루 쉽니다.

  라이나가 가족회의에 필요한 먹을거리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회의를 한다고 해도 오붓하게 할 필요성이 있다는 가르딘의 주장 때문에 마련된 것이다. 우울한 분위기에서는 우울한 결정 밖에 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췄다.

  화목한 가정에서 올바른 의견이 나올 수 있다고 믿는 가르딘이었다.

  “브리안은 아직 나이가 어려, 그러니 같이 가야 된다고 생각해.”

  가르딘은 브리안과 헤어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공부는 적당히 시켜도 되었다. 품에서 멀어지면 귀여운 딸이 커가는 것을 볼 수 없게 된다. 삶의 낙중에 하나가 사라진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하지만 여보, 브리안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켜주고 싶어요. 그런 점에서 오스라인은 최고라고 생각해요.”

  “브리안이 아직 어리지 않소.”

  “정 걱정이 되면 제가 여기 남아서...”

  “안... 돼.”

  가르딘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브리안이 오스라인에 남게 되는 것도 싫은데 라이나까지 여기 남게 되면 자신은 혼자 가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이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엄청난 문제였다.

  다른 것은 라이나의 의견에 모두 따른다고 해도 이번 결정은 절대불가였다.

  “가족이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안 돼. 우리 가족은 함께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여보! 하지만 브리안에게는...”

  “나는 라이나와 브리안을 사랑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떨어져서는 안 돼!”

  와락!

  가르딘은 라이나와 브리안을 꼬옥 끌어안았다. 누가 보면 억지로 가족을 떼어놓는 줄 오해할 만한 광경이었다.

  가르딘과 라이나가 고민할 때 브리안이 한마디로 종식시켰다.

  “나도 아빠, 엄마와는 떨어지기 싫어!”

  “어이구! 내 딸 말도 어쩌면 이렇게 귀엽게 하지. 그래그래 내가 어떻게 브리안과 떨어지겠니. 우리 언제까지나 함께 하자꾸나!”

  참으로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가르딘이었다. 딸은 언젠가 커서 시집가기 마련이었다. 지금 가르딘의 기세로 보면 시집도 가지 못하게 끌어안을 것처럼 보인다.

  “내가 졌어요. 당신의 뜻대로 하세요.”

  “고마워, 당신은 역시 천사야.”

  낯간지러운 말을 계속 이어서 뱉어내었다. 계속 듣고 있기에 민망한 대화라 자제해야만 할 상황이었다.

  “가게는 빠른 시일 내로 정리할게요.”

  “그렇게 해.”

  오랫동안 정이 든 집이지만 이 집도 정리하고 내놓아야 했다. 요즘 시세에 맞추어 많은 돈을 받고 팔아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라이나였다. 여기에 쏟아놓은 정성과 매번 오는 단골손님들을 계산할 때 권리금을 받을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가게를 정리하고 짐을 포장해야 했다. 이사 가는 작업이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것이 아니었다. 깨지는 것과, 깨지지 않는 것, 부서지는 것과 부서지지 않는 것, 귀한 것과 싼 것 등 으로 분리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가르딘은 가급적 필요한 것만 챙기라고 했다.

  “무리하게 다 챙길 필요 없어, 어차피 발키리 영지에 저택이 있으니까. 간단하게 챙기면 된다고.”

  “알았어요.”

  대답은 했지만 버리기 아까워서 모두 가지고 가려는 라이나였다.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던 라이나다웠다.

  회의가 끝나고 정리하는 동안 해가 저물어갔다. 날이 금세 저물고, 다음 날이 오기를 기다려야 할 판이다.

  한밤중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다. 가르딘이 가장 즐거워하며, 불타오르는 시간이 다가왔다. 그런데 그때였다.

   예기치 않은 불청객의 소리였다.

  똑! 똑!

  가르딘의 집을 두드리는 누군가가 있었다. 라이나와 브리안을 방에 있게 한 후 가르딘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인물들이 3명이나 버티고 있었다. 사내들이 얼굴도 드러내지 않은 채 모습을 보이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기에 불타는 밤에 초를 치는지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구십니까?”

  “잠시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나.”

  제일 앞에 서 있는 인물이 당연하다는 듯이 하대하며 들어서려 했다.

  가르딘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눈앞의 인물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바로 제국의 5대 공작인 타이가라 공작이었던 것이다. 이 밤중에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작위 수여식 이외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인물이었기에 상당히 뜻밖이었다.

  ‘음?’

  스치듯이 지나가는 느낌에서 가르딘은 타이가라 공작의 힘을 측정할 수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에 이르면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타이가라 공작의 경우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특수한 마법아이템을 사용하는 건가?’

  장막처럼 가려진 기능을 하는 마나방어아이템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역량을 숨기기 위한 마법아이템이었다.

  가르딘의 감각이 뛰어나기에 알 수 있는 것이지 보통의 오러 마스터들은 바로 앞에서도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최소 오러 마스터 중급 이상이군.’

  제국에서 타이가라 공작은 검에는 자질이 부족해서 오러 마스터에 이르지 못했다고 알려졌는데, 소문이 사실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타이가라 공작이 의자에 앉자 그 뒤로 두 명의 기사들이 버티고 섰다. 기사정복을 입지 않았지만 은은하게 흐르는 예리한 기도를 뿜어내고 있었다.

  “자네도 앉게.”

  가르딘이 타이가라 공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의자에 앉은 가르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를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공작이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올 리 없지 않은가, 그 내면에 숨겨진 뜻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내가온 것이 뜻밖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공작님과 안면이 가까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숨기는 것이 많은 타이가라 공작이었다. 원체 귀족들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상위귀족 중 최고라는 공작이었다. 공작이 숨기는 게 너무 많을 경우 의심 이 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톡 까놓고 말하면 음흉해 보이기까지 했다.

  “발키리 영지로 가게 된 것은 내 뜻이 아니었네, 나는 막고 싶었지만 네벨리언 공작과 바이멘 후작의 입김이 너무 강했네. 또한 황제 폐하 역시도 자네를 적임자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결정이 된 것이네.”

  ‘오오! 뒷담화를 깐단 말이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3가지 일 중에 하나였다. 첫째로, 남의 성 불구경하기. 둘째로, 남의 전투 구경하기. 셋째로, 남의 뒷담화 까기였다.

  동기끼리 모여서 혼자 화장실 가기 겁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한 명이 빠지면 빠진 사람을 집중 타격하기 때문이다.

  가르딘은 타이가라 공작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판단했다.

  황제의 경우 귀족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가뜩이나 귀족들이 힘이 세지는 상황에서 가르딘의 등장은 달갑지 않을 수도 있었다. 또한 네벨리언 공작과는 어쩔 수 없이 불화가 시작되었다. 가르딘이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기 도하다.

  “자네처럼 배경 없는 귀족에게 배경이 필요한 이유 중에 하나지,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받쳐줄 배경이 필요하지 않나.”

  “그렇군요.”

  타이가라 공작이 왜 왔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뜻을 같이 하자는 말이었다. 타이가라 공작의 경우 다른 공작들에게 비해서 세력과 힘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가 밀고 있다고 알려진 3황자 역시 그 능력에 의심을 많이 하고 있었다.

  ‘음험하다.’

  직감적으로 타이가라 공작이 위험하다고 느낀 가르딘이었다. 속에 숨기고 있는 것이 한둘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겁니까?”

  “지금 바로 결정하라는 것은 아닐세, 천천히 생각을 해보게.”

  “시간을 두고 좋은 결정을 하겠습니다.”

  “하하하, 뜻이 통해 좋군.”

  타이가라 공작은 가르딘이 거절하지 않자 웃음을 지었다. 가르딘도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숨기는 자일수록 뒤로 구린 일을 많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

 루어지지 않을 경우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만약을 대비해서 결정을 미루되, 함께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춰 주어야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곧 자네에게도 좋은 때가 올 걸세, 그때에 힘을 주게.”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네.”

  “살펴 가십시오.”

  가르딘은 일어서서 문을 나서는 타이가라 공작의 뒷모습을 보며, 이마에 골이 깊게 파였다.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뜻을 보여주고, 결정을 하라니! 정말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래서 싫었다니까!’

  아내와 딸을 위해서는 출세해야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권력의 혐오성과 탐욕성에 염증이 난 가르딘이었다. 역시나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타이가라 공작이 직접 온 것도 이해가 되었다. 오러 마스터의 영입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가 되니 말이다. 다른 공작이 아직까지 오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안에서 기다리던 라이나가 손님이 나가자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나도 눈치가 상당했다. 자신이 나오면 상황이 묘하게 흐를 것 같기에 끝나기를 기다린 것이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서 있는 가르딘을 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긴요, 지금 긴장했잖아요!”

  “괜찮아, 나 그렇게 약하지 않아!”

  “당신 강한 것 내가 잘 알아요.”

  라이나는 가르딘에게 힘이 되는 존재였다. 그녀가 있기에 지금의 가르딘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그 사람들 때문에 화난 거예요.”

   “화는 안 났어, 다만 짜증이 났을 뿐이지.”

  “그래요.”

  라이나가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소금을 한 바가지 퍼왔다. 이해를 못한 가르딘이 뭐 하는 거냐고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뿌리게요.”

  “뭐... 하하하!”

  “호호호호.”

  라이나가 문을 열더니 소금을 왕창 뿌려버렸다. 마치 재수 없는 것들이 와서 남편의 신경을 거슬렸다는 화풀이와 같았다. 가르딘은 라이나의 행동에 웃음과 더불어 정을 느꼈다. 역시 가르딘의 아내다웠다.

 -대저택.

  보는 이로 하여금 위화감을 조성할 만큼 큰 저택이었다. 좌우로 8개에 달하는 저택과 더불어 끝이 보이지 않는 정원, 그 중앙에 자리한 화려한 분수대.

  일반 평민이 꿈도 꿔보지 못할 저택이었다. 저택의 정중앙에 백마를 탄 기사조각상이 있었다. 검과 방패가 좌우로 교차되어 집주인의 표시를 나타내었다.

  백마와 더불어 검과 방패. 그것은 카이로만 제국 발리스타 공작 가문의 상징이었다.

  8개의 저택 중에서도 가장 크고 긴, 저택의 중심에 발리스타 공작의 집무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날이 저문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집무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집무실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숨 막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집무실에는 발리스타 공작과 미토스가 서로를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아들과 아버지는 상당히 많이 닮아 있었다. 미토스가 왜 그렇게 잘생겼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피는 역시 못 속였다.

  “발키리 영지로 가겠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아버지.”

  “네 실력이면 피닉스기사단의 단장도 될 수 있다. 그런데 자유기사가 되어 발키리 영지로 가겠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피닉스기사단에서 실력을 갈고 닦아 기사단장이 된다면 가문으로서는 그것보다 훌륭한 일이 없다. 황궁 내에서 압도적인 권력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공작이라 해도 세력과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세력이 바로 힘이라는 말이었다.

  발리스타 공작은 처음으로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아들은 언제나 자신의 뜻에 부응해 주었다. 고작 20살의 나이로 오러 마스터에 오른 것을 보면 기대보다 더한 보답이었다. 그런 아들이 지금 반항하고 있었다.

  “무엇이 너의 뜻을 바꾸었느냐?”

  발리스타 공작이 아들을 피닉스기사단에 보낸 것은 기사 단장이 되어 피닉스기사단의 통솔권을 가져오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피닉스기사단에 있는 것보다 저는 발키리 영지에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토스는 가르딘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일취월장하는 것을 느꼈다. 이 기회를 쉽게 버리고 싶지 않았다. 피닉스기사단은 나중에 다시 들어가도 되었다. 지금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야 했다.

  “무엇 때문이냐고 물었다.”

  “세상이 넓을 뿐입니다.”

  아들의 고집이 만만치 않았다. 오러 마스터 상급의 기사인 자신이 무형의 기운으로 압박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저항하고 있었다. 놀랍도록 성장한 아들이었다.

  오러의 기운과 기운이 서로 부딪침에도 둘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그 순간 발리스타 공작이 기운을 거둬들였다.

  “좋다, 네 뜻대로 하여라.”

  “감사합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미토스는 할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집무실에 홀로 남겨진 발리스타 공작은 아들이 다 컸음을 인정하는 한편,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게 하는 일이 되었다. 한 인물에 대해 재평가하는 계기였다.

  “가르딘 카이로스가 그 정도인가?”

  오러 마스터에 이른 기사이기에 충분히 뛰어나다고 평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자신의 아들에 비해서는 모자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들의 눈이 절대 틀릴 리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다.

  “끌어들여야 하는 인물이었군.”

  미토스를 보내서 적당히 그의 성격을 파악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을 내렸다. 아직 그의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니 가까이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그 임무에 미토스만큼 적임자는 없었다. 아들을 믿지 못하면 누굴 믿는단 말인가!

  캉! 캉! 차창!

  밤늦은 시각.

  연무장 안에서 검과 검이 부딪쳤다. 검이 맹렬하게 부딪치는 충격음이 밤의 정적을 깨웠다.

  검이 움직이는 궤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빠름을 상대하는 이의 움직임도 예상 이상으로 빠르고 날카로웠다.

  휘이이잉!

  허공을 가르는 검을 다시 회수한 인물이 대련을 멈추었다. 상대했던 젊은 청년의 얼굴에는 땀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검을 내려놓은 중년인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아직 부족합니다.”

  어느새 자식이 자라서 아버지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대성했다. 파스트론 공작은 자식의 칭찬에도 인색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는 고지식한 아버지상이었다. 진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면에서는 매몰차기까지 하다.

  “검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구나.”

  “이번 여정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경험과 노력, 그리고 다시 노력이다. 모든 것은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알겠느냐!”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에 발키리 영지에 가보고 싶습니다.”

  “발키리 영지에.”

  갑자기 하는 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검을 맞대면서 아들의 표정을 살펴보고 있었던 파스트론 공작이었다. 아들이 이미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아들인 만큼 일단 마음을 정하면 물러서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과 더불어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젊은 시절 모습과 겹쳐 보일 정도로 아들은 자신의 성격과 외모를 물려받았다.

  ‘좋겠지.’

  경험을 위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려는 아들을 막는 것은 좋지 못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허락하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만 들어가서 쉬어라.”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들을 돌려보낸 파스트론 공작은 가르딘 카이로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근래에 드러난 그의 신위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 중에 하나였다.

  파스트론 공작이 가르딘에 대해서 적극적인 회유를 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동안 봐온 그는 결코 오러 마스터에 오르지 못할 인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봤음에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오러 마스터에 올랐다. 올라 선 경지가 최소 중급에 달한다. 한 단계를 뛰어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뜻하지 않는 계기가 있을 수 있다고 하지만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가르딘에 대해서 확실하게 조사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 점에 있어서 스필언이 제격이었다. 스필언은 검술만 강한 녀석이 아니었다. 킹덤나이트의 학과부분에서 5위권 안에 드는 녀석이었다. 검술과 학식을 두루 갖춘 스필언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것은 가르딘에 대한 조사 뿐 아니라 아들의 능력까지 시험해 보려는 의도가 강했다.

  파스트론 공작은 사자였다. 사자의 자식은 결코 약하게 키울 수 없다. 약하게 자라는 자식은 결국 다른 사자의 먹이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능력을 보여라.’

  냉정한 아버지지만 아들들에 대한 사랑은 여타의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 다만 표현하지 않을 뿐이었다.

  오스라인에 가봐야 하는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은 브리안을 옆에 끼고 유유히 대로를 걸었다. 오랜만에 딸과 걷는 거리가 다르게 보였다. 딸은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었다.

  가는 곳에 먹을거리가 종종 보였다. 딸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고 싶어 하는 것은 어느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다.

  “초콜릿 먹을래.”

  “응, 아빠!”

  “어이구, 귀여운 내 강아지.”

  가르딘은 귀여운 브리안에게 초콜릿 한 상자를 사 주었다. 이 썩는데 초콜릿 사줬다고 라이나에게 혼나는 것은 둘째 문제였다. 기분 좋게 사주고, 딸에게 사랑 받는 것이 더 좋은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은 브리안과 오스라인에 도착했다. 오스라인은 마치 성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엄청났다. 왜 최고의 교육기관이라고 평가받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러니 100골드나 들어가지.’

  브리안에 대한 학적을 떼고, 필요한 서류들을 다시 받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낸 등록금이었다. 중간에 그만두니 돌려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브리안, 친구들과 잠시 놀고 있어. 학교장실에 가봐야 하니.”

   “알았어, 아빠!”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응!”

  가르딘은 오스라인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서 지리를 살펴보았다. 건물이 잘 지어진 것도 중요하지만 안에 설비가 참 편하게 되어 있었다. 건물의 전체적 위치를 볼 수 있도록 그림으로 표시를 해놓은 것이다.

  “여기가 학교장실이군.”

  가르딘과 떨어진 브리안은 좀 전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웠다. 브리안은 7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상당히 조숙한 편이었다. 배우는 것을 머리로 모두 흡수할 정도로 천재형이었다. 그렇기에 남들보다 빨리 사회를 알게 되었다.

  브리안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전날 가르딘이 동기들과 술 마시면서 한 얘기를 들었다. 네벨리언 공작이 풀루토의 외할아버지라고 말이다. 그 일로 인해 가르딘이 발키리 영지로 가게 되었다는 전말을 알게 된 브리안이었다.

  ‘이놈, 어디 있어?’

  이미 어긋난 상황이니 절대 그냥 둘 수 없는 브리안이었다. 가르딘이 당당하게 행동하라고 했으니 당당하게 건드려 주면 되었다.

  브리안이 주변을 살피면서 풀루토를 찾았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학교 건물의 반대쪽, 햇빛에 그림자가 생긴 어두운 장소에 누군가가 숨어 있었다. 브리안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 즉시 몸을 숨긴 풀루토였다.

  풀루토는 학교생활이 쪽팔린 상황이었다. 자기보다 2살이나 어린 여자아이에게 맞았으니 또래 아이들에게 주눅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외할아버지가 공작이라 겉으로는 건드리지 못해도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빠꼼히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피는 풀루토였다.

  “갔나?”

  “누구 찾아.”

  어느새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아이 목소리에 풀루토가 앞으로 폴짝 뛰었다. 놀라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풀루토가 브리안을 보았다. 브리안의 귀여운 미소가 악마의 미소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내...가잘못했어! 그러니 때리지 마!”

  그동안 당한 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브리안이 풀루토를 지능적으로 괴롭히고 있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괴롭히니 다른 사람에게 말해봤자 소용없었다.

  “그새 꼰질렀냐?”

  “그...건 아냐, 그저 엄마가 걱정이 되어서 외할아버지에게 말한 것뿐이었어. 정말...이야!”

  “뭐, 좋아. 떠나는 마당에 널 때려서 뭐 하겠니!”

  “정말!”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였다. 브리안이 떠난다는 말에 급 화색을 띠는 풀루토였다. 처음에는 좀 강도 높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벌벌 떠는 풀루토를 보니 그런 마음이 사라졌다.

  “너 되게 좋아한다.”

  “아...냐! 얼마나...서운한데!”

  표정을 숨기려고 노력하는 풀루토였다. 브리안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하나뿐인 외손자가 이처럼 벌벌 떠는데, 외할아버지인 네벨리언 공작이 화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앞으로 잘해, 나중에 내가 돌아와서 여전히 건방지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당...연하지.”

  “언덕에는 가지 말고.”

  “안 가. 나 여기서 공부 열심히 할게.”

  “믿고 간다. 하지만 믿음이 배반당하면 알지.”

  예쁜 주먹을 곱게 말아 쥐고 있지만 보고 있는 풀루토에게는 악마의 주먹이었다. 저 주먹에 맞으면 엄청나게 아프다는 것을 매번 느꼈다.

  브리안이 돌아서 가는 모습을 본 풀루토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브리안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가르딘은 학교장실에서 대판 싸우고 왔다. 이미 낸 등록금은 환불해 줄 수 없다는 말에 기가 막혔다. 고작 1달 조금 넘은 기간 배운 것뿐인데, 돈을 돌려주지 않는다는 말에 화가 치민 가르딘이었다.

  하지만 결국 가르딘이 졌다. 오스라인 학교의 규칙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계속 소란을 피우면 황궁에 알린다는 협박까지 한 학교장이었다. 학교장이 가진 연줄 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말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말로 먹고 산 세월의 무게가 그만큼 달랐던 것이다. 또한 학교장이라서 그런지 고지식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너무 꽉 막혀 있어 도무지 대화 가 되지 않았다.

  가르딘은 투덜거리며 학교장실을 나왔다.

  가르딘이 건물 안에서 나오자 브리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과는 말 잘했니?”

  “정리 다했어.”

  “잘했구나. 어서 집에 가자.”

  가르딘이 드디어 수도 오스란을 떠나는 날이 밝아왔다. 모든 것을 정리한 가르딘이었다. 기사단장에게 신고하고, 난 후 동기들과도 이별을 통보해 주었다.

  가르딘은 단초롭게 가는 것으로 선택을 했다. 괜히 병사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특히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족들 간에 여행이라는 것에 있었다. 라이나, 브리안과 같이 떠나는 여정이니 셋이서 오붓하게 보낼 생각이었다.

  수도를 나서는데 유타, 갈라, 필리언이 마중을 나왔다. 아직 제대 횟수를 채우려면 2달 정도 더 있어야 했다.

  “잘 가라.”

  빨리 와야 한다.”

  “걱정 마라. 제대하고 바로 갈 테니!”

  어쩔 수 없이 제대하고 같이 할 수밖에 없는 유타, 갈라, 필리언이었다. 그들은 이미 가르딘에게 코가 꿰여 있었다. 빠져나갈 구멍을 주지 않은 것이다.

  “그럼 가족여행을 해볼까나.”

  가르딘이 탄 마차는 두 마리의 말이 끌고 있었다. 모두 제법 튼실한 것이었다. 가르딘이 타는 말과 더불어서 나머지 한 마리는 비싸게 주고 샀다. 가격을 깎으려면 말상인 놈과 상당한 신경전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오붓한 가족여행을 위해서였다. 가르딘은 기사 정복을 벗어 던진 상태였다. 대신에 귀족인장을 가지고 있었다. 백작이 되니 인장을 새로 만들어야 했었다.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움직이지 않았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두 마리의 말을 타고 오는 청년들이 있었다. 모두 훤칠한 키와 잘생긴 얼굴에 매끈하게 빠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스필언과 미토스가 말을 타고 나타난 것이다.

  가르딘은 갑자기 나타난 녀석들의 모습에서 이상함을 발견했다. 마중하기 위한 복장이 아니었다. 말안장에 놓인 짐을 보니 어딘가를 떠나려는 복장이었다. 한동안 수도에 머물러서 공작들의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른 일정이었다. 도대체 어디를 가려는 것인지가 궁금하게 여겨졌다.

  “가르딘 백작님! 저희도 데려가 주십시오!”

  쿵!

  배틀 엑스로 한 대 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은 가르딘이었다. 갑자기 와서 데려가 달라니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충격을 회복하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마차 옆으로 스필언과 미토스가 달라붙어 있었다.

  “잘생긴 청년들이네.”

  “과찬입니다. 백작 부인께서도 상당한 미인이십니다!”

  “오빠들, 정말 잘생겼다!”

  “고맙다, 공주님도 예쁘구나!”

  “까르르르!”

  굉장한 수단이었다.

  고작 몇 마디로 가족들의 환대를 엄청나게 받았다. 라이나와 브리안이 즐겁게 맞아주자 어색하게 된 가르딘이었다. 잘생긴 놈들은 이래서 문제였다. 평범한 사내들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수작을 걸기 위해 노력한 것을 얼굴과 단 몇 마디 말로 혼을 빼놓으니 말이다.

  “파트스론 공작님과, 발리스타 공작님이 허락하신 것이냐?”

  “허락은 이미 받아왔습니다. 가르딘 백작님을 제대로 보필하라는 명령까지 받았습니다.”

  말이 좋아 보필이지, 감시나 다름이 없었다.

  두 공작이 아무 이유 없이 가르딘에게 아들들을 딸려 보낼 리 없지 않은가!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가장 큰 목적은 오러 마스터인 가르딘을 회유하는 것이 목적일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마음속으로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 쪽으로 기울어진 상황이니 무난하게 넘어가기는 하겠지만.

  ‘이놈들의 성정은 알지만, 불안한데!’

  가르딘이 보기에 스필언과 미토스는 절대 허튼짓을 하지 않을 놈들이었다. 하지만 제국 최고의 공작가에서 관심과 집중을 받는다고 하자 부담이 천근만근으로 다가왔다.

  ‘오붓한 가족여행이 무너지는구나!’

  다크랜드의 드라이스 산맥에 도착한 드워프들이었다. 마들랜드 산맥에 있던 드워프마을의 모든 드워프가 한꺼번에 공간이동을 해왔다. 180명이나 되는 드워프들을 한순간에 공간이동시킬 수 있는 존재는 라이젠뿐이었다. 드래곤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절대마법의 경지였다.

  라이젠은 이미 봐둔 터로 이동을 해온 상태였다. 안젤리카 역시 마중을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레어는 드래곤들만의 특성이 잘 스며든 곳이다. 드래곤들이 특별히 자랑하는 것이 레어였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드래곤들이 보물에 눈이 멀어서 많은 보물을 강요한다고 하는데, 오랜 시간을 사는 드래곤은 보물에 욕심을 내지는 않는다. 그저 모아두고, 감상하는 것 정도다.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쌓이게 되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에 불과했다.

  “내 딸일세.”

  “안젤리카예요.”

  “루인돌프입니다. 원하시는 레어를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레어의 구조를 설명할게요.”

  라이젠과 안젤리카는 우선 기본적인 레어의 형태를 띠도록 설계하게 했다.

  레어는 동굴이다. 그러기에 약간은 칙칙한 느낌을 준다. 안젤리카는 여성체 드래곤이기에 칙칙함보다는 화사함에 중점을 둔 설계를 부탁했다.

  “핑크색으로 주변을 도색하겠습니다. 핑크색을 위해서는 적철과 청철의 배합이 중요합니다. 주변을 탐색해도 되겠습니까?”

  철의 색을 변환시키는 것은 철에 어떤 재료를 섞느냐에 따라 다르게 된다. 드워프들이 색을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 중에 하나였다.

  다크랜드 주변을 탐색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몬스터와 마수들이 우글거리는 곳을 드워프가 함부로 돌아다니는 것은〈나 잡아 먹으세요!〉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주변에 몬스터와 마수는 별로 없지만 위험할지 모르니, 내 가디언을 빌려주마.”

  -골드윈 소환!

  라이젠이 가디언 중에 하나인 골드윈을 소환했다. 골드윈은 골렘이었다. 일반적인 골렘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성이 존재하는 에고골렘이라는 것에 있었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골렘들과는 차원이 다른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오러 마스터라고 해도 상급에 올라서지 않고서는 상대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장착한 골렘이다.

  보통의 골렘보다 작은 편에 속함에도 그 힘에서는 비교할 수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드워프들이 주변 탐색하는데 도움을 주어라.”

  “알겠습니다. 라이젠님!”

  드워프들이 탐색을 시작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그에 따라 골드윈이 드워프들을 호위하며 이동했다. 땅의 지형을 탐색 하고, 채광되어 질 금속을 확인하는 능력이 탁월한 드워프다. 특히 드워프는 광석이 뿜어내는 냄새를 기억하고 찾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철에서 향기가 날 리 만무하지만 그 향을 지극히 좋아하는 드워프들의 습성이 한몫하고 있는 것이다.

  루인돌프 촌장이 전체적인 설계를 마저 듣고 있었다. 라이젠과 안젤리카가 원하는 최고의 레어를 만들어야 했다. 과거에 진 빚을 갚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드워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광석이라고 하면 그와 버금가게 중요한 것이 신의였다.

  “이 산을 중심으로 저 계곡으로 흐르는 물을 막아놔야겠다.”

  “계곡에 흐르는 물을 저 분지에 모으시려는 겁니까?”

  “그렇지.”

  루인돌프는 라이젠의 말뜻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산의 한 부분을 막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못 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대규모로 저수지를 만들려는 이유를 알지 못한 것이다.

  “무얼 생각하시는 것인지?”

  “우리 딸의 고운 피부를 위해서 목욕탕을 만들려고 하네.”

  “알... 겠...습니다.”

  드래곤이 본체로 목욕하려면 거대한 호수가 필요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지는 의심이 되었다.

  마법으로 몸을 깨끗이 하면 그만일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안젤리카가 목욕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러네, 그리고 주변에 호수가 있으면 자연경관이 더 좋아질 것 아닌가!”

  “물론입니다.”

   딸이 좋아하는 것은 뭐든지 해주고 싶은 라이젠이었다. 라이젠의 말을 들은 안젤리카는 감동의 표정을 지었다.

  “아빠, 고마워요!”

  “뭘 이런 걸 가지고, 내 너를 위해서는 뭐든지 해주마!”

  부녀 간 사이가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드래곤이라서 그런지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뭐든지 커야 하며 그에 따라서 아름다움을 유지해야 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크면서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오밀조밀 하게 아름다움을 표현하면 그나마 쉬운 편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커지면 아름다움보다는 웅장함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 다시 아름다움을 섞어서 미관을 좋게 만드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일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과 조화였다. 주변지형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러워야 했다.

  “우선은 설계를 한 후 레어를 먼저 만들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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