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작위 획득@@]
드디어 돌아왔다.
바로 앞에 수도 오스란의 웅대하고 화려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르딘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까지 모진풍파를 모두 견뎌내고 여기까지 온 자신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드디어 라이나의 품에 돌아왔구나!’
이제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었다.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헤어질 수 없는 아내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에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고 있는 가르딘이었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고 해도 눈동자는 웃고 있었다. 가르딘의 옆에서 말을 타고 있던 필리언이 피식거렸다.
“너무 좋아하지 마라. 아직 결정 난 것도 하나 없는데.”
“아냐, 예감이 좋아! 오늘따라 아주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하긴 예전부터 네가 감 하나는 좋았으니까.”
가르딘이 들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마차 안에 있는 아이시런 공주는 별로였다.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으니 예전처럼 생활해야 했다. 가르딘과의 티격태격 짜증나는 일이기는 했지만 유쾌하기도 했다. 그리고 밖에 생활을 둘러볼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생활을 하기 힘들어졌다.
‘저 능글맞은 아저씨는 입이 찢어져 있겠지.’
가르딘과의 일이 시원섭섭하게 다가오는 아이시런 공주였다. 바로 앞에 있으면 짜증나는데 없으면 허전한 상황. 버리기에는 아깝고, 가지기에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황궁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개최하고 있는 상황이라 축제 분위기였던 것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공주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모였다. 사람들은 기대 반 설렘 반으로 공주의 행차를 지켜보았다.
공주를 호위하는 기사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달랐다. 제국의 국민들 대부분이 피닉스기사단이라고 하면 동경의 대상이었다. 제국의 검이자 대륙최강의 기사단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가르딘과 필리언이 공주의 마차를 호위하면서 그 옆으로 스필언과 미토스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람들의 환성 소리가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가르딘과 필리언에게는 그저 와! 라고 하면 스필언과 미토스는 우와 아! 였다.
‘사람 차별하네.’
‘너 때문이야! 네가 옆에 있으니까, 나까지 덤으로 초라해 지잖아!’
‘뭐!’
아주 작은 소리로 속닥거렸다.
가르딘의 외모는 평범한 편이다. 그에 반해 중년인치고, 필리언은 꽤 멋스럽게 생긴 녀석이다. 하지만 스필언과 미토스와 비교하면 거기서 거기였다. 차원이 다른 종으로 태어난 녀석들이었다. 일반인이 비교 대상에 오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우아아아아아!”
스필언과 미토스의 함성보다 더욱 큰 소리가 들렸다. 마차 안에서 잠자코 있던 아이시런 공주가 창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입가에 서린 열은 미소.
우아함이 한껏 배어 나온 얼굴의 곡선.
눈동자는 한없이 깊고, 맑아 보였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천사가 하강한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었다. 가르딘이 보기에는 상당히 가증스러운 모습이기는 했다. 실제 성격을 완벽하게 숨기고, 우아하고 기품 있는 아이시런 공주의 모습이었다. 아이시런 공주는 마중 나온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와아아아아!
공주님 만세!
가르딘은 황당했다.
‘뭘 했다고 만세야!’
나라가 독립한 것도 아니고, 만세라는 말이 나올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두 환호하고 있었다. 성녀를 데려다준 공주라는 인식이 꽉 박힌 상태였다. 대륙에 성녀의 등장과 더불어 아이시런 공주에 대한 이야기 가 화젯거리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얼씨구! 아주 죽네, 죽어!’
아이시런 공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웃어주자 사내놈들은 바지에 오줌을 지린 것처럼 자지러지고 있었다. 일반 여인들조차 공주의 아름다움에 오금이 저리고 있으니 말을 해서 무엇 하랴! 새삼 공주의 연기력이 무섭기까지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노련해지며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수도에 들어서서 연결된 대로를 타고 황성까지 환호를 받으며 들어가게 되었다. 가르딘은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임무에 충실했다. 공주의 가증스러운 모습이 짜증나기는 하지만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황궁까지 들어서자 아이시런 공주는 바로 황제가 있는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에 들어가서 황제에게〈나 이제 집에 왔어요!〉라고 말을 해야 모든 임무가 끝이 나는 것이다. 가르딘과 스필언, 미토스가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성인식인증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책임자가 가르딘이었고, 그 뒤로 마스터급에 이른 기사들이기에 황궁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황궁까지 가는 길은 거쳐야 하는 곳이 많다. 황궁 안은 내부와 외부가 완전히 격리되어진 곳이다. 제국의 황제가 기거하고 있는 곳이니 보안과 방어에 있어서는 대륙최강일지도 모른다.
황궁 안 대전의 크기 역시 일반 귀족의 저택을 능가할 정도로 거대하다. 대전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믿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건 과장이 약간 섞여 있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크고 넓다는 말이다.
대전의 중앙에는 화려한 문양을 자랑하는 카펫이 정갈하게 놓아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 황제가 있는 용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가르딘의 시선이 황제에게 향했다. 과거 15년 전만 해도 황제의 기상은 대단했었다. 전대 황제의 유약했던 모습을 던져 버리고, 철혈의 정치를 이룩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제는 당시의 강인했던 모습이 사라지고 피곤과 나태함이 섞여있었다. 이래서 시간이 무서운 것이다.
‘그 당시의 모습은 이제 없군.’
가르딘의 생각은 곧 끝이 났다. 황제는 피곤함이 섞여 있다고 해도 황제였다. 지위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오랜 시간 황제로 지내온 코스트너 황제에게는 범접하지 못한 기운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가르딘과 미토스, 스필언이 일정선 안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아이시런 공주만이 코스트너 황제에게 다가갔다.
“이제 왔구나!”
“황제 폐하를 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대전은 황궁의 중대사를 진행시키는 곳이기에, 황족이라고 해도 아버지와 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다들 아는 것 인데, 뭘 이렇게 행동하냐! 가식적인 행동보다는 따뜻한 부녀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할 수도 있으나! 정해진 법도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제국의 위상을 높여주다니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부끄럽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를 낳고 길러주신 폐하의 은혜이옵니다!”
“하하하! 이제는 네가 진정으로 다 컸구나!”
코스트너 황제는 어찌나 기쁜지 오랜만에 큰 소리로 웃었다. 쇠약해진 모습과는 다르게 상당히 호방한 웃음이었다. 과거의 영광이 그리워서 더욱 크게 소리 내는 것인지도 몰랐다.
코스트너 황제의 옆으로는 3명의 황후가 자리하고 있었다. 1황후 세리뉴, 2황후 글로리 아, 3황후 클라우디아였다.
그녀들도 만면에 웃음을 띠며, 공주의 귀환을 축하해 주었다. 특히 아이시런 공주의 어머니인 글로리아 황후는 진정으로 반겨주었다.
또한 황후의 옆으로 1황자 러쉬 카이로만, 2황자 지니언 카이로만, 3황자 다마트 카이로만이 서있었다. 1황자의 경우 정실이라고 불리는 세리뉴 황후의 피를 이어받은 정통적인 황태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유약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황태자로서 부족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2황자 지니언은 아이시런 공주와는 같은 어머니를 두고 있었다. 1황자와는 다르게 강인하며, 검을 숭상하는 전형적인 기사형 인물이었다. 마지막으로 3황자는 1황자, 2황자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조용했다. 조금 음침하면서도 병약해 보이는 모습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모든 가족들이 모였지만 분위기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밝지 않았다. 모두 속내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외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속내에 가담한 사람을 빼고 말이다.
가르딘은 황제를 비롯한 귀족들을 자연스럽게 살펴보았다. 황제와 귀족들의 반응을 살피고 대응하기 위한 방법이다. 괜히 주제넘은 짓은 절대 하지 않아야 했다. 말 한마디 잘못해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 바로 대전이었다. 황궁에서는 말이 검을 대신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가르딘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자들을 보았다. 그들 간에 보이는 미묘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오러 마스터를 초월한 가르딘의 감각은 예상 이상으로 뛰어났다.
‘공주가 외로웠던 건가?’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 숨겨야 하는 생활.
답답함이 쌓여 밖으로 나돌고 싶어 하는 성격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였다. 상당히 불쌍한 경우라고 할 수 있지만 가르딘은 공주를 동정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지옥인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공주의 삶은 복에 겨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보다! 저 사람은 왜 자꾸 날 노려보는 거야?’
가르딘은 시선을 옮기지 않았지만 누군가 강렬하게 노려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적대적인 감정이 섞여 있는 눈빛이었다.
황궁생활을 하면서 가르딘이 가장 유의하는 것이 권력이 높은 사람에게 찍히지 말자였다. 지금 노려보는 사람은 5대 공작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네벨리언 공작이었다. 제국의 5대 마스터 중에 한 명이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가르딘이 알 수도 없을뿐더러 저 정도의 감정 섞인 눈빛을 보낼 정도로 실수하지도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런지 이유나 알고 노림을 당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뭐야?’
줄을 잘 서야 하는 가르딘이었다. 어느 줄에서야 좀 더 이익을 보며, 편안하게 말년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는 상태니 조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네벨리언 공작의 눈빛이 맘에 안 들기는 하지만 내색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네벨리언 공작의 행태를 보면 역시 파스트론 단장과 발리스타 공작이 가장 나은 선택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네벨리언 공작과 마이어 공작이 서로 같이 2황자를 지지한다고 하지만 한쪽은 마음에 안 들고, 다른 한쪽은 황궁과 너무 멀었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거대한 세력인 파스트론 단장과 발리스타 공작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 사는 길은 무조건 줄이다. 줄을 잘 서야 앞날이 탄탄대로야!’
괜히 썩은 줄을 잡았다가 미끄러지면 인생 제대로 꼬이게 된다. 사전에 조사를 철저히 해서 준비를 해놓아야 했다.
가르딘이 귀족들을 보면서 고민하고 있을 때, 황제가 가르딘과 스필언, 미토스를 불렀다.
가르딘은 즉시 상념을 접고, 황송한 표정으로 부복을 했다.
“그대들이 있어 내 딸이 무사히 올 수 있었네!”
“아닙니다. 제국의 검인 피닉스기사단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임무였습니다! 또한 모든 것은 황제 폐하의 하늘과 같은 은혜를 갚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가르딘의 멘트는 꿀을 발랐는지 매우 매끄러우며, 달짝지근했다.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황제에 대한 칭찬과 제국을 위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말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말하는데 돈 드는 것이 아니기에 정확한 구성을 짜고 말을 날리는 가르딘이었다. 기승전결이 이상하게 돌아가면 마지막에 말문이 막힐 수 있기에 미리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야 했다.
“하하하! 충성스러운 기사를 두어서 제국의 복이로세. 앞으로도 제국을 지키는 자랑스러운 검이 되어 주기를 바라겠네!”
“충!”
크게 충이라는 말을 하고 일어서는 가르딘이었다. 그에 따라 스필언과 미토스도 동시에 일어섰다. 모두에게 전형적인 기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가르딘의 경우 어떻게든 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무지하게 애를 썼다.
가르딘의 말 때문인지 흡족한 미소를 지은 코스트너 황제였다.
“10일 후에 그대들의 작위와 영지에 대한 결정이 있을 테니, 그때까지 편안하게 쉬고, 기다리게.”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황제 폐하!”
가르딘의 경우 최소 백작위를 받게 된다.
이유는 이렇다. 원래 제대하게 되면 자작의 작위를 받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면 작위가 있는 귀족이 된다. 그 상태에서 오러 마스터가 되었으니 당연히 한 등급 상승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고로 황궁회의가 열려지게 된다.
백작급 이상은 상급귀족의 반열에 든다는 뜻이다. 상급귀족의 작위 수여는 보통 일이 아니기에 황제가 직접 회의를 통해 결정해야만 한다.
가르딘이 드디어 귀족이 되어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는 말이 되었다. 가르딘의 상념이 더욱 깊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가르딘은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이 나자 힘들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라이나와 브리안이 있는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황궁의 대전 안에서 아이시런 공주와 가르딘, 스필언, 미토스가 나왔다. 각자 원하는 방향으로 가면 이제 다시 볼일이 거의 없을 것으로 보았다.
아이시런 공주는 황궁 안의 또 다른 궁으로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다. 나오려면 혼인하는 것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가르딘은 떠나가는 아이시런 공주를 보며 홀가분하게 뒤돌아서려고 했다.
“며칠 후에 별궁에 들려주세요,”
“예? 잘 못 들었습니다!”
이런! 초보 기사나 하는 말실수를 하고 만 가르딘이었다. 아이시런 공주가 예상 밖에 말을 하는 바람에 나온 실수였다.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가르딘이 말소리를 듣지 못할 리 없지 않는가!
“가르딘 경이 수고했기에 초대하는 거예요. 물론 거절하지는 않겠지요.”
낮고 명쾌한 말투였다.
“물...론입니다,”
거절하면 절대 그냥 넘어갈 아이시런 공주가 아니기에 승낙은 했다. 하지만 다시 보기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공주와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는 범위를 한참이나 초월하게 된다.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그럼 다음에 봐요.”
“안녕히 가십시오! 공주님!”
아이시런 공주가 사라지고 나자 한숨이 나오는 가르딘이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을지 몰라, 대비해야 해.’
아무 일도 없이 부를 리 만무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 낼 수 있는 절대방어급 마법실드를 쳐야 할지 몰랐다.
가르딘은 우선 피닉스기사단으로 향했다. 황제 폐하에게 신고를 했으니 그다음으로 피닉스기사단장에게 신고를 할 차례였다.
신고는 높은 데서 아래로 가며 무조건 다 해야 한다. 하나 라도 빼 먹으면 나중에 쓴소리를 듣는다.
나 무시하냐!
이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하나의 실수에서 모든 화근이 시작되기에 순서에 맞추어 시행하는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이 피닉스기사단으로 향하는 중간에 조르크 바자바인 부단장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황궁에 있다가 언제 이곳으로 왔는지 모를 정도로 빠른 움직임을 보유한 부단장이었다.
“부단장님 안녕하십니까!”
별로 안녕한 사람은 아니었다. 힘든 여정을 하게 만든 핵심인물이 바로 이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바자바인 부단장만 아니면 성인식인증 여정을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어, 그래 반갑네!”
무척이나 반가운 듯한 바자바인 부단장이었다.
갑자기 저렇게 미소를 짓자 가르딘은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이 인간이 왜 갑자기 웃지?’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 바자바인 부단장이 친한 척 가르딘의 옆으로 다가와서 어깨동무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짓이야?’
그렇다고 팔을 쳐버릴 수도 없는 상태였다.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하는 바자바인 부단장이었다.
“이제 같은 백작이네.”
“예? 그게 무슨?”
“이거 왜 이래, 이번에 백작급 작위를 받을 것 아냐, 같은 백작끼리 말 편하게 하자고.”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같은 백작이 되면 서로 반 공대를 하게 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자신의 아래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해도 급이 높아지면 대우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 귀족사회였다.
가르딘은 선뜻 바자바인 부단장의 뜻대로 하기를 망설였다. 말을 편하게 하라는 것이 이상하게 걸렸다.
‘이놈의 인간이 이처럼 친절할 리 없는데!’
여태까지 모든 일을 함에 초를 친 인간이었다. 처음부터 친근하게 나올 때는 의심을 해봐야 했다. 어찌나 치사하고 얍삽한지, 가르딘보다 한 수 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같은 유사인종은 위험한 존재였다.
무언가 있을 것 같은데, 딱히 문제점을 찾기 힘들었다.
“어서 편하게 하지 그러나.”
“그래도 아직 부단장님이지 않습니까!”
가르딘은 버텼다.
바자바인 부단장의 의도대로 움직여주기에는 그동안 당한게 너무 많았다. 괜한 일에 목숨 걸지 말자 주의의 가르딘이었다.
“어허, 자네도 참 고지식하구먼! 난 그저 좀 더 편하게 지내자는 의미로 한 말일세. 자네가 이처럼 불편해하니 내가 더 불편하지 않는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가르딘은 등 뒤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대로 굴복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버티느냐의 순간이었다. 말 한마디 꺼내기가 쉽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의심이 가!’
가르딘이 망설이고 있을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가르딘의 동기인 유타였다. 유타는 기사단으로 올 가르딘이 아직 오지 않자 마중 나와 본 것이다. 이미 스필언과 미토스는 기사단에 도착해 있었다.
“바자바인 후작님,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그리고 가르딘 너도 빨리 와야 될 것 아니 야!”
‘응?’
방금 헛소리가 지나갔다.
유타의 말에 섞인 내용을 곰곰이 찾아서 분석을 한 가르딘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역시 그렇지, 이 인간이 그럴 줄 알았지!’
가르딘은 유탄의 말에서 바자바인 후작이라는 말을 들었다. 공작 아래에 있는 후작, 상급귀족 중에서도 상위귀족에 속하는 위치라는 말이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편하게 말하라고 한 것이다.
바자바인 부단장은 아쉬운 듯이 탄성을 질렀다.
“아! 아쉽다. 약점 잡을 수 있었는데.”
“언제 후작이 되신 겁니까?”
“네가 오기 20일 전에 승진했지.”
가르딘은 역시 만만치 않은 부단장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반말이라도 했다가는 그걸 가지고 두고두고 괴롭혔을 것이 분명했다.
“다 내가 자네들을 잘 가르쳐서 이렇게 상승한 거지. 위에서 그걸 알아주시고 내 길을 열어 주신 거라네.”
자화자찬을 서슴없이 하고 있는 바자바인 부단장이었다. 사실 그의 작위상승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단 나이가 찼고, 경력이 되었다. 또한 피닉스기사단 내에서 마스터급 기사가 3명이나 배출되었다. 충분히 공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에 반해 가르딘은 짜증이 치밀었다.
마스터급 기사배출은 가르딘이 직접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결코 바자바인 부단장의 노력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스필언과 미토스의 실력이 이미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계기를 준 것은 가르딘이었다.
‘쥐뿔도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 운은 억세게 좋구나!’
가르딘은 겉으로는 축하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배알이 뒤틀렸다. 다른 사람 다 잘돼도 저 인간 잘되는 꼴을 봐줄 수가 없었다.
“그것보다 자네 딸 대단하던데.”
“그건 또 무슨 소리 입니까?”
물론 브리안이 뛰어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가르딘에게는 그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자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자바인 부단장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스라인에 다니는 내 딸이 그러던데, 자네 딸이 자신보다 몇 살 많은 사내아이를 박살냈다고 하더라고.”
“예?”
한없이 귀엽기만 한 브리안이 폭력을 썼다고 하니 상상이 가지 않는 가르딘이었다. 하지만 바자바인 부단장의 말을 계속 듣자니 충분히 이유가 되었다.
“그놈이 조금 야비했지, 여자아이를 괴롭히다가 오히려 당한 거지, 내 딸이 그래서 자네 딸과 친하게 지내고 있지.”
가르딘은 이야기를 전부 들었다.
브랜디 자작의 아들 풀루토가 브리안을 괴롭혔다는 것이었다. 귀족이기에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브리안이 어쩔 수 없이 정정당당하게 대결을 한 것이다.
가르딘은 분노가 치솟았다.
괴롭힐 데가 어디 있다고 브리안을 괴롭힌단 말인가! 브리안에게 죽도로 맞은 풀루토라는 녀석을 다시 보면 개박살을 내주고 싶은 가르딘이었다.
‘감히 내 딸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브랜디 자작은 네벨리언 공작의 사위였다. 네벨리언 공작이 아끼는 외손자를 팼으니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이 당연했다. 가르딘의 정치 생명에 치명적인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가르딘은 오히려 브리안이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르딘도 네벨리언 공작과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고작 애들 싸움에 어른들이 감정적으로 대하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욕을 해도 상관없었다. 자신에게 무엇 보다 소중한 자식이었다. 그런 자식이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핍박받았다고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잘했다, 내 딸! 그런 놈들은 기어오르지 못하게 잘근잘근 밟아 줘야 해!’
가르딘의 마음이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에게 가는 확실한 계기였다. 원체 강력한 두 공작이었고, 그 자식들까지 친해진 상태니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다.
“빨리 가시죠, 지금 도노반 선배에 대한 일로 기사단의 분위기가 안 좋은데 이런 데서 웃고 떠들 시간이 있습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도노반 선배가 죽었대.”
“뭐야?”
유타의 말에 가르딘이 놀랐다. 도노반 선배는 가르딘이 들어오고 1년 후에 제대하여 작위를 받은 인물이었다. 1년 차에서 어려운 점이 있을 때 도움을 준 선배이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운이 좋게 영지까지 받아서 잘 살고 있다고 전해졌었다.
몬스터들에게 죽다니, 가만 그리고 보면 부단장님과는 동기잖아요.”
“그렇지.”
“동기가 죽었는데 저한테 농담할 시간이 있었습니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런 일로 계속 담아 둘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을 하면서도 의외로 씁쓸한 바자바인 부단장이었다. 동기가 죽었다는 말에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앞으로의 일에 지장을 준다면 그것은 잘못이었다. 피닉스기사단이기는 하지만 많은 기사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발생한다. 죽거나 다치는 일에 대해서 계속 마음에 담아 두게 되면 다른 기사들을 지휘할 수 없게 된다. 지휘자급의 기사가 된다면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마음 속 한견에 놓아둘 뿐이다. 계속 마음에 두어서 분위기를 망친다면 이번 여정에서 죽은 기사들에게 대한 모독이 된다.
‘하긴 이미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
한번쯤 마음을 담아 생각해 주는 것으로 끝을 내면 되었다.
“그것보다, 자네에게 격려금이 지급되었네, 한턱 거하게 쏘는 것 잊지 말게.”
“알...겠습니다.”
역시나 금세 농담을 하는 바자바인 부단장이었다. 사실 이번에 나오는 격려금의 사용용도는 정해져 있었다.
가르딘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유타를 바라보았다. 유타가 흠칫 놀라더니 물었다.
“너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오늘 우리 집으로 모여. 오늘 한번 죽어 보는 거야!”
“나야 좋지, 동기들 모두 모이는 거냐!”
“당연하지, 내가 쏜다고 모두 모이 라고 해!”
가르딘도 호탕할 때는 호탕했다.
“동기들 만이다.”
“알았어, 인마!”
유타는 가르딘의 말에 별 뜻 없이 대답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 안에 서린 음모를 알았다면 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대답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독 동기들을 강조하는 가르딘의 말뜻을 이해했어야 했다.
가르딘은 정식으로 파스트론 공작에게 신고를 하고 난 후 모든 여정을 마칠 수 있었다. 기사단 내에서 설전했던 도노반 자작에 대한 일은 삼가 조의를 표하고 끝이 났다. 가르딘이 말한 대로 유타, 갈라, 필리언이 모두 모였다.
동기들이라고 해봤자 이 녀석들이 다였다. 가장 친한 녀석들이니 한턱 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짠돌이인 네가 쏜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
“무슨 소리야, 나도 쓸 데는 쓴다고.”
총각일 때의 가르딘이었다면 돈을 쓰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하고 난 후의 가르딘에게는 술 한 잔 얻어먹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월급이라고 탄 돈을 모두 부인에게 갖다 주는 지독한 놈이었다.
오랜만에 한턱 쏜다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유타, 갈라, 필리언이었다.
한턱 쏘는 장소가 가르딘의 집인 펀머푸(편안함이 머무는 집) 라이나의 집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자기 집에서 술을 팔아 돈을 남기겠다는 가르딘의 철저한 계산이었다. 다른 집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경제적 절약을 할 수 있었다.
“오늘은 제수씨가 뭐라고 해도 너희가게 술 다동날 줄 알아!”
“맘대로 해, 그리고 제수씨라니 형수님이라고 불러라.”
“미친놈, 역시 넌 미친놈이야!”
“시끄러, 너보다 정상이니까, 걱정 마라!”
동기들이라서 그런지 말이 많아지고 시끄러웠다. 벌써부터 이런데 술이 들어가면 얼마나 대단할지 걱정이 되는 상황이었다.
황궁을 나와 한참을 걸어가자.
-펀머푸(편안함이 머무는 집)
펀머푸라는 간판이 보였다.
한동안 못 봐서 잊어버릴 뻔했던 가르딘은 감격에 겨워하고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식당의 문 앞으로 여인이 문을 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라이나였다. 기사단이 돌아왔다는 것으로 황궁이 떠들썩했다. 가게 일로 인해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가르딘이 혹시나 오지 않을까 시간마다 밖을 나와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르딘만큼이나 라이나도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당신!”
와락!
가르딘이 빠르고 강렬하게 달려 나갔고. 라이나는 나비처럼 부드럽게 살랑거리며 날아들었다. 서로의 거리가 사라졌을 때 거침없이 서로의 등과 등을 손으로 감싸 안았다.
“여보, 보고 싶었다오!”
“저도요!”
“당신을 생각하면, 하루도 편히 지낼 수 없었소!”
“저도 당신 생각뿐이었어요.”
“커억! 으웩!”
여러 번 본 장면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적응을 하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하는 유타, 갈라, 필리언이었다. 어떻게 저런 장면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연출하는지 그게 더 의문이었다. 보통의 정상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내라면 닭살이 돋을 만한 장면이었다.
‘저러고 싶을까!’
동기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아빠!”
“오오! 내 딸 그사이에 또 예뻐졌구나!”
아내가 나오고 난 후 딸이 또 나와서 닭살 가정사를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유타, 필리언, 갈라는 이미 돌아서서 저물어 가는 해를 보고 있었다. 더 보고 있다가는 닭이 되어 날갯짓을 할 것 같았다.
가르딘은 브리안을 보며 바자바인 부단장에게 들은 말을 꺼냈다. 라이나가 있기에 정확한 내용을 말할 수는 없지만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브리안, 아빠한테 할 말 있지?”
“아빠, 알고 있었어?”
“물론이지.”
“아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오스라인 학교는 귀족 자제들의 집합소다.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은 대부분 귀족들의 입을 타고 흘러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가르딘이 안다는 식으로 말을 하자 브리안이 금세 눈치를 챘다. 그리고 잘못했다고 말을 했다. 어찌되었건 싸움을 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브리안은 가르딘의 눈치를 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가르딘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브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니, 아주 잘했다. 다음부터도 그렇게 당당하게 행동하여라.”
“역시, 아빠 최고야!”
자식에게 최고의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르딘은 브리안의 그 한마디에 모든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라이나가 무척이나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가르딘과 브리안이 웃으면서 말을 했다.
“비.밀.이.야!”
“나중에 알면 재미없어요.”
“그래도 안 돼. 이것은 브리안과 나만의 비밀이야.”
라이나가 알아서 좋을 것 없었다. 가뜩이나 검술이나 무공을 브리안에게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 라이나였다. 폭력을 휘둘러 아이를 다치게 했다면 잔소리가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다. 최대한 모르게 하는 것이 나았다.
집으로 들어가는 가르딘의 등 뒤에서 필리언이 작게 속삭였다.
“너도 당당하지 못하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한다.”
“너보다는 당당해.”
“말이나 못하면.”
술을 먹기 위해서 친구들을 데려오면 보통 가정집의 아내 들은 좋아할까! 싫어할까! 당연히 싫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라이나는 예외였다. 술자리에 사람을 데려오면 매상을 올릴 수 있는 기회이기에 자주 데려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오늘은 내가 사는 거야.”
“당신이 산다고요!”
급 실망하는 라이나였다. 매상을 올리는데, 주인이 내면 말짱 꽝이 아닌가! 표정이 너무 쉽게 드러나자 가르딘이 웃으면서 달래주었다.
“앞으로의 일을 위한 투자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곧 영지를 얻게 될 거야. 가게를 청산하고 당신도 이제 귀족이 되는 거야.”
라이나는 딱히 귀족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브리안을 생각하면 귀족이 되어야 했다. 딸의 장래를 위해 부모는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백작 부인이라고 불러야 하나! 하하하!”
“어머! 당신도 참!”
“녀석들이 원하는 대로 술을 가져다 줘, 돈은 이미 충분히 받아 놓은 상태야. 그리고 이것은 선물이야!”
가르딘이 숨겨 놓은 상자 하나를 라이나에게 주었다. 상자를 받아 든 라이나는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리베시안 찻잎이 정갈하고, 깔끔하게 정제되어 보기 좋게 놓아져 있었다.
“이것은 설마 리베시안 찻잎?”
“맞아.”
“이 귀한 것을 당신이 산거예요.”
“돈 걱정하지 말래도 당신이 고생한 것 아니까. 이 정도는 마셔도 된다고 생각해서 사온 거야.”
“여보, 고마워요!”
눈물까지 보이면서 좋아하는 것을 보면, 선물이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가르딘의 정성이 들어 있기에 더욱 감동한 라이나였다. 오늘만큼은 확실하게 동기들을 대접해 주어 야겠다는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브리안이 이미 잠에 취해 있는 시간까지 술과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져 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 가는 술병들과 거나하게 취한 미친개들이 모여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필리언, 유타, 갈라의 경우 가르딘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제대하게 되어 있었다.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고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사내는 미래가 없으면 불안해한다. 특히 자신이 먹여 살려야 하는 아내와 자식이 있을 경우는 더 심하다.
“필리언이 기사단장이라고!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백 배 낫다!”
“닥쳐, 유타 네놈이 기사단장하면 아마 썩은 기사단이라고 대륙에 소문이 날 거다!”
유타와 필리언의 신경전이었다.
가르딘의 입장에서 누가 됐던 상관없었다. 필리언이 아니라 유타가 먼저 물었어도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만큼 친한 사이였으니 허물이 없는 사이였다.
“아아! 서로 싸우지 말고 대화를 이어나가자고,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지닌바 외모로 보나, 나이로 보나 내가 기사단장을 하는 게 적격이라고 생각하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 하냐?”
“이게 갑자기 끼어들어서 이익을 보려 하네!”
갈라 역시 은근슬쩍 끼어들며, 자리싸움에 동참해 버렸다. 역시 그냥은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던 모양이었다.
가르딘은 대화의 내용이 자신이 유도한 곳으로 가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나가는 투로 기사단장에 대한 말을 넌지시 던져 놓았다. 그랬더니 고기인 줄 알고 덥석 무는 녀석들이 아닌가! 너무 쉬워서 어렵게 말할 필요도 없었다.
‘때가 무르익고 있구먼!’
피닉스기사단을 제대해서 영지를 받으면 상당히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대부분은 작위와 퇴직금을 조금 받는 것이 다였다. 이후에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다른 공작가의 기사가 되어서 사는 것이지만 기사단장 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자리가 차 있는데 그 상황을 뚫고 들어가려면 실력과 돈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투자한 만큼 자리를 얻을 수 있으며, 줄을 잘 서야 제대로 된 직장을 얻게 된다. 치열한 삶의 투쟁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귀족의 기사가 되면 불편한 점이 여간 많은 게 아니다. 자유롭지 못하며, 귀족의 성격에 따라 하기 싫은 일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유타, 갈라, 필리언의 경우 자유로우면서 즐겁게 살고 싶은 인간군상들이었다. 누군가가 뭐라고 하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피닉스기사단 내에서는 정해진 규칙대로 움직이기에 그나마 괜찮은 편이지만 사회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
“너희들 제대하고 나하고 같이 할래!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너희들 정도면 내가 대접 제대로 해줄게! 그리고 나하고 있으면 편하고 즐겁잖아, 안 그래! 예전으로 우리 같이 돌아가는 거야!”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던지며, 가르딘이 계속적으로 미끼를 뿌리고 있었다. 가르딘의 입은 쉼 없이 움직이면서, 손 역시 이미 술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술이 들어가자 가르딘의 말이 꿀 바른 낙원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오러를 수련한 기사들이라고 해도 적절량 이상의 술이 들어가면 몸과 이성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 쉽지 않다. 또한 유타와 갈라, 필리언의 경우 가르딘의 말에 심적으로 동의를 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끌려갈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그럴까! 나도 킹덤나이트 때처럼 살아보고 싶다!”
“우리 다시 한 번 모이는 거야!”
“한 번 킹덤나이트는 영원한 킹덤나이트라는 것을 잊지 말자!”
“마셔, 오늘 먹고 죽는 거야!”
“가자, 가자, 가자! 저 앞에 낙원이 펼쳐져 있구나!”
가르딘과 동기들의 술판이 점점 극을 향해 치달았다. 한껏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 되어 갔다.
가르딘이 잠시 주방으로 가서 종이 3장을 가져왔다.
“이게 뭐...냐?”
“뭐, 별거 아냐, 오늘 우리가 한 맹세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글로 남기려고, 말로 해서 지나간 것은 흔적을 남길 수 없잖아, 그럼 너무 아쉽잖아!”
“그런가!”
약간은 떨떠름한 필리언이었다. 가르딘은 필리언의 머쓱한 표정을 확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 가지 더 말을 붙였다.
“우리 사이가 보통 사이냐! 앞으로 해쳐 나갈 위대한 앞날을 위한 중요한 대화를 이대로 사장시키는 짓은 대륙의 앞날을 위해서 결코 옳지 않은 일이야!”
“그...렇지! 생각해 보니 그...렇구나!”
고작 해야 기사 4명이 모여서 한 대화에서 대륙의 앞날까지 걱정할 필요성은 없었다. 평상시라면 뻥이 심하다고 할 말들이지만 술이 들어가자 당연한 말로 승화되어 버렸다. 술의 놀라운 능력 중에 하나였다.
가르딘은 아랫부분만을 보여주며, 날인을 찍으라고 했다.
-귀족서약!〈우리는 오늘 한 말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며, 맹세한 내용을 피가
마르고, 뼈가 으스러질 때까지 지킬 것을 귀족으로서 서약하는 바이다>
-날인(유타, 갈라, 필리언)
아주 간단한 단어를 사용한 것이지만 일부 부분일 뿐이었다. 그 앞에 방대한 내용을 가르딘이 임의적으로 적을 수 있도록 공간을 남겨 놓았다. 나중에 필요하면 더 집어넣겠다는 심산이었다.
귀족서약은 신성한 것이다. 귀족이 태어나면서 가장 신중히 결정해야 할 일 중에 하나였다.
가르딘도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딴소리하면 귀찮아질 염려가 있기에 사전에 조금 제약을 둘 필요성에 의해서 선택한 것이다. 이것으로 동기들의 약점을 잡으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가르딘은 라이나와 브리안이 가장 소중하지만 그 다음으로 동기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일에 동기들과 같이 이끌어 가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함께하고 싶은 동기들이었다.
“나만 믿어, 나 이래 봬도 대륙최강의 오러 마스터야!”
뿌우웅!
가르딘이 술 취한 김에 한 방 크게 쏴주었다.
냄새가 급하게 퍼지더니 사방을 가득 메워버렸다. 만일을 대비해 가르딘이 미리 라이나를 대피시킨 상황이었다.
“뻥은! 그래도 방귀 하나는 대륙최강이다! 이놈아!”
“술맛 떨어지게시리!”
“저놈 방귀는 살인무기 라니까!”
-황궁회의.
백작급 이상의 작위에 대한 의논이 이어져오고 있었다. 황궁의 대전 위에서는 황제가 친히 앉아서 귀족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결정은 황제가 알아서 하는 것이 관례였다. 물론 귀족들의 영향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의 의견을 들어 놓고 그 제안 중에서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황궁회의를 열겠습니다. 회의의 주된 안건은 마스터급 기사 3명에 대한 것과, 발키리 영지의 영주를 뽑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겠습니다.”
재상인 바이멘 후작이 안건에 대한 사안을 정했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한번은 다시 상기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형식은 있으면 불편하지만 없으면 무질서한 것이 사실이었다. 일정 차례를 지켜주어야만 원만한 회의가 이루어 질 수 있다.
“시작하라.”
코스트너 황제가 회의를 시작하도록 했다.
대전 안에는 황궁의 중요인물들이 모두 모였다. 특히 5대 공작 중에서 4대 공작이 자리하고 있었다.
발리스타 공작, 파스트론 공작, 네벨리언 공작, 타이가라 공작이 가장 먼저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머지 1개의 공작가는 카론마이어 공작이었다. 그는 제국의 북방을 책임지는 총사령관의 임무가 주어졌기에 참석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원래 모든 회의는 이곳에 모인 4명이 주도하는 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귀족들이 황궁에 진출하려는 것이다. 자신들의 발언권을 행사하려면 황궁에 가까워야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그나마 생기기 때문이다. 변방에서 대단히 훌륭한 말을 하더라도 들어줄 사람이 없는데 말해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스터급 기사 중에 스필언 파스트론, 미토스 발리스타의 경우 나이가 상당히 젊습니다. 이제 막 피닉스기사단에 들어온 신입에게 백작급 이상의 작위는 너무 섣부른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서 자작의 작위를 우선 수여하고 나중에 시간이 되어 공을 세우면 백작급으로 승급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의에서 반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황제뿐이다. 황제가 있는 곳이고, 황궁회의니 만큼 공작이라고 해도 말을 높여야 했다.
네벨리언 공작이 가장 먼저 말을 이었다. 발리스타 공작과 파스트론 공작의 경우 자식들의 일이리만큼 먼저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객관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어차피 먼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는 사안이었다. 아무런 공도 없이 마스터급 기사가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백작급의 작위를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네벨리언 공작의 말에 수긍이 되는 상황이었다.
나머지 공작들의 의견이 하나로 귀결이 되었다.
“동의합니다.”
“동의합니다.”
“동의합니다.”
공작들이 동의하자 황제가 결정을 내렸다.
“미토스 발리스타, 스필언 파스트론의 작위를 자작으로 명하며,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백작으로 올리겠노라.”
땅! 땅! 땅!
결정을 내리면서 탁자 위에 놓아진 나무로 된 망치를 두드렸다. 모두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다음 안건이 가르딘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아무 배경이 없는 귀족으로서 백작위까지 가는 귀족은 극히 드물다. 개인의 실력이 출중한 것도 있지만 뒤를 받쳐 줄 배경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가르딘은 바늘구멍을 통과한 케이스 중에 하나였다. 제국에 5명밖에 없었던 오러 마스터가 되었으니 그 중요성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피닉스기사단의 가르딘 오브라이언의 경우 이미 기사단에서 연수를 채운 상태로 들었습니다. 원래 받아야 했던 작위가 자작이었으므로 그 위의 단계인 백작위를 수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가르딘이 원하던 일이 점차로 현실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 백작이 되면 당당히 상급귀족이 되어 보란 듯이 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인식 여정과 성녀의 동행으로 인해 공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을 세운 마스터급 기사를 백작위로 올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발리스타 공작의 말에 네벨리언 공작이 한마디 덧붙여서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공작들의 의견이 이번에도 하나로 귀결되었다.
황제가 다시 결정을 내렸다.
“가르딘 오브라이언에게 백작위의 작위를 수여하며 카이 로스의 성을 하사한다.”
땅! 땅! 땅!
이로써 가르딘은 백작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카이로스라는 성을 하사받게 되었다. 귀족으로서의 등급이 올라가게 되면 기존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성을 받게 된다. 아버지가 남작인데, 백작이 된 아들이 성을 그대로 물려받을 수는 없기에 마련한 제국의 법칙이었다.
가르딘 카이로스라는 이름으로 재탄생되게 되었다. 꼴도 보기 싫었던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아야 했던 가르딘에게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계시일지도 몰랐다.
“이번 안건이 중요합니다. 발키리 영지의 영주가 몬스터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새로운 영주를 뽑아야 합니다. 거론되는 인물로는 기사로서의 실력이 뛰어난 인물이 여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생각한 바로는 이번에 백작이 된 가르딘 카이로스가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바이멘 후작이 먼저 운을 띄웠다. 회의를 원활하게 진행시키기 위해 한정적으로 단어를 압축시켰다. 또한 미리 코스트너 황제에게 뜻을 전해 알고 있도록 한 상태였다. 코스트너 황제가 허락을 했기에 회의의 안건으로 진행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마스터급 기사를 변방으로 보낸다는 것 자체가 제국을 위해서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마스터급 기사는 제국의 군사력이었다. 또한 상징성이 상당히 강했다. 마스터급 기사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대부분 전쟁에서 일기대결은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전에서도 마스터급 기사는 중요하다. 이유는 바로 상대의 적장을 베어버림으로써 명령체계를 무너뜨리고, 아군의 사기를 증강시키기 때문이다.
마스터급 기사를 굳이 변방으로 보낼 이유가 없기에 발리스타 공작이 반감을 드러내었다. 기사 하나를 얻음으로써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떨어뜨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을 내렸다.
“변방이라니요, 발키리 영지는 제국의 곡창지대 중에 하나입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지역을 변방으로 표현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또한 발키리 영지가 몬스터의 습격으로 사라지게 된다면 제국으로는 큰 손실이 될 것입니다!”
네벨리언 공작은 발리스타 공작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바이멘 후작의 의견에 동조했다.
네벨리언 공작의 사적인 감정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그가 말년에 얻어 유독 사랑했던 딸, 빅토리아였다. 그런 딸이 자식을 낳았다. 외손자인 풀루토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외손자가 떡이 되도록 맞았는데 아무 감정이 없다면 말이 되지 않았다.
‘내 외손자를 건드리고 그냥 둘 수 없지!’
마스터급 기사를 회유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네벨리언 공작이었다. 다른 일에는 냉정하며 사리판단이 뛰어난 편이지만 가족과 연관된 일은 이성을 뛰어넘어 감성적이었다.
“발키리 영지의 경우 이미 몬스터의 공격을 막아낸 곳입니다. 굳이 마스터급 기사가 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몬스터가 언제 어느 때, 침범한다는 것을 말하고 공격을 합니까! 중요한 영지를 지키는 일은 보통의 기사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 는 영지입니다.”
대국적인 관점에서 말을 하며 선동하는 네벨리언 공작이었다. 다른 공작들이 반론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말을 하면 자신들이 끌어들이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었다. 괜한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황제가 있는 데서 오러 마스터를 편으로 끌어들이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불신의 벽이 깊어질 수 있었다.
“또한 발키리 영지는 대외적으로 안전한 지역입니다. 몬스터들의 습격이 있다고는 하지만 헥토르 왕국을 제외하고 접경지역이 없습니다. 헥토르 왕국의 경우 제국과는 동맹관계에 있는 상황이니 전쟁이 일어날 리 없지 않습니까! 만약 전쟁이 난다면 발렌타인 성을 중심으로 먼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럼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에 불러들이면 됩니다.”
반박할 말은 모두 차단하며 가장 중요한 이유까지 모두 대는 네벨리언 공작이었다.
확실하게 못을 박고 있었다. 모두가 가고 싶지 않은 발키리 영지를 안전한 지역으로 탈바꿈시키는 언변에 놀라울 지경이었다.
네벨리언 공작의 열변에 공작들이 대답하지 못하자 의견이 종료되어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황제의 판단뿐이었다.
아무리 공작들이 적절한 의견을 내놓았다고 해도 황제가 아니라고 하면 말짱 꽝이었다.
“발키리 영지는 제국의 곡창지대다! 그 중요성이 다른 곳과는 다른 곳이니 적합한 인물이 필요하다, 그에 따라 가르딘 카이로스를 발키리 영지의 영주로 임명하는 바이다.”
땅! 땅! 땅!
가르딘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상황이 나와 버렸다. 안전하면서도 수입이 좋은 장소로 발령되기를 바랐지만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엄한 곳으로 발령이 되어버렸다.
“작위 수여는 5일 후에 황궁에서 있을 테니 정시에 모여 주십시오! 늦는 사람에게는 벌점이 추가됩니다.”
바이멘 후작의 말이 끝나자 황궁회의가 종료되었다.
황궁회의가 종료되는 시각에 가르딘은 아이시런 공주가 머무는 내전으로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황궁 안에 마련된 정원에서 아이시런 공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별로 보고 싶지는 않지만 강제적으로 약속이 된 상태이기에 거절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가르딘의 입장에서 잘 보여야 하는 인물 중에 하나였다. 다시 여정을 하지 않을 테니 점수라도 다시 따놓는 것이 좋다고 판단을 내렸다.
아이시런 공주는 정원에 놓아진 의자에 앉아 탁자에 놓인 차를 마셨다. 가르딘도 그 옆에 앉아서 맛없는 차를 억지로 입에 대며 기다렸다. 공주와 나란히 앉아서 마시는 것이 불경스럽게 보일 수 있으나 앉으라고 하니 권력 없는 가르딘은 두말없이 앉았다.
계급이 낮으니 까라면 까는 것이 신분사회에서는 다반사적인 일이었다.
“날씨가 무척이나 좋네요.”
‘곧 비가 올려나!’
“바람도 선선한 게 시원하기까지 하네요.”
‘태풍이 올지 모르겠다.’
“햇빛도 좋고, 차도 맛있네요.”
‘음! 맛은 모르겠고, 곧 어두워지겠군!’
아이시런 공주가 혼자 말하는 격이 되었다. 가르딘이 생각만 하고 대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아이시런 공주가 더러운 성격을 드러내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이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예! 공주님!”
“꼭 화를 내야 한다니까.”
“죄송합니다.”
“그럼 다시 말할 테니, 반응을 보이세요.”
“알겠습니다. 공주님!”
딱히 반응이 필요한 대화는 아니었다. 영양가 없는 말을 계속할 뿐이었다. 하지만 가르딘은 방심하지 않았다. 이러다가 어딘가에서 경로를 바꾸어 찔러 들어온다는 것을 경험한 가르딘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부를 이유가 없었다.
“이번 여정에서 수고를 많이 해주었어요!”
“과찬입니다.”
“아니에요, 이번에 신성제국에 무사히 갔다 온 것은 모두 가르딘 경의 수고 때문이에요.”
“아닙니다. 모든 것이 공주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그건, 맞아요. 다 내가 예쁘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제대로 되어졌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주 조금이지만 가르딘 경의 도움이 있었기에 무사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얼씨구!’
조금만 칭찬해 주자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아이시런 공주였다. 뻔뻔함이 점점 극에 이르러가고 있었다. 심하면 병이 된다고 하는데, 저런 병에 옮으면 약도 없다는 것이 정석처럼 전해졌다.
“나처럼 예쁜 사람은 대외적으로 모두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연한 일입니다. 공주님의 아름다움은 대륙이 알아줍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중에 영지에 놀러가도 되죠.”
“응?”
‘잠깐 대화가 이상한데!’
혹시나 잘못 들었나 하는 심정에 물어보았다.
“혹시 제가 영지를 받게 되면 오신다는 말씀이신지요.”
“나이가 들어서 이해력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네요! 다행이에요. 바로 이해해서.”
아직 가르딘은 영지를 받지 못했다. 물론 5일 후에 정식으로 받게 되겠지만 받지도 않은 영지에 공주가 오겠다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왜요, 제가 가는 게 싫은가요?”
“아닙니다. 하지만 아직 받지도 않은 영지입니다. 행여나 위험한 곳에 걸리게 되면 공주님의 안전에 누가될 수 있습니다. 황궁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위험한 영지에 걸릴 리 없다고 판단한 가르딘이었지만 공주가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둘러대었다. 황궁의 안전성과, 편안함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들이 모두 있는 곳이니 절대로 떠나서는 안 된다고 강변했다.
“황궁에 돌아오신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십니까!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호호호!”
가볍게 웃음을 지은 아이시런 공주였다. 일반 사내들이 봤으면 침을 질질 흘릴 정도로 황홀한 웃음이었다. 특히 햇빛에 반사되는 투명한 살결이 사람의 눈을 황홀감에 들게 만들 것이다. 반면에 가르딘은 오싹한 감정을 느꼈다.
“아버지가 한 번 정도 허락을 해주신다고 이미 확답을 받았답니다. 이번 여정을 무사히 마침과 동시에 제국에 큰 공을 세웠다고 칭찬까지 해주셨거든요!”
성녀의 탄생과 더불어 신성제국과의 외교가 더욱더 확고해졌다. 대외적으로 아이시런 공주와 성녀의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대단한 공을 세운 것은 분명했다.
‘제기랄! 그런데 왜! 내 영지야!’
카이로만 제국의 영토는 대단히 넓다. 무수히 많고 넓은 지역을 놔두고, 하필 가르딘이 가는 곳을 오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가는 곳을 가려는 이유가 있습니까?”
“쓸쓸하지 않고 재밌잖아요, 나중에 꼭 갈 테니 준비 잘하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받지도 않은 영지를 어떻게 단장해야 공주에게 잘 보일 수 있을까, 고민 좀 해봐야 하는 가르딘이었다. 정말 고민을 배로 늘려주는 공주의 말이었다. 역시 가까이 있으면 위험한 여인 중에 하나였다.
작위 수여식이 다가왔다.
가르딘은 정복을 차려입고 멋지게 폼을 잡았다. 오늘은 모두에게 잘 보여야 하는 날이기에 특별히 맞춘 정복을 입었다. 라이나가 옆에서 목부터 시작해서 옷소매, 그리고 발끝 까지 정리를 해주었다. 역시 알아서 잘 해주는 라이나였다.
“여보, 기대하고 있어!”
“잘하세요, 당신만 믿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라. 다 잘 될 거야.”
모든 일이 순조롭다고 생각한 가르딘이었다. 라이나와 브리안도 기대 반 설렘 반이 섞여 있었다. 원하는 대로만 일이 풀리면 백작 부인과, 백작가의 자손이 된다.
“행운의 키스를 부탁해!”
“아잉! 당신도!”
쪼오옥!
싫다고는 안 하는 라이나였다. 브리안도 가볍게 가르딘의 볼에 뽀뽀를 했다. 가르딘은 다른 누구보다 라이나와 브리안의 행운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녀오세요!”
가르딘은 펀머푸를 나서서 피닉스기사단으로 향했다.
기사단으로 향하면서도 가르딘은 여러 가지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공주의 성인식 여정으로 인해 일정 부분 드러난 힘. 그로 인해 얻어진 권력과 명예.
장밋빛 미래라는 허황된 생각은 없다. 단지 앞으로 살아가는 생애를 어떻게 하면 가족과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를 철저하게 계산해야 할 뿐이다. 가족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다!’
백작이 되면 그에 상응하는 힘과 능력을 보여줄 것이다. 잘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자기최면을 거는 가르딘이었다.
기사단에서는 백작 수여에 대한 일로 인해 떠들썩했다. 가르딘이 가는 곳마다 축하한다는 말들이 이어졌다. 검의 절대 경지를 개척한 마스터급 기사가 되었으니 기사들의 존경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필리언과, 유타, 갈라가 앞에 서서 격려와 함께 부탁을 했다.
“잘해라!”
“걱정 마라!”
“잘해서 좋은 영지를 받아야 되는 것 알지.”
“위에서 어련히 잘 해주겠냐? 내 실력과 인망이 두루 퍼졌을 테니 잘될 거다!”
같이 잘 해보자는 취지였다.
좋은 영지를 받게 되면 가서 편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동기들이었다. 가르딘의 백작위보다 뒤에 이어 지는 빵 고물에 더욱더 관심이 있는 녀석들이었다. 이래서 녀석들이 좋다.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다.
가르딘이 보기에 절대로 마스터급 기사에게 후진 영지를 주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사실 그것이 보편적인 생각이기는 했다. 누가 마스터급 기사를 홀대하겠는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말이다.
-작위 수여식.
황제를 비롯한 공작들, 그리고 후작까지 모여들었다. 자질 구례한 귀족들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거창하게 열린 작위 수여식이었다. 황제가 직접 가르딘과 스필언, 미토스에게 작위를 수여하는 식이 거행되었다.
작위 수여식이지만 식이라는 형식을 띠기에 처음부터 차례로 진행이 되었다. 지루한 연설과 제국에 대한 충성 등과 같은 형식적인 말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제국의 국가가 제창되어졌고 황제 폐하의 훈화 말씀이 이어서 진행되었다.
“이어서 그대들이 제국의 자랑스러운 귀족이 되었음을 선언하는 바이다.”
가르딘은 백작이 되었으며, 스필언과 미토스는 각각 자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많은 귀족들이 보이는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순조롭군.’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배경이 없는 가르딘이었기에 트집을 잡을 줄 알았건만 무난하게 넘어갔다. 이제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순서였다.
스필언과 미토스의 경우 영지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줄 생각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에 반해 가르딘은 백작위를 받았기에 영지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떤 영지를 줄 것인가! 제발 편안하고, 좋은 영지를 주시옵소서!’
주신 라이니언에게 간청을 올리는 가르딘이었다.
황제의 말 한 마디에 가르딘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황제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르딘 카이로스에게 제국의 중요한 영지 중에 하나 인...”
‘오오! 중요하다고 좋았어!’
아직 다 듣지 않았지만 중요하다는 말에 다소 안심한 가르딘이었다.
“제국의 곡창지대인 발키리 영지의 영주로 임명하는 바이다.”
발키리 영지라는 말에 알고 있는 귀족들이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발키리 영지는 변방에 위치해 있으면서 다크랜드와 인접한 무시무시한 곳이다.
가르딘도 즉시 귀족들의 표정을 살폈다.
‘이거 뭐야? 꼭 뱉어버린 침을 다시 삼기는 기분일세!’
가르딘은 머릿속으로 영지도감의 글귀를 떠올렸다. 발키리 영지를 한번 지나가는 식으로 살펴본 기억을 재생시킨 것이다.
-발키리 영지.
-제국의 3대 식량보고 중에 하나.
-후작급 이상의 넓은 영지.
여기까지는 너무 좋았다. 무엇 하나 불편하고, 어려운 점이 없다. 이미 잘 운영이 되는 영지에다가 넓기까지 했다. 또한 외곽에 위치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중앙에 위치할 수 없다면 차라리 밖으로 빠지는 것이 괜찮은 방법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다음에 이어지는 글귀에 얼굴이 일그러질 뻔했다.
-다크랜드 접경지역.
-다양한 몬스터와 마수를 경험할 수 있는 체험장.
가르딘은 순간적으로 핼쑥해졌다.
하필이면 제국에서 가장 불안정한 영지 중에 하나로 선택이 되었다. 이번에 도노반 자작이 죽은 장소이기도 했다.
‘이런 제길!’
몬스터와 마수가 우글거리는 지역으로 가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가르딘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되물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황제가 말을 해버렸으니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더불어서 가르딘은 감사하다는 말까지 해야 했다. 황제가 작위와 영지를 하사했는데,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안 가! 내가 왜 거길 가! 너 같으면 가겠냐! 니미럴!
“황제 폐하의 은혜를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더불어서 제국의 검으로서 충성을 맹세합니다!”
개떡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입에서는 저절로 미사어구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속은 시커멓게 타 들어갔다. 날벼락을 맞은 가르딘은 얼이 빠진 채로 수여식을 모두 마치게 되었다.
수여식을 마치자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 축하한다는 말과 더불어 격려를 했다.
“조금만 기다리게, 다시 불러주겠네.”
“최선을 다해서 영지를 발전시켜 보게.”
“감사합니다. 공작님.”
가르딘은 그들의 말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발키리 영지에 대한 일로 공황상태에 접어들어 다시 정신 차리려면 시간이 필요한 상태였다.
가르딘이 지나가는데 네벨리언 공작이 모습을 보였다.
“축하하네, 내 외손자가 무척이나 기뻐할 걸세.”
‘응?’
네벨리언 공작의 의미심장한 웃음에 상황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되었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져 피똥을 싸게 된 가르딘이었다.
‘두...고 보자!’
가르딘의 속은 그다지 넓은 편이 아니다. 파리가 날아 들어와서 간신히 헤엄칠 수 있을 넓이 정도였다. 속에 쌓아두고 나중에는 꼭 갚아주겠다는 가르딘이었다. 이 모든 것이 네벨리언 공작의 계략이라고 여겨졌다. 황제와 바이멘 후작 때문이라는 생각은 물 건너간 상태였다.
가르딘이 대전을 나와 필리언, 유타, 갈라에게 갔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자 가르딘이 짐짓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필리언이 궁금한지 먼저 물었다.
“어떻게 됐어?”
“발키리 영지야.”
잠시 생각을 한 필리언과, 유타, 갈라가 그 즉시 돌아서서 제 갈 길로 가려고 했다. 다시는 가르딘과 상종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 것으로 보였다. 그러자 잽싸게 방향을 차단하는 가르딘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
“우리가 아는 사이였던가.”
“할 일이 있어서 그러니 비켜주게.”
“기사단에 두고 온 게 있어서 빨리 가봐야 하네 어서 비키게.”
몬스터와 마수로 인해 골치를 썩고 있는 변방 영지로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동기들이었다. 가르딘이 사정조로 부탁을 했다.
“정말 이러기야, 며칠 전에 같이 하기로 했잖아!”
“며칠 전은 술 먹고 한 얘기고 지금은 평생이라는 단서가 붙잖아.”
“지금부터 영지를 방어하려면 준비해야 하니 자네도 바쁠 것 아닌가, 어서 가보게!”
“호오!”
가르딘은 끝까지 변치 않겠다는 우정의 맹세를 한순간에 찢어발기는 녀석들의 만행에 단죄의 철퇴를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꼭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가르딘이 주머니 속에 숨겨진 종이를 꺼냈다. 종이를 꺼내서 필리언과 유타, 갈라의 시야에 들어오도록 했다.
무언가 하는 심정에 본 필리언, 유타, 갈라의 표정이 똥 씹은 것처럼 변했다.
귀족서약을 한 종이였다. 그 아래 자신들의 필적까지 써져 있었다. 위에 내용을 읽어 내려갈수록 빼도 박도 못하게 된 상황이 되었다.
“그...건!”
“어...떻게?”
“이...럴 수가!”
“너희들이 안 가면 이걸 만천하에 공개해 버릴 테다.”
무지막지한 협박이었다.
귀족의 서약까지 한 약속을 위반하게 되면 귀족으로서의 체면이 바닥으로 처박히게 된다. 귀족으로서의 권한은 유지 되겠지만 손상된 품위와 명예, 그리고 위신의 상처까지 고스란히 간직해야 한다. 귀족에게 가장 무서운 협박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르딘... 친구끼리 농담한 걸 가지고 왜 그러냐!”
“맞아, 언제 안 간다고 했냐!”
“나도 가고 싶어 했다고!”
차라리 따라가는 것이 나았다. 가르딘이 가지고 있는 귀족 서약이 유출되면 가문의 위신까지 떨어뜨리는 일이 되어버린다.
필리언, 유타, 갈라도 치사한 녀석들이었지만 가르딘의 치사함에는 따라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