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93)

   @@[제3장 꼬여가는 상황@@]

 흑! 흑! 흑!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쉴라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부모님과 헤어질 때까지도 소녀는 당당했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고작 16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가 부모와 떨어져서 볼 수 없게 됐는데 멀쩡할 수는 없었다.

 쉴라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가르딘과 아이시런을 따르고 있었다.

 너무 서럽게 울자 보다 못한 아이시런이 가르딘에게 눈짓을 보냈다.

 ‘응?’

 눈짓을 받은 가르딘은 ‘왜?’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평소라면 눈치 백단인 가르딘이 모를 리 없지만 상황이 난처했다. 우는 여자아이를 달래라는 말이 되는데, 그게 쉬운 일인가! 전쟁에 나가 싸우는 일보다 더 하기 싫은 일이기에 일부러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지만 상대는 집요하기 그지없는 아이시런이었다.

 눈짓이 안 되자 이번에는 더 강력한 일격을 가했다.

 “지금 여자가 우는데, 뭐 하는 거예요? 그러고도 기사인가요! 여태까지 그렇게 안 봤는데, 가르딘 경은 제게 찍히고 싶은가 보내요.”

  찍힌다.

 그것도 공주에게 찍힌다.

 ‘윽!’

 드워프 중에서도 최고의 장인이 만들어 놓은 신검에 찔리는 충격을 받은 가르딘이 심장을 움켜쥐며 휘청거렸다. 공주에게 잘 보이려고 그동안 노력한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가르딘의 표정이 똥 씹은 것처럼 변했다.

 ‘빌어먹을, 구하라고 했으면, 책임은 자기가 지는 게 상식 아니야! 내가 획기적인 방법까지 생각해 냈는데, 나의 공을 이런 식으로 무시하다니!’

 인신매매범이라는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한 방법을 생각한 공을 인정해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더 강력한 공격이 올 것 같아 입을 닫았다. 가르딘이 아이시런 공주의 등쌀에 못 이겨 마지못해 쉴라에게 다가갔다.

 갈 길을 멈추고 돌아서는 가르딘의 모습에 쉴라가 흠칫했다.

 아직 가르딘과 아이시런 공주의 정체를 모르는 쉴라로서는 두려움과 무서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쉴라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과를 했다. 어리지만 야무진 면도 있었다. 그런 쉴라의 모습을 바라보는 가르딘은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그저 짜증이 났을 뿐이었다.

 ‘어떻게 위로해 줘야 잘했다고 칭찬 받을까?’

 “힘드냐?”

 “예? 그게 무슨?”

 쉴라는 갑작스러운 말을 당황했다. 그렇지만 가르딘의 다음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과 헤어지고 울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마음껏 우는 것도 도움이 된다.”

 “고마워요.”

 “하지만ㄴ 운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적당히 해라! 네게 용기가 될지 모르지만 내 얘기를 해주마!”

 가르딘은 아주 진한 표정으로 정색하며 말을 했다. 진지한 모습에 쉴라도 동조가 되었다. 가르딘의 눈동자는 어떠한 사심도 없었다. 그것을 봤기에 가르딘을 따른 것이다.

 쉴라는 다른 것도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은 확실했다. 어린 시절부터 악의와 선의에 대해서는 알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나도 15살에 가출했다.”

 “예? 가출이요.”

 잘 나가다가 뜬금없이 말이 이어지자 쉴라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렇게 어엿하게 잘 자란 중년인이 되었다. 그리고 대륙제일의 미인과, 대륙에서 두 번째로 아름다운 딸을 낳고 살고 있다. 세상 누구보다 해이복하게 살고 있다는 말이다. 어떠냐? 용기가 팍팍 솟지 않느냐!”

 “용기...가 솟...내요!”

 가르딘은 어렸을 때 가출했지만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말을 한 것이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사람 이상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어느새 울음을 그쳤다. 쉴라는 가르딘이 제정신인가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시런은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어떻게 저따위 말을 정색을 하며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자화자찬으로 이어지는 가르딘의 쉼 없는 말을 아이시런 공주가 빠르게 잘랐다. 계속 말했다가는 자신까지 이상한 취급 받을 것 같았다. 벌써부터 쉴라의 표정이 당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아이시런 공주가 가르딘의 팔을 잡고 끌었다.

 아름다운 공주가 손을 잡아주었다는 것은 느끼지 못했다. 가르딘은 갑작스러운 공주의 행동에 의아할 뿐이다.

 “지금 그게 위로라고 한 거예요?”

 “이것보다 더 좋은 위로가 어딨습니까? 어린 나이에 가출하고서 이만큼 성공한 사람 있으면 한번 데리고 와 보십시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까!”

 가르딘이 어깨를 으슥하며 말하자 아이시런 공주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아이시런은 살면서 이런 꼴 때리는 상황을 겪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가르딘이 다시 정색하며 물었다. 

 “우선은 공주님의 환영아이템을 쉴라에게 주십시오, 놈들이 이목을 벗어나기 위해서 변장이 필요할 테니까 말입니다.”

 “알았어요.”

 “그리고 당분간 외출은 못합니다.”

 “왜요?”

 자유로운 외출이 보장되는 여행을 즐기려는 아이시런이었다.

 가르딘은 쉴라를 구하면서 공주의 단속을 위한 핑계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 도둑길드의 정보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환영아이템을 쉴라가 착용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공주는 자유롭게 밖을 구경할 수 없게 된다.

 그럼 경계, 보호를 해야 하는 가르딘에게 위험한 상황이 줄어들게 된다.

 어차피 할 일이라면 일석이조를 노리는 가르딘이었다.

 “만약 도둑길드가 쉴라를 발견할 경우, 기사단 전체가 도둑길드의 공격을 받아야 합니다. 놈들이 제국의 기사라고 해도 못할 것이라고 하면 오산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기사들이 죽어나갈 수 있습니다. 공주님의 행동 하나에 기사들의 목숨이 걸려 있습니다. 이래도 외출하시겠습니까!”

 아이시런은 가르딘의 말을 듣고 나자 수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자신이 자유롭고 싶다지만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놀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실 가르딘의 말은 조금 무리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아무리 어둠의 길드에 속하는 도둑길드가 무섭다고 하지만 대륙 최강국의 피닉스기사단을 상대로 도발할 수는 없다. 감히 공주의 행차를 방해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어차피 도둑길드 놈들도 이익집단이었다. 제국과 싸움을 해서 좋은 꼴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할 것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시런에게 거짓말과 진실을 섞어서 아무렇지 않게 사실처럼 말을 하고 있는 가르딘이었다. 거짓을 말해도 사실처럼 사실을 말해도 사실처럼 가르딘의 철저한 말장남에 놀아나고 있는 아이시런 공주였다.

 사람이 한 명 늘은 상태에서 파스트론 공작성의 앞에까지 오게 되었다. 공작성의 높은 담벼락을 앞에 두고 가르딘과 아이시런, 쉴라가 서 있었다.

 쉴라는 왜 이곳까지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가르딘과 아이시런의 정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먼저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정체를 숨기려는 자에게 함부로 캐묻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쉴라였다. 가르딘이 아이시런 공주에게 속삭였다.

 “공주님, 이제는 정체를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공작성에 들어가면 쉴라도 알아야 하는 것이니 미리 말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아이시런은 기운이 없었다.

 불쌍한 백성을 위해 나선 것이지만 그로 인해 자신은 불이익을 당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매몰차게 고개를 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공주도 알고 있었다.

 선택을 했으면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말이다.

 “공주님이시라고요!”

 가르딘의 말을 듣고 난 쉴라는 가슴이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설마 했는데, 아이시런과 가르딘의 정체가 그녀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녀는 즉시 바닥에 이마를 대고, 공주님에게 절을 했다.

 “평민, 쉴라가 공주님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평민들에게 공주는 하늘보다 높은 존재였다. 공주의 말 한마다면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만 일어나라.”

 “하지만 어찌 제가 감히!”

 “이제부터 내가 너를 고용하는 것이니 앞으로 일은 걱정하지 마라.”

 쉴라는 너무 황송했다.

 공주가 자신을 돌봐준다고 말을 하자 그 어떤 말보다 안심이 되었다.

 가르딘은 그 옆에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구한 것은 난데, 엄한 데서 감사하고 있어!’

 쉴라는 공주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나서 옆에 있는 가르딘에게도 인사를 했다.

 “가르딘 기사님, 정말 고마워요!”

 “흠, 그래, 항상 그 마음을 간직하고 있어라.”

 다음에 보답하라는 속뜻이 담겨 있었다. 제일 좋은 보답은 돈이었다. 나중에 브리안의 학비에 보태고 싶었다.

 “그럼, 이제 공작성으로 들어가죠.”

 가르딘이 양옆으로 아이시런과 쉴라를 들었다. 두 명을 들고 나서 6미터나 되는 담벼락을 가볍게 넘었다. 아이시런은 역시나 이상하게 생각했다. 홀로 안고 넘을 때나 둘을 안고 넘을 때가 차이가 없었다.

 오러 익스퍼트 상급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로 대단할 것 같지는 않았다.

 쉴라 역시 놀라고 있었다. 이상한 아저씨라고 생각했건만 그 실력만큼은 이상하지 않았다.

 덜! 덜! 덜!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내 앞에서 심각하게 망가진 산토스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또한 한쪽 팔은 덜렁거리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는 고통보다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의자에 앉아서 고민을 하던 사내는 바로 루벤 영지 내 도둑길드 지부장인 고든이었다. 이곳 영지 내 도둑길드를 관리 감독하는 인물이었다.

 지부장이라고 하지만 단체를 다스리는 역할을 하기에 그 위치가 높은 것은 당연했다. 산토스는 고든 직속수하 10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악랄한 손숙과, 간계, 돈을 늘리는 능력 어느 것 하나 못하지 않는 녀석이기에 믿고 있었던 고든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실패를 했다.

 확실히 특이한 사항이었다. 루벤 영지 내에서 활동하면서 도둑길드를 건드리는 놈들은 없었다. 아무리 귀족들이 대단해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다들 도둑길드를 두려워한다. 두려움은 강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강함에 실해는 존재해서는 안 되었다. 고든은 산토스의 보고를 들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갑작스럽게 나타난 놈이었습니다. 스스로 인신매매범이라고 하면서 저를 비롯한 우리아이들을 모두 쓰러뜨렸습니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소리냐?”

 도둑길드가 존재하는 곳에서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놈들은 모두 잡아들이는 것이 관례였다. 함부로 활동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하물며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 갑작스럽게 발생했다. 고든은 책상 아래 적혀진 보고서를 보았다. 

 산토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조사를 해보았다.

 -산토스를 비롯한 도둑길드원 10명이 모두 쓰러짐.

 -모두 반병신이 되어버렸고,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상태.

 -10명을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면, 최소 A급 용병 정도의 실력자로 생각이 됨.

 -신원 불명.

 -주변을 모두 수색했지만 찾아내지 못했음.

 고든은 또다시 아리송했다. 루벤 영지 내에서 활동하는 도둑길드의 조직원들을 모두 동원해서 알아낸 정보라고 하기 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반나절이면 모든 정보를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다고 자부했건만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하늘 아래 태어난 존재에게는 흔적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증발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계집을 한 명 데리고 있었다.

 눈에 띄게 아름답고 어린 계집이었다.

 “혼자라면 모르겠는데 계집을 데리고 사라졌다라!”

 상황은 여러 가지가 나올 수 있었다. 인신매매범이라는 것도 이상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실력자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다니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라엘, 너의 생각을 어떠냐?”

 “루벤 영지에서 우리의 이목을 이렇게 쉽게 피할 수는 없습니다. 상당한 신분을 가진 자라고 생각이 됩니다.”

 라엘은 길드 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상당한 신분을 가진 자가 인신매매범을 사칭한다라, 그거 정말 우습군! 아니 날 우습게 만들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알겠지!”

 “물론입니다.”

 고든은 쉽게 흥분하지 않으며 냉정한 위인이었다. 그리고 잔인했다. 

 당한만큼 아니, 그보다 잔인하게 보복하는 인물이었다.

 “정보력을 모두 동원해서 놈을 찾아내, 그리고 잡아와라!”

 “알겠습니다. 지부장님!”

 고든은 이미 놈을 잡아 갈기갈지 찢어발기는 상황을 생각했다.

 라엘이 나가고 나자 고든이 안절부절못하는 산토스를 바라보았다.

 움찔!

 산토스는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냉정한 칼을 담고 있는 고든의 눈동자는 시리도록 무서웠다.

 “살...려, 주십시오!”

 “살고 싶으냐?”산토스는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자신을 위해서 무슨 짓도 서슴없이 하는 성격이다. 그런 성격을 가진 산토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건 바로 바신의 목숨이었다.

 “살려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야.”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산토스는 필사적이었다.

 고든은 살려고 바동거리는 인생들을 모두 보아왔다. 그리고 그들의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며, 차근차근 죽음의 그림자를 선사해 주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마지막까지 구차하고, 비굴한 모습을 지켜볼수록 자신도 모르게 희열감이 뇌리를 지배했다.

 “돌아가서 상처를 치료해라.”

 “감...사합니다.”

 마지막 빛을 발하는 별은 타기 직전까지 화나게 빛을 발한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남겨진 것은 먼지뿐이다. 고든의 방을 나선 산토스는 머리가 복잡했다. 지금 당장은 살았지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바늘방석이었다.

 지부장의 바로 아래에서 수십 년을 생활해 온 산토스였다.

 고든이 산토스를 아는 것처럼 산토스 역시도 고든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언제고 나는 소모품이 된다. 그전에 대책을 세워야 돼!’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도둑길드의 정보망에서 어떻게 도망을 가겠는가! 어떻게 해서든 뒤통수를 칠 생각을 가지게 된 산토스였다.

 어차피 도둑이었다.

 의리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물고 물리는 약육강식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침이 밝아 오는 시간이었다.

 동이 트는 시간에 주인은 한가하지만 시녀들은 바쁘다.

 조인이 필요한 것을 마련하고, 아침식사와 옷, 세안 모든 것을 구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필요한 시기에 가장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주인이 조금의 불편함도 없이 편안하게 하루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었다.

 시녀초보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침이 필요하다. 시녀들의 일에 무슨 가르침이냐고 하겠지만 실상 그 일은 해보지 않고서는 어려움을 알 수 없다. 아이시런 공주의 전속시녀장인 엘리언은 새로 들어온 쉴라를 가르치고 있었다.

 사내들의 서열과 마찬가지로 여자들의 서열도 확고하다. 아니 더 치열하고, 군기가 가득 차 있다고 보는 것이 정답이었다. 쉴라도 처음에는 하루 정도 휴식을 취했다.

 아이시런 공주는 다른 사람은 다 제쳐두고, 유일하게 엘리언만은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녀에게 쉴라의 교육을 맡겼다.

 아이시런의 쉴라를 특별하게 대우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만 특권을 준다는 것 자체가 위계질서를 무너뜨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저 엘리언에게 당부 정도만 해주면,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것이다.

 어제 저녁부터 쉴라는 한눈 한 번 팔지 못하고 교육받았다. 엘리언은 다정한 것 같으면서도 무게감이 잇는 여인이었다. 공주와 있을 때는 공주의 성격에 맞추어 가벼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게 다가 아닌 여인이었다. 상황에 맞추어 대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였다.

 고작 하루 만에 쉴라는 시녀로서의 정신교육이 확고해졌다.

 대단한 엘리언이었다.

 “우리는 공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고, 필요한 것을 보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임무다. 하지만 일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주님이 편안하게 생활하는 것이다. 공주님의 육체적인 편안함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불편함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시녀장님!”

 가르딘은 아침에 아이시런 공주를 보필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가는 길 복도에 엘리언과 쉴라가 보였다. 엘리언은 평소에도 빈틈을 보이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아무 말 없었지만 쉴라 역시도 군기가 들어 보였다. 가르딘은 이채를 띠었다.

 ‘얘가 외 이래?’

 어제 정체를 밝히고 나서부터 어렵게 대하지 말라고 하자 바로 활기 넘디천 쉴라였다. 그런데 고작 반나절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엘리언과 쉴라이 관계를 보던 가르딘은 짐작이 갔다.

 ‘엘리언 그렇게 안 봤는데, 애 갈구는 데 탁월하구나!’

 나중에 허심탄회하게 고참의 비전 갈굼 신공을 토론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엘리언과는 통하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았다. 가르딘이 엘리언에게 물었다.

 “공주님은 준비가 다 되셨나?”“잠시만 기다리세요.”

 엘리언은 공주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먼저 들어가 보았다. 가르딘은 그 잠시간의 시간 동안 쉴라와 얘기를 했다. 어제와는 너무 달라진 쉴라를 보고서 조금 당황되기는 하지만 적응을 잘하는 것 같아서 안심이었다.

 일의 책임은 아이시런에게 있지만 잘못된다면 그 뒷감당은 가르딘이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군기가 확 들었는데.”

 “놀리지 말아요! 아저씨!”

 “윽!”

 어제 초조해하면서 불안해하기에, 그냥 편하게 부르라고 했더니 바로 ‘아저씨’라는 말이 나왔다. 쉴라의 입장에서 가르딘과의 신분 차이는 엄연히 존재했다. 그럼에도 쉴라가 그처럼 말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쉴라야, 아무리 아저씨가 맞다고 해도, 듣는 아저씨는 오빠라는 소리가 듣고 싶구나! 어서 해보렴, 가르딘 오빠라고!”

 사실 가르딘은 귀족의 권위를 내세우고 싶은 마음 따위는 어렸을 때 버렸다. 작금의 신분적 차이를 부순다는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존재라고 보지는 않았다.

 태어나면서 가지는 신분은 하늘이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건 순전히 운이다. 그저 부모님이 황족, 왕족, 귀족이라서 태어난 자식들도 귀족인 것일 뿐이다.

 그래서 가르딘이 평민인 라이나하고 결혼하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귀족이라는 허울 좋은 감투를 쓰고, 거만하게 행동했다면 라이나와 혼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자신의 사상을 함부로 발설하지는 않는다. 그건 너무 위험했다. 모든 귀족들의 합공을 받고, 사지가 잘려나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무튼 가르든은 젊은 오빠 소리를 득고 싶었다.

 그래서 쉴라에게 편하게 대하라고 했건만 기대는 다시 한번 박살이 났다.

 “어떻게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오빠라고 해요!”

 “헛!”

 쉴라의 아버지인 마커스의 나이가 36살이었다. 그럼 가르딘보다는 2살이나 어리다는 소리다. 

 ‘제기랄! 그때 본 마터스는 적어도 나보다 10살은 많겠다!’

 쉴라를 구할 당시 마커스의 얼굴을 40살은 넘어 보였다. 그런데 실제 나이가 36살밖에 안 된 것이다.

 ‘그놈은 왜 그렇게 겉늙은 거야!’

 그건 그렇다 치고 좀 전까지 군기 가득한 쉴라의 말투가 변해 있었다. 어제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는 말은 자신한테는 잘 보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 아닌가!

 엘리언은 눈치를 보면서 정작 자신은 지나가는 개만도 못하다는 괘씸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허! 이런 맹랑한 놈을 봤나! 이제 볼짱 다 봤다 이거지!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라고 하더니, 그게 맞는 말이었구나!’

 따끔한 일침을 가하려고 할 때였다.

 “이놈아! 아무리 내가 편해도 그렇지, 너 그러는 거 아니다!”

 언성이 조금 높아지고 있었다.

 그 소리가 복도를 타고 흘러가는데, 아이시런 공주가 방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상황이 되었다. 인상을 쓰는 가르딘과 그 앞으로 겁먹은 듯 서 있는 쉴라!

 쉴라의 눈망울이 울먹거렸다.

 “가그딘 경! 또 얘를 울리는 거예요!”

 아이시런의 도발적인 말이 가르딘의 귓속으로 들어왔다. 가르딘은 조금 황당했다.

 ‘내가 언제 울렸었나! 왜 또 라는 말을 하는 거야!’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말을 하는 아이시런과 자신의 앞에서 군기 잡힌 채로 떨고 있는 쉴라로 인해 상황은 가르딘에게 극도로 불리했다. 이러다간 애를 괴롭히는 몹쓸 놈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 순간 가르딘은 쉴라에게 당했다는 것을 감지했다.

 아이시런은 보지 못하게 가린 상태에서 가르딘을 향해 혀를 내미는 쉴라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여우! 그래도 귀엽긴 하네!’

 쉴라는 정말 귀엽고 예뻤다. 비록 얼굴 변환 환영아이템으로 가려지긴 했지만 가르딘의 눈에는 그녀의 진실된 모습이 보였다. 그랜드 마스터의 실력쯤 되면 이 정도는 별것 아닌 능력이었다. 아이시런은 약간 시무룩해 있는 상황이었다.

 쉴라를 구한 것은 좋았지만 이후 자신은 밖에 외출을 하지 못할지 몰랐다. 그게 너무 아쉬웠다. 가르딘은 오늘 일정을 아이시런 공주에게 설명했다. 어차피 오늘이 루벤 영지에서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내일이면 다음 여정을 위해 움직여야 했다.

 “오늘의 일정은 간단합니다. 카스티온 백작과의 아침식사후에는 자유시간입니다. 그리고 저녁때 공주님을 위한 파티가 있을 예정입니다. 변경하실 내용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이시런은 공주였다. 

 일정이 있다고 하지만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없어요, 대신 자유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게 뭐예요?”

 “공작가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밖은 못 나가나요?”

 “그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알았어요. 가요!”

 실망한 아이시런이었지만 카스티온 백작과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한시도 품위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자 가르딘은 아이시런 공주의 대단함을 느꼈다.

 싫은데도 내색하지 않은 삶을 평생 동안 살고 있는 것에 말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녀이 외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해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말이었다. 공주의 즐거움을 위해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었다.

 가르딘은 공주를 오휘하면서 돌아가는 동안 뜬금없는 말을 들었다.

 “기사들의 검술을 보고 싶다고요?”

 “그래요, 자유 시간 동안 한 번 보고 싶네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가르딘의 공주의 부탁이 무리한 것이 아니기에 즉시 기사들을 불렀다. 고참들과 더불어서 신참들을 카스티온 백작가 연무장으로 모이게 했다. 공주가 지켜본다는 말에 기사들은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기사들에게 아이시런 공주는 여신이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싶지 않은 기사는 없을 것이다. 단, 가르딘은 예외였다. 이미 임자가 있는 자신에게 아이시런 공주는 지켜야 할 애물단지 정도일 뿐이기 때문이다. 가르딘은 기사들을 보면서 혀를 찼다.

 ‘이놈들아, 공주는 그저 재미를 위해 부른거야, 한마다리ㅗ 우리들은 광대라는 소리지!’

 광대놀이에 끼고 싶지 않은 가르딘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책임자였다. 몇몇 녀석들을 대련시키면 그만이었다. 공주가 가르딘에게 말을 했다.

 “이번에 신참들이 들어왔다면서요, 킹덤나이트를 졸업한 기사의 실력을 보고 싶네요.”

 가르딘은 신참 중에서도 누굴 시킬까 고민하고 있는데, 공주가 직접 신참들 중에 미토스와 스필언을 지목했다. 확실히 눈에 띄게 잘생긴 녀석들이었다. 군중들 한가운데 있다고 해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군계일학이었다.

 “스필언, 미토스 나와서 공주님에게 실력을 보여드려라!”

 척!

 스필언과 미토스가 제식을 갖추며 연무장 중앙으로 나왔다. 그와 동시에 공주에게 기사의 예를 갖추었다.

 “미천한 실력이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이시런도 스필언과 미토스의 말에 호응해 주었다.

 “기대하겠어요.”

 가르딘이 보기에 스필언과 미토스는 절대로 미천한 실력이 아니었다.

 ‘익스퍼트 상급이 미천하면 나머지 기사들 다 칼 물고 자살하라는 소리냐!’

 솔직한 심정으로 가르딘은 미토스와 스필언이 적당히 하기를 바랐다. 이놈들은 신참이지만 실력은 신참이 아니었다. 실력만 놓고 본다면 상위기사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지금까지 미토스와 스필언의 실력을 잘 알지 못한 고참기사들을 생각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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