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신성제국으로 가는 길@@]
황궁에서 나오고 난 후 맨 처음으로 간 영지는 루벤 영지였다. 루벤 영지는 황궁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대륙제일기사 파스트론 공작령에 속해 있었다.
루벤 영지는 파스트론 공작의 확실한 명령체제하에 있는 관계로 가장 번영한 영지 중에 하나였다. 또한 매년 풍년이 들 수 있는 조건과, 몬스터나 마물의 침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에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발달한 영지라고 볼 수 있었다.
루벤 영지로 가는 길은 지루할 정도로 평온했다.
30명의 피닉스기사단과 100명의 정규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덤벼들 수 없는 규모였다. 대규모의 용병들이 덤빈다고 해도 초토화 시킬 수 있는 전력이었다.
루벤 영지로 가는 공주 일행의 편성은 앞으로 정규병 50명과 기사 10명, 뒤로 정규병 50명과 기사 10명, 중앙에 공주의 마차가 위치하며 그 양옆으로 10명의 기사가 지키고 있었다.
가는 길은 어떤 경우에서도 공주를 지킬 수 있도록 포위형태를 유지했다. 공주의 마차를 위해서라면 몸으로라도 방패 역할을 하기 위한 편성이었다.
가르딘이 공주의 바로 옆에서 긴장은 하되, 감각을 날카롭게 곤두세우지는 않았다. 감각은 항상 팽팽하게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 팽팽한 실은 순식간에 잘려나갈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지 대처할 수 있도록 풀어지지 않을 정도로 유지하는게 중요하다.
“스필언!”
“부르셨습니까!”
“지금 앞으로 조금 더 가면 협곡이 나온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병사 19명을 데리고 가서 양 협곡을 철저하게 조사하게, 만일의 사태는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는 거니까!”
“명대로 이행하겠습니다.”
가르딘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웬일인지 모르지만 협곡과 협곡 사이에서 불길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이번 여정에 총책임은 모두 가르딘에게 있었다.
공주에게 불길한 일이 한 점이라도 벌어지게 되면 자신의 목숨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만약에 만약에라도 철저하게 조사하는 게 중요했다.
“가르딘, 너무 조심하는 거 아니냐?”
“아니, 확인하지 않은 협곡이다. 그 위에서 화살이라도 쏘면 우리는 큰일 날 수 있어, 난 되도록, 산행은 자제하고, 협곡은 지나가지 않으려고 했어, 하지만 루벤 영지로 가기 위해서 저 하리탄 협곡을 지나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을 뿐이야!”
가르딘의 정색하는 표정과 진지한 말투에 필리언도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르딘이 정색하며 진지할 때는 필리언은 여러 번 경험할 수 있었다. 가르딘의 예감은 거의가 다 적중했다.
이상하지만 미리 대비한다고 해서 나쁠 것 없었다.
일반적인 기사들이라면 다른 판단을 했을 것이다. 황궁에서 가장 가깝고, 대륙제일의 기사 파스트론 공작의 영지라면 안심하고 지나가려고 했을지 모른다.
양 협곡의 위에서 숨어 있는 정체불명의 인물들은 다가오는 공주 일행을 보다가 정찰을 하러 오는 기사들을 보고 적지 않게 당황을 했다.
‘제법이군, 여기라면 안심하고 있을 것이라는 방심을 유도한 건데.’
공주 일행을 습격하는 데 이곳이 좋을 것 같아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틀어졌다.
어찌되었던 기사들이 올라오게 되었을 때 발견되면 낭패였다. 정면으로 붙으면 양진영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카이로만 제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아야 한다.
“부단장님, 어떻게 할까요?”
“놈들 중에 제법 감이 좋은 놈이 있는 것 같다. 역시 우리의 대적인 피닉스기사단답군, 일단은 모두 후퇴하고, 다음 지점을 노린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협곡 사이를 빠져나갔다. 하나같이 잘 단련되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었다.
루벤 영지로 통하는 하이탄 협곡은 무사히 지나각 되었다.
가르딘은 자신의 감각을 불길하게 만들었던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그랜드 마스터에 이르면서 감각이 보통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전했다. 이성적인 판단과 감성적인 판단은 약간의 착오를 불러일으킨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를 수 없다. 단지 자신의 주관과 객관적 사실의 양방향에서 정 중앙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해야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분명 좋지 않은 예감이 스쳤는데 아니겠지.’
공주는 마차의 창문으로 보이는 가르딘을 보았다.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며, 위험이 있을 시에는 귀찮더라도 미리 세심하게 주의를 주고 있었다. 그의 철저하고 꼼꼼한 모습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내 자랑에 팔불출 같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저런 모습도 있구나!’
아이시런은 요즘 들어 가르딘을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사내로서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만 사내를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하기는 처음이었다.
루벤 영지로 들어가자 영지 내에서 공주의 행차에 대한 환영식이 벌어졌다.
가는 길마다 공주의 마차를 중심으로 2열 종대로 줄을 지어 구경을 했다. 루벤 영지의 장남인 카스티온 백작이 공주를 마중했다. 카스티온 백작은 파스트론 공작의 첫째 아들이었고, 그의 위를 이어 영지를 대리로 관리하고 있었다.
아직 정식 승계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카스티온의 나이가 40살이 다 되어 가는 것을 감안하면 짜증나는 일일 수도 있었다.
루벤 영지의 파스트론 공작성 앞까지 사람들이 늘어서 있는 가운데 공주가 마차에서 내리자 카스티온 백작이 환영인사를 했다.
“공주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고마워요.”
공주가 미소를 지어 보이자 주변 환경이 환해지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공주의 옆으로 가르딘이 카스티온 백작에게 기사의 예를 갖추었다.
“이번 여정의 책임자인 가르딘 오브라이언이라고 합니다. 카스티온 백작님을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나도 반갑네, 공주님의 안전한 여정을 위해 애써주기 바라네.”
가르딘의 눈이 카스티온 백작의 몸을 살폈다.
대륙제일의 기사라고 평가받는 파스트론 공작의 아들치고는 너무 약했다. 이제 막 오러 유저 중급을 갓 넘을 정도였다. 스필언이 익스퍼트 상급이라고 하면 나이 차가 많이 남에도 불구하고 실력 차이가 확연하게 나고 있었다.
‘별종이군.’
스필언도 자신의 형인 카스티온 백작에게 인사를 하고 대기했다. 지금 스필언은 피닉스기사단 기사의 신분으로 온 것이다. 사적으로 형이지만 임무를 맡은 이상 공적인 임무에 충실해야 했다.
카스티온 백작도 임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아는 척만 하고 공주를 수행하였다.
“공주님을 위해 연회를 마련했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카스티온 백작님의 성의를 받겠어요.”
아이시런 공주가 파스트론 공작성으로 들어가고 나자 가르딘은 지시를 내렸다. 병사들은 밖에서 대기하며 휴식을 취하도록 하고, 기사들은 공주를 따라서 경호임무에 충실할 것을 지시했다.
“필리언, 10명씩 조를 정해서 공주님의 방을 호위하고, 나머지는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도록 대기하면서 휴식을 취하도록 해.”
“명대로 하겠다!”
“어쨌든, 사소한 것 하나라도 다 체크해서 문제가 없도록 해. 이번 임무를 생각하면 이성보다는 감이 더 필요할지도 몰라. 알겠지!”
“물론이야.”
루벤 영지에서는 3일 정도 머물 계획이었다. 성인식 여정에서 공주는 영지를 순례하면서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시키는 목적까지도 갖고 있었다.
공주가 방문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영지민들에게는 크나큰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루 안에 떠나는 것은 귀족의 예에서 상당히 무례한 일이기에 기본적으로 3일을 머무는 것이 적당한 예로 통하고 있었다.
물론 아주 바쁜 일이 있을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양해를 구하고 떠나는 것이 서로에게 예의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아이서런 공주가 연회장에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 순간에 집중되었다.
카스티온 백작이 안내를 하고, 그 뒤를 아이시런 공주를 호위하기 위해 가르딘이 주변을 경계했다. 여기서 위험이 있을 리 없지만 강인한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서 임무에 충실한 엘리트기사를 표방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시런 공주님이 나오십니다!”
카스티온 백작의 말에 연회장에 모인 귀족들이 모두 일어섰다. 연회장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서런 공주를 바라보았다.
‘오! 과연!’
‘대륙제일 미인이라는 말이 사실이구나!’
귀족들이라고 해서 모두 공주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보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 연신 감탄성을 터뜨렸다. 이미 봤던 귀족들도 역시나 감탄을 해야 했다. 공주의 외모는 한 번 봤다고 해서 감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분의 환호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이시런 공주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대기를 타고 주변으로 퍼지자 모두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내려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짜증나!’
반면에 실제로 아이시런 공주의 속은 빠듯하게 정해진 일과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명색이 공주였다. 공주로 태어나면서 받은 권리가 있듯이 공주는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체면 깎일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공주로서의 대접을 포기한다는 말과 같았다. 공주가 마음대로 행동한다고 해서 귀족들이 대놓고 불만스러운 말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스스로의 자격조차 지키지 못하는 공주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정해진 일과대로 환영회가 끝이 나고 공주가 방으로 들어갔다. 환영회에서 고품격의 위엄과 우아한 아름다움을 연기하느라 피곤한 공주였다.
그럼에도 아이서런 공주는 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이시런 공주는 가르딘을 방으로 불렀고 비밀 작당을 모의했다.
“가르딘 경!”
“예, 공주님”
“가시의 약속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는데,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가르딘의 속이 말이 아니었다. 공주는 벌써부터 외출을 꿈꾸고 있었다. 영지 첫날부터 수상하고 불길한 감으로 인해 예민한 가르딘이었다.
원래대로 편안한 여행이었다면 외출을 적극적으로 검토해 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니 이번 여정은 공주가 외출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시런 공주는 기사의 약속을 들먹이고 있었다. 기사는 자신의 충심을 맹세한 자에게 목숨을 건다. 그 다음으로 중요시되는 것이 바로 기사의 약속이다.
둘의 비중에서 첫 번째가 가장 크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둘 모두 목숨을 겅어야 한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었다.
공주 앞에서 호언장담을 했으니 그 약속의 무게감이 천근만근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공주의 칼같이 파고 드는 말에 심장이 갈가리 찢겨버릴지도 몰랐다.
가르딘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역시나 보통내기가 아닌 공주였다. 당돌하고 당찬 공주였다.
“오늘은 정말 짜증나는 하루였어요.”
“그렇...습니까!”
“나는 오늘 보통 사람들이 사는 생활을 구경하고 싶어요. 평민들의 삶을 알아야 공주로서의 삶에 충실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평민들의 일상은 그저 그렇습니다. 볼 만한 게 절대 아닙니다.:”
가르딘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위기상황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정작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공주의 물음에 답하는 가르딘의 말도 궁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 성격이에요. 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를 가장 경멸하고 싫어하죠, 그리고 저는 당하고 사는 성격이 아니에요! 받은 만큼 돌려줄 거예요, 아이시런 카이로만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죠!”
움찔!
공주의 풀네임을 걸고 한 약속이었다. 기사의 약속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압력이 가르딘을 짓눌렀다. 말의 무게로만 따지면 드래곤의 본체 몸무게가 내리누르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그랜드 마스터가 되고 이토록 땀이 나보기는 처음이었다.
‘제기랄! 바자바인 부단장이 떠넘길 때부터 하기 싫더라니!’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방법은 찾아서 아이시런 공주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어야 했다. 불만은 천천히 쌓이다가 한 번에 폭발한다. 그때에는 막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울 정도가 될 수 있었다.
어렵더라도 약속을 했으니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공주님, 외출준비를 하십시오, 복장은 이미 구비했으니 그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다만 공주님은 반드시 저의 뜻에 따라주어야 합니다. 물론 안전을 제외한 모든 행동은 자유입니다. 시간은 3시간 정도입니다. 그 안에 돌아보고 오셔야 합니다.”
“물론이에요.”
가르딘은 즉시 필리언을 비롯한 고참기사들의 편성을 재구성했다. 공주의 방 주위의 경계 폭을 조금 넓혔다. 가르딘은 최대한 눈치 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수정을 가했다.
시간 때를 조절하고, 경계 폭은 느슨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경계를 느슨하게 하자 이상하게 여겼지만 경계가 철저하고 안전한 루벤 영지이기에 다들 동의를 했다. 루벤 영지에서까지 철저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신참들과 달리 고참 중에서 가르딘을 잘 아는 필리언은 달랐다.
“무슨 일이야?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긴장하던 놈이 갑자기 이런 식으로 경계를 풀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단 말이야?”
“하긴, 너는 알고 있어야겠지.”
아무도 모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소한 필리언은 알고 있는 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가르딘은 순전히 자기중심적으로 공주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막나가는 공주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니 순진한 자신은 어쩔수 없이 따르는 수ㅤㅂㅏㅆ에 없다고 했다.
이야기의 방향은 가르딘에게만 유리하도록 설명하니 듣는 사람의 오해를 유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한 점의 거짓도 없이 진실만을 말하는 것처럼 태연했다.
술술 말하는 가르딘의 거짓말에 필리언도 넘어가고 있었다. 가르딘을 잘 아는 필리언마저 속일 정도면 다른 사람은 말해 봐야 소용없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편집을 한 가르딘의 말에 필리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공주가 정말 그런 성격이야!”
“쉿! 자칫 이 소문이 밖으로 나가면 너와 내 목은 이거야!”
휙! 휙!
가르딘은 목을 그어 보이며, 입 다물라고 했다. 필리언도 입을 다물고, 가르딘의 말에 집중했다.
“그래도 그렇지 기사의 약속을 강요하다니, 그건 정말 너무 심했다!”
가르딘은 자신이 먼저 잘 보이기 위해서 한 말을 역으로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뻔뻔스럽게 말을 했다. 물론 필리언은 그 말을 사실대로 믿고 있었다. 오랜 시간 같이 한 가르딘이었다. 우격다짐이 많기는 했지만 서로의 신뢰는 분명히 있었다.
사사삭!
병사들과 기사들이 허술하게 지키는 곳을 찾았다. 허술한 곳을 찾은 가르딘은 아이시런을 판 팔로 안은 상태로 담을 넘었다. 도약을 위해서는 다리와 무릎의 힘이 가장 중요하다.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가르딘은 한 번의 도약으로 담벼락을 넘었다. 담벼락을 넘어 착지를 함에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이시런은 뒤돌아서 넘어온 담장의 높이를 보았다. 최소 6미터는 되어 보이는 곳을 혼자도 아닌 자신을 안고 넘을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이 사람 생각보다 뛰어나다.’
알려진 것으로 보면 익스퍼트 상급이라고 하지만 그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기사의 강함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아이시런 공주는 의심이 되기는 하지만 확신을 갖지는 못했다.
아이시런 공주의 외모는 전과는 달리 많이 달라져 있었다. 눈부시게 빛나던 금발머리카락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눈동자와 코, 입술모양이 많이 달라져서 전의 아이시런과는 차이가 있었다.
다만 전체적인 아름다움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이시런 공주 특유의 향과 더불어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몸매로 인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산했다. 누가 보더라도 매력적이었다. 다만 그 옆에서 호위하는 가르딘은 아이시런 공주의 아름다움에 관심 없이 했다.
그녀가 아름답든 말든 그것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미 부인인 라이나에게 빠져 있는 상태였다. 다른 여인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상황대처능력과 경험 면에서 다른 누구보다 뛰어난 가르딘이었지만 여인을 평가하는 문제만큼은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죠?”
여전히 아름답고 청아한 아이시런 공주의 목소리였다. 외모가 변해도 목소리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웠다. 사내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였지만 가르딘의 심금만큼은 아무런 자극도 되지 못했다.
“그걸 왜 제게 묻습니까? 구경 가고 싶은 곳으로 가십시오. 저는 그저 공주님이 가는 길을 지킬 뿐입니다.”
가르딘의 퉁명스러운 말에 아이시런 공주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와 단둘이 나가는 것을 데이트라는 소린데! 피이!’
사내와 단둘이 밖을 돌아다닌 적이 없었던 아이시런 공주였다. 당연히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중년의 기사 가르딘은 설레는 마음은커녕 오히려 짜증내고 있었다. 가르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대로 정신이 박혀 있다고 보아야 했다.
자신은 제국의 공주이고, 가르딘은 일개기사였다. 아무리 생각 없는 놈이라고 해도 공주에게 사적인 감정을 가질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게 일반적이고, 평범한 생각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볼 수 있었다.
반면에 아이시런은 그런 객관적인 의견보다는 감성이 시키는 대로 했으면 하는 이상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가르딘이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 아이시런은 앞으로 나서면서 골탕을 먹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사방이 막힌 세상에서 탁 트인 세상을 보자 마음이 풀리면서 시원해졌다.
항상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주변사람들에게 감시 받는다는 느낌이 사라졌다. 지금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아이시런 공주는 자유를 만끽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루벤 영지는 다른 여타 영지에 비해 발달이 잘된 곳이다. 또한 루벤 영지의 파스트론 공작성 내부에 분수대와 조형물도 제국황실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분수대에는 연인들이 서로의 사랑을 속삭이며, 달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이시런 공주는 그런 그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가르딘도 연인들의 애정행각을 보며 라이나를 생각했다.
‘아! 라이나! 당신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또, 이런 체위도 하고 저런 체위도 해야 하는데, 아! 불타는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한단 말이오!’
아이시런 공주가 가르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면 어이없어 할 것이다.
연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저 달도 따올 수 있다고!
(가르딘생각)- 미친놈, 달이 네놈 주머니 속에 있는 줄 알아!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주론! 당신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어!
(가르딘생각)- 세상 제일은 라이나라고!
아이시런이 연인들의 속삭임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저도 저들처럼 사랑하고 싶네요. 그럴 수 있을까요? 가르딘 경!”
낭만적인 상황, 그 달빛 아래 속삭이는 연인들의 고백, 이 순간만큼은 그들이 너무 부러운 아이시런 공주였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가르딘에게 낯 뜨거운 마을 한 것 같았다. 기대하면 기다린 대답은 그녀의 상상을 산산이 박살냈다.
“없습니다.”
가르딘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공주가 어떻게 평민들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한단 말인가! 공주는 언제나 그랬듯이 정략적인 결혼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제국의 기틀과 기반을 굳건히 하기 위한 도구였다.
슬프지만 현실이고,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꿈틀!
“내가 왜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아이시런의 눈썹이 화난 고양이처럼 올라가 있었다. 신경질이 난 것이다. 가르딘이 성의 없이 보이는 대답에 화가 났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르딘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가르딘의 대답은 날카로운 비수와 같았다.
“제국의 공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여자의 마음을 너무 모르는군요!”
“전, 라이나의 마음만 알면 됩니다. 다른 여인의 마음은 제가 알 필요가 없습니다.”
가르딘은 지금 아이시런 공주의 경호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시런 공주와의 실랑이는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가르딘의 말투가 사무적이고, 딱딱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이시런 공주는 정말 라이나를 한번 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사내의 마음을 이렇게 홀랑 뺏어 버릴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단한 부인과 남편이네! 정말!’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시런 공주는 화가 나자 방향을 정해놓지 않고 발이 가는 대로 걸었다. 그냥 무턱대고 걷자 파스트론 공작성의 외곽까지 나오게 되었다. 루벤 영지가 제국에서 가장 발달했다고 해도 모든 곳이 다 발달한 것은 아니었다.
영지의 외곽은 늘 힘없고, 불쌍한 자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나마 굶어죽지 않는 것이 다행일 수 있었다. 세상은 결코 좋음 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아이시런은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확실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이놈들, 내 딸은 안 된다!”
“이거 왜이래, 돈을 갚지 못했으면서 딴 소리를 하는 거야!”
“원금에 5배나 되는 돈이라니, 그게 말이 되느냐! 네놈들은 사기꾼들이야!”
쥐새끼처럼 생긴 사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내의 반항이 가소로운지 수하들에게 눈치를 주었다. 수하들이 집으로 들어가더니 아직 16살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녀를 끌어내고 있었다. 그걸 만류하던 여인을 밀쳐버리고,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쥐새끼처럼 생긴 사내의 이름은 산토스라고 불리고 있었다. 루벤 영지 내에서 고리대금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사내가 실질적인 고리대업의 주인은 아니었다.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행동을 할 뿐이다.
“안 된다, 원금에 10퍼센트가 이자였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제 와서 이렇게 하다니 네놈들은 사람도 아니다!”
“무슨 소리야, 원금의 반이 이자고, 이자를 합쳐서 다시 원금이 된다고 여기 계약서상에 나와 있잖아!”
마커스는 서류를 보자 몸을 부들거리며 떨었다. 서류에 적인 내용은 그가 알던 계약서와는 달랐다. 위조가 되었음이 분명했지만 놈들의 수법이 하도 교묘해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딸이 아프기에 어쩔 수 없이 돈을 빌렸는데, 오히려 그 일로 인해 딸을 빼앗겨야 하는 상황이 왔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공작령이 신고할 테다!”
“어디 해보쇼, 그래봤자 당신만 손해야! 우릴 귀찮게 하면 당신 딸뿐만 아니라 당신 아내까지 위험할 텐데 말이야!”
뿌드드득!
“악마 같은 놈들! 내 딸을 놔라!”
“이 새끼가 안 되겠구먼! 좋은 말로 하는데, 끝까지 짜증나게 하네, 애들아 적당히 조져줘라!”
“예, 형님!”
산토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5명의 사내들이 마커스를 집단으로 구타했다. 말리려고 했던 그의 부인마저도 같이 무자비하게 때렸다. 사람들이 할 짓이 아니었다. 원래 고리대금업을 주로 하는 자는 인정이 없다. 인정이 있다면 악덕 고리대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모두 본 아이시런은 분노로 인해 눈이 충혈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람이라면 저런 것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녀가 즉시 가르딘을 돌아보았다.
“가르딘 경!”
“예, 공주님.”
“지금 모습 다 봤죠, 어서 저 가족을 구해주세요!”
공주는 인간쓰레기들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사명감을 불태운 반면에 가르딘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안 됩니다.”
그 말에 공주의 눈이 쌍심지가 되어버렸다. 좀 전에 화가 난 것은 그저 기분 풀이 정도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진짜로 화가 났다. 어떻게 기사가 약한 백성을 놔두고 구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건 기사로서 문제가 있는 행동이었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저 사람들이 불쌍하지도 않단 말인가! 당신은 기사예요, 기사는 약자를 보호하고, 제국을 수호하는 게 임무 아닌가요!”
“공주님의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상황 나름입니다. 지금 제가 저들을 도와준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도와줘도 소용없다는 말에 아이서런 공주가 되물었다.
“지금 저놈들 오른팔에 달그림자와 더불어 손 그림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게 무얼 의미하는 줄아십니끼!:
“뭘 의미하는데요?”
“바로 어둠의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도둑길드라는 뜻입니다.”
“도둑길드가 뭔데, 그런 소리를 하죠!”
카이로만 제국의 황성 내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아이시런 공주가 대륙의 어두운 면인 어둠의 길드를 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알지 못하는 일에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가르딘은 처음부터 차근히 설명을 해야했다.
파스트론 공작령의 루벤 영지는 치안이 가장 좋은 영지였다. 함부로 도둑질을 하거나 범죄행위를 할 경우 공작령의 기사들이나 병사들에게 잡혀 들어가서 처형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도둑길드는 도둑길드라는 형식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형식으로 영지 내에 자리 잡았다.
영지 내에 자리 잡아야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어둠의 길드는 어쌔신 길드와 도둑길드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곳이다. 어둠의 길드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이 정보력이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영지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 영지 내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고리대업이라는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어둠의 길드도 다양한 형태로 사회에 스며들어 있었다.
“어움의 길드는 무서운 곳입니다.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 수만 해도 대륙전체로 놓고 보면 30만이 넘는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암살자들만 해도 10만에 달합니다. 그런 위험한 조직을 건드리라는 소리입니다. 제가 나서서 저 가족을 구한다고 해도 우리가 언제까지 저들을 막아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놈들은 집요하고 잔인합니다. 한 번 건드리면 기필코 그 원인을 제거하려고 무수한 함정과 암계, 암수를 씁니다. 제가 구해도 저 가족은 어둠의 길드에 의해 더 큰 고통을 당할 겁니다.”
어둠의 길드에서 행하는 보복은 상상을 초월한다. 일단 건드리면 앞뒤사정 보지 않고 복수하는 것이 그들의 특성이었다. 일단 약세가 보이면 어둠의 길드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특성 때문이기도 했다.
가르딘의 설명을 들은 아이시런 공주는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가르딘의 설명대로라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현실과 이성 사이에서 고민한 공주는 결정을 내렸다.
아이시런 공주는 가르딘의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일이 어떻게 되든 저 불쌍한 가족을 구하고 싶었다.
“힘이 세다고 포기하는 게 기사인가요, 당신은 비겁해요!”
“비겁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만약 공주님의 제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공주님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가장 최우선으로 이루어져야합니다. 하물며 위험을 자초하는 행위를 해서 공주님의 안전에 위기가 생기면, 그건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제국 자체에 위험을 초래하는 일입니다.”
가르딘은 제국이 위험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자신의 가족과 행복이 우선이지만 말은 다르게 나왔다. 제국과 제국민의 안위를 위험하게 한다고 장황하게 말을 했다.
현실을 안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해야 하건만 공주의 결심은 확고했다.
“조들을 구하세요, 이건 공주로서의 명령이에요!”
‘끄응!’
가르딘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공주가 저런 식으로 막무가내면 솔직히 방법은 없다. 지금도 공주에게 안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하물며 명령까지 어기면 절대 그냥 넘어갈 공주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명령에는 따르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가르딘이었다.
그런데 한숨이 나왔다. 공주가 세상에 나와서 저런 모습만 보면 모두 구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야 무슨 고생이 되겠는가! 일을 실질적으로 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제기랄! 이래서 하기 싫더라니! 어쩔 수 없고, 어떻게 구해야 좋을까!’
가르딘은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기사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은 정말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적당한 핑곗거리를 생각해 내서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민을 한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방법을 구하자 아이시런 공주에게 말을 했다.
“공주님, 저기 끌려가는 아이를 시녀로 쓸 수 있습니까?”
“시녀라니요! 무슨 소리죠?”
“공주님이 허락하면 소녀를 구하고, 저 가정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가르딘은 확정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확률을 따졌을 뿐이다.아이시런 공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허락을 했다.
“허락할게요.”
“그럼 한번 구해보겠습니다.”
가르딘은 그 말을 하고 소매 속에 준비한 두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두건이라고 해봤자 손수건 대신으로 사용하려고 한 것이다. 라이나가 손수 만들어준 손수건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슴 아플 뿐이다.
산토스는 인정사정없었다.
솔직히 마커스에게 돈을 빌려주고 나서 갚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마커스의 딸이 예쁘다는 것을 알기에 빌려주었을 뿐이다. 어리고, 예쁜 여자는 상품가치가 다른 어떤 것보다 비쌌다. 그래서 돈을 빌려주고 수를 쓴 것이다.
마터스의 딸 쉴라를 노리고 일부러 접근한 것인데, 마커스가 사정한다고 봐줄 리가 없었다.
‘호오, 고것 샅 애로 삼켜도 비린내 하나안 나겠구나!’
쉴라는 정말 귀엽고, 아름다웠다.아직 16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두살만 더 먹으면 그 아름다움이 활짝 필 것이다. 산토스가 군침을 흘렸다. 본부에서도 쉴라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라 한번 맛을 보고 넘길 생각을 했다.
“이제 가자.”
그때였다. 일을 마치고 무사 귀환할 순간에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인물이 나타났다.
산토스가 소리쳤다.
“네놈은 뭐냐?”
두건을 쓴 가르딘이 음흉한 미소와 사악한 말투로 대답했다.
“나 말이야, 사람들이 흔히 나를 인신 매매범이라고 하지, 내 할 일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 곱게 계집을 넘겨라, 그럼 네놈들의 목숨을 보장해 주마!”
어벙!
산토스의 수하들은 일순간 할 말을 잊었다. 자신들 앞에서 인신매매범이라고 당당하게 소리를 친 미친놈을 보고 어이없었던 것이다.
“이런 미친놈이 어디서 지랄이야!”
“호오! 지금 그 말은 내 말을 따르지 않겠다는 소리처럼 들리네.”
“야, 저 미친놈 제정신 차리게 좀 만져줘라!”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자신들을 건드리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 더군다나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놈이라면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되었다. 어둠의 길드 중에 도둑길드에서 하는 일은 도둑질을 비롯해, 인신매매, 납치, 공갈, 협박 등 온갖 나쁜 일은 다하는 곳이었다.
같은 업종에서 도둑길드에서 이목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도둑질을 하더라도 도둑길드에게 걸리면 손목이 잘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함부로 남의 영업장에서 영업했다는 미영 아래 말이다. 도둑도 용병처럼 도둑길드에 등록을 해야 정식도둑이 되는 것이다.
뚜둑!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쥔 가르딘이었다.
솔직히 자신도 저런 개자식들을 죽도록 패고 싶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는 보는 족족 죽여 보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공적인 관계가 얽힌 상황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기에 몰인정한 모습을 보인 것뿐이었다.
산토스는 수하들을 믿었다. 그런데 그의 믿음은 10초를 넘기지 못했다. 순식간에 가르딘의 주먹에 빵가루가 되어버린 수하들이었다. 어떻게 때렸는지도 모를 정도로 빨랐다. 깐 시선을 돌린 사이에 모두 기절시켜버린 것이다.
주춤!
산토스가 추춤하더니 뒷걸을질 쳤다.
“이놈, 날 건드리면 조직이 가만있지 않는다! 네놈도 같은 업종이면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알겠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나는 저 계집이 예뻐서 납치하려는 것뿐이거든, 그러게 처음부터 양보했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산토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개 같은 놈, 다된 밥에 재를 뿌려!’
산토스는 실력은 수하들보다 뛰어났지만 저렇게 쉽게 수하들 모두 때려눕힐 정도는 아니었다. 미친놈의 실력이 생각보다 더 강한 것이 그의 오판이었다. 하지만 절대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둑길드 내에서 실패는 죽음과 직결된다. 자리 보존을 위해서는 항상 성공해야 한다.
뒷걸음질을 치다가 손안에 비수를 잡고 그대로 던졌다. 놈이 방심하는 그 순간을 노린 것이다.
씨익!
가르딘은 이미 알고 있는 듯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놈의 단검을 쳐냈다. 단검을 쳐낸 즉시 산토스의 가슴 안으로 접근해서 턱에 주먹을 날렸다.
퍼억!
“크앗!”
한 방에 턱이 부서질 것 같은 충격을 받은 산토스가 공중으로 떠오르다가 다시 내려올 때 섬광과 같은 주먹세례가 이어졌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퍽!
가죽공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산토스의 신형이 공중에 멈춘 것과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어찌나 많이 때리는지 산토스의 얼굴 모양이 완전히 바뀌었다.
털썩!
한참을 맞던 산토스가 바닥에 떨어져서 기절했다.
가르딘은 일을 해결하고 난 후 마커스에게 다가갔다. 마커스는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산토스의 수하들에게 너무 많이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마커스는 믿어지지 못할 정도로 강한 가르딘의 신위에 벌벌 떨어야 했다.
그렇지만 딸의 납치한다는 가르딘의 말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내 딸은 안 되오!”
가르딘은 무서우면서도 딸을 지키려는 가장의 모습에 동정이 갔다. 자신도 이런 상황이라면 그리 행동했을 것이다.
“딸은 내가 데려가겠소, 그게 피차 좋을 것이오.”
“그게 무슨 소리냐? 내 딸은 내가 죽기 전에 안 된다!”
“당신은 딸을 지킬 수 있소, 내가 딸을 안전하게 지켜주겠소, 그게 서로에게 득이 될 것이오.”
가르딘은 일일이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도둑길드의 집요함과 잔인함으로부터 어떻게 지킬 것이냐는 말을 했다.
“선택은 당신들의 몫이오, 이대로 내가 가길 바란다면 그리하겠소.”
가르딘은 마커스 가족이 불쌍하긴 하지만 이대로 가는 것이 더 편했다. 쉴라를 데리고 가면 이것저것 불편한 것이 많이 발생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마커스는 가르딘의 정체를 알지 못하지만 그의 목소리와 말투를 들어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신분이 불확실하기에 미심쩍은 것이 가장 문제였다. 마커스의 의심은 이해가지만 가르딘의 입장에서 신분을 밝힐 수는 없었다.
만일의 사태에 공주라는 신분이 밝혀지면 상당히 공치 아픈 일이 발생한다.
가르딘은 마커스가 거절할 것으로 생각했다. 생판 모르는 놈에게 딸을 맞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대답은 마커스가 아니라 쉴라의 입에서 나왔다.
“제가 따라가겠어요!”
“쉴라야, 안 된다!”
“아버지, 어쩔 수 없어요, 제가 놈들에게 끌려가면 어떻게 될지 알잖아요, 차라리 이분을 따라가면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믿느냐?”
끄덕! 끄덕!
가르딘이 마커스의 말에 끄덕거렸다. 사실 믿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민들 사람을 믿어야지.’
쉴라가 비록 어리다고 하지만 놈들이 다시 나타나게 될 경우 집이 풍비박살 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걸 알기에 떠나려고 하는 것이었다.
“제 감이 그렇게 하라고 하네요, 전 걱정 마세요!”
쉴라가 강력하게 주장하자 마커스도 스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도 현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도망간다고 해도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차라리 가능성이 있는 가르딘의 말을 듣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가르딘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해라!”
“아버지, 저 꼭 돌아올게요!”
“그래, 그래! 돌아오너라. 내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울 테니 돌아오너라!”
한동안 부녀를 놔두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없었다.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가자!”
가르딘은 냉정한 말로 부녀를 갈라놓았다. 부모와 자식을 갈라놓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