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왕비는 저 얼굴을 알고 있었다.
실종자를 찾는 초상화에서조차 지금처럼 고압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던 그였다.
미하일이 그렇게 그리워하던 바로 그 사람. 한때 저 남자를 잃고 좌절한 상태로 왕성에 틀어박혔던 미하일의 모습 또한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침묵이 내려앉은 알현실에서 왕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아아, 요즘은 조건이 붙은 감사 인사가 유행인가 보지?”
드래곤은 입술을 틀어 올린 채 차갑게 일갈했다. 하지만 왕비가 꺼낼 조건이라는 것이 궁금하긴 했으니 그는 일단 한번 들어 보기로 했다.
미하일의 성격이 모친의 것을 닮았나 보군.
어차피 드래곤은 인간들의 당돌함에 익숙해진 참이었다.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왕비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조건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다.
“아껴 주셔야 합니다.”
아드리안의 눈동자에 일순 이채가 돌았다.
지금 이곳에서 오로지 왕비만이 드래곤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껴 달라? 드래곤은 왕비가 내건 조건을 듣자마자 대답했다.
“내 권속으로 들이는 자에게 소홀할 것 같은가.”
일말의 고민도 없었다.
누가 부탁하지 않아도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다.
왕비는 드래곤의 당당한 대답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옆에서 다시 자신을 말리려는 왕을 한 팔로 막아내며 인사를 전했다.
“다행입니다.”
흥, 드래곤은 왕비의 인사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참견은 거기까지만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언제?”
왕비의 질문에 드래곤은 아주 잠깐 고민한 후 대답했다.
“오늘 밤, 너희들의 파티가 끝난 후.”
드래곤이 눈을 떴다는 소식에 왕성에서 파티를 준비했다고 들었다. 승전 파티를 지금까지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에 참가했던 미하일은 그 파티를 즐길 권리가 있었다.
“그럼 그때 다시 왕성에 들리지. 뭐, 따로 준비해야 할 건 없어.”
허례허식은 질색이었다. 감사 인사를 한다며 또 다른 행사를 준비할세라 아드리안은 그것을 사전에 차단했다. 드래곤은 그 말을 끝으로 볼일을 마쳤는지 순간 이동 마법으로 휙-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아지랑이 같은 금빛 마나 알갱이만이 남아 날아다녔다.
“가장 아름다운 것……?”
드래곤이 원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건 미하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하일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의문 그 자체보다는 질투였다.
그게 뭐지?
지금껏 아드리안이 저토록 원했던 것이 있었던가.
미하일은 차가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무언가 알고 있는 듯 드래곤과 이야기를 나눈 어머니에게 질문을 해 보아도, 그녀는 웃기만 하며 “곧 알게 될 거다.”라고 할 뿐이었다.
***
승전 파티를 알리는 불꽃 마법 한 줄기가 하늘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불꽃은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떠올랐다가 공중에서 여러 갈래로 번져 갔다.
퍼엉-! 펑!
어두운 밤하늘을 색색의 밝은 빛이 꽃처럼 장식했다. 정복을 입은 미하일은 혼자 연회장에서 발코니로 나와 난간에 편히 등을 기대어 있었다. 불꽃을 보자, 그때 그 바사미엘의 파티 전야제가 떠올랐다.
‘아드리안과 호수에 나란히 앉아서 함께 불꽃놀이를 봤었지.’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아드리안은 곧 자신의 레어로 돌아갈 거고 자신은 더이상 그를 볼 수 없게 된다는 것.
이게 마지막인가……. 젠장.
미하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의 손에 들린 얇은 유리잔 속 투명한 술이 찰랑거리는 순간이었다.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티의 주인공이 왜 이렇게 죽상이야. 춤이나 출까?”
그 주인공을 고민에 빠트린 장본인이었다.
아드리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무심한 얼굴로 한쪽 팔을 내밀었다. 미하일의 춤 실력을 이미 알기 때문인지, 드래곤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차가웠던 미하일의 표정이 더 날카로워졌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뭐야.”
“응?”
“네가 가져가겠다는 그것, 그게 뭐냐고. 내게 그 정도는 알려 줄 수 있잖아.”
“……눈치는 참…… 더럽게 없군.”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 아드리안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눈치는 없는 주제에 귀는 또 밝은 모양이었다.
아드리안은 잠시간 사실을 말해 줄까 말까 고민하다 픽, 입술을 끌어 올렸다. 아무렴 어때, 드래곤이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는 데에 대상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미하일이 함께 가기 싫다고 해도 이제는 별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춤은, 나랑 추기 싫다는 건가?”
끝내 아드리안의 입술에서 나온 것은 미하일이 물었던 것과는 다른 대답이었다.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아드리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난간에 편히 기대어 있던 미하일이 몸을 바로 했다. 그는 발코니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잔을 올려 둔 채로 아드리안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와 우뚝 섰다. 조금만 더 왔다가는 코가 닿을 거리였다.
“다른 사람이랑 출 거야?”
“…….”
“누구랑 춤을 출 건데.”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간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붉게 일렁이며 타오르는 것이 살아 있는 보석 같았다.
“…….”
“누구야. 다피네? 바델리아?”
미하일은 입을 꾹 다문채 아드리안을 노려보았다.
정말로 대답을 기다리는 건가? 드래곤은 이 파티에 참가한 인간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드리안이 원하는 것은 지금 코앞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미하일이었다. 정작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름인데.”
“…….”
미하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모르는 이름이라면 드래곤이 영원히 모르고 지내는 것이 나았기 때문이다. 조금 전 왕자가 꺼낸 것은 루스타바란 왕국의 공주들의 이름이었다. 둘 다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했는데, 드래곤이 가장 아름다운 것을 원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미하일이 머릿속으로 떠올린 이들이었다.
휘이이익- 펑!
아드리안과 마주 선 미하일의 등 뒤로 불꽃 하나가 더 쏘아 올려졌다. 허공에 올라가 크게 빛을 발하자, 아드리안의 하얀 얼굴에 색색깔로 빛이 번졌다. 동시에 드래곤의 황금색 눈동자가 미하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역시……”
아름다워.
아드리안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른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멈칫 굳힌 미하일이 천천히 표정을 풀었다. 조금 전까지 미하일도 하늘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던 참이었다. 아드리안도 바사미엘에서의 파티를 떠올렸을까?
미하일은 감탄하듯 옅게 미소 짓고 있는 아드리안을 향해 말했다.
“바사미엘의 폭죽 마법보다?”
“폭죽 따위 내 관심 밖이야.”
차가운 말투로 단어를 짧게 끊어 말하는 드래곤을 미하일이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러면?”
그의 얇은 입술이 살짝 떨렸다.
아니, 드래곤이 그런 뜻에서 아름답다는 말을 할 리가 없잖아. 문득 떠오른 생각에 미하일은 스스로를 질책했다.
드래곤이 옅게 미소 지으며 팔을 뻗었다.
샴페인을 마시던 미하일의 따끈한 뺨과 숨이 드래곤의 손바닥에 여실히 느껴졌다.
아드리안은 그 상태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지금 여기에 뭐가 남았지? 저 폭죽보다 아름다운 것으로.”
“…….”
감히 왕자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대놓고 해 왔던 사람들은 몇 없었다. 하지만 미하일이 그의 외모에 관심 없는 것과는 별개로 세간에 알려진 평가를 들어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이 드래곤의 입에서 나오는 장면은 꿈속에서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미하일은 눈을 찡그리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설마…….”
“아마 그 설마가 맞을 거야.”
“설마 네가 원한다는 그 아름다운 것이……!”
드래곤이 원하는 것이 바로.
미하일의 붉은 두 눈이 반짝거리며 활기를 되찾았다.
자신의 뺨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드래곤의 손등을 빠르게 감싸며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나라고?”
“하, 드디어 알아차렸- 음.”
드래곤이 짧게 웃음을 터뜨리려던 참이었다.
미하일의 뜨끈한 숨이 입술에 닿았다. 조금 전까지 미하일이 마시고 있던 샴페인의 맛이 혀끝에 살짝 느껴졌다.
휘이이익-! 펑!
아주 잠깐의 찰나, 둘의 시선이 서로만을 담은 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아, 드래곤은 살짝 눈을 접어 웃었다. 자신만을 향해서 일렁이고 있는 붉은 눈동자가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살짝 입을 떨어트린 미하일이 자신의 입가를 매만지며 아드리안을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소드 마스터라며 칭송받는 기사였지만 지금 이 순간은 영락없이 환희에 빠진 청년에 불과했다.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을 바라보다 힐끔, 왕성의 시계탑을 확인한 후 중얼거렸다. 먼저 큼, 하고 작게 헛기침을 해 다른 상상에 잠긴 듯한 미하일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잊지 않았다.
“……파티가 끝난 후 데려간다고 했으니 준비를 하도록 해. 뭐, 어차피 이 대륙 안이라면 언제든 다시 올 수 있으니까 크게 준비할 건 없을 테지만.”
그러고 보니 드래곤은 계속해서 ‘데려간다’ 혹은 ‘가져간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었다. 미하일은 어디든 상관은 없었으나 드래곤의 그 목적지가 궁금해졌다.
“어디로?”
“그건 고민 중이야. 내가 방금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거든. 그래서 네 선택에 따라 움직이려고.”
아드리안은 다음 말을 하기 직전에 잠깐 침묵했다.
과연 지금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그제야 짧게 고민이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
미하일은 왕국의 왕자였고, 인간들에게는 신분이나 지위 같은 것들이 중요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미하일에게 그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버리고 자신에게 오라는 제안이 아닌 ‘명령’이었다.
뭐, 본인이 싫다 해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드래곤은 미하일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그를 가지기로 마음먹었으므로.
아드리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꺼냈다.
“얼마 전, 샐러맨더가 전설의 검을 하나 뱉어 냈다는군.”
미하일의 붉은 눈에 이채가 돌았다.
전설의 검!
샐러맨더가 뱉어 낸 검이라면, 바로 그 검일 것이 틀림없었다. 도헤니어 화산에서 미하일이 끝내 잃어버리고 만 그 검.
역시 검에 대한 건 반응 한 번 빠르네, 귀엽기는. 다행히 억지로 데려갈 필요는 없겠어.
아드리안은 속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전설의 검’을 두고 내년에 델바란 왕국에서 무투 대회를 연다는데…….”
드래곤의 얇은 입술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그가 다른 이에게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제안이었다. 그래, 인정해야 했다. 이건 지금껏 지루함에 못 이겨 혼자 하곤 했던 유희와는 달랐다.
“어때? 같이 가 볼까?”
밝게 웃고 있는 눈앞의 인간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흥미로울 테니 말이다.
휘이익-! 펑!
미하일의 등 뒤로 형형색색의 불꽃이 연달아 터졌다.
왕성의 모든 인간들이 승전 파티를 즐기고 있는 밤이었다. 축사를 위해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린 왕과 왕비가 드래곤과 미하일을 찾았다.
그러나 파티의 주인공들이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뒤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