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이가용-183화 (183/184)

183화

16. 드래곤이 원하는 것

맑은 물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드래곤은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조금 가려워진 귀를 살짝 움직였다. 드래곤의 귀 위에 앉아서 쉬고 있었던지 조그만 새가 포르르 다른 쪽으로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어디지?

푸우우- 깊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드래곤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넓은 호수였다. 호수 한가운데라고는 해도 얕은 탓에 똬리를 트고 잠자는 데 무리가 없던 모양이었다. 드래곤이 무겁게 느껴지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제법 오랫동안 이곳에 누워 있었던 것 같았다. 간만에 커다란 몸이 움직이자 비늘 위를 덮고 있던 이끼가 후두둑 떨어졌다. 호수에서 유유히 헤엄치던 물고기들도 놀랐는지 이리저리 여러 방향으로 흩어졌다. 황금색 비늘 위로 물결이 넘실거렸다.

드래곤이 상체를 일으키자 비늘 사이에 고였던 물이 주르륵 네 다리와 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괴조와 싸우느라 상처를 입은 곳이 전부 말끔하게 나아 있었다. 몸통에 남아 있는 물기를 몸을 몇 번 움직여 털어 낸 다음 목을 길게 빼내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울창한 숲속이었다.

툭!

조금 먼 곳에서 무거운 것이 풀밭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골드 드래곤이 무심히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드리안!”

누군가 이곳으로 뛰어 오더니 끝내는 와락- 안겼다. 드래곤이 누워 있던 곳은 얕은 호수 중심이었으므로 빠르게 호수를 헤치고 걸어오느라 바지가 전부 젖었다. 하지만 미하일은 그런 사소한 문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은 것 같았다.

완연한 성인 남자의 덩치로 거세게 목을 안아 오는 통에 드래곤은 커다란 눈을 찡그리곤 후우욱- 하고 콧바람을 한 번 불었다. 미하일이 자신을 얼마나 반가워하는지는 그의 팔 힘에서 알아챌 수 있었다.

“아드리안! 깨어났네, 어때? 괜찮아?”

드래곤은 그런 미하일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별다른 외상은 없는 것 같았다. 깜빡, 파충류 특유의 차가운 피부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움직이자 미하일은 감격스런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은 미하일의 질문에 대답하려 주둥이를 살짝 열었다가 무언가 깨닫고는 다시 닫았다. 본체가 사용하는 드래곤의 언어는 미하일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어차피 커다란 본체로 움직이는 것은 행동에 제약이 있으므로 인간 형태로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네 다리를 접은 채 호수 안에 웅크리고 있던 드래곤이 꼬리를 살짝 흔들었다.

미하일에게 저리 비키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드리안의 의사소통을 영 알아먹지 못한 듯 드래곤의 목을 두 팔로 더 세게 꽈악 안아 왔다. 윽, 드래곤은 불편하다는 듯이 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제야 무언의 몸짓을 이해한 미하일이 눈썹 한 쪽을 들어 올렸다.

“어디 불편해?”

동시에 거세게 옥죄어 오던 미하일의 팔 힘이 풀렸다.

이때다 싶어 아드리안이 육중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미하일은 조금 몸을 움직여 드래곤이 마음껏 움직일 수 있도록 길을 비켜 주었다.

커다란 몸이었으나, 드래곤의 움직임은 마치 깃털이 움직이듯이 가벼웠다. 아드리안은 천천히 얕은 호수를 걸어 나갔다.

그때, 그의 발에 채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날개 문양이 새겨진 흰 검집. 미하일이 조금 전 떨어트린 펠렌 디스프의 검이었다.

드래곤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검을 입으로 물었다. 뒤따라 호수에서 나오던 미하일이 그런 아드리안을 바라보며 의문을 표했다. 입에 검을 물고 미하일과 눈을 맞추기 위해 드래곤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응?”

미하일은 잠시간 자신의 검을 물고 있는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깜빡, 커다랗고 맑은 두 눈동자가 말하고 있는 것을 이윽고 알아차린 미하일이 천천히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드래곤의 눈동자가 반쯤 접혀 들었다.

드래곤은 미하일의 두 손 위로 검을 툭 떨어트렸다.

“……고마워.”

그때였다.

금빛 마나 알갱이가 드래곤의 이마부터 시작해 온 몸통을 감쌌다. 그 마나들이 삽시간에 사라지자, 모난 곳이나 상처 난 곳 없이 깨끗한 몸의 금발 머리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남아 있는 몸의 물기를 기껍게 여기며 손으로 무심히 훑어 내렸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인사에 대답했다. 드래곤은 자는 동안 가끔씩 자신의 몸 안으로 상쾌하게 불어오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미하일의 힘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기분이 꽤 상쾌한걸.”

“……잠깐 실례.”

아드리안의 흰 나신에 햇빛이 들까 하여 미하일은 빠르게 자신의 자줏빛 망토를 벗어 둘러 주었다. 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는 아드리안의 밝은 금발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미하일은 그제야 아드리안을 끌어안을 수 있었다. 망토를 걸친 아드리안을 한층 세게 끌어안자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그를 걱정하느라 불안해했던 시간들이 눈 녹듯 단번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무사하니 다행이야."

하하, 아드리안은 옅게 미소 지으며 미하일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미하일은 그 상태로 중얼거렸다.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어.”

“그래, 걱정이 많았겠군.”

“너, 여기서 몇 달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다고.”

“몇 달이나?”

그래서 몸 위에 이끼가 그렇게 자라났나 보네.

아드리안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인간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실 이 몸이야 어떻게 되든 별 걱정은 되지 않았다.

“아름다운 호수네.”

드래곤의 담담한 평가에 미하일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서로 껴안고 있는 탓에 미하일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여실히 드러났다.

“지금 그게 중요해?”

“당연히 아니지.”

이 호수가 어디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하고 궁금한 점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미하일이 뭐라고 대답할지 드래곤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질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때, 네 스스로 그 힘을 직접 깨우친 느낌은.”

드래곤은 언제나 미하일의 목표를 불가능하다고만 치부하며, 심지어 그의 의사를 무시하고 대신 이뤄 주려고까지 했었다. 만약 그대로 이뤄졌다면…… 미하일이 혼자 힘으로 목표를 이룬 순간을 절대 이 두 눈으로 볼 수 없었겠지. 그런 걸 자신이 대신하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오르디나스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하일의 붉은 눈이 아드리안을 향했다. 그는 예상하지 못한 드래곤의 질문에 한동안 고민하다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사실 알려 줄까?”

재미있는? 물어본 질문에 미하일이 대답은 안 하고 다른 질문으로 대신하자 아드리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천장화가 있는 던전에 대한 소식이야. 그때 검은 마나가 사라진 순간…… 그 던전도 함께 무너졌다고 해. 직접 가 보니 더 이상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게 입구가 사라졌어.”

“……그렇다는 건.”

미하일의 이야기에 아드리안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대륙의 멸망을 막는다는 목표를 이뤘으니 더 이상의 개입은 하지 않겠다는 건가.

“이제부터는 오르디나스가 정해 놓은 미래가 없다는 거네.”

“아마 그런 뜻이겠지.”

“간만에 좋은 소식이야.”

잔소리꾼이 사라졌다니!

아드리안은 왠지 모르게 신난 얼굴이었다.

***

드래곤이 잠들었던 곳은 왕가가 소유한 숲의 신성한 호수였다.

아드리안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왕성에서는 호들갑을 떨며 그를 맞을 준비를 했다. 미하일이 넌지시 승전 파티를 언급하자, 아드리안은 “아직도 승전 파티를 안 했다고?” 하고 되물었다. 미하일은 드래곤이 곧바로 레어로 돌아간다고 할 줄 알았던지 계속 설득하듯이 잠깐이라도 왕성에 머물다가 갈 것을 적극적으로 권했다.

아드리안은 그런 왕자의 설득에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도 왕성에 볼일이 있었다.

“혹시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루스타바란 왕국을 대표하여 책임지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왕좌에 앉은 왕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권했다. 전설로 치부되던 드래곤의 존재를 눈앞에 마주하고 있자니 그로서도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쪽을 향해 눈을 크게 뜬 채 소리 없이 경악하고 있는 알릭스 왕세자의 얼굴이 봐줄 만했다.

왕좌와 드래곤 사이에 몇 개의 계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래곤이 왕을 ‘올려다보는’ 느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왕좌에 앉은 왕이 상체를 앞으로 숙여 드래곤을 올려다보는 듯했다.

아드리안은 왕성의 모든 구성원이 모인 알현장 중심에 당당히 서서 왕을 바라보았다. 왕의 겉을 유심히 살펴보니, 미하일과 닮은 구석이 몇 있었다. 그러나 세상 어느 누구도 드래곤이 원하는 유일한 존재와 완벽하게 똑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드래곤은 피식, 짧게 웃은 뒤 입술을 열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꿀꺽, 누군가 긴장된다는 듯 목울대를 움직여 침을 삼켰다.

“루스타바란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져야겠어.”

“…….”

뭐라고?

왕성의 인간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니? 보석을 말씀하시는 건가. 아니면 그림? 고귀하신 드래곤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는 것도 예의에 어긋났다. 모든 사람들이 속으로 저마다 생각하는 아름다운 것을 떠올렸다. 왕 또한 깊은 고민에 잠겼을 때였다.

누군가 알현실에 내려앉은 깊은 침묵을 깨트렸다.

“……네, 좋습니다. 가져가시지요.”

“무, 뭣? 왕비!”

드래곤님께서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알고 하는 겁니까!

옆자리에서 나온 목소리를 듣자마자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왕비의 흔쾌한 동의에 왕성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왕비에게로 향했다. 드래곤이 무엇을 원하는지 예상할 수 없건만, 왕비의 자신 있는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는 이 왕성에서 유일하게 드래곤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