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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81화 (181/184)

181화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아드리안이 미하일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자신의 몸 안에 자리 잡은 마나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진짜 네 스스로 그 힘을 사용하는 법을 깨우칠 수밖에.”

원래라면 미하일은 드래곤의 손짓 한 번에 곧바로 소드 마스터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이미 그의 몸 안에는 카를로의 시간대에서부터 전해진 드래곤의 힘이 들어 있었다. 드래곤이 그 힘을 조금만 증폭시켜 준다면 소드 마스터가 되어 자유자재로 자신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아드리안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오르디나스가 정한 운명에 개입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는 건가. 생각에 잠긴 아드리안을 깨운 것은 미하일의 또렷한 목소리였다.

“바라던 바야.”

침울한 기색이라곤 하나도 없는 미하일의 목소리에 아드리안의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뭐?”

“원래부터 그러려고 했다고.”

펠렌 디프스의 검을 한 번 쓰다듬으며 미하일이 대답했다. 어린 시절, 검을 처음으로 손에 쥔 날이 떠올랐다. ‘아- 이것이 바로 내 운명이구나.’라고 생각한 그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단 하루도 소드 마스터에 대한 꿈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미하일은 금빛 사슬로 묶인 검은 원을 올려다보았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 검은 원에 흠집을 낸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미하일의 곧은 시선이 아드리안을 향했다.

“내 안의 힘이 무엇이든, 그건 내 거야. 사용하는 방법을 깨우치는 것 정도는 그 힘의 주인이 스스로 해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

“…….”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아드리안의 입술이 열렸다.

“……그 당연한 걸 지금 못하는 주제에.”

아드리안의 투덜거림을 들은 미하일이 피식, 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철컥—!

그때였다, 신경을 거슬리는 소리가 드래곤의 귀를 찔렀다.

“……!”

검은 원에 감아 둔 사슬이 끊어질 듯 벌어지는 것을 느낀 아드리안의 시선이 곧장 위로 향했다. 갑자기 틈이 많이 벌어진 탓이었다. 심상치 않았다.

밖으로 튀어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던 발톱이 이제는 작정한 듯 검은 원 가장자리를 움켜쥐고 있는 모양새였다. 마물이 금빛 사슬을 찢어발길 듯이 틈 사이를 천천히 벌리기 시작했다.

크그그그—극! 탁!

여태까지 갈라졌던 것보다 몇 배는 큰 균열이 나타났다. 크게 벌어진 틈에서 마물이 천천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작은 검은 빛을 내는 기다란 부리였다. 뾰족한 부리에 이어 초록빛 눈동자가 나왔다. 검은 마나에 들어갔다가 나온 듯 마물의 깃털에서 구정물 같은 액체가 떨어졌다.

호수에 드리운 마기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미하일.”

아드리안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쨌든 지금은 그 힘을 못 쓰겠다는 거지?”

미하일의 꿈을 응원하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미하일이 그 힘을 사용할 수 없다면 저것에 대항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아드리안은 고개를 약간 옆으로 꺾어 뚜둑 하는 소리를 냈다.

드래곤이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기 전에 늘 하던 습관이었다. 미하일의 의아한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 그 전까지는 내 말을 들어.”

죽을 것이 뻔한 위험한 곳에 미하일을 놔둘 수는 없었다.

“뭐?”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미하일의 눈썹이 찌그러졌다.

“약속했던 거와는 다르잖아.”

“미안하지만, 난 약속하지 않아.”

전에도 말했을 텐데.

아드리안은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드래곤은 약속하지 않는다. 그건 아마 이런 상황을 위해서일 것이다.

“여기서 멀리 떨어져.”

그의 팔이 휙 하고 바람을 일으키듯 움직였다.

윽, 아드리안을 잡아채려 뻗었던 팔이 무색하게 미하일의 몸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빠르게 던져졌다. 동시에 선발대가 타고 있는 나룻배가 검은 호수를 가르며 움직였다. 드래곤의 마법이었다.

“아드리안!”

드래곤은 미하일의 부름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머리 양쪽에서 단단한 뿔이 솟아났다. 이어서 커다란 꼬리와 날개가 나타났다. 밝은 금색 마나 알갱이들이 드래곤이 본체로 돌아가는 것을 도왔다. 머리에서부터 시작한 변화는 금빛 마나 바람이 그의 전신을 훑고 지나자 단번에 커다란 드래곤의 몸으로 바뀌었다. 아드리안의 금색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비늘을 가진 골드 드래곤이었다.

아드리안은 힐끔, 나룻배를 보낸 방향을 확인했다. 검은 호수 저 끝에 도착한 배는 적당히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고 있었다. 눈치가 있다면 배에서 내려 이 호수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쉬이이익—!

드래곤은 짧은 콧바람을 불고선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그의 눈앞에 통로를 깨부수고 나온 거대한 마물이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검은 까마귀 같은 모양새에 머리가 셋이 달린 괴조였다. 그것의 날개가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부는 거센 바람에 검은 호수 위에 잔물결이 반복적으로 일었다.

탁!

드래곤의 앞발이 괴조의 몸통을 낚아채어 짓눌렀다. 금빛 마법진 수십 개가 괴조를 에워싼 채 소환되었다. 마법이 정통으로 먹혀 들지는 않겠지만…… 속도는 늦출 수 있었다. 마법진 중심에서 거대한 금빛 창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괴조의 몸통 수십 곳을 꿰뚫었다. 축 늘어졌던 괴조는 호수의 검은 마나로 바로 회복하더니 다시 달려들었다.

괴조의 머리 하나가 크고 날카로운 부리를 벌려 드래곤의 목을 물어뜯었다. 그에 질세라 다른 머리가 부리를 닫아 뾰족하게 만든 후 드래곤의 몸통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 콱 내리찍었다.

크으으—아아악!

드래곤의 입에서 그제야 신음 소리가 들렸다.

***

마법과 이빨, 그리고 발톱으로 몇 번이나 거대한 괴조를 잡아 죽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저 검은 마나로 놈은 활력을 찾기 일쑤였다. 불 마법을 써서 상처를 불태우고, 검은 마나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트려 공중에서 잡아 눌러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마나라는 에너지 공급원 자체를 제거하지 않으면 저것을 죽일 수 없었다.

후욱, 후우우욱—!

거센 숨을 내뱉으며 드래곤은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이 몸 하나가 죽는 것을 애도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더 많은 시간을 바라는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된 지 한참이었다.

물론, 당장이라도 순간 이동 마법을 써서 이곳을 벗어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쿨럭!”

큭, 크흑. 드래곤은 검은 피를 거칠게 뱉어 냈다. 조금 전 또 한 번 더 쓰러트린 거대한 괴조가 꿈틀거리며 다시 깨어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곳을 드래곤이 피한다면 저것이 대륙으로 향할 것이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아드리안이 여기서 포기한다면 저놈이 대륙 전체를 무너트릴 것이 틀림없었다.

온몸에 피가 흐르고 있었고, 상처를 비집고 들어오는 마기가 쓰라렸다. 본래 가지고 있는 순수한 마나가 검은 마나에 의해 변질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되면…….

나는 결국.

눈가의 비늘들이 반대 방향으로 쓸리면서 진득한 검은 기운이 조금씩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시야가 온통 부옇게 가려져 바로 앞에 있는 것이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으득, 짓씹은 입에서 비릿한 피 맛이 배어 나왔다. 곧 이렇게 스스로 생각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걸, 드래곤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러기 전에 저들을 최대한 멀리 보내야 했다.

크아아악—!

왕성만 한 크기의 금빛 드래곤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크게 한 번 부르짖었다. 전신을 불태우는 것처럼 검게 물들이고 있는 검은 마나를 털어 내려는 듯 몸부림치는 것이었으나, 검은 마나가 비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비늘이 들리고 피부가 찢기며 순수한 마나로 만들어진 드래곤의 몸이 치이익-! 타는 소리를 내며 그슬렸다. 다만, 아드리안의 정신은 아직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빠르게 점멸하고 있긴 했지만, 저 멀리 밀어 두었던 조그만 나룻배 하나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렇게 내가 검은 마기에 정신을 잡아먹히게 되면 천장화의 그림이 현실로 된다.’

저 멀리 나룻배 위 미하일의 밝은 은발이 반짝이며 그런 드래곤을 질책하고 있었다. 저렇게 멀리 있으니 그림에 안 나왔지. 드래곤의 주둥이에서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직도 저기서 안 움직이고 뭐 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드리안은 정신이 온전치 않는 상황에서도 최대한 호수에서 멀어지려 날개를 크게 펼쳤다. 드래곤의 커다란 날개 두 장이 펼쳐져 호수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이 할 수 있는 것은 날개를 펼치는 것이 전부였다. 젠장, 날개가 제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이 평소보다 무거워진 듯 날개를 아무리 움직여도 몸이 떠오르기는커녕 계속해서 검은 마나 속으로 처박히기만 할 뿐이었다.

곧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 마물이 회복을 마친 후 날갯짓을 했다. 아직 검은 마나로 설기게 이어진 놈의 세 번째 목이 달랑거렸으나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

“아드리안!”

“왕자님, 위험합니다!”

젠장, 앞으로 더 나아가려는 미하일을 군단장이 뒤에서 저지했다. 왕자의 거센 팔 힘에 군단장이 이를 악물며 팔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아드리안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뭐가 있지. 이렇게…… 멀리서 지켜보는 게 고작인 내가 뭘 할 수 있겠냐고!’

미하일은 분한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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