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콰지직—
미하일이 검으로 내리친 가장자리에 생겨난 금이 더 벌어졌다. 그러면서 툭, 투둑 분리된 조각들이 검은 호수로 떨어졌다.
끼이이이—아아악!
벽 저 너머에 부딪혀 울리는 마물의 괴성이 들려왔다. 괜히 미하일이 검으로 가장자리를 찢은 탓에 더 날뛰는 것 같았다. 잠자는 괴수를 깨웠다 이건가?
“……부수려면 제대로 부쉈어야지.”
아드리안이 중얼거리자 멍하니 검은 통로 너머를 바라보던 미하일이 물었다.
“뭐?”
“이 호수를 쥐 죽은 듯 고요하게 만들었던 놈을 네가 깨운 거야.”
“……말도 안 돼.”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미하일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자책할 시간은 없었다. 쾅! 커다란 통로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끼워 넣으려 마물의 몸통이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크아아아악—!
마물은 그 뒤로 몇 번이나 더 부딪쳐 대고서는 이 상황이 답답한지 울부짖었다. 그 큰 진동에도 아드리안이 만들어 낸 금빛 계단은 떨림 하나 없었다. 통로 너머에서 한 번 더 굉음이 들리자, 미하일이 발아래의 검은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나룻배 하나가 이리저리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아래의 사람들이 위험해. 우선 내려가야겠어.”
뭐, 그럴까.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
위의 상황을 전달하자, 선발대의 표정이 한층 더 굳어졌다. 마물이 깨어나면서 요동치기 시작한 검은 마나 호수가 그들의 혼을 쏙 빼놓은 이후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할까.”
군단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그 말을 들은 미하일은 머리 위에 떠 있는 검은 원을 올려다보았다. 직접 보고 내려왔을 때보다 양쪽으로 금이 더 길게 나 있었다. 분명 위험한 상황은 맞았다. 하지만 아직 기회가 남아 있지 않은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내 안의 그 힘…….
미하일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드리안의 눈만이 미하일의 그 표정을 따라갔다.
“아니, 아직 좀 더 지켜봐야겠어.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지.”
아드리안은 그렇게 말하고선 선발대를 둘러보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선발대의 의아한 시선이 모두 금발 남자의 늘씬한 손가락으로 향했다.
“어떤-”
누군가 그에게 질문하려는 순간이었다.
딱, 하고 손가락 두 개가 맞부딪히는 소리에 입을 열어 의문을 표하던 몇 명의 인영이 순식간에 휙- 하고 사라져 버렸다. 열 명이 타 있던 나룻배에는 여섯 명만이 남게 되었다.
배에 남은 모든 이의 시선이 남자에게 향했다.
순간 이동 마법이었다.
그 복잡하고 까다로운 마법을 겨우 손가락을 부딪히는 것만으로 시전할 수 있는 인간은 이 대륙에서 아마 없을 것이다. 아드리안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을 향해 설명해 달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는 군단장에게 말했다.
“전력에 별 도움 안 될 이들을 돌려보낸 거다. 앞으로 우리가 하려는 일이 그들에겐 조금 위험할 수도 있어.”
“……감사합니다.”
군단장은 그제야 안심하곤 인사했다.
아드리안이 돌려보낸 이들은 일 인분 몫은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되는 수준이었다. 조사 임무에는 적합했으나 이런 돌발 상황에선 본인의 실력도 발휘 못 할 가능성이 컸으므로 그의 조치는 적절했다.
금발 남자는 어째선지 아까부터 그를 편하게 하대하고 있었으나 이쪽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외모도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군단장은 곧바로 ‘뭔가 비밀이 있는 남자군.’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배 아래의 검은 호수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캐서린이 입을 열었다.
“많이 위험하겠죠?”
결연한 표정이었다. 검은 마나는 마물들의 먹이였으므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상한 탓이었다.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를 무심한 표정으로 확인하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걱정 마, 너무 위험하다 싶으면 조금 전처럼 모두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 줄 테니까.”
“……안 됩니다.”
군단장의 또렷한 목소리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 마나가 계속해서 흘러나오다 보면 결국 대륙 전체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물들이 출몰할 겁니다.”
“그러면 그냥 여기서 다 죽자는 거냐. 우선은 자리를 피하고 미래를 도모할 줄도 알아야지.”
쯧, 드래곤은 귀찮다는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급한 시점에 설득까지 하고 앉아 있을 정도로 느긋한 성격은 아니었다. 딱 봐도 우직한 성격인 듯했으나 굳이 이런 설명까지 해 줘야 할 정도로 어리숙할 줄이야.
그때였다.
“나도 같은 의견이야.”
미하일이었다.
군단장에게 ‘위험할 때에는 돌아가야 한다.’라고 설명할 적에는 굳어 있던 아드리안의 입술 한 쪽이 삐죽 올라갔다. 살풋 일그러져 있던 아드리안의 눈썹이 자연스럽게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미하일이 말하는 거니까 그래도 한번 들어 보자는 자세였다.
“저 검은 원이 마계로 이어진 통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을 쓰면 파괴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지도 모르잖아.”
“…….”
아드리안은 황금색 눈동자가 미하일에게 향했다. 꾹 닫은 입술에서 미하일의 의지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힐데케 절벽으로 답사를 떠났을 때도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저 마물을 쓰러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려 줘.”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잠깐 검기를 씌우는 것 정도야…… 할 수 있어. 매일 훈련도 하고 있고. 우리가 지금 도망가면, 마물이 마을로 들어오게 되잖아.”
“우리는 저게 마을로 들어오기 전에 도망치면 되는걸?”
“아드리안.”
미하일은 달빛을 받아 드러난 아드리안의 흰 얼굴에 대고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곧은 시선이었다.
“내가 도망가기 싫다고 말하면, 도와줄 거야?”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아니 지금이 더 심각할지도.
촤아아아악—!
부글부글 끓던 검은 호수의 수면이 단번에 물기둥처럼 위로 치솟았다. 굵기가 들쭉날쭉 한 여러 개의 물기둥이 하늘 끝까지 굉음을 내며 올라가자 나룻배에 씌워진 얇은 실드 벽에 검은 마나가 세게 부딪혔다가 쓸려 나갔다. 나룻배를 잡아먹을 듯한 커다란 파도처럼 검은 마나가 불규칙적으로 배를 이리저리 떠밀어 댔다.
“죽게 내버려 두라는 건가?”
너를? 내가?
아드리안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조금 전 미하일과 같은 말을 했던 군단장에게는 헛소리 말라며 한마디로 일갈했던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미하일이 했다는 이유만으로 드래곤은 그들의 요청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단번에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쾅!
거대한 마물이 벽을 뚫고 나오려는 듯이 다시 한 번 더 몸통을 부딪치는 굉음을 냈다.
마음 같아서는 검은 마나란 마나를 모조리 이 대륙 위에서 몰아내고 싶었으나, 드래곤의 권속이 아니니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아니, 안타깝다니?
어떤 아수라장에서도 무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드래곤이었다. 그러니 평소의 그라면 대륙이 멸망하는 순간을 그저 관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감정에 눈썹이 살풋 일그러졌다.
“그럴 수는……-”
미하일의 곧은 시선이 고민 중인 아드리안을 똑바로 향해 있었다. 언제나처럼 고집스런 자세였으나, 그마저도 드래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미하일의 또렷한 목소리가 망설이고 있는 아드리안을 멈춰 세웠다.
“난 죽지 않을 거야. 내 옆에 네가 있으니까.”
“…….”
그래, 저 고집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알잖아. 아드리안, 넌 나를 여기까지 안전하게 데려왔어.”
사사로운 욕심은 하나도 섞이지 않은, 오로지 세상을 구하기 위한 고집이었다. 그리고 미하일의 의지가 곧 오르디나스의 의지였다. 살아 있는 생명체의 몸부림이었다.
“여기서 죽기만 해 봐.”
아드리안은 미하일에게는 먹히지도 않을 협박을 했다.
둘이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자, 캐서린이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지 논의해 볼까요?”
그녀의 시선은 호수의 수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까부터 부글부글 끓던 검은 호수 저 너머에서 무언가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캐서린은 입을 꾹 다물고 손을 움직여 실드를 강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