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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78화 (178/184)

178화

다시 검은 원이 제자리에서 낮은 소리를 내며 잘게 떨었다.

그 진동에 아주 잠깐이나마 잠잠해졌던 검은 마나 호수가 크게 요동쳤다.

쿠구구궁-!

좌우로 크게 배가 흔들렸다. 미하일은 멍한 얼굴로 오른쪽 발을 배 바닥에 디뎌서 가까스로 몸을 지탱했다. 그의 시선은 머리 위에 떠 있는 검은 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그 외의 것은 눈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상태인 것 같았다. 턱, 그는 그 상태로 뱃머리의 난간에 한쪽 발을 올렸다.

“위험해, 미하일.”

미하일은 팔을 낚아챈 아드리안의 말 또한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공중의 검은 원을 바라보며 다른 쪽 발을 뻗었다.

“위험하다고!”

아드리안은 짜증스럽게 팔에 힘을 더 주었으나, 앞으로 나아가려는 미하일의 몸이 멈출 기미가 없었다.

“그러다 떨어진다고요! 위험합니다!”

“밖으로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

“네, 아, 아니. 힘이 너무 세요. 도대체 어디를 가려고 하는 건지!”

바로 옆에 있던 캐서린과 군단장도 자꾸 검은 호수로 빠지려 드는 미하일을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는 휘청거리는 뱃머리와 다르게 흔들림 하나 없이 하늘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아드리안은 팔을 붙잡은 채로 미하일을 유심히 살폈다.

우우우웅——

그의 허리춤에 매여 있는 펠렌 디프스의 검이 공명하듯 잘게 떨렸다.

이것도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드래곤이 분노에 차 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했을 때, 막아 세웠던 새하얀 빛이었다. 만약 저 힘이 미하일을 검은 원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라면 어떤 이유가 되었든 미하일에게 나쁜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

아주 잠시 고민하던 아드리안이 별수 없단 듯 자신의 머리를 헝클였다.

“아드리안! 더 세게 붙잡아야 할 것 같아!”

다른 쪽 팔을 있는 힘껏 붙잡고 있는 캐서린이 다급하게 외쳤다. 흠, 아드리안의 입술 한쪽 끝이 슬쩍 올라갔다.

“아니, 캐서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바사미엘의 후배 아드리안 헤더가 캐서린에게 사용하던 말투가 아니었다.

금빛 마나 알갱이가 순식간에 아드리안의 밝은 금발을 중심으로 일렁였다. 엄청난 양의 마나가 빠르게 모여들면서 거대한 움직임을 만들어 냈다. 아주 약하게 팔랑팔랑이던 아드리안의 옷이 점차 빠르고 거칠게 펄럭거렸다. 밝게 빛나는 것은 그의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는 한낮에 뜬 두 개의 달처럼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드리안?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캐서린이 아주 느린 움직임으로 보였다. 지금 드래곤이 하려는 것은 마나를 다룰 수 없는 아드리안 헤더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드래곤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바람에 선발대의 전원이 두 팔을 들어 올려 눈을 보호했다. 아드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가락을 휙 휘둘렀다. 그를 둘러싼 금빛 마나 알갱이가 그 움직임에 응답하듯 미하일의 앞쪽을 향해 날아갔다.

“왜냐하면 난 미하일이 하고 싶어 하는 걸 하게 해 줄 거거든.”

“그게…… 무슨.”

군단장이 멍한 얼굴로 아드리안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눈앞에 펼쳐진 힘은 분명 미하일 왕자님에게 사전에 공유받은 남자의 인적 사항에는 없는 능력이었다.

나룻배 밖의 허공을 밟으려는 미하일의 발 바로 아래에 금빛 계단이 스으윽- 생겨났다. 여전히 검은 원만을 바라보고 있는 미하일의 발이 턱, 하고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그리고 그다음 발걸음을 위한 계단도, 그 계단의 위 계단도 아드리안은 손짓 한 번으로 만들어 냈다.

미하일을 위한 금빛 계단이 주우욱- 검은 원까지 이어졌다.

“……이게 원래 내가 알던 마법인가?”

선발대 중 하나가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대륙의 마나가 점점 줄어들면서 마법사의 존재 또한 드물었고, 그러다 보니 마법사가 낼 수 있는 힘도 한정적이었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금빛 계단은 지금껏 봐 온 간단한 원소 위주의 마법이 아니었다.

“아름다워.”

캐서린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감탄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하기보다는 고귀한 드래곤의 힘을 감상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어느덧 미하일은 금빛 계단의 가장 마지막 부분까지 다다랐다.

구우우웅———

검은 원이 금방이라도 미하일을 집어삼킬 듯이 공명했다. 아드리안은 묵묵히 계단을 따라 올라와 그의 팔짱을 꼈다.

“이제 뭘 할 거야? 네가 오고 싶어 한 곳까지 이렇게 데려와 줬잖아.”

“그래, 고마워.”

정신을 잃은 뒤로 지금껏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미하일이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잘못 들었나? 아드리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윽-!

커다란 바람이 불더니, 점점 더 거세졌다. 아드리안은 팔로 눈을 가리고는 미하일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대량의 마나가 움직이면서 만들어진 바람이었다. 아드리안의 힘은 아니었다.

미하일을 중심으로 지금 이곳의 모든 마나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왕자의 밝은 은발이 그 휘몰아치는 바람에 요동쳤다. 그러나 미하일은 여전히 눈을 환하게 뜬 채로 검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미하일!”

아드리안이 이를 악물고 그의 이름을 외쳤다. 왕자의 붉은 눈동자가 불타오르듯 빛나고 있었다. 그가 검을 쥔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왕자의 손바닥을 중심으로 엄청난 마나가 모여들었다.

미하일이 맑은 검기로 감싼 날카로운 검을 검은 원의 가장자리에 찔러 넣은 것이었다.

파삭, 쿠구우우웅——

굉음과 함께 검은 원의 가장자리가 커다란 틈을 내며 갈라졌다. 그 금에서 갈라져 나온 조각이 검은 호수 위로 하나둘씩 투둑, 떨어져 내렸다.

“……깨트린 건가.”

유효한 공격이군, 내 힘과는 다르게 저 힘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것 같은데.

흠, 아드리안이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 할 일은 마쳤다는 듯이 붉은 눈동자에서 천천히 빛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미하일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던 마나가 그와 동시에 빠르게 흩어졌다. 휘날리던 왕자의 은발도 점차 가지런하게 내려앉았다.

스으으윽-

다시 한 번 쓰려지려는 미하일의 몸을 아드리안이 가볍게 받아 냈다. 살짝 몸을 흔들어 보자 미하일의 눈이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조금 전처럼 붉게 빛나는 눈이 아닌, 평소의 눈동자였다.

“정신이 들어?”

아드리안은 미하일에게 물었다.

“무슨……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미하일이 중얼거렸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찬찬히 훑어 내렸다. 조금 전 검은 원을 횡으로 가를 때보다는 미약하기는 했지만, 펠렌 디프스의 검은 아직도 하얀 빛을 흘리며 잘게 떨고 있었다.

“이 빛은 도대체…… 그리고 이 계단은 뭐야.”

지금 아드리안과 자신이 서 있는 계단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마법인가?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걸어올라 왔지?

윽, 미하일은 검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을 움직이려다 낮게 신음했다. 그 신음 소리와 동시에 아드리안의 팔이 불쑥 시야로 들어왔다.

“이리 내.”

아드리안이 미하일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는 조금 아플 정도로 당겼다. 챙강! 그 바람에 검이 떨어졌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검이 계단 아래로 떨어지거나 말거나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미하일의 손을 들여다보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당장이라도 손바닥 가득 피가 뚝뚝 흐르는 것처럼 붉은 상처가 나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 상처를 확인하더니 간단히 진단을 내렸다.

“마나흔이야.”

“……그때처럼?”

미하일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잠깐 사이의 기억이 지워진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두 손바닥 위에 자신의 숨결을 후우욱- 불어넣었다. 그러자 미하일의 상처는 바람에 씻겨 내려가듯이 천천히 지워지더니 이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매끄러운 손바닥이 되었다.

미하일의 손바닥을 잠시간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이 안에 있어.”

“……감당할 수 없는 힘?”

미하일은 손에 힘을 줘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특별한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솔직히 그 힘을 어떻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아드리안은 퉁명스런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현 대륙에서 마계의 검은 마나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야. 그러니까 넌 이다음 시련도 분명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다.”

“다음 시련?”

“그래. 마계와 이 세계를 연결하는 건지 아닌지 확실하진 않지만, 저 검은 원이 쉽게 사라질 것처럼 보이진 않아서.”

아드리안의 시선이 뒤쪽의 검은 원을 향해 있었다.

쿠우우웅——

커다란 물체가 두꺼운 벽에 부딪힌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검은 원이 갈라지면서 정체 모를 괴수의 커다란 발톱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거의 사람 몇 명을 합쳐 놓은 크기였다.

발톱이 잠깐 어두운 틈 안으로 들어가더니, 다시 한 번 상이 크게 흔들렸다. 저 공간 너머에서 온몸으로 부딪히고 있는 것이었다.

쿠웅——!

괴수가 틈을 뚫고 이 세상으로 나오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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