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아드리안은 조용히 눈앞의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드래곤의 힘이라면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
원래 인간이라는 종족이 그랬다. 엘프처럼 뛰어난 운동 신경과 긴 수명을 가진 것도 아니고, 정령처럼 순수한 종족도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짧은 시간을 가지고 태어나 마치 그 한계를 잊은 듯이 삶을 불태우며 살아가고는 했다.
결국엔 미하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네가 가야겠지?”
이 많은 인간들 중에서 굳이 네가?
이미 미하일의 대답을 알고 있음에도 아드리안은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출정을 앞두고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천장화의 중심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아드리안의 표정이 굳었다. 그림 속 지옥 같은 광경이 그대로 실현된다면……. 그 순간은 바로 이번 출정이 될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이 든 것이다.
미하일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내가 맡은 역할이니까.”
“……네가 그렇게 대답할 줄은 알았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무척 미하일다운 결정이었으므로 괜히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드래곤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도울 힘이 있었다.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그러면 나를 데려가.”
인간 아드리안 헤더는 최정예 전력이 아니었으므로, 군단장이 정할 선발대에 속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 때문에 미하일의 입김이 좀 필요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만약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내가 필요할 거야.”
천장화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드래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정체불명의 감정을 정확히 명명할 수는 없지만, 결론은 이번에도 ‘미하일과 함께 간다.’였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하일이 죽어 버리는 것만은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아드리안의 눈동자에는 금빛 마나 알갱이가 물 흐르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드래곤의 눈동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었겠지만…… 그 정도로 드래곤을 유심히 관찰할 수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흔들림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언제나 시큰둥한 태도만 보이던 것과는 달리 지금 아드리안에게 어떤 틈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겨우 그 정도쯤이야. 내게 맡겨.”
미하일은 아드리안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아드리안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쓰다듬으려는 듯이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 끝이 뺨에 닿자 아드리안이 움찔, 눈가를 찡그리는 것이 느껴졌다. 미하일은 그 움직임에 손가락을 공중에 우뚝 멈춰 세웠다.
“……닿는 건 싫어?”
나직한 목소리였다.
아드리안은 자신의 뺨에 아주 살짝 닿아 있는 미하일의 손가락을 힐끔 눈으로 확인했다.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여 정면의 미하일에게 향했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놈은 가끔씩 이렇게 남의 몸에 손을 멋대로 대고는 했다.
“…….”
그의 손가락은 아드리안이 ‘싫다.’라고 말한다면 곧바로 떨어질 작정인 듯 굳어 있었다. 잠시간 고민하던 아드리안이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아니.”
아드리안의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던지 미하일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그는 드래곤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단 듯이 멈췄던 손가락을 그제야 움직였다. 강인하고 고귀한 생명체의 보드라운 살결이 손가락 끝에 감겨들었다. 딱딱한 비늘의 차가움이 아닌, 미하일 자신처럼 따뜻한 체온을 가진 존재였다.
미하일은 점차 대담하게 아드리안의 뺨을 스윽 문질렀다.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그를 쓰다듬어 보겠느냐는 욕심이 그새 차올랐다.
“…….”
처음에는 뭔가 목적이 있어 보여서 그냥 놔뒀는데 미하일의 손은 그저 뺨을 문지르기만 할 뿐이었다. 아드리안은 억겁의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 그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자신의 뺨을 조용히 허락하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왜 이렇게 만지는 건데?”
응?
즐기고 있었던지 살짝 웃고 있던 미하일이 아드리안의 질문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와 동시에 미하일의 손도 멈췄다.
“내 뺨은 왜 만지냐고.”
아드리안이 다시 묻자, 미하일이 빠르게 손을 거둬 갔다. 불시에 이뤄진 일이었다.
“……위로를, 네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위로해 주려다가.”
미하일은 다급하게 말을 이으려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부끄럽다는 듯 붉게 물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제멋대로 만지는 파렴치한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아드리안은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이런 걸 위로라 부르는 건가?”
미하일의 손바닥 온기가 사라진 부분을 아드리안이 슬쩍 자신의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아무래도 제 손으로 문지르는 것보다는 다른 존재가 만져 주는 것을 위로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강아지나 늑대들의 털을 가끔씩 쓰다듬어 주었던 것과 같은 행위인 것 같았다.
“멋대로 만져서 미안.”
미하일은 빠르게 사과한 후 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아드리안은 여전히 자신의 뺨에 손을 댄 채로 혼잣말을 했다.
“……그럭저럭 괜찮다는 뜻이었는데.”
위로라는 거.
아쉽게도 미하일은 드래곤만큼 청력이 좋지 않았으므로 아드리안의 혼잣말을 들을 수 없었다.
***
어떻게 설득한 건지는 알 수 없어도 미하일은 아드리안을 선발대에 포함시켰다. 군단장의 눈초리를 보아하니 조금이라도 걸리적거렸다간 곧바로 임시 기지로 돌려보낼 기세였다. 아드리안은 그런 날카로운 시선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넘겼다. 다른 인간들이 뭐라 생각하든 드래곤의 관심 밖이었다.
최소한의 전력으로만 구성된 선발대였다. 카일이 설명한 대로 한 시간 정도 걸어가자, 그들은 목적지를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누군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가 어디죠?”
아무도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륙의 지도상으로는 드넓은 평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검은 호수였다.
그 호수 앞에 선 원정대는 한동안 침묵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드리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
저 멀리 거대한 원이 공중에 떠 있었다. 세상의 것이라 볼 수 없는 짙은 검은색이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듯 빛조차 허락하지 않는 심연처럼 보였다. 그 검은 원에서 검은 마나가 느린 속도지만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나는 물보다는 오히려 진득한 초콜릿처럼 보였다. 그것은 공중에 떠 있는 구멍에서 호수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져 천천히 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양의 검은 마나라니…….”
캐서린의 힘 빠진 목소리가 광활하게 펼쳐진 검은 마나 호수 로 울려 퍼졌다.
모두가 그녀의 반응에 동의했다. 선발대는 눈앞의 풍경에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소름 끼치는 풍경의 호수를 빤히 내려다보는 것 이외에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오직 카일만이 그런 반응을 예상한 모양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카일이 그렇게 말하며 향한 곳에는 땅에 말뚝이 박혀 있었다. 카일은 주머니의 장갑을 꺼내어 착용하더니 말뚝에 묶인 밧줄을 세게 잡아당겼다.
끼익-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움직임에 점성 강한 검은 마나 호수 위로 조용히 파동이 일어났다. 밧줄을 몇 번 더 끌어당기자 성인 열 명 정도 탈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나룻배 하나가 저 멀리 모습을 드러냈다. 그새 검은 마나가 더 범위를 넓힌 탓에 이전에 준비해 둔 배와 호수 가장자리의 거리가 벌어진 탓이었다.
카일은 휴-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검은 마나로 더러워진 장갑을 벗으며 외쳤다.
“배를 타고 가지요. 이 나룻배에 타시면 됩니다.”
“……거기에 저희 전부 타도 될까요?”
캐서린이 중얼거렸다. 출정대의 인원이 딱 열 명이었는데, 자칫했다간 배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
“당연하지. 대신, 움직이는 동안은 배의 크기보다 큰 실드 마법을 네가 걸어 줘야 해.”
“그거야 당연히 할 수 있겠지만…….”
그녀의 반응에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카일을 믿지 못하겠다는 투가 역력했다.
“…….”
그것은 아드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드래곤은 바사미엘 클럽 오르디나스의 일원으로 일하면서 카일의 저런 태도에 몇 번 당한 탓에 그를 완벽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잠시간 조용히 상황을 판단하던 군단장과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발대는 그 배에 몸을 실었다. 한 명씩 올라탈 때마다 배에서는 끔찍하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금방이라도 바닥이 뚫려 검은 마나가 솟아오를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카일이 배에 올라타자, 일행 중 하나가 노를 젓기 시작했다.
동시에 캐서린은 커다란 실드 마법을 걸었다.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두 번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