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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75화 (175/184)

175화

드래곤의 의문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풀릴 듯했다. 카일이 조사했던 연구지, 그러니까 이 군단의 최종 목적지가 바로 근처였기 때문이다.

떼를 지어 달리느라 시끄럽게 울리던 말발굽 소리가 드디어 멎었다.

아드리안은 후미에서 자신의 말을 우아하게 멈춰 세운 뒤, 앞쪽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최전방에서 미하일이 바로 옆의 군단장에게 말하고 있었다.

“무사히 도착했군.”

“생각보다는 험한 여정이 아니라 다행입니다만…….”

그동안 마주친 마물이 다행히 한 마리도 없었다.

그러나 군단의 여정은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군단장은 낮게 깔린 시선으로 지평선을 훑어갔다. 앞은 조용하고 고요했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한 흙바닥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방향은?”

미하일의 질문에 커다란 지도를 두 손에 든 카일이 대답했다.

“곧장 직진입니다. 말을 타고 간다면 삼십 분, 도보로 간다면 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카일의 대답에 미하일은 잠시간 고민한 후 신속하게 다음 행동을 결정했다.

“그렇군, 그러면 절반은 이곳에 남아 임시로 기지를 세우고 나머지 인원은 도보로 움직이는 게 어떨까.”

왕자의 합리적인 결정에 옆의 군단장이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술서에 있는 규칙만을 고수하는 스타일이 아닌, 적당히 융통성 있는 지휘관이 될 재목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왕족이 공적만 바라보고 군에 지원한 줄 알았으나, 지난 몇 년간 그가 몸소 느낀 미하일은 절대 그런 왕족이 아니었다. 진지에서 미하일과 시간을 더 오래 보낼수록 왕자를 그저 풋내기 기사가 아닌 어엿한 동료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군단장은 고삐를 바투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결정입니다. 군마들에게도 휴식할 시간을 줘야 하니 그렇게 합시다.”

그의 말을 들은 옆의 병사가 뿔나팔을 불었다. 그러고는 공중에 팔을 들어 몇 가지 수신호를 보냈다. 우선 이곳에 임시 기지를 세우라는 신호였다. 가던 길을 멈추고 지시를 기다리던 병사들이 일제히 말에서 뛰어내렸다.

해가 지기 전 오늘 묵을 곳을 구축하려면 아마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었다.

***

천막을 펼치기 전에 가장 먼저 지휘관들을 위한 테이블이 흙바닥에 놓였다. 미하일과 군단장, 그리고 카일과 캐서린은 테이블에 펼쳐진 커다란 지도를 가운데에 두고 섰다.

카일은 지도의 어떤 지점을 검지로 짚은 채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이 군단의 현재 위치였다.

“전력이 없는 연구원은 최대한 여기에 남는 게 좋을 겁니다. 최소한의 인원만 움직여야 하니까요.”

“왜지?”

군단장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 역시도 모든 연구원들을 데려갈 생각은 없었으나, 카일의 문장 속 ‘최대한’이나 ‘최소한’이라는 표현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그건…… 여기서부터는 배를 타야 하기 때문입니다.”

“배?”

테이블 주변에 선 모두의 시선이 다시 카일의 손가락 끝으로 모였다. 이 근방은 모두 평지였다. 지도 위에도 호수나 강, 바다는커녕 아무 표식도 없는 대륙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가장 먼저 질문한 것은 미하일이었다. 카일은 그들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다시 보강했다.

“보고서에 썼던 것처럼 처음에는 그저 작은 물웅덩이 크기였습니다.”

툭, 그는 깃펜을 들어 지도의 어느 부분을 찍었다. 그러자 잉크가 아주 작게 지도 위에 찍혔다.

“하지만 그 범위가 점차 늘어났죠. 그 구멍에서 계속해서 검은 마나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카일이 깃펜을 가볍게 움직여 지도에 작은 원을 그리더니, 그보다 큰 원을 하나 더 그리고 다시 바깥쪽에 더 큰 원을 또 추가했다. 그것은 파동을 그리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점점 범위를 넓혀 갔다.

“그리고는 지금은 여기까지 검은 마나가 흘러나왔습니다.”

카일이 마지막으로 선을 그은 부분은, 군단이 지금껏 목적지라고 생각하고 달려온 지점이었다. 하지만 그곳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군단이 조사하려는 곳은 검은 마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중심지였다.

“마법으로 구멍을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임시방편으로나마 비슷한 크기의 마개를 만들어 구멍을 막아 보려고도 했었죠. 불로 태워 보기도 했었고, 모서리를 깨트려 보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방법도 통하지 않았죠.”

“…….”

카일의 이야기를 들은 모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고는 한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보고서로 확인한 것보다…… 조금 더 위험한 상황이군그래?”

군단장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트렸다. 카일은 침착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지체할 시간이 없어.”

미하일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검은 마나는 구멍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꾸물거리다간 그 범위는 자꾸 커져 결국에는 이 대륙 전체를 집어삼킬지도 몰랐다.

“인원을 빠르게 추려 보지.”

군단장은 미하일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재빨리 의자에서 일어났다.

짧고 간결한 군사 회의였다.

오, 상황이 그렇단 말이지. 아드리안이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대화를 엿듣는 아드리안의 두 눈이 평소와 다르게 일렁였다.

그때였다.

“여기서 뭐 합니까?”

아드리안의 두 눈에서 밝은 금색 빛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평범한 갈색이 된 눈을 움직이자, 군단의 후미에서 함께 말을 타고 달려왔던 조사원이 바위 옆에 서 있었다.

“아아,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힘들어서요.”

아드리안은 힘을 다 쓴 척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자 조사원은 맞장구를 치며 아드리안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 아무래도 하루 종일 공방에서 약초만 만지다가 이런 야외 활동을 하려니 힘들죠? 저도 사실 종일 말을 타고 이동해 본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러게요, 좀 힘드네요.”

하하, 아드리안은 멋쩍은 듯 미소를 지으며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거칠게 헤집었다. 아무래도 이놈은 농땡이를 치고 싶어 장소를 물색하려던 듯했다. 여기가 딱이긴 하지. 드래곤은 속으로만 생각하며 다시 저 멀리 군사 회의를 하던 테이블로 시선을 움직였다.

음? 다들 벌써 움직이는 건가?

어느새 테이블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아드리안이 미하일을 좇으려 고개를 빠르게 움직였을 때였다.

붉은 눈동자가 아드리안의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미하일과 아드리안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미하일도…… 나를 찾고 있었나?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시선을 마주한 채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드래곤의 그 조용한 미소에 미하일 또한 살짝 눈을 휘어 웃음 짓는 것이 보였다.

신기한 우연이었다. 인간의 형편없는 시력으로는 아마 이쪽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드리안은 벌떡 바위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미하일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었단 사실을 잊은 듯이 말이다. 아드리안은 지금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어, 어디 가요? 막사 짓는 걸 도우시게요? 그거 많이 힘드실 텐데.”

뒤에서 조사원이 말리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안은 빠르게 걸어가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다 쉬었습니다. 전 그럼 이만.”

지금은 미하일에게 가야 했다. 조사원이 이상한 놈이라며 투덜대는 것은 드래곤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미하일.

그는 마치 드래곤이 자신에게 걸어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가 성냥개비만 한 크기로 보일 정도로 아주 먼 거리였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아드리안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주위에서 소란스럽게 돌아다니는 다른 인간들의 움직임 따윈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단 태도였다. 아드리안은 발에 마치 날개라도 돋친 양 땅을 빠르게 박찼다. 그러는 동안 한창 자리를 잡고 있는 막사와 작업 중인 인간들이 그의 시야를 휙휙 지나쳐 갔다.

탁, 마지막 발걸음은 평범한 인간의 보폭보다 몇 배나 길었던 것 같았다. 인간이 아니란 걸 들키면 안 될 텐데. 그 사소한 고민은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에야 뒤늦게 아드리안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비로소 서로의 눈에 상대방의 인영이 맺혔다.

“좋지 않은…….”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느낌이 들어.”

애매모한 말이었다.

아드리안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투였다.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는, 영양가라곤 하나도 없는 말이었다. ‘느낌이 든다’라니.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인가. 아드리안은 입을 꾹 다문 채,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나 미하일은 그 표현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얇은 입술을 열었다.

“그러면 같이 가 줄 거지?”

그 말에 아드리안은 어딘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지금 인간의 껍데기가 아닌 드래곤의 몸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면 미하일의 말이 마음에 든다는 듯 꼬리를 천천히 흔들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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