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이가용-174화 (174/184)

174화

15. 단 한 순간을 위한 삶

혼란스러운걸.

드래곤은 곧바로 그 감정의 근원을 분석해 낼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은 아드리안이 자신의 마음속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감정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었다. 그러나 감정이라는 것은 지금껏 드래곤이 배워 온 학문 분야와는 전혀 달랐다. 그것이 자신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공식이나 실체로 증명할 수 없으므로 자꾸 혼란스러워지기 일쑤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드리안은 최대한 자신의 문제가 아닌 외부의 상황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를테면 캐서린의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래서 조합을 바꿔 봤거든. 그랬더니 아주 미약한 폭발 반응이-”

캐서린은 다른 인간들의 시선을 신경 써서인지 출정을 떠나기 전 막사에 잠깐 찾아왔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바사미엘에서 그랬듯 아카데미 후배로 대해도 되겠냐고 물어왔다. 드래곤이야 인간의 껍데기를 쓰고 있을 때는 그런 것들에 대해 매우 관대했으므로 흔쾌히 허락했다.

그 덕에 캐서린은 함께 출정길에 오른 아드리안 옆에 와서 쉼 없이 마법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왜 그런 걸까? 제일 마지막에 넣은 그 약초 에센스의 배합이 문제였을까?”

캐서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말에 올라타 있는 아드리안이 심드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상한 배합법이었지만, 그 문제는 아닐 겁니다.”

그 무심한 얼굴에서 흘러나온 것은 아드리안 헤더가 말할 만한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그럼?”

기대하고 있던 명쾌한 대답에 캐서린이 눈을 반짝이며 질문했다.

그때였다.

조사관 한 명이 캐서린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자꾸 이쪽으로 오십니까? 마법사는 더 앞쪽 열 아니었던가요?”

그는 왕족과 친한데다 왕국의 유명한 마법사인 캐서린이 퍽 부담스러운 듯했다.

“…….”

조사관의 말이 맞기는 했다. 후미에 속한 아드리안과 달리, 캐서린은 전방의 경계를 맡은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아드리안은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캐서린은 눈동자를 데루룩 움직이다가 큼, 하고 한 번 헛기침을 한 후 중얼거렸다.

“이쪽은 그저…… 아드리안과 잠깐 인사나 나누러 온 것일 뿐이야. 자리로 돌아가야지.”

그러나 곧바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직 아드리안의 답을 듣기 전이었다. 답을 듣고 제자리로 돌아가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아까 한 실험. 아마 시간이 문제가 아닐까요?”

의문문으로 끝났지만 사실은 그게 문제였다. 아드리안의 말에 남자와 대화하던 캐서린이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시간이?”

“네.”

아드리안은 고삐를 무심하게 한번 풀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마나와 섞기 전에 약초 에센스를 만드셨다고 하셨죠.”

“그렇지.”

“에센스를 만든 후에 충분히 상온에 식혔나요?”

“…….”

아니겠지.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반응이 나왔을 것이다. 아드리안은 이게 답이 되었냐는 듯이 턱짓을 한 번 했다. 오늘은 이만하라는 뜻이었다. 캐서린은 멍한 얼굴로 그날의 실험에 대해서 떠올리다가 드래곤의 축객령을 알아채곤 자신의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드리안이 다시 붙잡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응? 앞으로 이동하려던 캐서린이 우뚝 손을 멈추곤 옆을 돌아보았다.

“선배도 제게 질문을 하나 하셨으니, 저도 하나 하죠.”

“……네가? 아마 난 모를 텐데.”

캐서린은 의아한 투로 대답했다. 드래곤의 질문이라, 과연 그가 어떤 것에 대해 질문을 해 올 작정인지 당최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선배라면 아실 겁니다.”

아드리안은 캐서린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뭔데?”

캐서린은 말 위에서 귓속말이라도 들으려는 듯 상체를 조금 숙였다. 캐서린의 그런 배려 깊은 몸짓에는 아랑곳 않고 아드리안은 꼿꼿하게 앉은 자세 그대로 본론을 꺼냈다.

“선배가 한스를 처음 좋아하게 되었을…….”

“뭐?!”

캐서린의 높은 반응에 아드리안이 눈썹을 찡그리며 한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고선 짜증스레 투덜거렸다.

“……이게 그렇게 소리를 지를 만한 질문이었나요.”

“아니, 아. 미안. 네가 그런 질문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서.”

“계속 말해 보자면, 한스를-”

“이름은 굳이 안 말해도 좋을 것 같아.”

왜? 아드리안은 이상하다는 듯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발갛게 익어있었다.

미하일도 저랬는데. 아드리안은 속으로만 아주 살짝 웃었다.

“……이름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을 그 누군가를 좋아했을 때,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차리셨나요?”

아드리안이 궁금한 것은 캐서린과 한스의 미적지근한 관계에 대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필요 없는 부분은 과감히 넘겼다. 그 말을 들은 캐서린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녀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잠시간 하늘을 쳐다보더니 한참 뒤에서야 입을 열었다.

“……그게 질문이야?”

“네.”

“음……. 어렵네.”

캐서린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곧바로 대답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던 캐서린이 다시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때 보다 조금 전이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그러고선 눈가를 찡그리며 혼잣말을 다시 했다.

“그것도 아니었고.”

“…….”

아드리안은 그런 캐서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원래 감정은 혼란스러운 것이고, 그건 인간들도 그렇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캐서린은 뾰족한 대답을 하지 못한 채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곧바로 미하일의 날카로운 시선이 캐서린을 향했지만, 캐서린은 이제 실험이 아닌 한스로 가득 찬 자신의 머릿속을 정리하기에 바빴으므로 눈치채지 못했다.

***

한참을 줄지어 달려가던 말들이 군단장의 수신호에 따라 우뚝 멈춰 섰다. 말들의 투레질 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아직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휴식인가?”

아드리안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에서 뛰어 내렸다. 곧이어 말 한 마리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과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미하일이었다. 그의 머리색과 비슷한 흰 백마에 올라탄 모습이 늠름한 왕자다웠다.

“파견했던 조사단을 중간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이윽고 아드리안 바로 옆까지 다가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미하일이 말을 덧붙였다. 저 멀리 언덕 위쪽을 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였다. 누군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어? 미하일? 아드리안!”

그 누군가가 크게 팔을 흔들며 한달음에 뛰어왔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다.

미하일의 눈이 무심하게 그 방향으로 향했다가 다시 정면의 아드리안을 향했다. 그러고는 곧이어 불청객 탓에 잠깐 끊겼던 설명을 덧붙였다.

“……카일이 조사했던 곳이야.”

“널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순식간에 간격을 좁힌 카일이 덥석, 아드리안과 악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그 움직임에 미하일의 눈이 어이없다는 듯 차가운 빛을 띠었다. 왕족을 앞에 두고도 인사 한 번 없다니, 만약 그가 미하일과 몇 년간 시간을 보낸 지인이 아닌 일반 평민이었다면 벌을 내려도 모자랄 행동이었다.

카일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드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역시 걱정이 된 거구나? 안 그래도 미하일에 대해서 자꾸 물어보더니!”

“……도대체 언제 적 이야기야.”

레어에서의 만남을 언급하는 카일이 귀찮다는 듯 아드리안이 와그작 인상을 구겼다.

“카, 카일 선배님! 잠깐 이리로 와 보시죠.”

드래곤의 안색이 차가워지자 바로 옆의 캐서린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아드리안이 드래곤이란 사실을 카일이 모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캐서린, 너도 오랜만이다.”

카일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한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제야 자신이 궁중 법도를 어기고도 한참을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일이 미하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흥, 미하일은 영혼 없는 인사 따위 관심 없었으므로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카일에 정신 차리라는 듯 캐서린이 팔꿈치로 툭, 치면서 다급하게 말을 걸었다.

“지금 인사나 할 때가 아닙니다. 잠시만 마차 뒤로 오든가 아니면 조금 걸을까요?”

“야, 너무하다. 나 지금까지 말안장 위에 앉아 있었다고. 좀 쉬게 해 주라.”

“……선배는 진짜 졸업을 해도 여전하네요.”

캐서린이 지겹다는 듯 고개를 양옆으로 내저었다. 카일은 씨익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너도 그대로야. 그런데 다들 이쪽으로 자원했다니. 역시 내 보고서가 제일 눈에 띄었구나?”

미하일이 입술을 열었다.

“맞아, 이쪽에서 발견한 게 가장 흥미로웠거든.”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가 희망에 가득 차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모두의 앞에서 이 이야기를 직접 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다는 표정이었다.

“전에 보냈던 그 보고서. 그게 진짜라면, 마물들이 아니라 검은 마나 자체를 처리할 수 있다는 거잖아.”

검은 마나 자체를 처리할 수 있다고?

드래곤의 표정에 의문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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