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왕자님.”
멍한 얼굴인 미하일을 옆의 간부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러나 영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느라 미하일에겐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낯 뜨거운 고백을 들은 터라 저런 반응인 것은 이해하지만, 어쨌든 그는 오늘 안에 명단을 확정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병사는 할 수 없이 다시 한 번 더 미하일을 불렀다.
“저…… 왕자님?”
“응?”
“어떻게 할까요?”
그제야 미하일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조금 전 명단에 대해 큰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공지했던 간부가 왕자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미하일은 고민이 되는 듯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선 군중들 틈에 섞여 있는 아드리안을 내려다보았다. 간부가 왕자의 의견을 묻는 이유는 간단했다. 검은 마나가 쏟아지는 현장으로 파견되는 군단이었다. 아드리안 헤더는 전력이 아니었으므로 군단장의 허락이 필요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미하일이 아드리안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잠깐 따로 이야기하자는 뜻이었다. 드래곤이 갑자기 저런 돌발 행동을 하는 이유를 직접 알아봐야 할 것이다. 왕자가 몸을 움직이자, 아드리안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때였다.
“저도 함께 듣겠습니다.”
군단장 중 하나가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족은 아니지만, 루스타바란 군대에서 꽤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였다. 그도 미하일처럼 군단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자격이 있었다.
사감 섞인 결정을 섣불리 내리지 않도록 조언하겠다는 의도가 뻔히 보이기도 했다.
“……좋아.”
미하일은 짧게 동의한 후 남자와 함께 단상 밑으로 걸어 내려갔다. 아드리안은 아래에 우뚝 선 채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는 아드리안을 빤히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저 반짝거리는 눈을 보아하니, 내가 당황한 게 재미있나 보지?’
그는 미하일과 군단장을 향해 짧은 목례와 함께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밝은 햇빛에 반사된 그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가 활기찬 기운을 내고 있었다. 금발의 청년을 그저 왕자의 연인으로만 알고 있던 군단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권력을 등에 업고 막사에서 빈둥거리는 줄로만 알았는데, 직접 대면해 보니 제법 당찬 놈이었다.
재미로 도전한다는 거라면 바로 퇴짜를 놓으려고 왔더니만, 생각보다 진심인 듯했다. 그는 잠시간 고민하더니 아드리안을 향해 질문했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할 수 있지?”
그가 당연히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었다. 미하일은 군단장의 바로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아드리안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어차피 그들의 대화는 피상적인 것일 테다. 드래곤은 끝끝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야 말 것이니까.
드래곤은 뻔뻔한 얼굴로 조심스럽지만 당당하게 군단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바사미엘에서 조금이나마 약초에 대해 배웠습니다. 도움이 될 겁니다.”
진실이었다. 이후에 의구심을 가진 이가 다시 알아보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사실이었다. 아드리안의 입에서 ‘바사미엘’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군단장의 눈빛이 곧바로 달라졌다. 바사미엘은 루스타바란의 명문 아카데미였으므로 남자의 능력을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흐음.”
그러나 곧바로 허락하기엔 여러모로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군단장은 단호한 얼굴로 아드리안을 다시 한 번 떠보았다.
“그냥 재미로 신청하는 게 아니란 건가?”
“네, 누가 멍청하게 재미로 자신의 목숨을 걸겠습니까.”
“그러면 왜?”
“조금 전 이야기했던 그대로입니다. 미하일 왕자님을 옆에서나마 지키고 싶어섭니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사랑에 빠진 젊은 청년 특유의 당당함이 풍겨져 나왔다. 아드리안의 대답이 흡족했던지 군단장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선 미하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지원 병력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마음대로 하시죠.”
예외 상황을 내버려 두지 않는 융통성 없는 군단장이라 들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움직이다니 역시 저 뻔뻔한 태도 하나는 높게 살만 했다. 미하일은 이러나저러나 웃긴 지금의 상황을 숨기려 담담한 얼굴을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의견 참고하겠습니다.”
어린 군단장의 겸손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지 그는 허허, 하고 사람 좋게 웃으며 둘을 내버려 둔채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
아드리안과 마주 본 상태가 되자 미하일은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별로야?”
그에 드래곤이 먼저 고개를 기울이며 질문했다. 사전 상의도 없이 불쑥 깜짝 발언을 한 장본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미하일은 짧게 웃음을 흘리면서 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넘겼다. 저런 모습조차 귀여워 보이다니,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별로는 아니지. 당연히.”
미하일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분은 좋았다. 아드리안과 함께 검은 마나의 정체를 파헤치러 떠난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기대되기까지 하니까.
“하지만 따라가겠다는 진짜 이유가 궁금해.”
중요한 것은 이거였다. 조금 전 아드리안의 입에서 나왔던 이유는 그의 진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실력은 미천하지만 왕자님을 옆을 끝까지 지키고 싶습니다.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미하일의 곧은 시선이 아드리안에게 향했다. 마치 그렇게 빤히 드래곤의 얼굴을 본다면 가슴속 깊은 진심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진짜 이유?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 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만약 내가 바사미엘에서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낸 아드리안 헤더였다면…….”
나긋나긋한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바사미엘의 교정을 눈앞으로 불러왔다. 아드리안은 언제나 교정의 벤치에 앉아 오후의 햇살을 한껏 쬐면서 책을 읽었다. 그런 모습을 미하일은 멀찍한 곳에서 구경하고는 했다. 평화롭고 따스한 시간이었다.
만약에 그 아드리안이었다면, 어쩌면 미하일의 고백을 받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약초학을 배우고, 미하일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군대에 자원해서 들어왔을 것이다.
아드리안의 금빛 눈동자가 환하게 빛났다.
“만약에 그였다면 널 절대 혼자 보내지 않았을 거야.”
“…….”
그러나 미하일은 그 대답에 곧바로 수긍하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비틀며 질문했다.
“지금 그 말에 모순이 있다고는 생각 안 해?”
음? 아드리안은 이상하다는 미하일의 말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와 바사미엘을 함께 다닌 건 네가 맞잖아. 그건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너야.”
드래곤은 자꾸 아드리안 헤더와 자신을 분리시키려 들었다. 미하일은 아랫입술을 이로 짓씹으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네가 아드리안 헤더이든 루스 페니건이든 그건 그냥 이름일 뿐인걸.”
“……그건 그렇지만.”
맞는 말이었다. 언제나 이름은 그냥 이름일 뿐이라 스스로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 껍데기를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렇지만…….”
그러나 드래곤은 미하일의 저 말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진심으로 미하일과 함께 가는 것을 원했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만약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면 많은 것이 바뀌기 때문이었다.
“불가능한 일이야.”
드래곤이 고작 인간 하나를 원할 리가.
아드리안은 굳은 얼굴로 천천히 양옆으로 움직였다.
“아드리안.”
저렇게 혼란스러워하는 드래곤은 처음이었다. 아드리안이 외면하고 있는 그 진실을 알아챈 미하일이 입술을 다시 열었다.
“지금 네가 느끼고 있는 그 감정을 믿어.”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래도 감정에 대해서라면 드래곤보다는 어림잡아 몇십 년 정도 선배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미하일조차도 결정적인 순간에 인간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감정에 대해 완전히 알고 있지는 않았다.
인간은 대륙에서 유일하게 감정을 가진 종족이었다. 아니, 정말로 유일한 종족이 맞을까? 가끔 드래곤을 볼 때마다 미하일이 궁금했던 점이었다.
“그건 이 세상의 불가사의한 일들의 중 하나지.”
“……불가사의한 일.”
드래곤은 미하일의 이야기를 조용히 되뇌었다.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런가…….”
자신이 진짜 아드리안 헤더라면 했을 법한 결정을 따라 해 본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미하일의 말처럼 아드리안 헤더와 드래곤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곧 드래곤이었으며, 드래곤이 곧 아드리안 헤더였다.
미하일의 곁을 끝까지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이 바로 내 진심이라고. 드래곤은 인상을 살풋 찡그린 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드리안 헤더의 것인 양 외면하려던 그 감정을 그제야 대면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아드리안의 두 눈동자가 찬찬히 일렁거리고 있었다. 마치 금을 갈아 넣은 듯 밝은 알갱이가 요동치던 눈이 미하일을 향하자마자 우뚝 멈추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