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의미심장하게 말한 것치고 미하일은 크게 어려운 일을 부탁하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일정에 가끔씩 동행해 달라는 것뿐이었다.
가끔씩? 그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아드리안의 일상은 딱히 변화한 것이 없었다. 드래곤은 매일같이 여유롭게 진영을 산책하고 난 후, 이렇게 훈련장 구석의 나무 밑에 앉아 책을 읽고는 했다. 훈련 중인 다른 병사들이 아드리안을 가끔씩 곁눈질로 힐끔거렸지만, 정작 훈련장 정중앙에 선 미하일은 처음의 가벼운 눈인사 외에는 훈련에만 푹 빠져 있는 듯했다.
‘……훈련장에 와서 연인 티를 내 달라더니, 그럼 이쪽을 좀 봐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내내 훈련만 해서야 아무 의미가 없을 텐데.
오히려 아드리안이 책을 읽다 말고 잠깐씩 미하일의 훈련 경과를 살피고는 했다.
무거운 장검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위협적으로 휙휙 휘두르는 실력이 제법이었다. 대륙에서 검술깨나 한다는 인간들이 모여 있을 이 진영에서도 도드라져 보일 정도였다.
책을 무릎에 둔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미하일을 향해 멈춰 있는 것을 확인한 병사 하나가 고개를 양옆으로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이 위험한 전쟁터까지 따라왔다더니…… 진짜 둘이 뭔가 있긴 있나 봐요.”
순간, 병사를 향해 목검이 날아오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넌 훈련에나 집중해, 인마.”
탁!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아드리안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던 병사가 억울하다는 듯 무어라 대꾸했지만, 훈련 중 한눈을 팔았으니 혼나는 것도 당연했다.
그때였다.
“거기, 무슨 일 있나?”
또렷한 목소리에 병사 둘이 바짝 군기가 든 자세로 몸을 바로 세웠다. 검술 훈련 중에 사담하던 것이 발각된 탓이었다.
소문의 주인공,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 왕자였다. 병사 둘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분의 눈밖에 나면 이 진영에 발붙이기 힘들어질 것이다.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두 사람은 빠르게 외치며 곧바로 목검을 바투 쥐었다. 왕자의 붉은 눈동자가 그런 두 병사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는 한동안 훈련하는 병사들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모두들 집중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 멀리 나무에 기대어 책을 읽는 것에 집중한 아드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밝은 햇살이 그의 금발이 반짝일 만큼 비추고 있었다.
‘정말로 와 줬네.’
미하일은 입술을 꾹 다물고는 아드리안의 모습을 머릿속에 찬찬히 담았다. 바사미엘에서의 평화로운 한때 같지만,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언제 검은 마물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전장이었다. 이런 시간이 다시 오기 쉽지 않은 만큼 순간순간이 귀중했다.
“……여기까지만 할까요?”
미하일의 시선이 향한 곳을 확인한 부관이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왕자는 잠시간 고민하는 듯 조용히 아드리안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럴 수는 없지.”
단호한 목소리였다.
부관은 왕자의 결정을 듣고는 끄덕이며 병사들의 훈련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사랑보다는 대의를 선택한 미하일의 결정에 감동받은 눈치였다.
***
훈련이 끝난 후, 미하일은 흘린 땀을 닦아 내며 아드리안에게 다가왔다.
“힘들지는 않았어?”
이런 형식적인 인사까지 건네면서 말이다. 그 인사에 아드리안은 피식 한번 미소 짓고는 곧바로 대답했다.
“응.”
동시에 책을 탁, 접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미하일은 어느새 여기까지 달려온 종자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러자 언제 고된 훈련을 했냐는 듯 원래의 멀끔한 얼굴로 돌아왔다. 아드리안이 읽던 책을 힐끔 확인하더니 미하일이 제안했다.
“좀 걸을까?”
얇은 책이라 가지고 걷기에 거슬리지는 않아 보였다.
“그래.”
아드리안이 그 제안에 동의하자, 둘은 훈련장 옆의 넓은 공터로 향했다. 미하일은 인적이 드문 공터에 들어오자마자 아드리안에게 내일 있을 행사에 대해 간단히 언질을 주었다. 아마 이것이 이 산책의 진짜 용건이었을 것이다.
“……출정?”
아드리안의 두 눈에 의문이 올라왔다.
“조사차 떠났던 인원이 진영으로 돌아왔거든. 조사 결과에 따라 검은 마나가 가장 많이 쏟아져 나오는 유력한 후보지에 군단 몇 개를 파견할 거야. 나는 당연히 파견에 자원할 거고.”
“그렇군.”
매우 미하일다운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가 왕족 신분으로 자원하지 않았더라도 당연히 차출되었을 것이다. 최우선 차출 대상이 될 만큼 미하일의 검술 실력은 이제 대륙에서 따를 자가 없을 정도였다.
전력이 아닌 아드리안은 군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미하일은 막사 근처의 넓은 공터에서 아드리안과 마주 본 상태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내일부터는 훈련장에 나올 필요가 없어.”
“흐음.”
지금껏 미하일의 말을 듣고 있던 아드리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여기에 날 놔두고 갈 건가?’
아드리안은 속으로 생각하며, 미하일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드래곤을 진영에 놔두고 저 혼자 출정하겠다니, 정말로 자신을 ‘아드리안 헤더’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었다.
“왜?”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생각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한동안 조용했던 아드리안은 그제야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알았어. 잘 다녀와.”
그러나 미하일은 아직 드래곤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 잘 모르는 듯했다.
그가 드래곤을 자신의 연인인 아드리안 헤더로 취급하고 있다면, 이쪽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아드리안 헤더’가 그리 순순한 성격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
다음 날, 진영은 여느 때보다 복작거렸다.
새로운 얼굴이 드문드문 보이는 것이, 미하일이 말해 주었던 ‘조사차 떠났던 인원’이 도착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드리안이 평소처럼 진영을 한 바퀴 가볍게 걷고 있을 때였다. 저 앞의 공터에 인간들이 한데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명단 확인했어?”
“아니! 이제 확인하려고. 지금 뛰어가는 거 안 보여?”
“아, 괜히 내가 붙잡았네. 빨리 가 봐.”
그들이 이야기하는 명단이 저쪽 게시판에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드래곤은 막사로 향하던 발걸음을 급선회했다. 인간들이 많이 모인 곳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그곳에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공터에 들어서자 출정 명단을 붙여 놓은 게시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의 단상에는 현재 상황을 공유 중인 계급 높은 간부들이 앉아 있었다. 미하일 또한 그곳에 앉아 있었다. 아드리안이 공터에 들어서자마자, 미하일이 손에 든 양피지를 내려다보던 눈을 들어 올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그들 주변의 수많은 인간들은 마치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한 시선 교환이었다.
단상에 앉았던 간부 중 하나가 성큼성큼 걸어 나와 큰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말했다.
“명단에 이의 없는 자는 곧바로 이곳에 확인 서명을 하도록. 혹시 이상 있으면 말하고.”
간부의 지시에 병사들은 웅성웅성 서로 작게 이야기할 뿐이었다. 출정 명령에 따르지 않을 병사는 애초에 이 진영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였다.
척, 누군가의 팔이 군중 틈바구니에서 위로 올라왔다. 모든 시선이 단번에 그곳으로 향했다.
팔의 주인은 당연하게도 아드리안이었다.
단상 위에 선 간부가 그 팔을 확인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크게 떴다. 먼 거리였지만 손을 들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아드리안 헤더입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앉아 있던 미하일이 자리에 벌떡 일어섰다.
“……뭐?”
그러고는 조용히 중얼거리는 것이 아드리안의 귓가에도 들려왔다.
내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곤 아마 생각도 못 했겠지. 당황한 얼굴을 보여 달라고. 아드리안은 속으로 그를 비웃으면서도 얼굴에는 환한 미소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지금 이 몸이 드래곤이 아닌 진짜 아드리안 헤더라면 이렇게 덧붙였겠지.
“실력은 미천하지만 왕자님을 옆을 끝까지 지키고 싶습니다.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그의 얇은 입술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환하게 미소 짓는 아드리안의 얼굴에서 마치 꽃이 배경에 흐드러지는 것 같았다.
주변의 모든 인간들이 숨을 멈춘 듯이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말뜻을 이해함과 동시에 화르륵, 왕자의 얼굴이 발갛게 붉어졌다. 지금 저 말이 아드리안의 진심이 담긴 말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귓가가 붉게 달아올라 뜨거워진 것을 스스로가 느낄 정도였다.
‘……드래곤님과 정말로 무슨 사이인 건가?’
함께 단상에 있던 캐서린의 시선이 미하일에게 향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금 왕자는 드래곤의 고백에 부끄러워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만약 드래곤이 출정에 참여한다면 엄청난 전력이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