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짜증 나네.”
그 중얼거림을 미하일은 끝으로 심통 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드래곤을 노려보았다. 아드리안은 한동안 그의 이유 모를 분노를 받아 내다가 입을 열었다. 미하일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케인이었지 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한 점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 막사에는 왜 왔어.”
“……왜?”
아드리안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미하일의 두 눈동자가 양옆으로 흔들렸다. 잠시 조용하던 미하일은 그 후 언제 멈췄냐는듯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나는 오면 안 되나 보지? 카인은 매일 들락날락하던데.”
“……카인?”
“그래, 카인.”
“…….”
네가 방금 내보낸 놈의 이름은 케인이다만.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날선 반응에 두 눈을 살풋 찡그렸다. 그는 진짜로 종자의 이름 같은 사소한 것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오전에 훈련장에서 잠깐 스치듯 만났을 때만 해도 기분 좋아 보였는데, 미하일의 기분은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드리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케인은 당연히 너랑 다르지. 그는 내 막사에 매일 들어와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고 있으니까.”
그러고는 아주 잠시간 고민하다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안 그래도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었다. 주변에서 인간들이 서로 속삭이는 말들이 드래곤에게 들렸기 때문이다.
“네가 내 막사에 자꾸 이렇게 오면, 아무래도 다른 인간들이 더 의심하지 않겠어?”
이건 솔직히 미하일을 위한 조언이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그 사려 깊은 배려가 느껴지지 않았던지 도끼눈을 뜨며 되물었다.
“의심?”
“안 그래도 다른 인간들이 수군거린다고.”
“…….”
미하일은 묘한 표정으로 빤히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소문에 전혀 관심 없을 줄 알았던 드래곤이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미하일은 아드리안 주위를 서성거리는 다른 인간들의 가벼운 주둥이 단속부터 하지 못한 자신의 실책을 가장 먼저 인정했다.
하지만 인정한 것과 별개로, 아드리안이 이미 소문을 아는 거라면 그의 반응이 더 중요했다. 무엇보다 드래곤이 인간들 사이의 소문에 반응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발전이었다. 미하일은 슬쩍 아드리안을 더 떠보았다.
“그런 게 신경 쓰이나 봐?”
“음? 전혀.”
아드리안은 짧게 픽, 웃었다.
그 짧은 웃음과 동시에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가 멈칫, 굳었지만 드래곤은 계속해서 제 할 말만 이어 나갔다.
“나야 이렇게 있다가 떠나면 그만이지만…… 계속 남아서 그 쓸데없는 소문들을 신경 써야 하는 건 너인걸?”
“……아아.”
당황한 미하일이 곧바로 취할 수 있는 반응은 이것이 전부였다.
밖의 소란스러움을 막사의 천막이 차단해 주고 있던 터라 안 그래도 조용한 막사 내부였다. 미하일이 입을 꾹 다무니 적막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둘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그는 잠시간 조용히 가라앉은 아드리안의 얼굴을 바라보다 한마디를 차갑게 내뱉었다.
“그런 친절한 조언을 네게 들을 줄은 몰랐네.”
따뜻해 보여야 하는 붉은 눈동자에 어째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표면에는 친절하다는 말이 있었으나 왠지 모르게 말에 뼈가 있었다.
아드리안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네게 좋을 것 하나 없는 헛소문만 돌고 있다고.”
“내게 좋을 것 하나 없는 헛소문…….”
가장 거슬리는 부분을 미하일이 다시 짚어 냈다. 그의 눈에 한껏 짜증이 묻어났다.
“도대체 무슨 소문이길래 그래?”
미하일도 이미 그 소문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드리안이 붙인 저 수식어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해 주긴 하겠지만, 듣고 나서 괜히 다른 인간들을 괴롭히지나 마. 그들은 내가 작은 귓속말을 들을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네가 생각하는 내 이미지가 겨우 그 정도인가 본데.”
하, 미하일은 짜증 난 표정으로 거칠게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는 지금 다른 인간들을 괴롭히긴커녕, 신경조차 쓸 겨를이 없는 사람이었다. 미하일이 오로지 관심 있는 것은 지금 눈앞에서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드리안뿐이었다.
“너와 내가 연인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
아드리안은 단호한 목소리로 미하일에게 말했다. 마치 ‘너도 놀랐지? 나도 처음에 듣고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라는 말투였다.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데, 네가 내 막사에 자주 들른다는 것까지 퍼지면 괜히 거기에 더 힘만 실어 주는 꼴이 되겠지.”
“…….”
이야기를 들은 미하일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실대로 말할지 아니면 그냥 지나갈지 고민 중인 것이었다.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아드리안이 ‘난 이렇게 있다가 떠나면 그만이지.’와 같은 헛소리를 다시 지껄일 것 같았다. 그건 미하일에겐 좀 많이 곤란한 일이었다.
아드리안은 좀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렇게 마음먹은 다음에야 미하일은 굳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내가 의도한 대로 돌아가는 것뿐이니까.”
“……뭐?”
미하일의 폭탄선언에 아드리안의 눈이 살짝 확장되었다. 왕족인 미하일이 저딴 헛소문을 원했다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이 상황을 미하일이 오히려 의도했다. 분명 바사미엘 시절의 미하일은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가십거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었는데.
“왜지?”
아드리안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드래곤의 물음에 미하일은 굳어 있던 얼굴을 천천히 풀어내며 말을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너에게 질문해 대는 게 귀찮지 않아? 적어도 나는 그렇거든.”
“당연히 귀찮- 아, 그래서 다른 인간들이 내게 아무 말도 안 하는 건가.”
미하일을 말을 들은 아드리안이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전쟁 중인 진지에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 아드리안 헤더를 이상하리만치 아무도 경계하지 않았다.
“……그때 네가 그렇게 장담하던 이유가 있었군.”
왕족인 미하일의 연인이라 소문난 아드리안을 경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드래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를 검지로 매만졌다.
미하일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아드리안에게 말했다.
“그래, 혹시나 몰라서 덧붙이자면 내가 그 소문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냥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걸 놔두기만 했을 뿐이지.”
“…….”
미하일의 설명이 끝나도 아드리안은 말없이 다른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미하일은 아랫입술을 이로 깨물었다. 그런 소문에 멋대로 대응했다는 것에 드래곤이 화낼지도 몰랐다. 젠장, 괜히 사실대로 말했나.
미하일은 눈가를 살짝 내린 채로 입을 열었다.
“화났어?”
그 질문에 아드리안은 다른 곳을 향해 있던 시선을 미하일에게 되돌렸다. 그가 화낼 일은 전혀 아니었다.
“뭐, 잘했어. 그리 쓸모없지만은 않은 소문이었군그래.”
덕분에 꽤 편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식당에 들어설 때마다 힐끔힐끔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아드리안의 종자인 케인에게 은근슬쩍 질문해 댄다는 것 정도는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중 아드리안에게 직접 질문을 해 오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캐서린 에스티반이 자꾸 마법 수식이나 마도구에 대한 질문을 해 대는 것 빼고는 말이다.
아드리안이 별로 화난 것 같지 않자, 미하일은 괜히 더 미안해하는 척 시선을 내리깔았다. 본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이대로 굳힐 수 있는 마지막 한마디를 위해서였다.
“네가 지금이라도 싫다고 하면…… 나가서 바로 소문을 정정할게.”
막사 밖의 다른 누군가가 미하일의 표정을 봤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의 바로 앞에는 아드리안밖에 없었다.
“아니, 굳이 정정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여.”
“그래? 다행이네.”
“그럼 내가 따로 해야 할 건 없고?”
미하일의 고개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가 휙, 하고 들릴 정도였다.
“너도…… 도와주겠단 거야?”
생각지도 못한 월척에 미하일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진영의 다른 사람들이나 조금 전까지 의논하던 검은 마물에 대한 고민이 한순간에 미하일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지금 그에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 질문에 아드리안은 짧게 픽, 웃으며 대답했다.
“이봐, 이래 봬도 인간 세상에서 유희로 보낸 시간이 몇백 년이야. 그런 소문에 장단 맞춰 주는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더군다나 진짜 연인인 척할 필요도 없었다. 인간들의 눈이 이곳으로 향했을 때 연인 같은 ‘느낌만’ 주면 되는 일이었다.
미하일은 두 눈을 살짝 접으며 수줍게 웃었다.
“그래? 진작에 부탁할 걸 그랬네.”
이렇게 된 이상 아드리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잔뜩 있었다. 물론 아드리안이 정말로 들어줄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으로선 상상만 해도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