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괜히 카를로에 관해 물었다가 몰라도 될 비밀스런 관계까지 알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말을 왜 하다가 말아. 카를로는 왜?”
“지금 중요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굳이 알고 싶지는 않은 정보였기 때문에 미하일은 고개를 살짝 양옆으로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미하일이 말을 그만두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중요한지 여부는 내가 판단해.”
“…….”
바로 옆에서 묵비권을 행사하는 미하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미하일은 그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아드리안의 그 조용한 시선에서 느껴지는 채근에 미하일은 한동안 버티다가 이내 할 수 없다는 듯 짧게 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포기하지 않는 한 이 대치가 영원히 이어질 거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하일은 고집 싸움에서 백기를 들었다.
“오르디나스의 예언이 바뀌었다는 건…… 카를로와 이 던전에 다녀간 후 뭔가가 변한 것 때문이지 않을까.”
미하일의 조용한 목소리가 광활한 동굴 속에 울려 퍼졌다.
변했다? 아드리안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정확히 어떤 게 바뀌었다는 거지?”
그의 추론이 그럴듯했기 때문에 드래곤은 더욱 더 궁금해졌다. 미하일은 그런 아드리안을 마주 본 상태로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그게 궁금한걸. 한번 잘 생각해 봐.”
왕자는 드래곤이 살아온 시간 전부를 알지 못했다. 아마 던전을 돌파한 후 카를로와 지냈을 테니 그와 관련된 일이라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미하일은 자신의 까마득한 시조인 남자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가 자라난 왕성에는 카를로의 초상화가 여러 곳에 걸려 있었다. 역사를 공부할 때 배웠던 루스타바란 왕국의 건국왕 카를로는 무척 멀어 보이고 현실감이 없었으나, 아드리안과 함께하면서부터 그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아드리안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카를로가 아드리안에게 어떤 마음의 변화를 만든 것이다. 지금 바로 옆에서 생각에 잠긴 골드 드래곤 자신은 모르겠지만. 미하일은 입안을 거칠게 짓씹었다. 카를로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와 자신을 자꾸 비교하는 것이 치졸한 짓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는데.”
드래곤은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는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천장화에서 답을 찾아내려는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며 검은 마물들을 피하고 있는 그림 속 인간과 눈이 마주쳤다. 허공에 뜬 채 자신을 노리는 드래곤을 향해 살려 달라 말하는 듯한 절박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림 속 인간은 입만 벌리고 있을 뿐, 아무런 답을 말해 주지 않았다.
***
던전 지하에 들어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진영에 돌아오는 것도 드래곤에게는 손쉬운 일이었다. 붕- 떠올랐던 몸이 지면에 닿자 둘을 감싸고 있던 금빛 마나 알갱이들이 흩어졌다.
툭툭, 미하일과 아드리안은 대강 그 알갱이들을 털어 내고는 막사들이 모여 있는 진영으로 걸어갔다.
“……돌아가면 적당히 아드리안 헤더라고 말한 다음 장단만 맞춰 줘. 아마 저들끼리 상상의 나래를 펼쳐 댈 테니.”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미하일이 말했다. 그의 옆에서 성큼성큼 걸어가던 아드리안이 그 말에 의문을 표했다.
“전쟁에 도움도 하나 안 되는 사람이 왜 진영까지 왔는지, 사람들이 궁금해하지 않을까?”
인간의 마음 따윈 관심 없는 드래곤이 물을 만한 질문이었다.
낮에 그들의 이야기를 멀리서나마 들었던 사람들이라면 아드리안이 어떤 존재일지 절대 의심할 리가 없었다. 만약 의심하는 존재가 있다면 왕자가 적당히 손을 쓰면 그만이었다.
미하일은 아드리안을 향해 옅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아무도 너에게 그런걸 물어보지 않을 거니까.”
“……신원도 불분명한 인간을 그냥 받아들인다고? 그게 무슨 전장이야.”
애들 장난도 아니고, 아드리안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미하일은 자신 있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장담하지.”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
“……장담할 만했군.”
정말로 아드리안에게 도대체 어떤 분이시냐며 물어오는 인간은 단 한명도 없었다. 아드리안은 왕국의 열악한 경계 수준에 마음속으로나마 한탄했다. 뭐, 귀찮게 대답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긴 했지만.
던전의 천장화를 직접 보고 온 뒤로 아드리안은 진영의 막사를 하나 배정받았다. 미하일의 막사 바로 옆의 것이었다. 검 하나 못 다루는 일반인에게 주기에는 꽤나 번듯했다. 아드리안은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막사 천막을 휙, 거뒀다.
그러자 그 안의 선객이 반갑게 아드리안을 맞아 주었다.
“오셨네요!”
“응.”
검을 다루는 것도, 마법을 수련하는 것도 아닌 아드리안은 진영 주변을 하릴없이 걷다가 막사로 돌아오고는 했다. 가끔 타이밍이 안 맞으면 이렇게 막사를 정리하고 있는 소년과 마주치게 되었다.
아드리안은 그런 소년이 익숙한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한쪽 팔을 들었다. 소년은 빠르게 달려와 아드리안이 입고 있는 두꺼운 외투를 받아 갔다.
“이건 저기에 걸어 두겠습니다.”
“그래.”
“…….”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는 좀 달랐다.
선객이 무려 두 명이었다. 별것도 없는 막사에 손님이 둘이나 되다니. 아드리안은 막사 한쪽에서 소년과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미하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입을 꾹 다문 채 인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더 필요하신 건 없나요?”
좁은 막사에 인간이 둘이나 있으니 소란스럽게 느껴졌다.
“딱히?”
아드리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소년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아직도 아무 말 없이 고집스레 서 있는 미하일을 향해 물었다.
“미하일, 여기는 무슨 일이야.”
동시에 아드리안의 외투를 정리하던 소년의 귀가 쫑긋 세워지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할 일이 남은 건가. 아드리안은 무심하게 생각하며 막사 안을 주욱 둘러보았다. 깔끔하고 모든 것이 정리된 것을 보아 소년의 일은 더 없어 보였다.
미하일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던 듯했다. 그는 괜히 쓸데없이 잘 펴져 있는 이불을 더 정리하고 있는 소년에게 턱짓을 하며 말했다.
“뭐 해, 정리 끝났으면 나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말투였다. 어린애한테 쓸 만한 말투는 아니었다. 소년은 미하일의 날카로운 말에 바짝 군기가 들었던지, 몸을 바로 세워 반응했다.
“네, 넵! 전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더 시키실 일 있으시면 불러 주세요.”
그는 후다닥 짐을 챙겨 들더니 아주 빠르게 말하고선 막사를 벗어났다.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가 소년의 등이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가, 그제야 테이블에 앉은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생각했던 것이지만 이런 조잡한 막사도 마치 연극 무대처럼 보이게 만드는 남자였다.
“귀찮지 않아?”
조금 전 소년에게 차갑게 명령했던 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였다.
미하일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놈이 널 제법 따르는 것 같은데.”
“케인이?”
그런가? 아드리안은 눈썹을 찡그리며 케인이 자신에게 해 주었던 일들을 되새겨 보았다.
미하일의 막사에서 마주쳤던 소년의 이름은 케인이었다. 드래곤의 입에서 곧바로 나온 소년의 이름에 미하일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아드리안이 소년의 이름까지 알고 지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내게 말해. 왕성 교육을 받은 시종을 붙여 주지.”
“음.”
종자가 마음에 들고 말고랄 게 있나.
케인은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갚기를 원한다며 아드리안의 종자를 자청했었다. 드래곤이야 어차피 미하일의 옆에서 아드리안으로 지내려면 손이 하나라도 더 생기는 것이 편했으므로 흔쾌히 승낙했고. 그 뒤로 케인은 아드리안이 막사로 돌아오면 어디선가 나타나 외투를 벗는 것을 도와주거나 막사 내부를 정돈해 주고는 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여기저기 늘어놓은 책들을 한곳에 정리해 둔 걸 보면 눈치도 빠른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케인은 썩 괜찮은 종자였다.
“제 할 일을 그 나름대로 잘하는 것 같은데 뭐, 왕성의 시종보단 덜하겠지만. 편해.”
“그래?”
“왜 그런걸 나한테 물어보지?”
아드리안은 그제야 고개를 기울이며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목적이 수상했다. 아드리안의 의문을 미하일이 눈치챘는지 눈동자를 데루룩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케인은 원래 네 종자였잖아?”
그를 마주친 곳부터가 미하일의 막사였으니 말 다한 것이었다.
아드리안의 질문에 미하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종자 이름까지 기억하고 다닐 정도로 한가한 줄 알아?”
“…….”
요즘 한가해서 시종 이름이나 기억하고 있는 드래곤이 삐죽 입술을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