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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68화 (168/184)

168화

돌연 웃음을 터뜨렸던 아드리안은 한참 뒤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렇게 후련하게 웃은 적이 도대체 얼마 만이던가. 웃느라 살짝 접혔던 아드리안의 눈가가 천천히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그는 마지막으로 입가의 미소마저 지운 채, 평소의 무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미하일의 표정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왜?”

“……네가 그렇게 웃을 줄은 몰랐거든.”

그러자 지금까지 멍한 얼굴로 아드리안의 웃음을 바라보던 미하일이 말했다. 이쪽은 그 나름대로 진지한 대답이었는데…… 드래곤의 반응이 의아한 탓이었다. 미하일로서는 결연한 마음으로 진심을 담은 말이었으니, 거기에 아드리안이 웃는 것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음, 아드리안은 잠시간 입을 닫고 침묵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 웃음이라 본인도 그 이유를 말하려면 고민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아드리안의 멋들어진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비웃은 건 아니야.”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복잡한 머릿속을 단번에 정리해 주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에 더 가까웠다.

“……그래?”

진짜 비웃은 게 아닌 거 맞나? 겨우 저 말 한마디로는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미하일의 눈초리가 의심으로 샐쭉하게 가늘어졌다. 그 눈빛을 확인한 아드리안은 거칠게 머리를 흩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만큼 마음에 들었다고.”

지금까지 들었던 것 중에서는 제일 괜찮았어- 아드리안은 작은 목소리로 마지막에 덧붙인 후 주변을 휘익 둘러보았다. 자신의 얼굴에 닿아 있는 미하일의 곧은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아까부터 이쪽을 보는 인간들의 시선이 귀찮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하일은 살짝 고개를 틀어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향한 곳으로 시선을 따라 옮겼다. 그러자 언제나 심드렁한 눈빛만 보이던 드래곤의 얼굴 위로 떠오른 무언가 다른 감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아드리안은 아직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미하일에게 보란 듯이 와그작 인상을 찡그려 주었다. 미하일은 그런 아드리안에게 환하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로 마음에 들었어?”

“…….”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가 일렁이며 살짝 구부러졌다.

만약 오랜 시간 살아오며 아름다운 것에 면역이 생긴 아드리안이 아니라, 다른 인간이 그 앞에 서 있었다면 누구라도 단번에 반할 미소였다.

“그것도 제일?”

“비켜.”

자꾸 신경을 건드는 미하일을 향해 아드리안이 손을 휘적였다. 뚫어져라 자신을 보는 미하일의 시선이 좀 부담스러웠다.

조금만 더 귀찮게 굴었다간 뱉었던 말을 무르고 싶을 정도였다.

“……우릴 보는 저 인간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데. 어쩔 생각이야.”

아드리안은 이야기의 화제를 돌릴 겸, 미하일의 뒤편을 대강 턱짓하며 말했다. 저쪽은 정리가 좀 필요해 보였다.

미하일은 그 의도를 단번에 눈치챈 듯 짧게 픽, 웃었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면야 그걸로 좋았다.

스윽, 미하일의 고개가 뒤쪽을 향해 움직였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선 둘을 보던 병사들의 얼굴이 그제야 미하일의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전 막사에서 함께 뛰어나온 건지 캐서린도 그들 옆에 있었다.

원래라면 차갑게 일갈하며 신경 쓰지 말라고 외쳤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을 한번 바라본 미하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그래?”

원래 인간들은, 특히 미하일 같은 왕족들은 자신의 평판이나 소문에 예민하게 군다는 사실을 알기에 아드리안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미하일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아니, 오히려 더 편하게 되었어. 괜히 널 다시 소개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조금 전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라면 아드리안이 미하일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아챘을 것이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왕족인 미하일이 아끼는 상대에게 멋대로 굴 사람은 없었다. 아드리안이 드래곤이란 사실을 알려 줄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 정도야 알고 있는 것이 좋았다.

그런가?

미하일이 별것 아니란 듯이 반응하자 아드리안은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어차피 드래곤도 인간들의 시선 따위에 신경 쓰는 예민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냥 아드리안으로 괜찮다고 했지.”

드래곤은 미하일이 했던 이야기를 다시 되새기려는 듯이 말했다. 바사미엘에서 왕자와 같은 방을 썼던 룸메이트. 그리고 일 년 만에 실종되었던 아드리안 헤더. 멸망을 앞둔 인간들에게 아드리안이란 존재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미하일이 원한 것은 전능한 골드 드래곤이 아닌, 바로 그 ‘아드리안’이라고 했다.

분명 지난 유희를 계획했을 때까지만 해도 지금의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아카데미에서 약초학 공부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인류 최전선의 진영에서 미하일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줄이야. 아드리안은 뺨 언저리를 검지로 매만졌다.

“응. 그걸로 충분해.”

미하일의 또렷한 목소리에 아드리안은 묘한 얼굴로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일단은 이해했어.”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미하일의 말이 맞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려워하며 몸을 숨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르디나스가 예언한 것이 정말로 이뤄질 것인지, 미하일이 진짜 용사가 될지 지금은 알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드래곤은 자신의 마음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을 확인한 다음 말이다.

“그 전에 잠시 다녀와야겠군.”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스륵, 움직여 순간 이동 마법을 사용할 만한 공간을 찾으려는 순간이었다.

“음…….”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아마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바사미엘에서 아무 말 하지 않고서도 서로의 생각을 눈치챈 순간이 떠올랐다. 미하일의 검을 되찾으려 본관의 지하실로 가기 바로 전에 나눴던 것처럼 미하일의 눈빛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

“이 길이야?”

미하일의 목소리가 넓은 동굴 내부에 울려 퍼졌다. 손가락을 맞부딪쳐 몇백 년간 꺼져 있던 촛대에 불꽃을 일으킨 아드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드래곤의 손짓에 어두웠던 동굴이 순식간에 환한 대낮처럼 밝아졌다.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의문문으로 끝났지만 그런 것치고는 꽤나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이 던전에서 겪었던 일들은 하나같이 특이한 경험이었으므로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성큼성큼 아드리안은 어딘가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어차피 던전의 상층부에는 관심 없잖아.”

그들의 볼일은 던전의 최하층 가장 끝 부분에 있었다. 아드리안과 미하일은 조금 전 진지의 구석진 곳에서 순간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아드리안의 손짓 한 번에 눈을 감았다가 뜨자, 곧바로 이곳에 도착했었다.

“그건 그렇지.”

미하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과 함께 던전을 돌파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최단 거리’로 움직인다는 이야기란 걸 그제야 실감한 탓이었다.

그래도 조금 아쉽긴 했다. 골렘은 직접 보고 싶었는데, 그것은 아마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마치 이 던전의 주인처럼 빠르게 걸어가던 아드리안이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뒤따라가던 미하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기가…….”

앞을 바라보자마자 미하일은 이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찾아왔군.”

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신전이 하나 있었다.

광활하고 어두운 동굴에 홀로 밝은 빛을 내는 흰 대리석으로 세워진 것이 묘하게 비현실적인 장면을 자아냈다. 신전의 정면에는 커다란 문이 하나 있었다. 아드리안은 팔을 들어 올려 그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

드래곤은 신전의 문을 가볍게 열어젖히려 손에 힘을 줬다가 스윽, 힘을 뺐다. 그러고 보니 바로 이곳에 들어가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천장의 천사였다. 그것은 신전으로 들어간 모든 인간들을 죽여 버렸다. 이후 탐사대가 이곳을 살펴보았다고는 하지만…… 미하일을 데리고 들어가기에는 위험한 감이 있었다.

아드리안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문을 가볍게 열었다.

“넌 여기서 기다려.”

끼익-

몇백 년간 닫혀 있던 커다란 신전의 문이 열렸다. 흰 대리석 바닥과 기둥, 그리고 넓은 신전의 복도 끝에 보석이 놓여 있던 곳까지 그대로였다.

아드리안이 아무렇지 않게 그 안으로 빠르게 몸을 밀어 넣고 다시 문을 닫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미하일이 아드리안을 따라 신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밖에서 기다리려고 따라온 줄 알아?”

“너……!”

겁도 없이 결의에 찬 얼굴로 들어온 미하일을 향해 아드리안이 외쳤다.

“당장 나가!”

동시에 드래곤의 눈동자가 빠르게 천장으로 향했다. 만약 천사가 미하일에게 화살을 쏜다면……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그 힘을 막아설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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