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가지 말라니. 내가 어디로 가는 줄 알고.
삼 년 동안 성장한 탓에 아드리안보다 훌쩍 키카 큰 미하일이 길을 막아섰다.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그런 미하일과 아드리안을 바라보며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이야 들어 보지 않아도 뻔했다. 드래곤의 귀에는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귓속말이 바로 옆에서 오가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저 금발 남자는 왠지 낯이 익은데?’
‘그래? 미하일 왕자님과 도대체 무슨 사이길래 길 한복판에서 싸우고 있는 거지?’
무심한 표정으로 주변 사람들을 훑은 아드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적이 드문 곳까지 조금만 걸어 나가서 순간 이동 마법을 쓰려했더니, 이렇게 이목을 끌어서야. 아무래도 건방진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미하일을 해결해야 조용히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끈질기게 따라 붙은 걸 보니 그냥 놔뒀다간 아주 레어까지 따라올 기세였다.
“헛소리하지 말고 네 검이나 받아.”
아드리안은 차갑게 픽 웃으며 주먹으로 미하일을 밀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그 손에 들린 검에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싫어. 지금 안 받을 거야.”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드래곤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안 그래도 오르디나스의 예언 때문에 기분이 더러워져 있는 참이었다.
“미안하지만 지금 애들이나 부릴 법한 고집 따위 들어 줄 기분 아닌데.”
“…….”
고집. 아드리안이 꺼낸 단어에 미하일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갑자기 당한 어린애 취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하일은 아드리안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검을 받아 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저 검을 받아 들면 아드리안이 후련한 마음으로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짜증을 있는 대로 드러낸 아드리안의 얼굴이 시야 한가득 들어왔다.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아드리안의 손을 감싸 잡으며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알아. 그럴 기분 아닌 거.”
그의 또렷한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가득 채웠다.
“걱정하는 거잖아. 정말로 그 예언대로 될까 봐.”
확신에 가득 찬 미하일의 말에 아드리안이 인상을 와그작 구겼다.
“……뭐?”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걱정하다니. 내가 뭐를. 그런 건 인간들끼리나 할 법한 표현이었다.
자신의 손을 붙잡고 선 미하일의 손등을 휙, 뿌리치며 아드리안이 쏘아붙였다.
“걱정? 그런 거 따위를, 내가 하겠어?”
아드리안은 단어 하나하나 짓씹듯이 말을 뱉은 후, 끝까지 받아 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미하일을 향해 펠렌 디프스의 검을 내팽개쳐 버렸다.
그냥 알아서 주워 가라지. 가져가라고 몇 번이나 말했음에도 꿋꿋이 고집이나 피워 대는 놈에게 내리는 극약 처방이었다.
철컥!
미하일이 매일같이 손질하고 상처 하나 날세라 아끼던 펠렌 디프스의 검이 더러운 흙바닥에 떨어지며 돌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미하일과 아드리안을 바라보던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헉,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저 흰 검이 왕자님이 목숨보다 아끼는 검이란 사실 정도는 진영 내의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전에 누가 저 검에 손댔다가 어떻게 되었더라?’
누군가 팔꿈치로 툭, 옆 사람을 건드리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질문을 들은 병사는 미하일과 처음 보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로 대답했다.
‘말도 마. 바로 쫓겨났다던데.’
‘저게 누군지는 몰라도 저 금발 머리 남자는 오늘 사달이 나겠군. 거참, 저렇게 잘생겨 봐야 뭐 해? 눈치도 없이 굴다 왕자님 눈 밖에 나는걸.’
그들이 아는 미하일 왕자님은 여태 본 왕족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분이었으나, 선을 넘는 건방진 태도에는 칼같이 처분하는 냉정한 성격이었다. 아드리안은 수군거리는 인간들을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미하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그러나 미하일은 여태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검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모두가 숨죽여 미하일의 처분을 기다리는 순간이었다.
꿀꺽,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왕자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이들 중 하나가 긴장되었는지 목울대를 울린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다. 기사들의 걱정을 한눈에 받고 있는 금발의 잘생긴 청년은 상황 판단이 잘 안 되는지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쳐들고는 미하일이 꺼낼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미하일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그들의 상상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걱정했냐는 말이 그렇게 싫었어?”
동시에 미하일은 몸을 살짝 숙여 자신의 검을 가볍게 집어 들었다. 툭툭, 그는 무심한 얼굴로 검에 묻은 흙을 털었다.
왕자가 직접 검을 주워 들자 주위의 인간들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저 은발 남자가 진짜 미하일 왕자님이 맞느냐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미하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몸을 바로 세워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검을 던지는 건 심했군.”
목숨보다 아끼는 검이라 이야기해 준 걸 잊었나.
꾸욱, 미하일은 손에 익은 검집을 힘주어 잡았다. 아드리안이 방금 내팽개친 것은 그냥 검 한 자루가 아닌, 미하일의 마음 그 자체였다.
상처받은 듯한 미하일을 바라보며 아드리안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딱 봐도 멀쩡하잖아. 그리고 그 검보다 좋은 게 대륙에 얼마나 많은데 별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 떨기는.”
저 정도 생채기야 검을 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었다. 물론 펠렌 디프스의 검이 명검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유일한 명검은 아니었다. 아드리안도 레어에 몇 자루나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이 대륙에는 다른 명검도 많았다.
미하일은 애써 분노를 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 검을 왜 소중히 여기는지 정말 모르겠어?”
분명 드래곤은 인간보다 고귀한 존재였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미하일은 과연 감정도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존재가 정말로 인간보다 ‘더 대단한’ 종족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유를 말해 주지 않으면 아드리안은, 저 무심한 드래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고 지나갈 것이 뻔했다.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이야기를 들어 주겠다는 듯이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그야 네가 선물해 준 검이니까.”
“…….”
내가 바사미엘에서 선물하긴 했었지. 오르디나스가 정한 운명이라 어쩔 수 없이 선물했던 거긴 하지만 말이야.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단호한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당연히 명검이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저런 사소한 이유로 아끼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아끼는 거야. 아무리 너라도 그런 취급을 하는 건 용납 못 해.”
“흐음, 네가 용납 못 한다 하면 어쩔 거지?”
아드리안은 가소롭다는 듯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저 어이없는 이야기에 대한 반응이었을 뿐이었으나, 미하일이 또렷한 눈빛을 한 채 대답했다.
“난 카를로와 달라.”
미하일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이름이었다. 카를로라면 이전의 유희에서 그가 소드 마스터로 만들어 주었던 인간이었다. 내기에서 스스로 패배를 인정했기 때문에 들어준 소원이었다.
이어서 미하일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중얼거렸다.
“나는 절대 도망치지 않아.”
“…….”
그의 붉은 눈동자가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일렁이듯이.
아드리안은 잠시간 미하일의 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주 잠깐, 저 인간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그의 말처럼 미하일은 카를로와 달랐다. 미하일은 자신이 찾고자 하는 진실을 들을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붙었고, 결국에는 원하는 바를 성취해 냈었다. 과연 용사는 다르다 이건가. 드래곤은 지금의 상황에 대한 미하일의 생각이 조금 궁금해졌다.
굳게 닫혔던 드래곤의 입술이 천천히 열린 것은 조금 뒤였다.
“정말로 무섭지 않나?”
그에 비해 한없이 어린 인간에게 묻기에는 조금 부적절한 질문이었다. 심오했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라면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안함에 대한 것이었다. 미하일은 인류를 대표하기엔 한없이 어린, 치기 어린 청년이었다. 아마 짧은 생의 시간 동안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고민해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아드리안은 미하일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
“오르디나스가 이끌고 있는 이 운명의 끝이 그저 멸망뿐이라 해도?”
분명 아드리안은 미하일보다 살짝 키가 작은 청년의 몸을 가졌다. 하지만 그를 마주 보고 선 미하일은 드래곤이 내뿜는 거대한 위압감을 정면으로 느끼고 있었다. 미하일을 올려다보고 있지만, 마치 하늘 저 높은 곳에서 땅을 굽어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그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아드리안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 냈다.
운명의 끝이라……. 미하일의 두 눈동자는 떨림 하나 없이 담담했다.
그는 아주 잠깐 고민한 후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왜 두려워해야 하지?”
그 말에 아드리안의 두 눈이 샐쭉하게 길어졌다. 잠깐의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것을 깨트린 것은 아드리안의 짧은 웃음소리였다.
“……하.”
하하, 그 짧은 웃음에 왠지 모르게 후련함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