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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66화 (166/184)

166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오르디나스는 계속해서 아드리안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처음 마주친 동족의 죽음을 겪은 후 아드리안이 이 세상에, 아니 더 정확히는 오르디나스에 분노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 순간부터 드래곤의 금색의 비늘이 검게 물들어 타올랐다.

언제나 맑고 상쾌하다고만 느꼈던 몸 안의 마나가 새하얗게 불타오르며 검은 재로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대륙 위에 살아 있는 것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다는 살의로 가득 찼었지.

아드리안은 그 당시의 느낌을 되새기며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는 슬쩍 시선을 내려 테이블 위에 놓았던 손에 힘을 줘 꾹 쥐었다.

중요한 것은 그 진득한 살의가 그저 드래곤의 머릿속 상상에 그친 것이 아니었는 것이다.

‘내게는…… 그것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힘이 있다.’

아마 그것이 오르디나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힘일 것이다. 가끔씩 느껴졌던 한없이 거대하고 순수한 힘. 언제나 그 근원을 궁금해하던 아드리안에게 캐서린의 이야기가 답을 내려 주었다.

“루스!”

미하일은 루스에게 다가가려 한 발을 떼 내었으나, 루스를 중심으로 거세게 부는 바람에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번 더. 그는 발을 뒤로 옮기며 이를 악문 채 외쳤다.

“정신 차려!”

그때였다.

고개를 한껏 숙이고 있던 루스가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눈은 대낮에 뜬 달처럼 희게 빛나며 미하일을 마주 보고 있었다. 미하일은 그 이질적인 광경에 표정을 굳혔으나, 조금 전처럼 뒷걸음치지 않았다. 루스는 미하일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고룡에 대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떨어트렸다.

검은 마나에 침식되어 가는 아드리안을 겨우 막아섰던 건 바로 미하일이었다. 미하일이 잠시 맡겨 놓고 떠났던 펠렌 디프스의 검의 무게가 돌연 느껴졌다. 대륙은 지금 멸망하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가. 그 모든 것들은 나를 막기 위해서…….”

흠, 아드리안은 테이블을 조용히 내려다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이런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셀 수도 없는 시간 동안 탐구해 온 것은 아니었다.

“……아드리안.”

미하일은 팔짱을 낀 채로 조용히 가라앉은 아드리안의 표정을 확인했다.

지금 아드리안의 저 표정은 예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것이었다. 바사미엘의 검술 대회에서 우승을 한 후 신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려 관중석에 앉은 그를 보았을 때. 내면의 온갖 복잡한 심정을 겉으로는 하나도 보여 주지 않으려는 듯 차가운 얼굴이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미하일은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자신은 아직도 아드리안에 비하면 너무나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미하일은 지금 드래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그는 운명이나 오르디나스가 아닌, 아드리안 그 자체를 믿는 것이었다.

미하일은 단호한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몇백 년 전에 그려진 그림 하나 가지고는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어.”

생각에 잠겨 다른 곳을 바라보던 아드리안의 두 눈동자가 미하일을 향했다.

“어느 미치광이 화가의 작품 중 하나일 뿐일 수도 있잖아.”

“…….”

미하일의 말 안에 담긴 의도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을 빤히 바라보며 입술 한쪽 끝을 비죽 끌어 올렸다.

저렇게까지 진실을 외면할 필요는 없는데.

다행히 미하일과는 달리 캐서린은 객관적인 입장인지,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없어. 카를로 국왕 일행이 던전 끝까지 돌파한 이후에 재탐사하기 전까지 그 던전에 들어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걸.”

“그런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아무리 부정하려 들어도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림이 발견된 곳은 평범한 화가라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깊은 던전 속이었다. 게다가 시계탑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 높은 천장에 작업을 하는 일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미하일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아드리안이 먼저 자신의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말했다.

“그림이 어떻게 그려졌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그건 중요한 것도 아니지.”

그는 캐서린과 미하일의 대화를 깔끔하게 잘라 냈다.

아드리안은 실제로 그 천장화 위로 실시간으로 붓질이 더해지며 다른 이미지로 변하는 것을 직접 확인했었다. 그러니 그림이 끔찍한 장면으로 다시 바뀌었다는 사실은 곧바로 믿을 수 있었다.

“중요한 건 오르디나스가 그걸 통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는 것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아드리안은 시선을 어느 한곳에 고정한 채,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은 아니었다.

짧은 침묵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다가올 미래에 대륙을 멸망으로 이끌게 되는 존재. 아드리안의 한쪽 입술 끝이 뒤틀렸다. 생각해 보니 그건 드래곤에게 아주 어울리는 역할이었다.

“……생각보다 시시한 이유군.”

미하일과 캐서린은 말하기 꺼려 하는 그 진실을 아드리안이 직접 말했다.

“오르디나스는 대륙이 멸망하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 하는 거겠지. 모든 것은 대륙을 위해서이니까 너희가 오르디나스를 두려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

캐서린과 미하일의 눈길이 감정의 고저 하나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아드리안의 얼굴 위에 닿았다. 두 사람의 시선에 담겨 있는 것이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드래곤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오르디나스의 입장을 완벽히 이해했다.

천장화를 통해서 대륙 위의 약한 생명들을 지키고자 오르디나스가 아드리안에게 경고하는 것이었다.

이곳을 떠나라고. 네 분노가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기 전에.

“뭐, 그 천장화의 그림처럼 멸망의 원흉이 될 수 있는 나를 두려워하는 건 별개의 문제이지만.”

끼익- 아드리안이 몸을 갑자기 일으키자 의자에서 불쾌한 소음이 났다.

캐서린과 미하일이 갑자기 왜 일어나냐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아드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이만 실례.”

감정 하나 느껴지지 않는 단출한 인사였다. 도통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그는 그 인사를 끝으로 몸을 휙 돌려 막사 입구의 천을 들어 올렸다. 미하일은 그런 아드리안을 놓칠세라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이대로 돌아가는 건가? 미하일이 팔을 뻗었으나, 막사를 나서는 아드리안을 붙잡지 못했다. 그는 아랫입술을 이로 짓씹으며 드래곤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아드리안? 미하일! 어디 가?”

캐서린이 다급하게 등 뒤에서 그들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미하일은 그녀의 부름에 반응해 줄 시간이 하나도 없었다. 아드리안의 등이 사라지기 전에 그를 따라 뛰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드리안!”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남자였다. 미하일은 이를 악물었다.

진지를 지키던 병사들이 의아한 눈으로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왕자와 함께 이 진지에서 부대끼며 지냈지만 저런 표정을 처음 본 탓이었다. 그들은 자연스레 미하일이 다급하게 부르고 있는 이를 확인하려 고개를 스윽 내밀었다. 평소라면 본인 볼일이나 신경 쓰라며 일갈했을 미하일이었겠지만 지금 다른 사람들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커다란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아드리안, 거기 안 서?!”

미하일의 목소리에 아드리안의 발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려 자신을 향해 뛰어오고 있는 미하일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따라오는 거지?

이대로 아드리안은 레어로 돌아갈 셈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대륙에 해가 되는 거라면 그는 조금이라도 그 순간을 늦춰 줘야 할 책임이 있었다. 물론 정해져 있는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겠지만, 많은 생명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약한 인간들 입장에서는 벽화에 담긴 예언이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하일이 지금 저렇게 다급하게 따라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

아드리안은 잠시간 그 이유를 고민하다가 작게 감탄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한쪽 손에 쥐고 있는 검 하나의 무게가 그제야 느껴졌기 때문이다. 철컥, 검은 이제야 알았느냐는 듯이 쇳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아드리안은 검을 잠시간 내려다보다가 바로 앞까지 뛰어온 미하일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래, 미하일이 목숨보다 아낀다던 검이었다. 이거라면 저런 표정으로 여기까지 뛰어올 만했다.

“아, 맞아. 이걸 돌려줘야 했군.”

아드리안의 팔이 불쑥 미하일의 앞으로 내밀어졌다. 그의 손안에는 펠렌 디프스의 검이 가볍게 들려 있었다. 미하일이 그를 잡으러 온 이유는 이 검밖에 없다는 확신에 찬 손짓이었다.

“…….”

순간 저 검을 잊고 있을 정도로 다급하게 그를 쫓아왔던 미하일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겨우 검 하나를 돌려받기 위해 아드리안을 붙잡은 것이 아니었다.

“어디…….”

미하일은 검을 한번 내려다보곤 다시 아드리안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입술을 열었다.

“어디 가는 거야.”

“너무 당연한 질문이라 대답할 가치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런 사소한 질문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춰 세우고 대답까지 해 줘야 하나?”

아드리안은 짜증스레 반응했다. 동시에 그는 빨리 가져가라는 듯이 검을 쥔 손을 다시 한번 내밀어 미하일의 가슴께에 올려붙였다.

그러나 미하일은 자리에서 뒷걸음질 한 번 치지 않은 상태로 입을 열었다.

“가지 마.”

인간 주제에 오르디나스의 경고를 무시하는 당돌한 태도였다.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을 바라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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