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
캐서린이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자, 옆에 앉아 있던 아드리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신 입을 열었다. 드래곤은 그녀가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주야장천 기다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미하일의 말을 못 믿겠어?”
또렷한 목소리에 캐서린이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뚫어지게 자신을 향해 있는 아드리안의 투명한 금안과 마주하게 되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모든 것을 굽어보는 듯한 고귀한 이의 시선이었다.
저 시선과 마주한 다음에 그가 그냥 평범한 인간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드래곤은 스스로를 더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그를 둘러싼 오라가 완벽히 드래곤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캐서린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위대하신 드래곤님을 의심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으음.”
아드리안은 고민하는 척 짧게 침음을 냈다. 그리고는 캐서린을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테이블에 팔을 대고 턱을 괴었다. 드래곤의 시선을 눈치챈 캐서린이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으나, 이미 숨기기에는 늦었다.
“그러면 그 미적지근한 표정은 뭐지?”
“……미적지근하다니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지금 네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그 이유를 묻는 거야.”
“…….”
캐서린은 아드리안의 지적에 정곡을 찔렸는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드리안의 이야기에 가만히 대화를 듣던 미하일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움직였다. 캐서린이 답을 망설이자, 미하일도 마찬가지로 그 ‘이유’라는 것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다름이 아니라.”
그러던 캐서린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던 입술을 가까스로 열기 시작했다.
드래곤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자코 기다리던 드래곤이 다시 질문하려 했던 타이밍이었으므로, 눈치가 제법이었다. 아드리안은 말을 이어 가는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드래곤님이 이 전장에 있다는 것이…… 어쩌면 지금이 그 예언된 순간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예언된 순간. 아드리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드래곤의 심기가 불편해질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캐서린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몇백 년 전 던전에서 발견된 천장 벽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녀는 망설이던 것치고는 무척 담담하게 사실을 전달했다. 아드리안은 턱을 괸 자세로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던전에서 발견된 천장 벽화’라면 그도 아는 바가 많았다.
보석은 전설 그대로 대륙의 운명을 바꾸었다.
바로 고귀한 드래곤의 힘을 써서 말이다.
“예언인가?”
-그러나 도대체 누가? 드래곤은 천장의 벽화를 노려보았다.
그 기묘할 정도로 깨끗하고 차원 높은 마나. 그리고 순식간에 물 흐르듯이 변화하던 그림과 끝에 가서는 숲속의 인간 하나와 골드 드래곤의 이미지로 변한 것까지, 드래곤은 그 특이한 경험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캐서린의 다음 이어진 말에서 의아하단 듯이 눈가를 찡그렸다.
“대륙 전체가 검은 마물들로 뒤덮인 끔찍한 그림이지요. 지옥이라 묘사해도 좋을 정도로 잔혹했습니다.”
“……잠깐.”
캐서린의 설명은 아드리안이 직접 경험했던 사실과 달랐다.
아드리안은 손을 슬쩍 들어 그녀의 이야기를 멈추고는 중얼거렸다.
“끔찍한 그림이라고? 무척 평화로운 그림이 아니었나? 내가 아는 벽화와는 다른데. 네가 말하는 그게 만약 던전에서 내가 카를로와 발견한 그 천장화가 맞다면…… 그 그림은 울창한 숲속에 골드 드래곤이 인간 하나에게 검을 하사하는 이미지였어. 물론, 그림이 또 변했다는 건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야. 내가 봤을 때에도 그림이 한 번 바뀌었었거든.”
“……역시 그렇군요.”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서에 언급된 ‘루스 페니건’이 바로 아드리안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던전을 처음 돌파한 것이 루스 페니건과 카를로 데 이네하트 국왕이었다. 카를로는 즉위 후 조사단을 여러 차례 파견하여 그 던전을 면밀히 조사했었다. 돌연 자취를 감춘 루스 페니건의 행적을 되짚으려 한 명령이었으나, 조사단은 드래곤의 흔적은 전혀 찾지 못했고 뜻밖의 수확만 얻어서 돌아왔다. 던전의 천장화였다.
“카를로 데 이네하트 국왕도 당신과 정확히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심지어 벽화의 그림이 변한 것을 직접 확인했다는 이야기까지도요. 처음의 천사 그림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도 하셨지만…….”
캐서린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양옆으로 저으며 말했다. 카를로 국왕의 이름이 언급되자 옆에서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하일이 상체를 테이블로 기울였다. 캐서린의 이야기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의미심장하고 진지했다. 그녀가 말하고 있는 천장화는 미하일도 이미 알고 있는 그림이었다. 지금껏 그저 이상한 괴짜 화가의 작품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천장화였다. 그 당시, 카를로가 토벌했던 마물과의 전쟁을 묘사했다기에는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그림을 그저 어느 화가의 상상으로만 치부했던 것이다.
“그 뒤로 벽화의 그림이 바뀐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몇백 년 동안 천장화는 끔찍한 지옥의 이미지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붓질 하나하나까지 비교해 보아도 완벽히 일치했죠.”
“…….”
아드리안은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스윽, 테이블에 기대 있던 상체를 뒤로 빼내어 별것 아니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놀랍긴 하지만, 그 천장화 이야기가 지금 무슨 관련이 있지?”
분명 캐서린이 이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아드리안의 태도에 캐서린과 미하일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들의 시선이 테이블 어딘가에서 맞닿아 과연 이 이야기를 위대하신 드래곤님에게 해도 될지 망설이는 것이었다. 아드리안은 그들의 고민을 눈치채곤 작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편하게 말해. 난 지금 궁금해 죽을 지경이니까.”
궁금해 죽을 지경인 것치고 드래곤은 매우 심드렁한 표정이었으나, 캐서린은 그 허락에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 그림의 중심이 어떤 것이 그려져 있는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그 대륙의 모든 것을 끔찍한 죽음으로 만들고 있는 것 말입니다.”
“캐서린.”
미하일의 또렷한 목소리가 캐서린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얼굴을 굳힌 채, 자신에 대한 불쾌한 오해를 들은 것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캐서린이 말하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왜 그녀가 지금 이 상황이 오르디나스에 의해 예언된 것이라고 말하는지도 이해했다. 어젯밤 갑자기 자신의 막사로 찾아온 아드리안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만약 아드리안이 그에게 그 정도로 큰 의미를 가진 드래곤이 아니었다면, 미하일 또한 캐서린과 같은 추론을 곧바로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가설의 사실 여부와는 관련 없이 미하일에게는 지금 눈앞의 아드리안이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만 전달해도 충분해.”
그렇기 때문에 사감이 섞여 있는 캐서린의 이야기에 제지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캐서린은 그제야 지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이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다. 그녀는 빠르게 말하려다말고 한번 호흡을 멈춰 가다듬었다. 큼, 하고 격앙된 감정을 추스른 뒤 캐서린은 입을 열었다.
“천장화에는 말씀드린 대로 검은 마물들이 뒤덮인 대륙이 그려져 있고…… 그 중심에는.”
캐서린의 눈동자가 힐끔, 아드리안의 표정에 닿았다가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잔인하리만치 아름다운 골드 드래곤이 검은 마나에 물든 채로 포효하고 있으니까요.”
“…….”
골드 드래곤. 아드리안은 눈이 샐쭉하게 길어졌다. 그런 아드리안을 확인한 미하일이 옆에서 말을 덧붙였다.
“그냥 우연의 일치일 거야.”
“그럴 수도요.”
캐서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저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삽시간에 검은 마물들이 대륙을 뒤덮었을 때에만 해도 천장화는 그저 어느 화가의 상상으로만 치부했죠. 몇백 년 전 행적을 감췄던 골드 드래곤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을 듣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이래도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드리안은 조금 전 마수들로부터 진지를 지켰어.”
미하일은 골치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캐서린의 말을 반박했다. 둘의 시선이 공중에 맞닿으며 서로의 진심을 의심하는 찰나였다.
“어쩌면 그 천장화가 진짜 대륙의 미래를 예상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조용히 입을 닫고 혼자 생각하던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심지어 그는 이미 비슷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고룡의 죽음을 겪은 후 오르디나스의 의지에, 운명에 반감을 느꼈을 때였다. 그때, 언제나 태양처럼 밝게 빛나던 금색의 비늘이 검게 물들어 타올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