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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64화 (164/184)

164화

조금 전의 마나 부작용을 하늘 위에서 날고 있는 다른 마수들도 느낀 듯, 어느샌가 무리를 지어 막사를 공격하려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선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목숨을 보전할 길이라는 것을 아둔한 머리로도 직감한 것이었다. 거리를 좁혀 하강하려 했던 마물들이 다시 하늘의 검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

“…….”

아드리안은 검을 갈무리해서 검집에 밀어 넣은 후, 무심한 얼굴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소년과 아이들은 커다란 눈망울을 떨어트릴 모양새로 입을 바보같이 벌린 모습이었다.

남자가 검을 움직인 횟수는 단 한 번이었다. 가벼운 움직임과는 달리 커다란 폭발음이 들리고, 광범위한 바람이 불었던 것이었다. 주둥이를 크게 벌리며 날아오던 마수가 그 한 번에 녹는 듯이 사라졌다.

“……용사님이셨군요…….”

어린아이 하나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루스타바란 왕국의 아이라면 모두가 한 번은 읽어 보았을 동화 이야기였다. 실제로 남자의 손에 들린 것은 이전 세대에서 이름을 알린 용사 ‘펠렌 디스프’의 검이었다. 이름을 알려 주지 않으려 한 것도 당연했다. 용사라는 이가 고작 아이 몇 명을 구해 준 것에 자신의 이름을 고하지는 않을 터였다.

“뭐?”

용사라니. 내가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할 리가.

아드리안은 인상을 와그작 구겼다. 그러길래 아까 가라고 했을 때 빨리 갔으면 이쪽이 검을 휘두르는 일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가 단호하게 다시 한번 아이들에게 돌아가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아드리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드래곤의 입술을 멈추게 만들었다.

익숙한 이름에 드래곤이 한쪽 눈썹만 들어 올렸다. 그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긴 흑발 머리의 캐서린이 서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 몇 명이 따라붙었다.

“……네가 어떻게……?”

캐서린의 눈은 지금 이 광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커졌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사미엘의 아드리안과 지나치게 똑같은 외양을 가진 남자였다. 바사미엘 재학 당시 실종되어 죽은 것으로 결론 난 그 아드리안 말이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캐서린의 시야에 아드리안이 가지고 있는 펠렌 디프스의 검이 들어왔다. 미하일이 목숨같이 여기던 검이었다.

“……이미 만났나 보네.”

차가운 목소리였다. 아드리안은 자신의 검에 캐서린의 시선이 닿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뭐, 그렇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진짜 아드리안이 아니었다면 캐서린의 말을 이해 못 했을 대화의 흐름이었다. 그 대답에 캐서린의 눈초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저 남자는 진짜 아드리안 헤더였다.

아드리안은 캐서린의 의심을 이해한다는 듯이 샐쭉 두 눈을 접어 웃었다. 그리고선 누구라도 반할 만한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캐서린 선배.”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캐서린이 이를 악물고 짓씹듯이 말을 뱉었다. 그녀에게는 아드리안의 저 완벽한 미소가 소름 끼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때 네가 미하일에게 한 행동은 해서는 안 될 짓이었어. 알아?”

그런가?

그녀의 분노가 느껴짐에도, 아드리안의 짙은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잠시간 아무 말 없이 캐서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술을 열었다.

“간만에 만나 이렇게 반가워하는 건 좋지만…… 우선은 아이들을 실드 안으로 보내죠. 뭐, 마물들은 돌아갔지만 만약을 위해서.”

“…….”

아드리안의 말에 그제야 캐서린의 눈동자가 옆으로 움직였다. 휘둥그레 눈을 뜬 채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 셋이 보였다. 소년과 아이들은 캐서린이 남자를 지칭했던 ‘아드리안’이라는 이름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하아, 캐서린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여태 그녀의 등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사 중 몇 명에게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오라고 명령했다. 아이들은 아마 이후로 평생 다시는 볼 기회가 없을 용사님의 모습을 두 눈으로 담은 후, 순순히 병사들과 함께 움직였다.

“됐지? 넌 이리 따라와.”

캐서린은 어려운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는 듯 아드리안을 어딘가로 이끌었다. 아드리안은 알았다는 듯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캐서린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그녀가 이끄는 방향으로 걸어가면 갈수록 누군가의 마나가 느껴지는 걸 보면 목적지가 예상이 갔다. 휙, 그녀가 어느 막사의 천을 옆으로 걷었다.

“캐서린.”

미하일이었다.

그는 전술 지도를 앞에 펼쳐 놓은 책상에 앉아, 캐서린을 맞아 주려다 그녀의 뒤에 있는 아드리안을 확인하고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같이 왔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봤을 때에는 잘 어울리는 미남과 미녀 조합이었으나, 둘의 성격을 알고 있는 미하일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아드리안이 조금 전의 마나 반작용을 일으킨 장본인이야.”

“……그래?”

미하일의 시선이 아주 잠깐 아드리안의 얼굴에 닿았다가 다시 되돌아갔다. 아드리안이 마법을 쓴 것은 의외였으나, 그가 그 마나 반작용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데에는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 정도로 순수한 마나는 인간이 가지고 있을 수 없을 테니.

캐서린은 그런 미하일의 반응에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나를 전혀 다룰 수 없었던 아드리안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네.”

“…….”

한 문장으로 줄여 이야기하기에는 둘 사이에서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캐서린의 이야기를 들은 미하일은 그 모든 사건 사고를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했다. 바사미엘에서부터 이 전장까지, 캐서린은 출중한 마법사로 서로 등을 맡길 수 있는 전우였다. 당연히 아드리안과 관련된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하려고는 했었다.

그때가 이렇게 성큼 다가올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끼익- 아드리안은 둘의 대화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얼굴로 옆의 의자를 뒤로 끌었다. 그러고는 털썩 그 의자에 앉았다.

미하일은 이쪽을 힐끔 한 번 눈짓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정체를 지금 캐서린에게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할지 고민 하는 것이 뻔했다. 아드리안은 피식,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아무렇게나 설명해도 좋았다. 사실대로 드래곤이라 설명해도 되고, 임기응변식으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해도 관심 없었다.

“사실은…….”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그런 허락에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러고는 바사미엘에서 도헤니어 화산에 갔었던 일, 아드리안이 펠렌 디프스의 검을 줬던 일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캐서린은 얼빠진 얼굴로 그 이야기를 들으려는 참이었다.

“앉아서 들어.”

아드리안은 친절하게 자신의 옆자리 의자를 빼내 주었다. 캐서린은 정신없는 얼굴을 끄덕이며 그 자리에 앉았다. 미하일은 이어서 그들이 답사를 함께 떠났던 일, 그리고 그 절벽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설명했다. 도헤니어 화산이나 검을 선물했다는 것은 몰랐지만, 그의 마지막 아드리안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은 캐서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힐데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아드리안과 함께 미하일의 이야기를 다시 듣고 있자, 묘한 감정이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캐서린은 미하일의 이야기를 잠시 멈춘 후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그래서?”

지금 미하일이 하고 있는 이야기는 죽은 아드리안이 갑자기 살아 돌아온 것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한동안 이야기를 늘어놓던 미하일은 화자를 배려하듯이 아주 잠깐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듣고 싶어 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챈 캐서린이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캐서린. 드래곤의 유희라는 걸 들어 본 적이 있을 거야.”

또렷한 목소리였다.

“드래곤의 유희? 당연히…….”

위대한 존재, 드래곤에 대한 정보는 여러 호사가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다.

캐서린도 드래곤에 대한 몇 가지 일화를 들은 적이 있기는 했다. 당연히 그것들을 믿는 것과는 별개지만.

갑자기 드래곤이 이 대화에서 나올 이유가…….

“……알고 있는데.”

무언가 깨달은 듯 캐서린의 눈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슥,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지나치게 완벽한 얼굴을 가진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드리안 헤더와 똑같은 외모였으나, 그녀가 지금껏 알고 있던 바사미엘의 아드리안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이 일순 다가왔다. 묘하게 비현실적인 거대한 존재감이 그때서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대륙 최고의 장인이 금을 갈아 넣어 자아낸 듯한 머리칼은 여전했다.

그러나. 캐서린은 계속 자신의 옆에 있던 그 거대한 존재를 드디어 알아챈 조그만 개미처럼 꿀꺽, 침을 한번 삼켰다. 언제나 따뜻한 빛의 평범한 갈색이라고만 생각했던 그의 두 눈동자가 마치 낮에 뜬 두 개의 달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맙소사…….”

캐서린의 입술 사이로 힘 빠진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드래곤의 유희. 바사미엘의 수재답게 그 단어 하나만으로 지금까지의 상황을 완벽히 이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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