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사라졌던 남자가 갑자기 나타난 것에 놀란 것도 당연했다.
아드리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소년에게 질문했다.
“여자애?”
아까부터 드래곤의 눈에 거슬리는 조그만 인영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다 무너져 가는 막사 하나에 있었는데, 바깥의 소란스러운 상황에 더 놀랐는지 그곳에 처박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마 저 인영이 소년이 찾고 있는 아이가 맞을 것이다.
“……네?”
소년의 입술 사이로 멍청한 반응이 흘러 나왔다.
아드리안의 금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이제는 정말로 마수가 들이닥치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질문했다.
“네가 지금 찾고 있는 거 여자애 맞냐고.”
아마 소년에게는 협박하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소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넵. 맞습니다!”
소년의 팔을 붙잡고 옆에 선 어린아이가 멍한 표정으로 아드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이가 지금껏 봐 왔던 이들 중에서 가장 완벽해 보이는 남자였다. 아이의 입술 사이로 자연스럽게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날카로운 턱선과 어울리는 금빛 머리칼, 그리고 아마 갈색이겠지만 이상하게도 묘하게 금색처럼 보이는 눈동자까지. 마치 왕궁 벽에 걸린 값비싼 초상화에서 바로 걸어 나온 듯한 외양이었다. 게다가 무심하게 한 손에 가볍게 쥐고 있는 흰 검신의 장검이 그를 완벽한 기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좋아. 그러면 따라와.”
아드리안은 소녀의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긴 다리를 움직였다. 지금까지 그를 올려다보던 소년들은 짧은 다리를 빠르게 움직여 힘겹게 따라잡았다.
그렇게 따라가지 않으면 남자를 놓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어. 빨리 데리고 가.”
금발 머리의 남자는 무심한 얼굴로 막사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눈앞의 남자가 왜 갑자기 자신을 도와주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소년에게는 그걸 따져 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소년은 긴가민가한 얼굴을 애써 지웠다. 그러고는 남자가 가리킨 막사의 천을 들어 올리고 여자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 막사 안에는 정말로 지금껏 찾던 동생이 숨어 있었다. 바깥에서 울부짖는 마물들의 소리에 놀라 침대 옆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던 것 같았다. 소년은 떨고 있는 아이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달래 주었다. 그러고는 아이를 바닥에서 일으켜 빠르게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드리안을 도둑으로 몰았던 첫 태도와는 다르게 소년은 아주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의 양옆에 선 아이들도 덩달아 고개를 숙여 왔다. 아드리안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들을 향해 손바닥을 흔들며 말했다.
“인사는 됐으니까 빨리 실드 안으로 들어가.”
어차피 저런 인사나 받으려고 도와준 것이 아니었다. 사실 도와준다기보다는 자꾸 눈앞에 거슬리는 것들을 치우는 행동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런 아드리안의 말에 더욱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아드리안이 빨리 들어가라고 말해도 그들은 걸어가다가 자꾸 발걸음을 멈추고는 뒤돌아서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다 소년은 의문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왜…… 같이 안 가십니까?”
궁금할 만했다. 금발 머리의 남자는 마수의 습격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막사 여러 개가 쓰러지고,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상황에 사람이라면 두려움을 느끼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너희 가는 걸 보고 출발할 거야. 내 걱정할 필요 없어.”
아드리안의 대답에도 소년은 납득할 수 없는지 다시 한 번 질문했다.
“왕국의 기사단은 아니신 것 같은데…… 혹시 이름을 알려 주실 수 있나요?”
“…….”
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름 정도야 가볍게 알려 줄 만한데…… 소년은 실망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아드리안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한번 내쉬고 입을 열었다.
“알려 주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지금 당장은 네게 말해 줄 이름이 없어.”
사실이었다.
아드리안 헤더라는 이름은 이전의 유희에 사용했던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소년은 아드리안의 대답에 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
그때였다.
마물 하나가 그들을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멀리서 실루엣으로만 보였던 그 마수였다. 그새 다른 마물들도 합류한 건지 막사 전역을 하늘을 나는 마수 몇 마리가 둘러싸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쪽으로 쏜살같이 움직였다. 그것의 날갯짓이 일으키는 바람이 제법 위협적이었다.
아드리안은 그것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단호하게 말했다.
“위는 바라보지 말고 당장 앞으로 뛰어가.”
아이들이 저 광경을 직접 본다면 아마 얼어붙을 것이었다.
검은 마나를 뒤집어쓴 것처럼 어두운 형상이었다. 커다란 날개 두 장을 가진 검은 새처럼 보였다.
하지만 보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이었다. 소년과 아이들은 걸어가다 말고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마수는 주둥이를 활짝 열고서 소름끼치는 소리를 질렀다. 쇠가 긁힐 때 들리는 것처럼 날카로운 높은 음이었다.
“으악!”
소년은 조그만 동생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눈을 질끈 감으며 온몸을 웅크렸다. 품 안의 아이들 또한 그들의 운명을 직감했던지 잔뜩 굳은 상태였다.
아드리안의 두 눈이 순간 밝게 빛났다. 그래, 저렇게 무력한 모습을 그냥 바라보고 있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그들을 향해 마수의 주둥이가 활짝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철컥, 손에 들고 있는 검 손잡이가 살짝 움직였다. 드래곤의 마나를 조금 끌어온 탓에 그의 두 눈이 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몇 걸음 만에 떨고 있는 아이들의 앞에 다다랐다.
“비켜.”
지금껏 몇 마디 하지 않았던 남자의 또렷한 목소리가 소년들의 사이를 갈랐다.
스릉- 어느샌가 그의 손에는 펠렌 디프스의 검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검집에서 검을 꺼내는 움직임조차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
쾅!
마수의 날카로운 이빨이 검에 닿으며 굉음이 났다.
순간적으로 환하게 타오른 빛에 아이들은 팔을 얼굴 위로 들어 올려 시야를 차단할 수밖에 없었다.
우우웅-
서로 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맑은 검기와 마물의 검은 마나가 부딪히며 광범위한 효과를 냈다. 시작은 아드리안이 들고 있는 펠렌 디프스의 검에서부터였다. 자연스럽게 멈춰 있던 공기의 움직임이 휘이익- 갑자기 반대로 움직였다.
마나 반작용이었다.
그 충돌이 일으킨 뜨거운 바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거센 바람이 마치 원형을 그리듯이 근원지에서부터 한번 크게 일었다가 잠잠해졌다.
아드리안은 쯧, 하고 짧게 혀를 차면서 검을 빠르게 거둬들였다. 검을 감싸고 있는 순수한 마나에 닿은 마물은 이미 소멸되어 형체를 잃어 가고 있었다. 고작 손가락 하나만 써도 될 개미를 잡는 일에 화염 마법을 쓴 격이었다.
마나를 흩트리듯 허공에 한번 휙 움직인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
옆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아이들의 시선을 최대한 외면하면서 말이다. 최대한 소동 없이 이 상황을 해결하려 했던 아드리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
솨아악-
바닥의 잔디가 급격한 마나 움직임에 의해 바닥으로 눕는 것이 보였다. 그보다 더 크게 전신의 오감이 바짝 곤두서는 느낌이 밀려왔다.
이렇게 큰 마나 반작용은 처음이었다.
전장 안에 있던 몇 안 되는 고수의 경지에 오른 이들만이 이 마나 반작용을 느꼈다. 그 안에 당연히 미하일도 포함되었다. 마수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진지를 둘러보던 미하일이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건.”
그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미하일이 아는 한에서는 이런 마나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이 나서지는 않았을 거야. 그러면 누구지?’
이렇게 강한 마나를 가진 인간이라니. 미하일은 속으로 고민했다.
주변의 몇 명이 서로를 힐끔 눈짓했다. 너도 느꼈지? 도대체 이게 누구야? 라는 의미의 시선 교환이었다. 마나 반응에 민감한 마법사, 캐서린 에스테반도 마찬가지였다.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못 참겠다는 듯한 속마음이 여기까지 들렸다.
미하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작용이 일어난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캐서린은 미하일의 의사를 알아채고서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그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뒤로 병사 몇 명이 따라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