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그래? 아직 마수를 훈련시키는 데까지 발전하지는 않았군.
진지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저것이 마수이든 아니든 아드리안이 취할 행동은 같았다. 그는 여전히 관심 없다는 듯 비스듬히 짝다리를 짚고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정면에서 아드리안을 열심히 노려보던 소년의 얼굴이 천천히 경악에 차 하얗게 질리는 것이 보였다.
“……저건……?”
소년의 중얼거림에서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의문이 느껴졌다.
그 표정에 지금껏 심드렁하던 아드리안의 입술이 불만스레 슬쩍 움직였다. 최대한 이쪽의 개입 없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럴 순 없을 것 같은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저놈은 왜 저렇게 놀란 표정이지? 여기는 마수를 상대로 하는 전장인데, 익숙한 광경이 아니었나.
조금 전 휘파람 소리를 듣고 다급하게 이쪽으로 뛰어오던 인간들의 발소리가 멎어들었다. 당연히 그럴 만한 것이, 커다란 날개를 휘젓고 있는 저 마수의 그림자가 그들의 머리 위뿐만 아니라 이 진지 절반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아드리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막사 전체를 휙 둘러보았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볼 수 없는 부분까지 마나가 깃든 드래곤의 금안은 속속들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진지 중심에 활성화된 실드가 있음을 확인한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계속 이러고 있을 건가?”
도둑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또렷한 음성에 우뚝, 소년의 떨림이 멎었다.
소년은 점점 형체를 키우고 있는 마수의 그림자에 이미 한껏 겁을 먹은 상태였다. 위급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인간들이 할 만한 반응이었다. 온몸이 얼어붙은 듯 굳어 사고의 회로가 정지된 것이었다.
아드리안의 담담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멈춘 숨을 내쉴 수 있게 된 소년이 빠르게 고개를 움직였다. 그제야 정면의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네…… 네? 네. 아니요.”
소년은 말을 마구 더듬으며 남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음, 아드리안은 소년의 대답이 충분하지 않다는 듯 작게 신음했다. 이곳에 계속 있는 것은 위험했다. 드래곤은 어린 생명체에게 최대한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했다. 아드리안은 조금 전 자신의 질문에 소년이 했어야 했던 답을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우선 실드 안으로 들어가야지.”
“……실드 안?”
“정신 똑바로 차려. 아무리 임시로 세워진 진지라도 교육받은 게 있을 텐데?”
물론 곧이곧대로 떠먹여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드리안은 정답을 중심에 두고 빙빙 돌아가는 소년에게 정신 차리라는 듯 날카롭게 다그쳤다.
뭐? 실드 안…… 소년은 그 단어를 듣고는 입가에 손을 댄 채 기억을 더듬어 보는 듯했다. 그러다가 몇 초 후에 무언가 떠오른 듯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
그러자 아드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아드리안은 네가 생각한 것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슬쩍 움직였다.
‘맞아, 이럴 때를 대비해서 중간쯤에 실드가 있다고 했지.’
그때,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아드리안과 소년 사이를 날카로운 소리가 갈라냈다.
끼이이아아악!
머리 위의 마수가 커다란 소리로 포효했다.
막사 사이의 공간에서 소년은 올려다보며 입술을 꾹, 악물었다. 저 정도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점차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우선…… 여기는 위험하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 소년은 아까부터 이곳을 구경하고 있는 종자들을 향해 빠르게 외쳤다.
“얘들아! 다들 어딨어?”
이곳에는 그보다 어린 아이들이 더 많았다. 본격적으로 마수와의 싸움이 시작되면 아이들의 안전은 뒷일이 될 것이 뻔했다. 지금 최대한 챙겨 가야 했다. 고개들만 빼꼼히 내밀고 있던 아이 하나가 “다른 애들은 아까 저쪽 막사를 정리한다고 했었는데…….”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알았어. 데리러 가자! 지금 바로!”
소년은 아이의 팔 윗부분을 아프지 않게 잡아챘다. 하지만 어딘가로 향하려다 말고 우뚝, 발을 멈춰 세웠다. 그제야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 님의 검을 든 의문의 남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휙, 고개만 돌려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이 다급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빨리 안 가고 뭐 하냐는 듯 턱짓을 하기까지 했다.
위험한 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여유로워 보였다.
눈에 보이지 않아 내부인만 알고 있는 정보일 ‘실드’를 알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영 이상한 사람은 아닐 것 같았다. 소년은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후 중얼거렸다.
“……검에 대한 사정은 나중에 듣겠습니다.”
그러고는 소년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아무 대답 없이 그런 소년의 등을 바라보며 슬쩍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
휙-! 후우웅-!
마수의 날갯짓이 머리 바로 위에서 나는 것처럼 가까이 들렸다. 조금 전 그들이 하늘에서 봤던 실루엣은 하나였으나, 한 마리가 아닐 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차피 아드리안에게 마수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소년과 헤어졌던 그 자리에 멀뚱히 서 있었다.
“…….”
드래곤의 눈에는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년이 다른 아이들을 찾으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아드리안은 흐음,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면서 팔짱을 꼈다.
마수가 언제 막사로 날아올지도 모르는데 소년이 사소한 곳에 정신 팔려 있는 것이 조금 거슬렸다. 저 어린 인간에게는 다른 이들을 챙길 능력이 전혀 없었다. 저렇게 애써 보았자 괜히 마수의 배나 더 채워 주는 것밖에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배를 채운 마수는 더 날뛸 테고. 신나게 검은 주둥이를 벌려 아이들을 한 번에 집어삼키는 마수의 이미지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
소년은 끝까지 아이를 찾을 생각인지, 심지어 무어라 이름을 크게 외치기까지 했다.
쓸데없는 것에 끈질기긴. 아드리안의 멋들어진 입술이 비틀어졌다. 저런 끈질김 때문에 괜히 더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사소한 것 하나까지 친절을 베풀었다가는 드래곤은 살아갈 시간 대부분을 대륙의 모든 생명을 지키는 데 사용해야 할지도 몰랐다.
‘저러다 죽으면……. 그게 저 소년의 운명일 뿐.’
아드리안은 소년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시선을 천천히 거둬들였다. 그가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끼이익- 풀썩. 소년이 들어간 막사 천막들이 휘날리다 못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안은 뒤돌아 선 채로 골치 아픈 고민거리를 털어 버리려는 듯이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였다.
그때였다. 철로 만들어진 보호구가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안은 슬쩍 뒷걸음질을 해서 자신의 존재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밝은 금빛 눈동자만이 소리 나는 쪽을 향했다.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갑옷에 모두 같은 문장이 새겨진 걸 보니 소규모 군대 정도의 기사단인 것 같았다. 저 멀리 보이는 소년은 그들에 비해 키가 반 토막은 짧아 보였다.
“저기요! 혹시 이만한 어린 여자애 못 보셨어요?”
소년은 스쳐 지나가는 기사 하나의 망토를 잡아채어 다급하게 질문했다. 마수들과의 전쟁터인 진지는 위험한 곳이었으나 그만큼 어린 종자들에게 높은 보수를 제공하는 일터였다. 그리고 같은 나이대의 아이들끼리 모여 허드렛일을 하다 보니 길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서로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은 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 빨리 실드 안으로 들어가야지!”
기사는 소년에게 잡힌 자신의 망토를 휙, 잡아 빼며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
‘맞는 말이야.’
아드리안은 기사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어둠 속에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곧 이어질 전투에 아이들이 이곳에 남아 있으면 휘말려 애꿎은 목숨만 잃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차가운 기사의 반응에도 꿋꿋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이 하나가, 동생이 아직 안 보여서-”
“다른 사람 걱정할 때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들어가!”
기사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언이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빠르게 돌려 다른 기사들의 행렬에 합류했다.
기사단이 가 버리자 그 자리에는 여자아이를 찾던 소년과 아이만 남았다. 아이는 소년의 옷소매를 몇 번 아래로 잡아당기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소년에게 질문했다.
“형 이제 우리 어떡하지……?”
그보다 고작 몇 년 더 살았을 뿐인 소년도 할 수 없이 거칠게 입안을 짓씹었다. 아무래도 기사들은 앞으로 시작될 마물과의 전투 때문에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아이 하나를 찾아 달라는 것은 지금 그들에게는 사소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못 찾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대피한 다음이라 조용해진 막사 앞에서 소년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냥 동생을 포기하고 도망가든가, 아니면 목숨을 잃을 각오하고 막사들을 더 뒤져 봐야 할 것 같았다. 소년이 아이의 손을 잡고 갈팡질팡하는 발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따뜻한 바람이 그의 코끝을 간질이듯 불어왔다.
응? 다급한 전쟁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감각이었다. 그에 소년은 바닥을 내려다보던 고개를 번뜩 들어 올렸다. 누군가가 성큼성큼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말에 한숨이 섞여 있었다.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