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이가용-161화 (161/184)

161화

“…….”

이참에 아드리안은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펠렌 디프스의 검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철컥, 쇠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흰 검날에 밝은 금색 눈동자가 어렴풋이 비쳐 보였다.

“……많이 낡았군.”

주인이 아무리 아끼고 관리한다 해도 검날이 깨끗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냥 훈련에 사용하는 검이 아닌, 전장에 나선 이의 검이었다. 이제는 바사미엘에서 미하일이 처음 받았던 때의 새하얀 검이 아니었다. 검의 손잡이에서는 사용감이 느껴졌고, 몇 군데에는 손질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커다란 생채기도 나 있었다.

그러나 이건 장식용 검이 아니었다. 이런 사용한 흔적들 덕분에 검이 더욱 빛나 보였다.

미하일의 목소리가 지금도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이 검을 목숨보다 아끼는 건 알지?”

목숨보다 아끼는 검을 맡기고 간다라. 도대체 이쪽을 얼마나 좋아하기에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당연하게도 아드리안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때 검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옆으로 스륵 움직였다. 이 막사를 향해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미하일의 말에 의하면 ‘아침 점호’ 시간일 텐데, 지금 이렇게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점호에 참여하지 않는 인원일 것이었다.

편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아드리안의 상체가 바로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촤락, 막사의 천막이 걷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탓에 어두웠던 막사 안으로 밝은 햇빛이 들어왔다. 불청객은 막사에 들어오자마자 입구 쪽을 향해 있던 아드리안과 두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란 기색이었다. 그는 순간 자신이 실수로 다른 막사에 들어온 줄 안 것 같았다.

“……아, 아! 죄송합니다. 제가 막사를 헷갈려서. 죄송합니다.”

그는 다급하게 사과를 하며 한 발짝 막사 내부로 디뎠던 발을 휙, 잡아 뺐다. 그러고는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후, 자신이 들어온 곳이 틀린 곳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본 후 다시 조심스레 막사의 천을 걷어 올렸다.

“……. 저기, 그런데. 누구십니까?”

조금 전과는 다르게 의심이 한가득 담긴 말투였다.

“…….”

그러는 넌 누군데.

아드리안은 침대에 똑바로 앉아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냐는 물음에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행동이 오히려 소년의 의심을 활활 타오르도록 부추겼다.

“예? 누구신데 여기에 이렇게 앉아 계시냐고요.”

그는 위협이 가득 섞인 말을 내뱉으며 성큼성큼 미하일의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것치고는 어려 아직 소년티를 채 벗지 못한 인간이라 아드리안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소년은 아드리안 바로 앞까지 걸어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빨랫감을 양탄자 위에 툭,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소년은 진지 내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종자인 것 같았다.

아드리안은 여전히 소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런 행동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답도 안 하실 겁니까? 자꾸 대답 안 하시면 경비대 부르겠습니다.”

“…….”

소동을 일으키는 것은 사양이므로, 경비대를 부르는 건 좀 곤란했다.

아드리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소년은 자신보다 큰 키와 손에 검을 든 아드리안을 그 자리에서 바라보았다. 꽉 쥔 두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보아 수틀리면 달려들 생각도 하고 있는 듯했다.

저 어린놈과 싸우기엔 이쪽 면이 서질 않았다.

“……나갈게.”

아드리안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거칠게 헝클면서 대답했다. 그러고는 빠르게 막사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소년이 빠르게 뛰어와 두 팔을 한껏 벌려 아드리안의 앞을 막아섰다.

“그 전, 그 전에 누구신지는 신원을 밝혀 주셔야겠습니다.”

소년은 그러고선 입술을 앙다물며 원하는 바를 말했다.

이 안에서 뭐가 하나라도 사라진다면, 막사 안을 드나드는 종자들이 의심받을 것이 뻔했다. 물론, 눈앞의 남자는 신분이 꽤나 높아 보였고 지금도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는 걸 보니 도둑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로서는 무슨 일이 터졌을 때, 다른 사람의 이름 하나 정도는 댈 수 있어야 마음이 편했- 소년의 동그란 눈이 청년의 손을 바라본 순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남자의 손에 들린 물건을 그제야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니, 당신! 지금 당신이 들고 있는 검이 어느 분의 것인지는 아십니까?”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 왕자님을 먼 발치에서 모시며 멀리서만 봐 왔던 검이었다. 이 막사의 주인이 목숨같이 아낀다는 그 검.

소년은 두 팔을 뻗어 아드리안이 가볍게 들고 있는 펠렌 디프스의 검을 잡으려 했다.

어딜 감히.

아드리안은 그런 소년을 비웃듯이 손을 아주 살짝만 움직여 피했다.

“이 검이 누구의 것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지.”

현재 왕국 내에서 적당한 지위조차도 없는 신원 불명의 상태로 소란을 일으켰다간 드래곤만 골치 아파질 게 뻔했다. 그래서 아드리안은 소년의 말에 모르는 척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드래곤이 원하는 것처럼 그냥 넘어가면 좋으련만, 소년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요! 그건 펠렌 디프스의 검이잖아요!”

“아니 펠렌 디프스가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이야? 놀랍군.”

그럼 이만.

아드리안은 담담하게 한마디 한 후 휙, 몸을 돌려 막사를 나섰다. 일단은 다른 곳에서 미하일을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소년은 벙찐 표정으로 그 자리에 잠깐 남았다가 허, 하고 크게 숨을 내뱉으며 아드리안을 따라 나갔다.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 님의 검을 훔쳐 가다니! 이봐요! 여기 도둑이 있습니다!”

소년은 뻔뻔한 도둑을 향해 크게 소리 질렀다. 그러나 진지 내의 웬만한 이들은 모두 점호에 참여하러 자리를 비운 터였다. 그의 외침에 고개를 내민 이들은 모두 힘없는 종자들이거나 막사 옆에 매여 있는 말들뿐이었다.

아드리안은 그런 외침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걸음의 속도도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시끄러운 소년의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딴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아침 점호는 도대체 언제쯤 끝나는 거지.’

그동안 저기 숲속이나 걷고 있어야겠다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이곳을 향하는 몇 명의 발걸음을 눈치채고 아드리안은 쯧, 혀를 짧게 혀를 찼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어차피 다른 종자 하나가 그 바로 앞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터라 걷는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아드리안은 그 자리에서 짜증스레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난 도둑이 아니야. 이건 미하일이 직접 내게 맡긴 거라고.”

“……어이없는 거짓말이군요. 그 검은 미하일 루스 이네하트 님께서 지금껏 막사에 두고 나가신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물건입니다.”

“그건 나중에 미하일한테 물어봐.”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고, 우선 검을 제게 넘겨주시죠.”

소년을 두 손을 뻗어 아드리안을 향해 흔들었다. 아드리안은 그것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 검은 미하일이 맡긴 검이었다. 이것조차도 잘 간수 못 하면 드래곤의 위엄이 땅에 떨어질 것이다.

소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휘익- 휘파람을 불어 사람들을 모았다.

“……소란 피우지 말고 그냥 보내 주지?”

아드리안은 귀찮다는 듯이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도 검을 두고 가시면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됐어.”

아무래도 미하일이 직접 여기로 와야 상황이 해결될 것 같았다. 아드리안은 비스듬히 짝다리를 짚으며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검을 저놈에게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소년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이곳으로 향해 달려오는 인간들의 뜀박질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래도 검을 내놓지 않는다고?

소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해결책을 사용했음에도 끄떡 않는 남자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아드리안의 귀에 저 멀리서 나는 커다란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아드리안은 소년을 향해 고개를 무심히 돌렸다. 그러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몰라서 묻는 건데.”

“뭐요. 감옥에 가지 않고 싶어서 거짓말할 거라면 조용히 하십시오.”

아드리안은 그런 퉁명스런 소년의 답에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다시 이었다. 그의 시선은 그들의 바로 위, 허공을 향해 있었다.

“그새 인간들이 마수를 휘파람으로 부르는 교육을 할 수 있게 되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네? 그게 무슨 소리,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소년은 그제야 이상하다는 듯이 아드리안이 보고 있는 곳을 확인하려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밝은 하늘 먼 곳에 떠 있는 검은 형체가 소년의 눈에 들어왔다. 너무 거리가 먼 탓에 정확한 크기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으음.”

아드리안은 소년의 대답에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건 좀 큰 문제였다. 다행인 것이 하나 있다면, 앞으로 몇 분 뒤면 이쪽이 미하일의 검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신경 쓸 인간들이 없을 거란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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