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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59화 (159/184)

159화

스윽-

아드리안의 길게 뻗은 검지가 미하일의 벗은 등 위를 움직였다. 그는 마치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는 음악가처럼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 막혀 있던 마나가 흐르면서 섞이지 않았던 것들이 뒤엉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갔다.

원래 이렇게 움직여야 했다. 마나를 몸 전체로 운용하는 데에 익숙해지면, 손에 쥔 검에 검기를 씌우는 데도 능숙해질 것이었다.

“어때?”

당연히 이 한 번으로 완전히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미하일의 엉망이었던 몸 상태가 조금 괜찮아진 것이 눈으로 보였다. 아드리안은 눈동자에 마나를 실어 아래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그제야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몇 번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조언했다. 소드 마스터가 되려면 이런 조언이 꼭 필요할 것이다.

“미하일, 느껴져?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해.”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침대에 엎드려 있는 미하일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듣고 있는 것 맞아? 그새 잠들었나.”

툭툭, 아드리안이 상체를 숙여 미하일의 상태를 살피려는 순간이었다.

이 상태로 잠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누워 있는 미하일은 곤란하다는 듯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드래곤은 아무래도 인간의 반응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 할 수 없었다. 미하일은 무언가 참으려는 듯 아랫입술을 물고 있다가 마지못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

웅얼거리는 목소리였다. 아드리안의 손바닥이 여전히 맨살에 닿아 있었다. 서늘한 온도였지만 그 손을 중심으로 번져 나가듯 따뜻하게 마나가 정리되고 있었다.

삼 년 동안 바사미엘을 졸업하고 바로 최전선에 자원했던 미하일이었다. 첫사랑인 아드리안과 그렇게 헤어지고 난 후 왕자의 눈에 들어차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도 한몫했다.

……여유가 없는 것은 지금도 같은데 도대체 왜 이러지?

한동안 멈춘 것 같았던 심장이 쿵쾅대며 빠르게 요동쳤다.

드래곤의 귀에는 이 소리가 마치 북처럼 크게 들릴 것이었다.

‘젠장.’

미하일은 침대에 얼굴을 파묻으며 낭패 어린 표정을 최대한 숨겼다.

이제는 사라졌을 거라 생각한 것과 다르게, 다시 만나자마자 천천히 마음의 수면 위로 감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본인의 이 감정을 빨리 알아 달라는 듯이, 더 크고 빠르게.

지금 엎드려 있어서 다행이다. 미하일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의 벗은 양어깨가 달아올라 붉은 기가 퍼져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의 맹숭맹숭한 반응에 눈썹 하나를 들어 올렸다. 뭐 큰 걸 바라고 도와준 것은 아니었다만, 어린놈이 생각보다 더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었다.

“그게 끝?”

미하일은 그 말에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불만스런 표정의 아드리안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보면 바사미엘에서 같은 방을 썼던 그때와 똑같아 보였다. 물론 똑같은 게 맞겠지만……. 하하, 미하일은 특유의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드리안을 마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잊은 게 있었다.

“고마워.”

슥, 미하일은 누운 채로 팔을 들었다. 그러자 등에 대고 있던 아드리안의 손이 단번에 잡혔다. 조금 전까지 닿아 있던 손바닥이 묘하게 따뜻했다. 미하일은 그곳에 대고 슥, 엄지를 문질렀다.

“날 걱정해 준 것도, 그리고…… 이렇게 먼저 와 준 것도. 고마워.”

“…….”

난 걱정했다고 말한 적 없는데.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미하일을 내려다보며 아드리안이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드리안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미하일이 꾹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 부드러운 손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가 댔다.

쪽.

입술이 손등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짧은 소리가 조용한 막사 안을 가득 채웠다. 동시에 와그작, 아드리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갑자기 왜 이런 짓을? 아드리안의 입술 틈으로 의문 섞인 반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음?”

아드리안의 차가운 목소리에 미하일의 감고 있던 눈꺼풀이 올라갔다. 그가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여 위를 올려다보자 변함없이 무표정인 아드리안의 얼굴이 시야 한가득 다가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하일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아드리안의 손을 놓아주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그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결정했다. 아드리안을 지금까지 관찰해 온 결과, 이 순간 당황하는 것보다는 아무렇지 않은 자세로 구는 것이 가장 나았다.

그리고 그게 정답이었다.

미하일의 의아한 표정에 아드리안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여졌다.

이게…… 일반적인 문화인가? 손등에 키스하는 것?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저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고맙다는 의미의, 그런 행동이군. 인간의 복식과 문화는 생각보다 휙휙 바뀌어서 드래곤이 따라가기에는 매번 당황스러운 감이 있었다.

“아니, 뭐.”

아드리안은 잠시간 표정을 찌푸리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상황을 넘겼다. 별건 아니니까.

“됐어.”

피식, 그에 미하일이 살짝 미소 지었다. 지금 저 머릿속에서 어떤 사고의 흐름이 흘러가고 있을지 뻔했다.

그냥 이게 새로운 감사 인사 방식이라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전 그가 한 행동은 ‘그저 감사 인사’ 이상의 행동이었다. 애초에 다른 사람들과 닿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던 미하일이었다. 아무리 고마운 이라 해도 미하일이 먼저 입을 맞췄을 리가 절대 없었다. 그런 것까지 아드리안이 알아주길 바라기에는 아직 너무 일렀다.

하지만.

미하일은 사람 좋은 듯 웃으며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예전보다 사람을 다루는 것에 능숙했고, 자신이 생겼다. 가만히 좋아하는 상대를 기다리기만 할 나이는 지난 것이었다.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미하일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면…….”

미하일은 우수에 잠긴 것처럼 속눈썹을 내리깔고 입을 열었다.

“다시 돌아갈 거야?”

“그렇지. 내 볼일은 끝났으니까.”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아드리안이 대답했다. 미하일은 아드리안을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그 볼일이라 함은, 조금 전처럼 내 마나의 흐름을 손봐 준 거 말이지?”

“그래.”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단호한 대답과는 달리 뭔가 어긋난 지점이 하나 있었다. 아마 아드리안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원래의 드래곤이라면 이쪽이 곤란해하고 있건 말건 관심 한 조각 주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언질도 없이 카일의 말만 듣고도 이곳으로 찾아왔다. 무언가가 아드리안의 행동을 변화시킨 것이었다.

미하일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한 팔에 턱을 괴었다.

“사실 궁금하지?”

아드리안의 날선 눈빛이 슥, 움직였다. 그것은 감히 누구 앞이라고 헛소리를 하냐는 듯 뾰족했다.

어렸을 적이라면 저 눈빛에 상처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하일은 이 정도에 상처받을 나이는 지났다.

“그날 네 앞에서 큰소리 쳐 놓고 아직도 이러고 있으니까 말이야. 과연 진짜 내가 스스로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잖아. 그러면 직접 지켜봐.”

“…….”

흐음. 이놈 봐라? 자신을 향한 것치고는 다소 신랄한 평가였다. 드래곤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미하일은 아주 좋은 상품을 권하는 것처럼 아드리안의 결정을 부추겼다.

“많이 걸리지도 않을 거야. 그리고 어차피 넌 시간도 많잖아.”

“…….”

“걱정 마. 도와 달라고는 안 하니까.”

절대로.

미하일의 곧은 눈빛이 드래곤의 얼굴에 닿아 왔다.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미하일은 절대 그런 부탁을 해 올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면 왜? 아드리안의 입술이 슬쩍 열렸다가, 다시 천천히 닫혔다. 하지만 드래곤 혼자 생각해 보았자 미하일이 저렇게 구는 이유를 파악해 낼 수 없었다.

아드리안은 결국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게 낫겠어?”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는다 해도?

그냥 은근슬쩍 넘어갈 수 있는 질문이었다. 아드리안은 물어보면서도 미하일의 답변을 그리 기대하지 않았다.

그가 대답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응.”

덧붙일 말이나 앞뒤로 꾸미는 수식 구절 하나 없이 딱 떨어지는 대답이었다.

그 말에 여태 심드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조금 크게 확장되었다. 환하게 밝은 황금색 눈.

“네가 보고 있으면…… 난.”

미하일은 그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거든.”

그게 뭐든 말이야.

막연한 기대와 희망이 한데 뒤섞인 달콤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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