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이가용-158화 (158/184)

158화

미하일은 침대에 앉아 아드리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막사 안에 아드리안이 있는 것이 아직까지도 꿈인 것 같았다.

“전에 바사미엘에서 해 봤잖아.”

아드리안은 다시 한번 검지로 침대를 가리키며 대강 대답해 주었다.

실제로 미하일의 몸 상태를 확인해 보니, 카일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떠올렸던 추측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미하일이 본래 가지고 태어난 마나와 드래곤의 마나가 그의 몸 안에서 제대로 섞이지 않고 있었다.

“성장기에는 저 향초로도 충분했겠지만, 이제는 체내의 마나가 진해진 만큼 마나 운용이 점점 더 힘들어질 거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내가 도와줄 테니 누우라고.”

아드리안은 여기에 온 목표를 빠르게 완수하고 레어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미하일이 조급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오르디나스가 이미 그의 운명을 정해 두었을테니까. 그에 따라 미하일은 용사가 될 운명이었으므로, 그가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소드 마스터는 어련히 될 것이었다.

“…….”

도와준다고. 미하일은 아드리안이 건넨 이야기를 자신에게 되새기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잠잠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던 미하일이 불쑥 질문했다.

“우리가 지금 몇 년 만에 보는 줄은 알아?”

어둠 속에서도 그의 붉은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바사미엘 시절처럼 날것의 느낌이 아닌, 이제는 잘 벼려진 검날 같은 눈빛이었다.

“……얼마나 지났지?”

아드리안은 고개를 기울이며 미하일에게 되물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것 같긴 하지만 정확히 얼마나 흐른 것인지 드래곤은 알 수 없었다.

“삼 년이야.”

그런데 그게 왜.

몇 년이 지났는지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 딱히 덧붙일 말이 없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막사에 침묵만이 맴돌았다.

아드리안은 미하일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한 번 크게 깜빡,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도 몇 번을 더.

“……기분이 안 좋나?”

짜증 난 듯 이를 악물고 있는 턱. 새초롬하게 쭉 찢어져 있는 눈매. 하지만 미하일은 여전히 저 모양이었다.

“내 기분?”

미하일은 그제야 본인의 기분을 알아챈 듯 중얼거렸다.

“몇 년 만에 눈앞에 나타난 상대가 정작 나한테는 관심도 없고, 용사가 될 소드 마스터로 만드는 데에만 집착하고 있는데…….”

하, 미하일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그래, 기분이 딱히 좋지는 않네.”

“…….”

까탈스럽긴.

아드리안은 아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그런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장에선 조금 억울한 감이 있었다. 나쁜 의도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소드 마스터로 만들어 준대도 싫다 하고, 몸 상태가 엉망이라 마나 순환까지 도와준다고 했는데……. 그게 이렇게 화를 낼 일인가?”

“여기에는 왜 왔어.”

미하일이 아드리안의 말을 툭, 끊었다. 그는 본인이 그렇게 말하고도 아드리안의 표정이 궁금한지 고개를 번뜩 들어 올렸다. 그러나 막사 내부가 어두운 탓에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하일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 협탁에 촛대가 하나 있었다.

칙- 손가락 끝에 불꽃을 만들어 내어 초를 켰다. 그러자 작은 불빛이었으나 막사 안이 따뜻한 불빛으로 환하게 밝아졌다.

아드리안의 훤한 얼굴이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딱 떨어지는 콧날과 세련된 턱. 켜져 있는 촛불보다 환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와 물결치듯 정돈된 금발. 여전히 알 수 없는 무표정. 아드리안이 맞았다.

“카일이 그러더라고.”

갑작스럽게 나온 카일의 이름에 미하일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카일? 카일 드바이시?”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설명을 덧붙이려 했다. 아무래도 몇 년이 지났으니 미하일도 그를 잊은 것이 분명했다.

“그때 바사미엘에 있었던 선배 말이야. 왜, 오르디나스를 연구하던.”

“누군지는 알아. 카일이 왜?”

차가운 말투였다. 미하일은 여전히 화가 난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드리안은 숨김없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다쳤길래 그놈을 레어에 데려가 치료해 줬거든. 그때 전해 들었어. 대륙의 상황이랑 그냥 이것저것들을.”

“뭐? 레어에 데려갔다고?”

“그냥 길바닥에 버리고 갈 수는 없으니까.”

“…….”

그건 그렇지만.

미하일은 짜증스레 아랫입술을 이로 짓씹었다. 자신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아드리안의 레어에 카일을 데려갔다니. 시작한 적도 없는 경기에서 벌써 진 느낌이었다.

삼 년 전, 그렇게 헤어지면서 미하일은 다짐했었다. 하루빨리 소드 마스터가 되어 아드리안의 앞에 당당하게 나서겠다고. 절대 스스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없을 거라 말했던 아드리안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며 멋들어진 고백을 다시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의 선택을 조금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면 그 목표를 이루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아드리안의 마음에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하일은 잠시간 아래를 노려보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바사미엘에서도 유독 카일을 따랐었잖아. 그런 놈이 취향인가?”

“무슨 취향.”

아드리안은 픽, 웃으며 짧게 답했다.

인간들을 바라보면서 특별히 누구는 좋고, 또 누구는 싫다는 호불호의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알잖아. 내가 어떤 취향을 묻는 건지.”

“그러면 너도 지금쯤은 알 텐데. 내가 그런 놈을 좋아할 리 없잖아.”

입술을 짓씹던 미하일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나빴던 기분이 아드리안의 그 대답에 완전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그런 미하일의 표정 변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아드리안은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그러고는 하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서 했다.

“아무튼 카일이 네 소식을 알려 줬는데, 딱 들어 보니 마나 컨트롤 문제일게 뻔해서 한번 와 봤지.”

“걱정이 돼서?”

“……뭐?”

“내가 걱정돼서 찾아온 거냐고.”

미하일의 또렷한 목소리가 아드리안의 머릿속을 환기했다.

“…….”

그 질문에 아드리안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사이의 침묵은 결국 아드리안의 짧은 코웃음이 깨트렸다.

“……걱정? 내가 너를?”

조금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자신이 미하일을 걱정하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려고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

미하일은 이쪽을 바라본 채 활짝 웃고 있었다. 저놈이 저렇게 웃었던 적이 또 있었던가.

소원을 빌던 때의 조금 씁쓸했던 그 웃음과는 달랐다. 저건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듯한 미소였다. 겨우 그런 사소한 이유로 여기에 찾아왔다고 저렇게 좋아해?

살짝 열렸던 아드리안의 입술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곳에 온 진짜 이유가 뭐였든 저렇게 행복해하는 놈에게 구구절절 말해 봤자 귀에 들어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냥 그렇다고 쳐줄 생각이었다.

“궁금한 게 모두 해결된 거면 좀 눕지?”

아드리안은 퉁명스런 말투로 손을 휘적였다. 그제야 미하일은 마음이 편해졌는지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상의를 탈의하고 있었기에 그의 날렵한 등 근육이 일렁거리는 촛불에 있는 그대로 비춰졌다.

그러나 그의 그 속은 본래 그가 가지고 태어난 마나와 드래곤의 마나가 부딪히며 뒤섞이지 않아 불안정한 상태였다.

미하일의 맨몸에 아드리안이 손바닥을 가져다 대며 질문했다.

“쉽게 가는 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이런 어려운 길을 선택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마나의 흐름을 그리려는 듯이 아드리안의 손가락이 미하일의 등 뒤를 천천히 배회했다.

“…….”

미하일은 눈을 꾹 감은 채 아드리안의 손가락 감촉을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 이불을 꽉 쥐었다.

“애초에 소원을 빌 때에 이걸 해결해 달라 말했다면 많은 것들이 쉽게 풀렸을 텐데 말이야. 내가 말해 줬잖아. 바사미엘에서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계속.”

오랜 훈련으로 굳어 있는 등 근육이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아드리안은 그의 등에 대고 마나를 아낌없이 퍼부었다. 그러자 미하일의 멈춰 있던 마나가 천천히 요동쳤다. 서로 다른 마나가 부딪히는 열 반응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너무 가라앉아 있던 탓에 한동안은 이렇게 휘저어 줘야 했다. 아드리안이 세심한 손짓으로 마나의 흐름에만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던 미하일이 중얼거렸다.

“이게 어려운 길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어.”

소드 마스터가 되는 것도, 그리고 너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도. 물론 쉬운 일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손을 움직이던 아드리안의 시선이 슥, 미하일의 옆얼굴로 향했다. 그의 뺨과 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나 반응 치고는 조금 과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