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이가용-157화 (157/184)

157화

펠렌 디프스의 검.

아드리안은 눈을 움직여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놈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가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마 지금 자다 깬 거라 이 상황을 인지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런 미하일을 향해 아드리안이 피식, 짧게 웃으며 인사했다.

“환영 인사 한번…… 거창하네?”

그러고 보니 눈높이가 바사미엘 시절에 비해 조금 높아졌다. 미하일은 지난 몇 년간 아카데미 학생 특유의 어린 티를 완전히 벗은 듯했다. 지금 이 모습이 꿈에서 본, 전장에 선 미하일인 건가? 아드리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흐트러져 있던 밝은 은발이 미하일의 매끄러운 이마 위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머리카락 아래로 유려하게 올라간 눈매가 상대를 확인한 순간 살풋 일그러졌다. 드래곤의 심미안으로 보건대 그사이 미하일은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을 듯한, 꽤 분위기 있는 미인이 되어 있었다.

여유롭게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는 아드리안을 향해 미하일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

나직한 미하일의 목소리에서는 잠기운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 이름으로 부를 거지.”

일단 이건 치워.

아드리안은 투덜거리며 자신의 목에 닿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온 검날을 잡아 밀었다. 아, 미하일은 그 움직임에야 정신을 차렸던지 손에 쥔 검을 곧바로 뒤로 뺐다. 그는 검을 검집에 넣으면서도 아드리안이 자신의 막사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실감이 안 나는지, 드래곤을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막사 안은 매캐한 향초 연기로 가득했다. 한참 동안 연기 속에서 자고 있던 탓에 미하일은 머리가 아픈지 눈가를 찡그리며 관자놀이를 검지로 매만졌다.

“……꿈인가. 이건.”

아드리안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었다.

몇 년 전에 그렇게 헤어진 후, 드래곤의 소식이라고는 단 하나도 들은 적 없었다. 물론, 대륙 전체에서 들끓고 있는 마물들을 처리하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도 이유였다. 자칫하다간 마물들이 모든 마을을 쓸어버리고 이 땅에서 인간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 위기의 순간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만난 첫사랑 따위는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면 금방 사라질 줄 알았는데.

“하아-”

깊은 한숨이 미하일의 입술 틈을 비집고 나왔다. 자꾸 아드리안이 등장하는 꿈을 꾸는 것은 좋지 않았다. 미하일은 검을 오랜 시간 잡아 온 탓에 거칠어진 자신의 손바닥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

한숨?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미하일은 상의를 벗고 자느라 맨 몸을 드러낸 채 이마를 손으로 짚고 서 있다가 몸을 휙 크게 돌렸다. 그는 자신이 너무 피곤한 나머지 지나치게 생생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다 미하일은 시야에 들어온 향초를 확인했다.

이건 왜 꺼져 있지?

자는 새에 꺼진 향초를 다시 켠 후, 미하일은 다시 간이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는 천천히 눈꺼풀을 닫고 잠에 빠지려는 순간이었다. 아직 깊은 밤이라 곧장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자려고?”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지만 않았어도.

감겼던 미하일의 눈이 번뜩 뜨였다.

휙, 미하일은 눈을 크게 뜬 채로 침대에서 빠르게 일어났다. 조금 전 봤던 장면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잘게 흔들리는 미하일의 시야에 공중에 가볍게 뜬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드리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드리안은 그 상태로 향초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이제 효과 없을 텐데.”

잠시 잦아들었던 연기가 다시 막사 내를 채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미하일은 향초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아드리안을 향해 외쳤다.

“아드리안! 여긴 어떻게……!”

동시에 팔을 뻗어 허공에 편하게 누워 있는 아드리안의 팔을 낚아챘다. 그러자 손바닥에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조금 낮은 체온이 느껴졌다. 미하일이 그 팔을 잡고 살짝 힘을 주자, 아드리안의 몸이 가볍게 침대에 내려앉았다.

미하일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아드리안의 이마 쪽에 손을 가져다 댔다. 부드러운 금발 머리카락 사이로 스윽, 미하일의 손가락이 파고들어 갔다. 검지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움직이자, 드러난 아드리안의 이마에서 옅은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미하일은 그 점을 발견하자마자 손가락을 움찔 떨었다.

“진짜네…….”

그는 애틋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손가락 끝에서 살짝 느껴지는 아드리안의 서늘한 피부에서 그제야 지금 그가 이 막사 안에 실재한다는 것을 완전히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음대로 하란 듯 미하일의 손가락을 내버려 두었던 아드리안은 무표정으로 그런 그를 응시했다.

“확인 끝났으면 손가락 치워.”

아드리안은 심드렁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몇 년간 미하일이 성장한 탓에 자연스럽게 둘의 체격 차가 조금 느껴졌다. 뭐, 체격 정도야 그냥 껍데기이니 드래곤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했다. 실제로 그는 오랜 시간 유희에 나설 때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껍데기를 변화시키곤 했다.

드래곤의 맑은 눈동자가 미하일의 몸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주욱 훑었다. 아니나 다를까 생각했던 것처럼 마나 밸런스가 엉망이었다. 저 향초는 분명 가끔씩 피우라 말했었는데…… 제멋대로 넘치게 태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조급해하고 있다.’라고 말했던 카일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하여간, 신경 쓰이는 놈이었다.

아드리안은 짜증스레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몸 상태를 보아하니 아직도 소드 마스터까지는 한참 멀었네. 그때는 그렇게 자신 있다고 하더니…… 마나 컨트롤이 생각보다 까다롭긴 하지?”

목소리에서 비난하는 의도가 명백히 들렸다.

그러나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지금 미하일에게는 그런 비난보다, 아드리안이 이곳에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이렇게 갑자기-”

그때였다. 미하일의 막사 밖에 누군가 서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 기척을 먼저 느끼고는 힐끔, 눈짓을 보냈다. 조금 전 미하일의 외치듯 크게 말했던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이 막사가 왕자의 것임을 알고 있던지, 곧바로 들이닥치지 않고 앞에서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한 후 조심스레 물어 왔다.

“저……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교대로 진지를 순찰하는 보초병인 듯했다. 그 목소리에 미하일의 고개가 막사의 입구 쪽으로 휙, 돌아갔다. 그 상태로 미하일이 상황을 대충 넘길 만한 변명거리를 생각하던 중이었다.

미하일의 팔에 끌어당겨져 얼결에 침대에 앉아있던 아드리안의 입술이 먼저 열렸다.

“아-”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텁, 그런 아드리안의 입을 미하일이 다급하게 손으로 막았다. 진지 내의 병사들은 미하일의 목소리를 대부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대신 답하는 것은 지금 이 막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말하는 꼴이었다.

쉿, 미하일은 그 상태로 아드리안의 귓가에 대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내가 말할게. 조용히 있어.

아드리안은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미하일의 손을 내려다보고는 탁, 옆으로 치워 냈다. 제법 아플 만했으나 미하일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상태로 입구 쪽을 향해 말했다.

“아무 일도 없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간결한 말투였다.

밖의 보초는 미하일의 목소리에 안심했던지 “네. 그럼 주무십시오.” 하고 말하곤 순찰을 마저 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터벅터벅 점차 멀어져 가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막사 안에서도 들렸다.

그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입구를 바라보던 미하일이 아드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드리안은 같은 침대에 앉아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헤어진 이후로 몇 년이 흘렀음에도 그대로인 외양이 무척 부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이래서야, 꿈이라 오해할 만도 했다.

미하일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는 말해도 돼. 괜찮아?”

미하일의 조심스런 눈빛과 말투를 아드리안은 귓등으로 들으며 슥,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아드리안은 미하일과 수다나 떨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안 괜찮을 건 또 뭐람.

아드리안은 일어서자마자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협탁의 향초를 짜증스레 다시 한 번 콱, 짓이겼다. 막사에 들어오자마자 드래곤이 손으로 껐을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처참하게 부서져, 향초는 다시 쓸 수 없게 되었다. 미하일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런 아드리안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이어서 침대를 검지로 가리켰다. 드래곤은 그냥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편했다.

“마침 잘됐군. 그대로 등을 위로 해서 누워.”

뭐?

갑자기 나온 이상한 명령에 미하일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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