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오르디나스.
카일이 선택한 단어에 드래곤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내 기억을 묻는 거라면, 뭐. 당연히 잊지는 않았지.”
어차피 정말로 그것을 기억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며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왜?”
날 선 눈동자가 맞은편의 카일을 향했다. 파충류 특유의 뾰족한 동공이 도드라졌다.
그러나 카일은 기세에 눌려 쭈그러든 말투로 말할지언정, 본인이 하고 싶었던 말을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꿋꿋하게 이 근방을 돌아다니던 이유를 꺼냈다.
“지금 저는 오르디나스에 대한 연구를 이어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드리안의 무심한 눈빛이 카일의 이야기를 재촉했다.
“만약 오르디나스가 인류의 멸망을 계획하고 있다면…… 저희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요. 지금 저는 마물들이 조금이라도 적게 출몰하는 지역들을 탐사하고, 그 이유를 파악하는 중입니다.”
“…….”
“루스타바란 초대 국왕 카를로가 소드 마스터가 된 것도, 미하일 왕자가 펠렌 디프스의 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당신의 개입이라 들었습니다.”
툭, 툭.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아드리안의 검지손가락이 규칙적으로 표면을 몇 번 두드렸다. 배짱 하나는 높게 사 줄 만했다. 흠, 아드리안은 제자의 바보 같은 질문을 받은 스승처럼 잠시간 카일의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려 고민했다. 저런 말을 하는 의도가 어렴풋이 전해졌다.
“그래서 그 질문은 뭐, 이 몸이 오르디나스와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다- 이건가? 너희 인간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싶어서 마물들을 대륙 위를 활개 치는 것을 내버려 두고 있다고.”
카일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는 다급하게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그런 뜻은 절대 아니었-”
아드리안이 픽, 입술을 끌어 올려 비웃으며 카일의 말을 잘랐다.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
“…….”
데루룩, 카일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굳었던 그의 표정이 점차 환해졌다. 이어서 그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정말 다행이군요.”
저 안심하는 표정은 뭐지? 아드리안은 뚱한 표정으로 그런 카일을 바라보았다.
“뭐가.”
“생각보다 그리 매정한 분은 아닌 것 같아서요.”
“대륙에서 마물들이 저렇게 날뛰고 있는데 나서지 않는다 해도?”
네.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이 몇 번이나 인간들을 도와준 일화를 들어서인지도 모르겠으나, 왠지 모르게 그 밑에 깔려 있는 선의가 느껴져서였다.
“…….”
드래곤은 그런 카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돌렸다. 제멋대로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관심 없었다.
남 일처럼 심드렁한 얼굴이던 아드리안의 시야에 밝은 창밖이 들어왔다. 레어의 유리창 밖의 동물들은 마물들이 날뛰며 대륙이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뛰놀고 있었다.
드래곤은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직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나?”
카일은 그런 질문을 해 오는 아드리안을 스윽, 바라보았다.
“……누구를 물으시는 겁니까.”
“당연히 미하일이지. 내가 너에게 다른 사람을 물어보겠어?”
다시 미하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레어로 데려올 때에도 드래곤은 미하일의 소식을 궁금해했었다. 이상한데. 카일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드래곤의 표정에서 감정을 찾으려 애썼지만, 무표정한 아드리안의 얼굴 위에서 그런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궁금하다는 듯 답을 기다리고 있는 아드리안을 위해 카일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었다.
“네. 그렇습니다. 뭐, 사실 소드 마스터라는 것이 왕자님처럼 젊은 나이에 도달하기에는 너무나 높은 경지이니…… 시국이 이래서 스스로 조급해하는 것도 한몫하는 것 같고요.”
“조급해하고 있어?”
드래곤의 나직한 목소리가 곧바로 따라붙었다.
카일은 그 목소리에 옆으로 고개를 아주 약간 기울였다.
‘역시 뭔가……’
처음 그냥 과민한 의심이라 생각했던 가설 하나에 힘이 실리고 있었다.
“본인은 아닌 척하시지만…… 조급해하는 건 맞습니다. 그 힘든 출정에도 하루도 빼먹지 않고 개인 훈련을 하고, 궁정 마법사 여럿에게 의견을 구하시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마물들을 처리하는 데에는 검에 검기를 덧씌우는 것이 가장 좋은데, 검기를 정교하게 컨트롤하는 것이 어려우시다더군요. 마력은 충분한데 섬세한 움직임 조절이 부족한 거죠.”
“……아직도 그런가.”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미하일은 선천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핏줄이었다. 하긴, 아무리 노력한대도 본인의 핏줄을 갈아 끼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카일은 아드리안의 중얼거림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반응했다.
“그야 같은 방을 썼으니까.”
아드리안은 단호하게 그 이유를 덧붙였다. 하지만 겨우 그 사실 하나만으로 드래곤이 인간 하나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하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었다. 하지만 본인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카일은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한참을 창밖을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팔은 이제 괜찮지?”
드래곤의 또렷한 목소리에 덩달아 ‘뭔가 밖에 있나?’라고 생각하며 유리창 쪽을 바라보던 카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네. 그렇습니다.”
갑자기 물어오는 팔 상태에 카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드륵, 그 대답을 들은 드래곤이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키며 의자 뒤로 뺐다. 응? 그 움직임에 카일이 고개를 들어 아드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드래곤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 이 장면 익숙한데.
“이제 돌아가.”
이번에도 아드리안은 카일에게 대답할 시간 따위 주지 않았다.
그 말을 끝으로 탁, 손가락을 가볍게 퉁겨 소리를 냈다. 카일은 테이블에 앉은 채로 공간 이동 되었다. 사용된 마나의 양으로 환산하면 아주 값비싼 축객령이었다.
깜빡, 카일의 눈이 닫혔다가 열렸다.
“……감사합니다…….”
카일은 잘게 눈을 깜빡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그는 깊은 숲속에서 주머니를 뒤져 주섬주섬 지도와 나침반을 꺼냈다.
기묘한 만남이었다. 나중에 숙소에 도착하면 꼭 이 모든 걸 기록해 둬야지. 뼛속까지 학자의 마음가짐으로 가득 차 있는 카일이었다.
***
드래곤이 도착한 곳은 임시로 구축한 막사들이 늘어선 전장이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다짐하더니.’
아드리안은 퉁명스런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공간 이동 마법을 쓰고 남은 마나 알갱이들을 털어 냈다.
카일과의 대화를 한 후, 그는 미하일의 상태가 조금 궁금해졌다. 드래곤이 곧바로 이곳에 도착한 것은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결론이었다. 아주 즉흥적이었으나, 드래곤은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충분히 옮길 만한 능력이 있었다.
인간들이 잠에 빠진 깊은 밤이라 전장에는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중 미하일이 잠들어 있는 막사의 천막을 휙, 가볍게 걷어 낸 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윽, 드래곤은 그 안에 들어가자마자 인상을 썼다.
안은 약초가 타면서 내는 특이한 냄새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아드리안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손바닥을 휘적여 연기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 했다. 하지만 연기가 이미 막사 내부를 꽉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나아지는 건 없었다.
아드리안은 그 향기의 원인을 단번에 눈치챘다. 바사미엘에서 그가 미하일에게 건넸던 향초의 냄새였기 때문이다.
그는 성큼성큼 막사 깊은 곳까지 걸어가 간이침대 앞 협탁에 놓여 있는 향초를 확인했다. 여전히 타고 있는 것이 밤새 이것 하나를 전부 다 피워 버리려는 듯했다.
효과가 이제 슬슬 안 먹힐 때도 되었지. 아드리안은 슬쩍 옆의 침대를 눈짓했다. 그곳에는 바사미엘의 기숙사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미하일이 잠버릇 하나 없이 고요하게 숨소리만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검이 정성스레 놓여있었다.
냄새가 이렇게 지독한데, 여기서 잘 수 있는 저놈도 참 대단했다.
치익-!
아드리안은 손을 뻗어 향초 끄트머리를 엄지와 검지로 붙잡았다. 불이 닿으면서 피부가 살짝 타는 향기가 났으나, 이 정도 화상이야 드래곤에게는 인간으로 치자면 모기에 물린 축에도 안 들었다. 그는 곧바로 힐링 마법으로 손가락 상처를 치료했다.
“……배합이 영 틀렸군.”
누가 만든 거야.
아드리안이 쯧, 하고 혀를 차는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침구가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아드리안이 몸을 천천히 뒤로 돌리자, 날카로운 쇠붙이 소리가 이어졌다.
“누구냐.”
위협적인 목소리였으나, 아드리안은 그것을 귓등으로 들으며 자신의 목에 겨눠져 있는 검 끝을 힐끔 눈짓했다.
그것은 드래곤에게도 익숙한 펠렌 디프스의 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