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지금 이 대륙의 상황?
아드리안은 되돌아가려던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선 채 물끄러미 카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사슴 한 마리가 드래곤 옆에 고고하게 서 있는 모양새가 마치 그가 바로 이 숲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듯했다.
“…….”
다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카일이 눈을 멍하니 뜬 채로 아드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아드리안은 그런 시선들이야 이미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지겨울 뿐이었다.
“어떻길래?”
그는 카일을 향해 천천히 상체를 굽히며 질문했다.
“대륙의 상황이 도대체 어떤데.”
“…….”
아드리안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고서는 카일은 자신의 생각을 전부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아는 아드리안과 눈앞의 남자는 같은 외양이었으나 전혀 달랐다.
이 남자에게는 자신이 아는 아드리안이 가지고 있지 않은, 아니 가질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금빛 마나 알갱이들이 은하수처럼 펼쳐져 있는 저 두 눈동자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봐. 정신 차리고 대답을 해.”
아드리안은 짜증스레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목소리에야 정신을 차린 카일이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방금 당신이 손쉽게 잡아 눌렀던 저 마물이…… 대륙 전체를 뒤덮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영토가 이제 몇 군데도 남지 않았고-”
카일은 해를 등지고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느라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뜰 수밖에 없었다. 카일은 꿀꺽, 침을 한 번 삼켰다.
지금 눈앞의 존재는 바사미엘을 함께 다녔던 아드리안 헤더가 아니었다. 위대한 드래곤에게 자비를 구하는 것 같은 나직한 목소리가 카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 그것 참 안타깝게 되었군.”
그러나 그 목소리에서는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아드리안은 대강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그의 기억을 스치고 지나가는 인간이 하나 있었다. 자신 있게 소드 마스터가 될 거라 다짐하던.
마침 바로 대답해 줄 인간이 눈앞에 있었다. 아드리안은 카일에게 곧바로 물어보았다.
“미하일은?”
“…….”
그 갑작스런 화제 변화에 카일이 잠시간 벙찐 표정을 지었다. 대륙의 존망에 대한 이야기 중이었는데, 갑자기 미하일의 이름이 왜 나온 것인지 드래곤의 사고 흐름에 따라가지 못한 탓이었다.
아드리안은 그런 카일에 대고 다시 한 번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미하일은 지금 뭐 하고 있냐고 물었어. 왕족이랍시고 가만히 안전한 곳에 숨어 있을 놈은 아니잖아.”
“……뭐, 그렇죠.”
조금 전부터 카일은 저도 모르게 높임말로 대답했다.
“당연히 미하일은 그 최전선에서 마물들과 싸우고 있-”
끄응, 카일은 말을 더 이어서 하려다말고 신음했다. 잊고 있었던 상처에서 스멀스멀 고통이 올라온 것이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아드리안의 눈썹 하나가 올라갔다. 그러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와줘?”
사실 드래곤이 친절을 베푸는 데에 그가 예전에 만났던 인간이라는 사실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물론 성가신 일이기는 했다. 저놈은 애초에 레어 안쪽에 들어오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 같으니 말이다. 그래서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으려 했는데…….
다친 것을 확인하고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힘을 숨길 필요도 없으니 그 정도 도움이야 베풀 수 있는 일이었다. 대신, 궁금한 걸 더 물어봐야겠군. 아드리안은 멋대로 생각을 끝낸 후,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마법을 시전하려는 기색에 카일의 눈이 커졌지만, 드래곤이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대신 레어에 들어와서는 더 자세하게 말해야 해.”
아드리안은 카일에게 대답할 시간 따위 주지 않았다.
그 말을 끝으로 손가락을 가볍게 탁 퉁겨 소리를 냈다. 카일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공간 이동 마법이 시전되었다. 드래곤의 엄지와 검지가 움직이는 것이 느리게 보였다.
깜빡, 그의 눈이 닫혔다가 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숲속에 있었는데…….”
카일은 잘게 눈을 깜빡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공간 이동 마법은 처음 당해 보는 것이었으므로 그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이렇게 깔끔하게 사람 하나를 온전히 이동시킬 수 있다고? 이렇게 시전하는 데에 필요한 드래곤의 마나는 얼마나 필요할까?
지금 그가 앉아 있는 곳은 따뜻한 색감의 촛불들이 군데군데에 놓인 아늑한 방이었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실크 양탄자가 느껴졌다. 각종 양탄자들이 구분 없이 깔려 있었는데, 어제 상인이 방문이라도 했는지 한 번도 제대로 사용한 적 없는 것처럼 하나같이 깔끔했다.
“그래서 여기가 어디지?”
그때 카일의 머릿속을 스치는 단어 하나가 있었다.
분명 아드리안이 이곳으로 자신을 보내기 전에 ‘레어’라고 말했다. 헉? 설마. 카일의 두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여기가 바로 그……?!”
카일은 바닥에서 일어나려다가 팔의 상처에 몸을 움찔 떨고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다리를 늘어트렸다. 드래곤의 레어는 이렇게 생긴 건가? 레어의 주인은 손님을 데려다 놓고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덕분에 카일은 마음껏 그곳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는 드래곤의 레어를 연구하러 들어온 학자처럼 유심히 내부를 관찰했다.
특이하게 벽 하나를 커다랗게 차지하고 있는 유리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 안은 햇빛이 들지 않은 저녁처럼 어두웠다. 마법인 것 같았다. 카일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최대한 목을 길게 잡아 빼어 유리창 밖을 확인했다.
아아-
감탄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창밖은 그야말로 천국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그곳은 드넓은 초원이었다. 야생의 동물들이 먹이 사슬에서 해방이라도 된 듯, 종에 구별 없이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초원을 둘러싸고 있는 맑은 호숫물에 햇빛이 잘게 반사되어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냈다. 그 뒤로 빽빽하게 들어선 높은 나무들이 이 공간을 보호하고 있는 울타리처럼 서 있었다.
그때였다.
“이제 좀 살 만한가 보군? 그냥 다시 아까 거기에 데려다 놓을까.”
등 뒤에서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일은 흠칫, 몸을 굳히고는 헛기침을 하면서 능청스레 뒤로 돌았다. 그곳에는 한쪽 입가만 삐죽 올린 채 비웃고 있는 아드리안 있었다. 창밖을 구경하는 동안 들어왔는지 그는 레어의 벽 옆에 있는 대리석 테이블에 앉은 상태였다. 카일은 이마로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입술을 끌어 올렸다.
‘……저게 원래 성격인가. 아카데미에서 저 성격 죽이고 사느라 고생깨나 했겠네.’
카일은 목숨이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당연히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다. 드래곤의 심기를 거슬려 그와 독대할 수 있는 이 귀한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그는 애써 미소 지으며 어색한 말투로 레어를 칭찬했다.
“풍경이 정말 보기 좋네요. 하하.”
아드리안은 그의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던지 손가락을 허공에 대고 휙, 움직였다.
그 손짓에 카일의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발이 허공에 뜬 채로 저절로 미끄러지듯 날아갔다.
“윽!”
카일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푹신한 소파 위로 가차 없이 던져졌다. 아드리안은 카일이 널브러진 소파를 힐끔, 바라보고는 테이블 위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제대로 앉아. 다친 곳은 이쪽으로 내밀고.”
“……네, 넵.”
외관상으로는 카일보다 몇 년은 더 어린 청년의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봤다면 무척 이상한 상황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일은 아드리안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팔을 테이블 위로 조심스레 내밀자, 마나 알갱이들이 순식간에 그의 팔을 덮더니 이어서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가 되었다. 카일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팔을 굽혔다 펴 보며 그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아드리안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런 카일을 행동을 멈추게 만들었다. 카일은 맞은편의 드래곤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바깥이 그렇게 위험한데 왜 혼자 돌아다니고 있지?”
드래곤이 할 수 있는 합당한 질문이었다.
“……대답하기 전에 괜찮다면, 다른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카일은 꿀꺽, 침을 한번 삼켰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밝은 눈동자가 슥, 카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의 허락에 카일은 다시 입을 열었다.
“바사미엘에서 함께 오르디나스에 대해 연구했던 것이 기억나십니까?”
드래곤이 주는 위압감에 온몸이 잘게 떨렸지만, 카일은 자신이 원하던 말을 간신히 모두 뱉어 낼 수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아드리안의 표정이 일순 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