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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54화 (154/184)

154화

14. 인류 멸망의 기로에서

어두운 동굴이었다.

곳곳에 마나를 태우며 빛을 내는 촛대들이 놓여 있고, 그 불빛들을 따라 동굴 안쪽으로 한참 더 들어가야 하는 곳에 이 동굴의 주인인 골드 드래곤이 잠들어 있었다.

마치 언덕 하나만큼 커다란 금 덩어리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살피면 그것이 숨 쉬는 박자에 맞추어 몸을 서서히 부풀렸다가, 다시 늘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후우, 후우. 드래곤의 깊은 숨소리가 동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쿵, 레어의 실드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것이 느껴졌다. 드래곤은 동굴과 레어 주변의 넓은 숲에 실드를 펼쳐 두었던 것이다. 동굴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실드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는지, 굳게 닫혔던 드래곤의 눈이 단번에 열렸다.

환하게 빛나는 밝은 금색 홍채에 파충류 특유의 세로로 길쭉한 동공이 도드라졌다.

막 깊은 잠에 빠지려던 참이었으나 아까부터 자꾸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저것 때문에 도통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잠이라는 것은 드래곤에게 필수는 아니니, 차라리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잠을 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드래곤은 바닥에 누였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드래곤의 발이 땅을 디디는 소리가 동굴을 몇 번 흔들었다. 곧이어 드래곤은 날개를 활짝 펴 천장의 출구를 향해 날아서 동굴을 몇 초 만에 빠져나갔다. 어두운 동굴과 대조되는 상쾌한 바깥 공기와 밝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광활한 하늘을 날면서 드래곤은 커다란 눈을 가늘게 떴다. 도대체 레어의 실드를 건드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심히 거슬렸다.

빠르게 날아가던 드래곤이 커다란 날개를 대지를 향해 펼쳐 그 자리에 멈추더니, 그대로 하강했다. 드래곤의 날갯짓에 숲의 커다란 나무가 옆으로 쏠리고 흙바닥의 모래가 휙휙 날아갔다.

드래곤의 커다란 발이 적당한 공터에 닿으면서 인간의 다리로 변했다.

이런 숲에서 커다란 몸으로 움직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다리에서부터 시작한 변화는 금빛 마나 알갱이가 훑고 지나가자 단번에 인간의 몸으로 바뀌었다. 드래곤의 비늘 색과 완벽히 같은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성큼성큼 숲을 헤치고 걸어가 실드의 경계선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음? 드래곤은 다시 걸으려다 어느새 발밑을 가로막고 있는 토끼 몇 마리 때문에 걸음을 멈췄다. 드래곤이 내려다보자, 얼룩무늬 털을 가진 토끼가 고개를 쳐들고 코를 찡긋거리며 드래곤을 마주 보았다. 드래곤은 그 토끼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질문했다.

“왜?”

그러나 토끼들은 길쭉한 귀를 쫑긋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원래라면 드래곤의 걸음에 거슬리지 않도록 발 맞춰 걸어갈 동물들이었다. 드래곤이 이상하다는 듯 양옆으로 고개를 저으며 다시 발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툭, 커다란 뿔을 가진 수사슴과 암사슴 몇 마리가 드래곤 옆에 와 있었다. 드래곤은 사슴의 검은 두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슴들은 축축한 코로 드래곤의 허리춤이나 상체를 툭툭 찔러 댔다. 그 움직임은 드래곤이 실드 밖으로 다가가려하자 더 심해졌다.

어떻게 알았는지 숲에서 여러 동물들이 튀어나와 드래곤의 앞길을 하나둘씩 막아섰다.

하하, 드래곤은 그제야 이 동물들이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챈 듯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는 사슴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중얼거렸다.

“나를 걱정해 주는 거냐.”

드래곤을 걱정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짓이야. 그는 상체를 굽혀 작게 미소 지으며 발치의 토끼들을 툭툭 한 번씩 두드려 주었다.

컹! 뒤따라오던 은빛 늑대가 큰 소리로 한 번 짖었다. 드래곤이 날아오는 것을 열심히 달려 뒤따라온 모양이었다. 모여 있던 토끼들이 그 소리에 번쩍 고개를 쳐들더니 움직임을 멈추었다. 늑대의 가벼운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토끼와 사슴들은 슬금슬금 눈치 보며 자리를 피했다. 그제야 실드 밖으로 편하게 나갈 수 있게 된 드래곤이 고맙다는 듯 늑대와 눈 맞춤을 했다. 커다란 몸통을 가진 늑대는 그 눈빛을 이해했다는 듯 근엄한 자세로 우뚝 멈추더니 자리에 앉았다.

토끼와 사슴처럼 저놈도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드래곤은 곤란하다는 듯 금색의 머리카락을 대강 손바닥으로 긁적였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늑대는 맑은 두 눈으로 드래곤을 바라보며 바닥에 완전히 엎드렸다. 그곳에서 기다리겠다는 뜻을 알아들은 드래곤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실드는 바로 코앞에 있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일반인이 봤다면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드래곤의 레어에서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인간들이 이곳까지 오고 싶지 않도록 넓은 범위의 마법을 시전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우다다닥! 하고 어떤 불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쾅!

그리고 곧이어 커다란 파열음이 들렸다.

마물은 검은 마나를 뒤집어쓴 채 드래곤을 향해 쏜살같이 뛰어오다 다시 한 번 실드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드래곤의 잠을 깨운 것의 정체가 바로 저 마물인 듯했다. 드래곤은 흥, 하고 한 번 짧게 코웃음을 친 후 중얼거렸다.

“아둔하긴. 앞뒤 분간도 못 하는 종이군.”

저걸 생명체라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것에 달려들어 생명력을 순식간에 빨아먹는 마물이었다. 마계에서 살아가는 종족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 대륙에서 발견될 확률은 희박했다. 말 그대로 ‘길 잃은 영혼’이라 불릴 만했다. 실드 안으로 들어와 보았자 별것 없을 텐데, 저런 무의미한 짓을 반복하고 있다니.

드래곤은 실드 바깥을 차갑게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실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물이 힘겹게 온몸을 부딪치고 있는 것과는 대조되게 실드는 드래곤의 권속이었으므로 그는 가볍게 통과할 수 있었다.

실드를 나서자마자 흐릿한 피 냄새가 드래곤의 코를 간질였다. 동물의 피는 아니었다. 인간인가?

드래곤은 다시 한 번 저 멀리서 뛰어오고 있는 마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것부터 해결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었다.

그는 마물을 향해 뻗은 팔의 주먹을 가볍게 쥐고 잠깐 위로 들었다가…… 허공의 무언가를 주먹의 아랫부분으로 내리치듯이 짧게 휙 움직였다.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가 났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마물의 몸통 바로 위에서 효과가 나타났다.

콰아아앙—!

검은 마물은 찍소리도 내지 못한 채 달려오던 상태 그대로 바닥에 짓이겨졌다. 마치 커다란 바위에라도 깔린 듯 부풀어 있던 몸통이 종잇장처럼 얇게 바닥에 깔렸다. 그 주위로 검은 마나가 즙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예전에 숲속에서 미하일과 봤던 마물과 똑같았다.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드래곤은 천천히 그 흔적으로 흔적 쪽으로 다가갔다. 무릎을 살짝 굽혀 그 검은 마나에 손가락을 대 보려는 순간이었다.

“……아드리안?”

음?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의외의 목소리에 드래곤은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바사미엘에서 만났던 카일 드바이시였다. 아카데미를 다녔을 때보다 시간이 조금 흘러서 그런지 그는 완연한 성인 남성으로 자라 있었다.

카일은 드래곤에게 팔을 뻗으려다 다친 상처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윽, 하고 신음했다. 하지만 그리 심한 상처는 아니었기에 지금 이 상황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눈앞의 저 비현실적인 외모를 가진 금발의 남자는 분명 카일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았다. 답사 때 생긴 사고 이후로 몇 년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외관은 여전히 바사미엘 재학 시절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아드리안 헤더, 맞지?”

애절하게까지 들리는 카일의 물음에 잠시간 침묵했다. 어느새 옆까지 다가와 허리춤을 머리로 밀어내고 있는 사슴의 털을 슥슥 매만져 주었다. 검은 마물이 사라지자 안심하고 실드 밖으로 걸어 나온 모양이었다.

드래곤은 카일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아주 잠깐 고민했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아니야.”

거짓말은 아니었다.

카일은 그 어이없는 말에 소리 지르는 것처럼 외쳤다.

“아드리안 맞네!”

시끄러운 소리에 아드리안은 귀찮다는 듯 귀를 문질렀다. 동시에 사슴의 귀가 쫑긋 세워지는 것이 보였다.

“그래, 맞아.”

아드리안은 그냥 빠르게 인정해 주기로 결정한 후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랜만이다. 그럼.”

아드리안은 차갑게 대답하며 바로 작별 인사를 내뱉었다. 카일은 그 갑작스런 인사에 한 번 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그렇게 가기만 해 봐. 어?”

시답지도 않은 협박이었다. 카일의 외침에도 아드리안이 아랑곳 않고 다시 실드 안으로 발을 들리려는 순간이었다.

“지금 이 대륙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

카일의 목소리가 아드리안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드리안은 가려던 발걸음을 우뚝 멈춘 채 고개만 뒤로 돌렸다. 아주 조금이지만 궁금하긴 하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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