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아마 몇 달 동안 찾아 헤맨 상대에게 들을 만한 대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미하일이 원하던 진심이었다.
화를 낼까? 아니면 눈물을 흘릴 수도 있었다. 아드리안은 내심 궁금해하며 미하일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드래곤의 모든 추측은 빗나갔다.
“그랬군.”
미하일은 웃고 있었다. 무언가 후련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나?”
아드리안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물어보지 않고서는 미하일이 웃는 이유를 스스로 알아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미하일은 좌우로 고개를 약하게 저으며 말했다.
“솔직히 내가 기대했던 대답은 아니야.”
오히려 기대와는 정반대의 대답이었다. 그래서 입안이 썼다.
드래곤이 유희를 그런 식으로 끝낸 후로 한 번이라도 자신을 생각했노라고 말해 줬다면 좋았을 것이었다. 아니면, 조금이라도 후회하고 있다고 해 줬거나. 미하일이 기대했던 건 그런 대답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난 그 말을 직접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어.”
바사미엘에서의 일 년, 그리고 동행한 지난 한 달 동안 언제나 아드리안과 자신 사이에 어떤 벽 하나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드리안이 유희라는 거짓으로 만들어 낸 커다란 벽 말이다.
그리고 조금 전에야 미하일은 처음으로 그 벽 너머에 있는 아드리안의 진심이 느껴졌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지금 이렇게 후련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만족한다니 다행이군.”
여전히 미소 짓는 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행동이 매우 많았으므로 이번에도 그냥 납득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 아드리안의 얼굴을 마지막까지 뚫어져라 바라보던 미하일이 갑자기 품속의 비늘을 떠올렸다.
“아, 이걸 돌려줘야지.”
미하일은 주머니에서 비늘을 꺼냈다.
어? 그는 주머니에서 나온 비늘을 확인하곤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을 드래곤의 비늘이 어딘가 모르게 광택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미하일의 의문에 아드리안은 별것 아니란 듯이 대답해 주었다.
“이미 소원을 들어줘서 그런 거야. 다시 내 손에 들어오면 빛을 찾게 되지.”
아드리안은 미하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바닥 위에 비늘을 올려 주려던 미하일의 손이 멈칫, 허공에서 굳었다.
“……그러면 지금 이건 네 마력이 없는 그냥 비늘이란거야?”
그 질문에 아드리안은 비늘을 잠깐 확인했다. 마력은 한 줌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거기다 대고 소원을 빌어 봤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
잠시간 미하일은 아무 말도 없이 손안의 비늘을 내려다보았다.
“왜 주려다 말아?”
아드리안은 퉁명스레 말을 꺼냈다. 미하일을 향해 뻗은 손이 민망해질 참이었다.
꾹 다물려 있던 미하일의 입술이 그제야 열렸다.
“이걸 꼭 다시 가져가야 해?”
또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그런 화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드리안이 짜증스레 미간을 찡그렸다.
“비늘을 제자리에 끼워 놓으려면 필요하지.”
질문의 의도가 너무 뻔했으므로, 아드리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미하일은 그 거절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이제는 어차피 소원도 빌 수 없는 비늘인데…… 내가 가지면 안 돼?”
미하일은 왕족의 막내답게 가지고 싶은 것은 당당히 요구할 줄 알았다. 그 요구에 코웃음을 치려던 아드리안의 입술이 움찔, 떨렸다. 은빛 속눈썹 아래로 붉은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건…… 그러고 보니 바사미엘에서 자신이 한스에게 틸론 좀 아껴 보려고 써먹은 방법이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매번 까탈스럽게 굴던 미하일에게서 볼 수 있을 거라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눈빛에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빨리 내놔. 강제로 빼앗아 가기 전에.”
드래곤의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았다.
휙, 아드리안의 손가락이 비늘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래?”
미하일의 풀 죽은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가득 채웠다. 아드리안의 날카로운 눈빛이 미하일의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향했다.
“너의 진심을 듣느라 소원을 써 버린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그는 손에 들린 빛바랜 드래곤의 비늘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이 꽉 쥐고 있었다.
“나는 대륙의 모든 금화와 명예, 소드 마스터가 될 기회를 다 버리고 네 대답 하나만을 원했는데…….”
그러니까 누가 그러라고 강요했어?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입을 살짝 벌렸다.
“고작 네 비늘 하나 가지는 것조차 안 되는 거야?”
“……하.”
드래곤은 짧게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이런 하찮은 실랑이를 할 만큼 고작 비늘 하나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비늘을 매개로 한 마법은 끝났으니 이제는 소원을 빌 수 도 없는, 그냥 일반적인 것보다는 조금 더 클 뿐인 비늘이었다.
“가져.”
아드리안은 손을 대강 휘적이자, 침울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던 미하일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고마워.”
“그래. 왜 가지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을 억지로 묶고 있던 소원이 끝났다는 것이 중요했다. 아드리안은 비늘을 내려다보며 기뻐하는 미하일을 잠시간 내버려 둔 채 속으로는 딴 생각을 했다. 사실 미하일의 소원을 들어준 뒤 무엇을 할 건지는 정해 두지 않았었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비껴 낸 채 생각에 잠겨 있는 아드리안에게 미하일이 말했다.
“이제…… 돌아갈 거야?”
“……어디로?”
글쎄?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아드리안은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장소를 꺼냈다.
“내 레어?”
“레어로 돌아가고 싶어?”
“…….”
돌아가고 싶냐는 ‘욕망’을 물어본 거라면 아니었다. 물론 편하고 아늑한 안식처인 것에는 틀림없으나, 그저 유희가 끝나면 레어로 돌아가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져 먼저 생각난 것이었다.
드래곤은 대륙 위의 그 어떤 것이든 가질 수 있었고, 불가능한 것도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런 행동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드리안은 의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 후, 미하일을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그게 아니면…… 설마 너랑 같이 왕국으로 돌아가자는 건가?”
“네가 진심으로 원하는 걸 해.”
“하긴, 오르디나스가 말하길 네가 대륙의 운명을 구할 영웅이 된다고 했으니 널 도와야겠지. 안 그래?”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아드리안은 그 말을 한 후 스스로 설득되었는지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다. 그러나 미하일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드리안. 오르디나스는 신경 쓰지 마. 난 네 진심이 궁금한 거지, 오르디나스의 결정이 궁금한 게 아니니까.”
“…….”
아드리안은 단호하게 말하는 미하일의 얼굴을 바라보다 기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그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였다.
“너는 내 진심을 왜 그렇게 궁금해하지?”
아까부터 계속 미하일의 입에서 나오는 ‘진심’이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인간들이야 순간의 감정에 휩싸여 나중에 돌이켜보면 이상한 결정들을 덜컥 선택하고는 했지만, 드래곤은 달랐다. 그는 한 번도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는 자신의 진심을 의심해 본 적 없었다.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가벼운 궁금증에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바사미엘에서 말했잖아.”
자신의 고백이 아드리안의 마음에 크게 남지는 않았던 것 같아 씁쓸하지만, 미하일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진심을 말해 주었다.
“너를 좋아하니까.”
다른 곳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아드리안의 고개가 그 대답에 휙 움직였다. 유희 중일 때야 다양한 인간들에게 여러 번 들어 보았던 이야기였으나, 지금은 달랐다.
“인간인 아드리안을 좋아한 거랑은 다를 텐데. 난 드래곤이니까.”
“네가 드래곤인 것쯤은 몇 주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딱히 다를 건 없지.”
아하, 몇 주 전부터 알고 있었구만? 아드리안의 눈이 슬쩍 좁아졌다. 시간을 가늠해 보자면 아마 미르킨트가 핀 걸 발견했을 무렵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네가 원하는 대로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거야. 오르디나스 때문이 아니라.”
“……주제넘은 조언이군.”
아드리안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는 넌 ‘진심으로’ 내가 같이 안 따라가도 괜찮겠어? 대륙의 멸망을 막으려면 넌 소드 마스터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분명 드래곤의 힘이 필요할 텐데?”
미하일은 그 말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그건 내 운명이야. 내가, 나만이 이룰 수 있는 운명.”
***
“하여간 그놈들의 피에는 뭔가 흐르는 것이 틀림없어.”
레어로 돌아온 아드리안이 테이블에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머그잔에 담긴 따뜻한 커피에서 김이 올라오고, 발치에는 은빛 털을 가진 늑대가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드래곤의 머릿속에서는 힐데케산에서 미하일과 헤어지기 바로 직전 그가 했던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결의에 차 반짝거리는 미하일의 눈동자도 함께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미하일의 당당한 모습에 아드리안은 잠시간 말문을 잃었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시시했지만 아주 가끔씩, 의외의 성과를 이룩해 내는 인간들이 있었다. 그것이 드래곤을 놀라게 만들고는 했는데, 아드리안은 그런 종류의 놀라움을 싫어하지 않았다.
“나만이 이룰 수 있는 운명이라…….”
일렁이는 붉은 눈이 참 볼만했지.
아드리안은 하, 하고 코웃음을 치며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과연 어떻게 될지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