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관 뚜껑을 단번에 열어젖힌 미하일은 그 안에 든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관의 옆면을 붙든 그의 손가락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는 것이 아드리안의 눈에도 보였다. 충격받은 것이 분명했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아드리안은 미하일의 등을 잠시간 바라보다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한 번 내뱉고는 몸을 움직였다. 짐마차에서 가볍게 뛰어 내린 후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가는 아드리안의 발걸음 소리가 둘 사이를 가득 채웠다.
“…….”
그러나 관 속을 내려다보고 있는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움직임에도 아무 말 없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기만 할 뿐이었다.
아드리안의 것과 똑같은 금발 머리 시신이 눈앞에 있었다. 몇 달이라는 시간에 맞게 시신은 오랫동안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부패해 있었다. 관을 열자마자 그 악취가 났지만, 미하일은 아랑곳 않고 그것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비어 있을 줄 알았는데.”
미하일은 만약 아드리안의 시신을 찾게 된다면 자신은 분명히 눈물을 흘릴 거라고 생각했다. 눈물을 흘릴 만한 이유는 다양했다. 드디어 시신을 찾았다는 데에서 찾아온 감동이든 슬픔이든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신을 마주하고 있는 미하일의 두 눈동자에서는 오직 분노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래, 고귀하신 드래곤에게 시신 하나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겠지.”
왜냐하면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진짜’ 아드리안 헤더의 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동이나 슬픔에 잠길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 상황을 한발 떨어져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아드리안은 끝까지 자신을 속이려 했던 것이다. 그래, 설명할 기회가 충분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미하일의 빈정거림에 옆에 선 아드리안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 된 것, 다 털어놓자는 생각에서 아드리안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가 자신의 레어에 맨드레이크를 심었다고 이야기하려는 순간이었다.
“이건 말이지-”
“아니. 설명해 줄 필요 없어.”
그러나 그것은 곧바로 미하일에게 가로막혔다. 탁, 미하일은 관의 뚜껑을 다시 닫으며 몸을 일으켰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왜?”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나?
아드리안은 그런 미하일에게 뚱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드래곤이 말해 주려는 이 이야기야말로 미하일이 몇 달간 찾아다녔던 시신에 관한 정보인데, 갑자기 궁금하지 않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 이번에도 거짓말로 대충 넘어갈 거잖아.”
미하일은 말을 뱉은 후, 짜증스레 아드리안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그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빛났고, 그 안에 담긴 질책이 느껴졌다.
“진실을 말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냥 말하지 마. 그런 건 듣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이번에는 진짜 알려 주려고 했어.”
어린놈이 의심만 많네. 아드리안이 뺨 근처를 손가락으로 긁적였다. 그 중얼거림을 들은 미하일은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단호하게 잘랐다.
“네가 하는 말 따위 이제 안 믿을 거거든.”
“……따위?”
그 말에 아드리안이 하! 하고 혀를 짧게 찼다. 그가 드래곤인 것을 알고 있는 데도 자신을 이딴 식으로 대한 인간은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든가. 어차피 그러면 너만 손해야.”
“유익한 조언 새겨들을게.”
……음.
미하일의 대답에 아드리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침음을 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드래곤에게 감히 저런 대꾸를 해 대는 놈의 심장에 당장이라도 손톱을 박아 넣으려는 듯 아드리안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지만, 금세 제자리로 돌아갔다.
“당당한 건 좋지만 좀 적당히 해. 지금껏 오르디나스 덕에 몇 번이나 목숨을 구했는데, 드래곤에게 말 한 번 잘못한 죄로 죽을 수는 없잖아.”
“안 그래도 위대하신 오르디나스께 감사함을 느끼고는 있어.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너와 대화하는 것도 불가능했단 건 알고 있거든.”
“…….”
아드리안은 그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미하일을 바라보기만 했다.
도대체 미하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드리안의 시신이 필요하다고 강경하게 말했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필요도 없다며 화를 내다니. 이렇게 쉽게 거절할 것이었다면 애초에 소원으로 빌지 말았어야 했다. 결론적으로 고작 인간 하나가 드래곤을 헛고생하게 만든 것이었다.
사아아아- 약한 바람이 둘 사이를 간지럽히고 지나가면서 이파리들끼리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차갑고 굳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상쾌한 바람이었다.
그 여린 바람은 분노에 경직되어 핏대가 선 미하일의 얼굴도 간질이고 지나갔다. 미하일은 그제야 조금 전의 대화에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속 거짓말만 하려 드는 드래곤에게 욱해서 원래 성격이 튀어나왔던 것이었다.
“……미안, 다시 만나자마자 이렇게 싸울 생각은 없었어.”
머리가 아픈지 미하일은 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아드리안은 그 말을 듣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리석은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을 안다면 드래곤으로서 이런 사소한 잘못쯤은 너그러이 넘어가 줄 수 있었다.
“뭐, 네 사과는 받아 주지. 그래서?”
그래서?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미하일이 아드리안의 물음에 고개를 번뜩 들어 올렸다. 어떤 의도인지 이해를 못 했다는 표정이었다. 아드리안은 친절하게도 다시 한 번 현재 둘의 관계를 얽매고 있는 것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소원은 어떻게 할 거냐고. 미하일, 지금 이대로는 소원이 마무리되지 않으니까, 소원을 다시 바꾸든지 해.”
그러나 아드리안의 설명에도 미하일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금 그게 중요해?”
“그러면?”
그야 인간은 모르겠지만 드래곤에게 용언 계약은 엄청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말에 대답하려는 듯 입술을 살짝 열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천천히 다물었다. 그러고는 아마 지금도 제 주머니 안에서 반짝거리고 있을 드래곤의 금빛 비늘을 떠올렸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의 범위에 대해 다시 말해 주어야겠군. 네가 소드 마스터가 되고 싶다면, 내 손짓 한 번에 바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이 왕국을 아니 이 대륙을 가지고 싶어도 마찬가지지. 이 고귀한 몸에 지금, 이 순간에 한마디 말만 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는 천금 같은 기회를 고작 인간일 뿐인 너에게 허락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사랑하는 이가 있나? 평생 너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마법을 써 주지. 돈을 가지고 싶나. 이 대륙에서 가장 많이? 그렇다면 내가 이 방을 보석과 금화로 가득 채워 주겠다.”
다시 원점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지금은 아드리안 헤더의 시신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있었다.
“소원의 범위는 전과 같고?”
“그렇지.”
아드리안의 금빛 눈동자가 살풋 접혔다.
그 또렷한 대답에 미하일이 느리게 눈을 한 번 깜빡인 후, 다시 한 번 질문했다.
“……네가 나를 사랑해 달라는 소원을 빌어도 된다는 뜻이야?”
“그래.”
그게 네 소원이라면.
아드리안은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곧장 대답했다.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마법이야 여러 개 알고 있었다. 물론 스스로에게 써 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된다고? 미하일은 나직하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마치 뇌가 작동을 멈춘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졌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안.”
목이 꽉 막혀 오고, 잔뜩 힘을 준 아래턱이 아린 것 같았다. 그러나 미하일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 대신 솔직하게 물어보는 것을 선택했다.
“난 너의 진심이 궁금해. 눈앞의 상황을 모면하려는 대답이 아니라.”
쿵쿵, 미하일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는 것이 여기까지 들렸다.
“단 한 번이라도, 나에게 미안한 적이 없었어? 왕성에서 소원을 빌었을 때나, 네 시신을 찾으러 이 산에 다시 왔을 때에도? 그저 오르디나스가 원하기 때문에 내게 검을 선물하고 내 목숨을 살려 줬던 거야? 그렇게…… 그냥 그렇게 끝내면서 내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었어? 솔직히 말해 줘. 너를 그동안 찾아 헤맨 나에게 최소한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그 말에 아드리안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바로 맞은편에서 환하게 타오르고 있는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안 그래?”
이번에도 이상한 소원이었다. 아드리안은 잠자코 미하일의 이야기를 듣다가 곧장 되물었다.
“……그게 소원이야?”
미하일은 아드리안의 질문에 사납게 미소 지었다.
사랑해 달라는 소원? 미하일 자신이 그런 걸 말할 리가 없었다. 미하일은 진짜를 눈앞에 두고 가짜를 얻으려 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미하일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속으로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입을 다시 열었다.
“그래.”
알았어.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곤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의 금발이 부웅- 뜨고 입고 있는 옷이 따뜻한 바람에 나부끼며 흔들렸다. 금빛 아지랑이 같은 것이 그의 몸을 감싸 안고 흐르듯이 요동쳤다. 번뜩, 마치 달 두 개가 눈동자에 박혀 있는 것 같은 금안이 보였다.
푸스스- 곧 떠올랐던 금발이 천천히 가라앉으면서 드래곤의 눈동자가 미하일에게 향했다.
“계약의 조건이 수정되었어.”
곧바로 이뤄 줄 수 있는 소원이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잠시간 침묵했던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내 진심이 궁금하다고?”
미하일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든 충격받지 않을 거란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지금껏 이런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아드리안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니.”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하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아드리안은 나머지 말을 이었다.
“이건 내 유희이고, 그것에 대해 네게 미안해야 할 일은 단 하나도 없어.”
거기서 더 덧붙이고 싶은 말도, 빼야 할 말도 없는 아드리안의 진심이었다.
그에 화답하듯 미하일의 주머니 안에서 비늘이 환하게 빛났다.
아드리안의 두 눈과 마찬가지로 밝은 금빛이었다.
그러게, 때로는 진실을 그냥 모르고 넘어가는 것이 훨씬 더 좋을 수도 있다니까. 아드리안은 속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