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비현실적으로 밝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였다. 그것은 사람의 얼굴보다는 어두운 밤하늘 위가 더 어울릴 정도로 신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미하일은 그런 루스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극적인 순간에 드래곤의 힘을 되찾은 루스가 입술을 한껏 끌어 올려 활짝 웃고 있었다. 고귀한 힘이 몸 전체를 돌면서 세상의 모든 생명이 발아래에 놓여 있는 듯한 이 느낌.
손바닥 안에 충만한 힘이 느껴지고, 몸 전체를 감싼 마나가 일렁거렸다. 그것에 화답하듯 그의 밝은 금발이 넘실거리며 구불거렸다. 마음속 가득 차오르는 뿌듯함에 루스는 목울대를 움직이며 하하, 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런 느낌이었어.”
되찾은 힘을 더 즐기고 싶지만, 우선해야 할 일이 있었다.
루스는 미하일의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 듯 성큼성큼 괴한들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중 하나의 허리춤에 매여 있는 펠렌 디프스의 검을 한 손으로 스르륵 들어 올렸다. 검을 고정시키고 있던 괴한의 허리띠가 조금 딸려 올라갔으나, 루스는 손짓 한 번으로 그 걸쇠를 풀어 버렸다.
다행히 펠렌 디프스의 검은 부서진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루스는 검을 한 번 죽, 훑어보고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미하일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그것을 검집째로 미하일에게 건네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안 오고 뭐 해. 네 검 챙겨야지.”
그 채근에 미하일의 눈동자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또렷해졌다.
“……네.”
기절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괴한들을 넘어가야 했다. 미하일은 담담히 그들을 스쳐 지나 루스가 서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루스가 내밀고 있는 검을 받아 들자 묵직한 검의 무게가 느껴졌다. 미하일은 다신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펠렌 디프스의 검을 조용히 내려다보며 검집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쓰다듬었다. 세심하게 음각된 검집의 장식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 검의 전 주인 펠렌 디프스 또한 대륙에 이름을 꽤나 날린 용사 중 하나였다.
루스는 그런 미하일을 바라보며 뿌듯한 얼굴을 했다.
그래, 미하일을 용사로 만드는 것 정도야 해 줄 수 있다. 진작 말하지. 그는 괜스레 오르디나스를 탓했다. 루스는 여전히 검을 살펴보고 있는 미하일에게 질문했다.
“검은 어때?”
미하일은 루스의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
대답하려 입을 열었던 미하일은 루스와 마주 보자마자 멈칫, 입술을 꾹 닫았다.
루스의 분위기가 단번에 바뀐 것 같았다. 물론, 지금 이 모습이 본연의 것이겠지만…… 지금까지의 루스와는 완전히 달라 어색함이 느껴졌다. 미하일은 시선을 약간 비껴 낸 채 대답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네, 다행이죠.”
미하일은 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항상 가지고 다니던 검을 허리의 검대에 고정시키자, 그 무게가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그럼 돌아갈까? 생각보다 저놈들이 많이 움직였나 본데, 여기서 힐데케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어.”
루스의 질문에 미하일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스는 심드렁한 얼굴로 미하일이 고를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를 늘어놓듯이 이야기했다.
“음, 순간 이동 마법이 싫다고 했었지. 어차피 그렇게 멀진 않으니 날아가도 좋을 것 같고.”
“…….”
“아니면 뭐, 천천히 걸어서 돌아가는 것도 있는-”
말을 이어 가던 루스가 미하일의 표정을 보고선 우뚝, 멈춰 섰다. 마치 화난 것처럼 굳어 있는 미하일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던 루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마음에 드는 게 없나 봐?”
한낮에도 해처럼 밝게 빛나고 있는 드래곤의 두 눈동자가 샐쭉 접혔다. 정말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지나치게 완벽한 외관이 오히려 소름 끼칠 지경이었다.
미하일은 슬쩍, 한 번 바닥을 바라본 후 굳게 마음먹었는지 고개를 번뜩 들어 올렸다. 루스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한 채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오르니다스 때문입니까?”
머뭇거렸던 것과는 달리 미하일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단호했다. 그의 말이 마주 선 루스의 웃음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다.
“뭐?”
기껏 도와주려 여러 가지 제안하고 있었더니.
루스는 미하일의 질문에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미하일은 건방지게도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제 정해진 운명에 따르기로 결정하신 건지 여쭤본 겁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루스의 진실된 마음이 도대체 뭔지 알아내려는 듯 뜨겁게 일렁이고 있었다.
“힘을 되찾으신 걸 보아하니 그런 것 같아서요.”
“으음.”
루스는 짧게 고민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솔직히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은 질문이었다. 친절의 의도를 캐묻는 것은 굉장히 건방진 행동이었다. 심지어 미하일은 이쪽이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당장 죽여 버려도 성에 차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었다. 저놈이 용사가 되는 것을 지켜보려면 한동안 이놈과 함께 다녀야 할 텐데 굳이 관계를 어긋나게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 난 오르디나스가 바라는 걸 해 줄 생각이야.”
“……그렇군요.”
그러나 루스의 솔직한 대답에도 미하일의 표정은 미적지근했다. 오히려 오르디나스 때문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왜? 루스는 어이없다는 듯 재차 물었다.
“너에겐 그편이 좋은 것 아닌가?”
드래곤이 수호해 준다는데 왜 저리 시큰둥하지? 지금껏 드래곤의 도움을 싫어한 인간은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다.
“…….”
그러나 미하일 또한 자신의 기분이 왜 별로인 건지 말할 수 없었다. 분명히 루스가 함께한다면 든든한 아군이 되어 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드래곤이 진심으로 원한 바가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다는 그 오르디나스를 억지로 따르는 것뿐이라면…… 미하일은 입속을 이로 짓씹었다.
“죄송합니다. 별 의미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싱겁긴.”
루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순간 이동 마법.”
미하일은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왕성에서 처음 드래곤을 소환했을 때는 그를 믿을 수 없어 단칼에 거절했었던 제안이었다. 이쪽의 호불호에는 전혀 관심 없을 것 같은데 여태 그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의외였다.
하지만 이제는 거절할 필요 없겠지. 미하일은 고개를 약하게 양옆으로 저으며 선택했다.
“순간 이동 마법으로 괜찮습니다.”
“그래? 좋아.”
루스는 미하일의 선택에 씨익 웃어 주었다.
이 세상 모든 것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드래곤의 능력이라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루스의 두 눈동자가 화답하듯이 환하게 불타올랐다. 이윽고 마나가 불러일으킨 따뜻한 바람이 둘의 몸을 감싸 안아 왔다. 스윽, 머리칼이 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듯 허공으로 떠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시켜 주지.”
루스의 말과 함께 둘의 실루엣이 팟, 하고 단번에 사라졌다.
***
“왕자님!”
마법으로 힐데케산 중반부에 도착하자마자 기사들 중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외쳤다. 하루 종일 아래에서 대기하다 끝내 정상에 올라갔더니 둘은 갑자기 사라져 있고, 그 자리에는 기절 마법의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이다. 기사들은 곧바로 그들을 찾아나섰던 것 같았다. 산에서 루스와 미하일을 탐색하는 그룹과 마법의 흔적을 추적하는 그룹으로 나뉘어 흩어졌다면서, 남아 있던 기사가 그제야 안심한 표정으로 다른 이들에게 연락을 넣었다.
“괜찮으십니까?”
“응, 다들 걱정 말라고 전해.”
많은 일들은 있었으나 결론적으로는 괜찮았다.
저건 뭐지?
미하일의 시선은 힐데케산까지 오는 동안 탔던 마차 뒤에 세워진 짐마차에 고정되어 있었다. 호위 기사 하나가 마차를 손짓하며 말했다.
“아 왕자님, 그리고 바사미엘에서 온 짐마차가-”
기사가 이어 말하려는 순간, 미하일이 고개를 짧게 양옆으로 저어 말을 막았다. 왕자는 이미 저 짐마차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눈치였다.
“그래, 잠깐 기다려.”
“네. 우선 오늘은 푹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미하일은 기사에게 알았다고 말하고는 짐마차 안에 있는 것을 상상하며 잠시간 침묵했다. 그가 알기로는 바사미엘에서 보내온 것이라면 그가 부탁한 것밖에는 없었다.
모든 일이 저것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였다. 미하일은 오르디나스가 저 짐마차 안에 든 것을 빌려 자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바사미엘에 입학한 모든 이들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운명을 조용히 지켜보는 것. 미하일은 긴장된 마음에 주먹을 꾹, 눌러 쥐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빨리 저 안을 확인해 봐야 했다. 미하일이 짐마차를 향해 발을 내디디려던 참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루스의 목소리에 멈췄다.
“그래서, 언제 가져다줄까?”
“……어떤 것을?”
루스는 미하일의 대답에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게 그거 말고 또 있었던가? 루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미하일이 어느샌가 잊은 것 같은 ‘그것’을 이야기했다.
“아드리안 헤더의 시신.”
이제 힘을 되찾았으니 레어에서 맨드레이크를 캐내 오면 끝이었다. 복잡했던 미하일의 소원도 끝나는 것이다.
아아, 미하일의 표정이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비뚤어지며 끝내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어이없다는 듯 날카로운 비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