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우선 루스는 미하일이 숨을 제대로 쉴 수 있도록 고개를 돌려 주었다. 그러고는 살짝 옆으로 비켜서 물을 쉽게 뱉어 낼 수 있게 미하일의 등을 몇 번 두드려 주었다.
하아, 하.
미하일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눈을 질끈 감은 채 산소를 열심히 집어삼켰다. 옷소매로 입가를 스윽 닦아 내며 감았던 눈을 뜨자, 한참 동안 볼 수 없었던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루스는 그 눈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했다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순간 미하일이 정말로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가 죽은 사람을 살릴 정도로 대단한 응급조치를 한 것도 아니었다. 조잡한 흉내였는데……. 이거야말로 운명의 장난 같은 묘한 상황이었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고?”
루스는 우선 과정보다는 결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미하일의 안색을 살피며 질문했다.
미하일은 숨을 고르면서 고개를 몇 번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 대답에 루스는 눈을 감은 채 잠시간 고개를 숙였다. 드래곤의 고뇌는 아주 잠깐이었다.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미하일에게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러면 이 좀 악물어 봐.”
“예?”
퍽, 미하일의 뺨을 루스가 주먹으로 내리쳤다. 단발적인 파열음이 숲을 울렸다.
“윽…….”
미하일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얻어맞은 뺨을 손으로 매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루스의 주먹은 턱이 얼얼할 정도로 매웠다.
“……왜-”
미하일이 표정을 와그작 구긴 채 중얼거렸다. 루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미하일을 때린 오른손을 허공에 몇 번 털면서 몸을 가볍게 일으켰다. 그제야 그들을 둘러싼 숲의 상쾌한 바람이 느껴지고 강의 물소리가 들려왔다.
속이 좀 후련했다.
한껏 걱정하게 만들어 놓고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단 표정인 게 괘씸했지만. 루스는 자신을 여직 올려다보고 있는 미하일에게 무심히 대답해 주었다.
“정신 좀 차려.”
미하일은 눈가를 찡그리며 턱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턱을 몇 번 움직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이 떨어진 절벽이 있는 방향을 살폈다. 여기와는 거리가 좀 있군-이라고 생각하며 미하일은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확 깨긴 했습니다.”
루스는 젖어서 축 늘어진 금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질해서 넘기다가, 미하일의 건방진 소리에 눈을 날카롭게 떴다.
“꼬박꼬박 대답만 잘하기는. 방금 너 진짜 죽을 뻔했어.”
루스는 몸을 일으킨 채 물끄러미 자신을 응시하는 미하일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말해 줄 테니 잘 들어. 중요한 거니까.”
그러고는 곤란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검지로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저놈에게 어느 정도는 진실을 알려 줘야 할 것 같았다. 아마 미하일도 그걸 알고 있었다면 아까처럼 무모한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까지 드래곤에게 오르디나스가 내려 준 미래에 대한 계시가 있었다. 아니, 오르디나스는 위대한 존재였으므로 미하일에게 이것들을 전해 달라는 뜻으로 드래곤에게 먼저 알려 준 것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오르디나스의 진심은 고귀한 드래곤, 루스조차도 모르는 것이었으니.
“네 손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달려 있어.”
하, 루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하일이 그에 곧바로 되물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미하일, 한 번 멀리서 이 모든 상황을 두고 생각해 봐.”
미하일은 아직도 얼얼한 턱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루스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검은 마나가 온 대륙에서 솟아나고 있는 인류 멸망의 절체절명의 순간에, 몇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던 드래곤 소환을 네가 해냈고…….”
루스는 문장 말미를 길게 늘이며 미하일을 슬쩍 흘겨보았다. 미하일은 여전히 드래곤의 의중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구긴 채 루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스는 입술 한쪽을 비틀어 올리며 멈췄던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찾고 있는 그 ‘아드리안 헤더’말이야. 그래, 네 말대로 그가 만약 정말로 드래곤이라면…… 드래곤이 너와 아카데미에서 한 방을 썼고 갑자기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이 무척 수상하지 않나? 그의 흔적이 마치 우리를 어딘가로 이끌고 있는 것처럼 작용하고 있잖아.”
“…….”
미하일의 눈초리가 돌연 날카로워졌다.
루스가 먼저 아드리안 이야기를 꺼낸 탓이었다. 지금껏 모르는 척하더니 이제야 본인이 아드리안이었다는 걸 털어놓는 건가?
미하일은 입을 꾹 다물고는 루스가 먼저 사실대로 털어놓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나 루스는 자신의 정체를 이야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미하일이 지금처럼 아드리안을 다른 드래곤이라 생각하고 있는 편이 소원을 들어주는 데에 수월했다. 아드리안이 드래곤이라는 증거는 아직까지 미르킨트뿐이었으니, 지금까지는 루스가 얼마든지 상황을 뒤집을 수 있었다.
“한 번도 이상하다 생각해 본 적 없었나? 너무 딱딱 들어맞잖아. 이상할 정도로.”
루스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한 단어씩 말할 때마다 검지와 엄지를 튕겨 딱,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루스의 입술을 바라보던 미하일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의 이야기는 지금 이 상황을 해결 방법도, 아드리안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미하일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런 것들이 저와-”
“너랑 무슨 관계냐고? 글쎄, 인간의 그런 좁은 사고방식으론 아직 한참 멀었어. 사소한 거에 하나하나 집착해서 보려 하지 말고 멀리서 봐야지, 멀리서.”
루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벼운 말투로 이었다. 하나하나 이유를 타고 들어가면 분명 원인이 있긴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현재 마주하고 있는 것은 고작 하나의 결과가 아닌 수천, 수만 개의 인과관계가 빚어낸 운명이었다.
“평범한 인간들과 넌 달라, 미하일. 이 모든 상황들이 단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어.”
미하일은 루스의 입에서 나온 ‘평범한 인간들’이라는 단어에 눈썹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미 왕족으로 태어나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이야기였으나, 왠지 모르게 드래곤이 말하는 저 ‘평범한 인간들’은 조금 다르게 들린 탓이었다.
루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얼굴로 미하일을 향해 말했다.
“넌 지금부터 몇 년 안에 세상을 구할 용사가 된다.”
“…….”
그들이 서 있는 강의 물소리가 한동안 둘 사이를 채웠다.
용사?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상한 말에 미하일이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못 믿겠다는 표정인데?”
“……그 말을 들으면 누구나 이런 표정일 겁니다.”
“네가 내 말을 믿는지는 관심 없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네 목숨 하나에 세계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거, 그거 하나만 명심해.”
“…….”
“겨우 여기서 수영 하나 못해서 죽을 그런 하찮은 운명이 아니란 말이야. 알겠어?”
루스의 눈이 미하일의 표정을 샅샅이 관찰하려는 듯 호선으로 가늘어졌다.
“……네.”
“좋아. 생각보다 빨리 이해하니 다행이군.”
대화를 끝낸 후 이 장소를 벗어나려는 참이었다. 쫓기는 와중에 한 장소에서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러면 당신은 무슨 역할입니까?”
음? 루스가 미하일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제가 용사가 되어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태어났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
미하일의 한쪽 뺨은 조금 전 맞은 탓에 아직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였다. 루스는 그곳을 힐끔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딱 하나밖에 없었다.
“당연히 용사를 도와주는 역할이지.”
“아하, 초대 국왕 카를로를 도왔던 것처럼 말입니까?”
미하일은 곧바로 질문했다.
그에 루스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인간들과 함께하며 몇 번이나 마주했던 질답이었다.
“글쎄…… 그렇게 해 주기를 원하나?”
“아니요.”
대답은 왕성에서의 것과 같았다.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가 뜨겁게 타오르며 루스를 향했다. 자신을 시험하려 드는 드래곤을 질책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누군가가 제 운명을 대신해 주기를 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하, 루스는 저것 보라는 듯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전에 소원을 말할 때에도 생각했지만 어린 인간치고 미하일은 순간의 욕심에 휩쓸리지 않았다.
“……뭐, 그게 네 선택이라면 존중해 주지.”
그 점은 높게 살 만했다. 이번이야말로 오르디나스가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일지도 몰랐다. 루스가 눈앞의 미하일을 잠시간 바라보다 다른 주제로 바꾸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갑자기 한쪽 팔을 들어 올려 미하일의 움직임을 막으며 말했다.
“잠깐.”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과 동시에 숲의 나뭇가지와 모든 수풀이 단번에 한 방향으로 누웠다.
루스와 미하일 둘 다 고개를 깊은 숲 쪽을 향해 돌렸다.
갈대밭의 갈대와 잔디가 가끔 큰 바람에 흔들려 함께 춤을 추듯 움직이는 그런 광경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방향이나 제멋대로 부는 자연적인 바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확히 한 방향을 향해 숲 전체를 훑듯이 쓸고 지나갔다. 그 바람은 루스와 미하일을 가로질러 통과했다.
루스는 입술을 한 번 짧게 깨물고는 짜증 가득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추적 마법을 쓰는 마법사가 이제야 도착했나 보군. 솜씨 한번 요란하기는.”
일부러 쫒기는 상대가 다 알아차리게끔 과장된 마법이었다. 그 안에 담긴 협박의 메시지를 알아차리라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