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좋습니다. 그럼 나가 볼까요?”
“…….”
마주 본 채 이야기하는 미하일을 뚱한 표정으로 보던 루스가 입을 열었다.
“뭐, 나가는 건 좋은데…… 그냥 무작정 나가려고?”
루스는 그들이 기대어 서 있는 문을 눈짓했다. 미하일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 못 한 걸지도 몰랐다. 지금은 같잖은 약속 따위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당연히 아닙니다. 마침 기척을 지우는 마법 하나를 사용할 줄 아는 것이-”
미하일은 머릿속에 지금 막 떠오른 마법 하나에 밝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조금 어두워졌다. 그는 잠시간 침묵하다가 이내 고개를 양옆으로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아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건 안 되겠군요.”
“왜?”
“……시전자에게만 효과가 있는 마법이라 당신의 기척까지 지우려면…….”
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미하일의 모습에 루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먼지투성이 창고에서 영원히 있자는 건 아닐 거고, 할 수 있는 마법이 있다면 쓰는 게 좋을 거였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답을 다시 한번 채근했다.
“왜? 도대체 뭐길래. 그냥 말해.”
“…….”
미하일은 자신의 입술을 한 번 꾹 깨물고 대답했다.
“기척을 지워 주는 마법인데 기본적으로는 시전자의 호흡에 한한다는 제약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당신의 기척도 함께 지우려면 제 숨을 입안에 가지고 있는 동안만 유효하다는 겁니다.”
별 쓸데없는 제약이 다 있군. 언제나 마법을 마음껏 사용하던 드래곤에게는 다소 번거롭게 들리는 제약이었다. 어쨌든 이 창고를 몰래 나갈 때 사용하기에는 좋을 것 같았다.
“그래? 알았어. 별것 아닌데 뭘 망설였지?”
“……으음.”
미하일은 심드렁한 루스의 표정에 다시 한번 설명했다.
“……저, 설명을 다 알아들은 게 맞습니까? 제 숨을…… 당신의 입안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니까요.”
“응. 추적 마법에 걸리지 않으려면 마법사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마법을 써야 하니까 지금 당장 해.”
“…….”
미하일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드래곤을 조용히 마주했다.
“지금 당장…….”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서로의 입술을 맞대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드래곤에게는 별일 아닐지 모르겠으나 미하일에게는 의미가 달랐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마법을 사용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단검 하나로는 창고를 벗어날 수는 있겠으나, 그 뒤까지는 보장할 수 없을 터였다.
미하일은 초조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그는 분하다는 듯 주먹을 말아 쥐었다. 첫 입맞춤을 겨우 이런 일에 사용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하일의 맞은편에서 루스는 ‘빨리 안 하고 뭐 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 순간 창고 밖에 있는 괴한들의 대화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다른 인원들에게 감옥이 비었다는 소식을 알리러 나갔을 것이 분명했다.
고민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미하일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팔을 뻗어 루스의 부드러운 두 뺨에 손을 올렸다. 동시에 미하일은 기척을 지우는 마법의 시전어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순간 귀가 먹먹해지면서 마치 투명한 물이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천천히 차오르는 느낌이 것처럼 느껴졌다. 기척이 지워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 상태로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전자인 미하일 또한 숨을 참아야 했다. 한 번으로는 분명 충분하지 않을 테니 움직이는 길 중간중간마다 눈에 띄지 않을 장소를 찾아 마법을 다시 시전해야 할 것이었다.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미하일은 그 상태로 눈앞의 루스의 입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는 이내 모든 잡생각들은 날려 버리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미하일은 루스의 뺨에 대고 있는 손에 힘을 줘서 앞으로 조금 끌어당겼다. 비슷한 키의 두 청년의 얼굴이 완벽히 맞대어져 코끝이 닿았다.
“……아.”
미하일은 자신이 루스를 당겨 놓고도 닿는 감촉에 놀라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숨을 참고 있던 미하일의 입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기척을 숨기는 마법은 언제 활성화되었냐는 듯이 스르륵, 그대로 풀려 버렸다.
“……왜 시전을 하다 말아?”
루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다시 하겠습니다.”
“…….”
미하일은 다시 한번 마법의 시전어를 중얼거린 후, 루스의 입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뺨에 대고 있는 손의 엄지를 움직여 루스의 입술을 한 번 슥, 매만졌다. 그러자 루스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미하일은 그 틈으로 후우- 숨결을 불어넣었다.
미하일의 숨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루스의 날카로운 턱선이 천천히 움직여 미하일의 숨을 한껏 받아들였다. 호흡을 참고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공기를 머금어야 했다. 그의 숨을 마시자 귀가 먹먹해지며 보이지 않는 어떤 막이 온몸을 감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척을 지우는 마법이 통한 것이었다.
입을 맞추고 있던 미하일은 상황을 확인한 후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민망했는지 자신의 입술이 닿았던 루스의 입술 위를 손등으로 훑어 주었다.
숨을 참은 채 몸을 홱, 돌려서 창고 문을 조용히 먼저 열어 보는 미하일의 귀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
미하일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괴한들의 본거지는 혼란에 빠졌다.
[어? 방금 저기 두 명이 있었어. 우리가 찾고 있는 그놈들이잖아!]
[어디? 내가 지나온 길인데 왜 난 못 봤지?]
하아, 하. 미하일과 루스는 어느 건물 뒷골목에 등을 기댄 채로 모자란 숨을 빠르게 내쉬었다. 숨을 참은 채로 움직이는 것이 생각보다 고역이었다. 숨을 최대한 참는다고 해도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아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미하일은 눈앞에 보이는 수풀 쪽으로 손짓했다. 루스는 그가 하려는 이야기를 단번에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나 있는 길목은 아니었으나 그편이 더 인적이 드물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그래, 다시 출발할까?”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입을 맞췄던 그들이었다.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미하일이 손을 뻗으면 루스가 그의 코앞까지 몸을 움직여 입술을 맞대어 왔다. 뛰어오느라 숨을 가쁘게 내쉬던 루스는 숨을 최대한 받아 마시려 미하일의 뺨 언저리에 손을 올려 끌어 당겼다. 미하일은 그런 루스를 향해 잘했다는 듯 입꼬리를 위로 끌어당겨 옅게 웃어 주었다.
[저기다!]
누군가 입 맞추고 있는 루스와 미하일을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슥, 그와 동시에 둘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젠장, 무슨 마법이야 저게.]
[계속 발견되는 걸 보면 넓은 범위의 이동 마법은 아닌 것 같다. 저 근방을 계속해서 뒤져!]
[네!]
***
헉! 헉.
깊은 숲속으로 들어오자 어느 순간부터 기척을 지우는 마법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루스와 미하일은 지금 그들이 달리고 있는 숲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 알아볼 틈도 없이 우선은 최대한 납치당했던 곳에서 멀어지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하일과 비슷한 속도로 잘 달렸으나, 드래곤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루스는 몇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힘겨워하더니 이내 자리에 멈춰 숨을 골라야 했다.
미하일은 루스가 숨을 고를 때까지 주변을 망보다가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드는 루스를 향해 팔을 뻗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하, 하아. 됐어.”
루스는 미하일의 팔을 옆으로 치운 뒤 다시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짐이 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문득 루스가 달리던 다리를 멈추고 고개를 위로 들었다. 깊은 숲속 맑은 새소리와 함께 그의 귀에 들어온 소리가 하나 있었다.
“물소리.”
어딘가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강을 따라 뛴다면 산 밑으로 내려가기 더 수월해질 것이었다.
“저기로 가자.”
“네.”
미하일은 루스의 확신에 가득 찬 판단에 동의하며 숲 주변을 훑었다.
아직 꼬리가 따라붙지는 않았으나, 이 숲은 그들에게 더 익숙한 반경일 것이었다. 따라잡히는 것은 한순간일 터였다. 쉴 새 없이 여기까지 달려왔으나, 숲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
미하일이 고개를 돌리자 루스가 여전히 나무에 기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숲을 벗어나려면 강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루스의 판단에는 의심 한 점 없었으나, 괴한들의 본거지에서 멀어진 것이 맞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루스가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싶은 것이었다.
미하일이 루스가 가리킨 방향을 손짓하며 먼저 둘러보고 오겠다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쇄액-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며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그것은 루스가 기대 있던 나무 옆면에 꽂혀 힘의 반동에 위아래로 흔들렸다.
[빗나갔잖아!]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동시에 미하일도 빠르게 고개를 돌려 루스의 팔을 세게 붙잡으며 외쳤다.
“가요!”
더 쉬게 해 주고 싶었지만, 여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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