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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43화 (143/184)

143화

쇠가 긁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어두운 복도를 자꾸 울렸다.

루스는 지겨운 듯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미하일이 고집을 부리면서 여전히 자물쇠에 대고 갉작거리는 꼴을 계속 보고 있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암, 루스는 납치범들의 소굴에 갇힌 것 치고는 여유로운 태도로 하품했다. 기다려 주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아무래도 미하일에게는 극약 처방이 필요했다.

“흐음…….”

루스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앉았던 몸을 일으켜 복도 저 끝을 수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소리에 자물쇠와 여태 일대일 사투를 벌이고 있던 미하일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미하일의 질문에 루스는 복도 끝에 나 있는 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우리를 감시하는 보초가 없는 게 이상해서.”

“제가 눈을 떴을 때부터 보초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마 신참인가 보군. 아, 아니면 너처럼 저 문을 못 열고 있을지도.”

“……당신은 꼭 말을 해도 그딴 식으로.”

루스의 말에 미하일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비꼬는 것과 동시에 상황 전달을 하는 것이 루스다웠다. 미하일의 다급함과는 별개로 여전히 이 망할 자물쇠는 끄떡도 없었다.

“어쨌든 보초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걸 해결하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나한테 검을 넘기든가.”

끼익, 검의 날카로운 날이 자물쇠 겉면을 다시 한 번 긁으며 불협화음을 자아냈다.

“검으로 자물쇠를 열어 본 적 있으십니까?”

“내가 그런 수준 낮은 짓을 해 봤을 리 없잖아.”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만.”

틱, 또 다시 검이 미끄러졌다. 아무리 시도해 봐도 이건 불가능했다. 단검 하나로 감옥을 탈출하거나, 보물을 훔쳐 간 도둑들 같은 이야기들은 다 거짓말 아닐까? 미하일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자물쇠에 열쇠가 들어가는 곳에 애초에 단검이 들어갈 리 만무했다. 순간, 미하일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해결책이 떠올랐다. 자물쇠를 여는 것에 꼭 이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좀도둑처럼 이렇게 갉작거리는 것이 아닌, 미하일이 가장 자신감 있는 방법 말이다. 미하일은 두 눈을 천천히 감아 후우, 하고 큰 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없었지만, 그만큼 복잡한 마음속을 가라앉혀야 했다.

루스는 복도 건너편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하, 저런 수도 있었군.’이라고 생각했다. 저건 일반적인 인간들은 시도도 하지 못할, 미하일만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미하일이 감았던 눈을 부릅떴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빛나고, 부드러운 흰빛을 띤 오라가 단검을 쥔 그의 손을 휘감았다.

휘익, 단검이 흰 선을 그려 내며 단번에 자물쇠를 횡으로 그었다. 검기를 씌운 검이 자물쇠를 케이크라도 되듯 반으로 갈랐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쇳조각과 자물쇠를 손바닥으로 곧장 받아 낸 미하일은 씨익, 미소 지었다.

미하일은 그때까지 굳게 잠겨 있던 감옥의 쇠창살을 천천히 밀자, 매끄럽게 열렸다. 그는 조금 전 루스가 바라보던 복도의 문을 눈으로 훑으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보초 이야기는 그냥 과장이었군요.”

“과정은 어쨌든 드디어 자물쇠를 열었네. 이쪽도 빨리 열어.”

루스가 철창 사이로 심드렁한 얼굴을 한 채 재촉했다.

그때였다.

덜컥, 철컥. 어두운 복도 저 너머의 문손잡이가 움직이는 소리가 둘 사이를 채웠다. 하필 지금? 루스와 미하일은 경악한 얼굴로 서로를 한 번 바라보았다.

“빨리!”

루스의 외침에 미하일이 곧장 걸어와 문을 열어 주었다.

루스는 감옥을 나오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어딘가를 발견하고는 미하일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들이 갇혔던 감옥 옆에 있는 좁은 문 하나가 있었다. 루스는 그곳에 미하일을 먼저 밀어 넣고 뒤이어 자신도 그 안에 들어가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루스와 미하일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복도 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가 났다. 루스는 우선 그들이 들어온 곳을 살폈다. 그곳은 창고로 쓰는 곳이었던지 온갖 잡동사니로 복잡했고, 더러웠다.

[뭐야? 두 개 다 비었잖아? 제대로 잘 있는지 확인했다며!]

[예?]

남자들의 놀란 목소리가 창고 안까지 들렸다.

다행히 창고에는 두 사람이 잠깐 몸을 피할 만큼의 공간이 있었다. 무척 좁은 탓에 둘의 얼굴 간격이 너무 가까워 서로의 숨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이긴 했지만. 루스는 그 상태로 귀 한쪽을 문에 바짝 가져다 댔다. 괴한들의 대화 소리를 훔쳐 들을 수 있었다.

[분, 분명히 몇 시간 전만 해도 기절해 있었는데……!]

[뭐? 몇 시간 전? 너 보초 안 서고 뭐 했어?]

[그게…….]

저들끼리 싸우는 것처럼 시끄럽게 굴어 댔다. 루스는 눈을 찌푸린 채 밖의 상황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으나 여전히 언어만큼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미하일이 저들의 언어를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루스는 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미하일, 넌 저놈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듣고 나한테도 알려 줘 봐.”

밖의 괴한들이 여전히 싸우고 있어서 이 정도 목소리는 괜찮았다.

“…….”

“미하일.”

“…….”

그러나 미하일은 아무 대답 없이 얼굴을 잔뜩 붉히고 있을 뿐이었다.

“미하일?”

루스는 붉은 얼굴의 미하일을 마주 바라보며 어깨를 툭, 움직였다. 그러자 그제야 미하일이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열었다.

“응? 아니, 뭐. 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그렇게 이상하게 굴어.”

큼, 흠. 미하일이 손을 들어 입 앞에 가져다 대고 헛기침을 하자, 안 그래도 좁은 간격이 더 좁아졌다.

[어떻게 나간 거지?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빨리 이놈들을 찾아야 해.]

[자물쇠를…… 도대체 어떻게 끊어 낸 거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잖아!]

밖의 남자들이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다가 다른 하나를 세게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에 귀를 대고 있던 루스가 그 파열음에 눈가를 찡그렸다. 루스는 미하일을 바라보며 문 밖을 엄지로 가리켰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계속 미하일에게 물어봤던 질문을 다시 한 번 말했다.

“저놈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려 달라고.”

“……네.”

미하일은 천천히 귀를 문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둘은 완벽히 마주 보는 상태로 좁은 창고 안에 몸을 구기고 있게 되었다.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미하일은 지금 느껴지는 루스의 숨결에서 시원한 숲의 향기가 난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신선한 이끼 냄새처럼 포근한 것 같기도. 바사미엘에서도 아드리안의 체향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이제야 어떤 향기인지 알아낸-

미하일은 입술을 슬쩍 깨물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빨리 밖에 나가서 노는 놈들을 불러 모아! 주변을 찾아봐야지.]

[네, 네!]

미하일은 밖의 남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루스에게 루스타바란 왕국어로 다시 말해 주었다.

“……인원을 더 동원해서 밖을 수색할 모양입니다.”

“뭐? 생각보다 끈질기군.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나가는 수밖에.”

루스는 미하일의 해석에 곧장 투덜거리며 반응했다.

[그리고 둘 중 검기나 마법을 다룰 줄 아는 놈이 있는 게 분명해. 수색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마법사를 불러와.]

문에 귀를 대고 있던 미하일이 그 이야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왜?”

낭패 어린 미하일의 반응에 루스가 재촉했다.

“기다리는 것은 안 되겠습니다. 저들이 마법사를 불러오기 전에 이곳을 떠야겠네요. 우선은-”

미하일은 대답을 하다가 힐끔, 루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를 관찰할 기회는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루스의 헝클어진 밝은 금발 머리 틈 사이로 희고 반듯한 이마가 드러나 있었다. 미하일은 루스의 오른쪽 이마 위쪽에 나 있는 점 하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드래곤 본인은 있는 줄 몰랐다던, 그리고 자신이 먼저 발견했던 그 점이었다. 미하일은 그 점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루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스윽 매만졌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라 그런지 루스의 몸은 체온이 살짝 낮아 시원했다.

“우선은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루스는 뜬금없이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는 미하일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미하일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앞으로 더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는 루스의 이마를 만지던 손을 움직여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대강 정리해 주었다.

이 금발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절벽에서 떨어지던 아드리안의 모습이 미하일의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스쳐 지나갔다. 미하일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아드리안과 똑같은 얼굴의 루스를 마주 본 채로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인간들처럼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라고까지 바라지는 않겠으나…… 제발 아까처럼 목숨을 쉽게 버리지만 말아 주세요. 약속해요. 저도 절대 당신의 손을 놓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미하일은 루스의 반듯한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살짝 부딪쳤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뜨끈한 온도의 미하일의 이마가 닿아 오자 루스는 천천히 뒤로 몸을 빼려 했으나 좁은 창고의 벽에 등이 닿아 더 이상 내뺄 수 없었다.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미하일은 그 상태로 질문했다. 이마가 서로 닿아 있어 미하일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듯이 진동처럼 전해졌다. 루스는 그런 미하일을 빤히 바라보다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드래곤은 못 지킬 약속 같은 건 하지 않아.”

“지금 당신은 드래곤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정도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약속입니다.”

“…….”

루스는 슬쩍 눈동자를 움직여 코앞의 거리에 있는 미하일을 확인했다. 그는 간절하게 눈을 감은 채 루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대답이 무척 중요한 것이라는 듯이 말이다. 어차피 그가 말한 것은 자신의 목숨을 지켜 달라 한 것이 아닌 내 목숨이었고, 그와는 아무 관계가 없을 텐데 저렇게 애절하게 구는 것이 묘했다.

“뭐, 그런 거라면.”

인간인 루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노력은 할 수 있겠지.”

간절하게 감겨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고, 이어서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미하일이 듣고 싶었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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