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하아.”
겨우 몸을 일으켜 상체를 세운 루스가 나직하게 한숨을 뱉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팠다. 그는 눈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보았으나 아무리 눌러 봐도 머릿속의 고통까지 없애 주지는 않았다. 누군가 머릿속에 손을 집어넣어 아무렇게나 흔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미하일이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러 왔다. 복도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또렷했는데, 아무래도 루스보다 한참 전에 깨어난 것 같았다. 여전히 머리가 아팠기 때문에 루스는 눈을 감은 채 미하일에게 질문했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당신은?”
나? 루스는 미하일의 질문이 날아오자 곧바로 고개를 아래로 내려 몸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는 아픈 곳이 없는 것을 보니 큰 상처를 입은 곳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크게 움직이지 않아 뼈가 부러지거나 근육이 다친 것을 느끼지 못한 수도 있었다.
루스는 손바닥으로 팔과 다리 그리고 몸통을 몇 번 대강 눌러 보았다.
온몸이 뻐근하고 머리통은 아직도 아프다며 아우성쳐 대고 있었으나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큰 상처는 없었다.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네요.”
미하일은 건너편에서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루스가 갇힌 곳은 어두운 창고 같았는데, 기다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미하일이 있는 곳과 마주 보는 구조인 것 같았다. 마주 본 방 사이의 거리는 가까웠지만 문에 쇠창살이 규칙적으로 박혀 있어, 밖에서 열어 주지 않으면 나갈 수 없었다.
루스는 몸 상태 확인을 끝내자마자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혼잣말을 했다. 납치를 당했는데 이렇게 멀쩡하다고?
“의외네. 너는 몰라도 나는 바로 죽일 줄 알았는데.”
그 말에 미하일의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미하일이 창살 가까이로 몸을 붙여 왔다. 창살 사이로 루스의 모습이 보였다. 미하일이 루스를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무척 심각한 어투였다.
“……죽을 줄 아셨는데도 그렇게 굴었단 말입니까?”
어둠 속에서도 미하일의 붉은 눈동자는 마치 타오르는 불처럼 밝게 보였다. 루스는 그 질문에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턱 근처를 대강 긁었다.
“뭐, 지금은 대륙에서 아무 지위도 신분도 없는 인간이잖아. 납치를 하면서 별 볼 일 없는 인간을 살려 두는 게 더 귀찮고 복잡한 일이거든.”
나도 의뢰 때문에 납치를 몇 번 해 봐서 잘 알지.
루스는 이참에 자신의 용병단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지금 이 상황을 납치범들에 이입해서 생각해 본다면 지금 둘을 살려 놓는 이유는 따로 목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미하일은 낮게 보아도 귀족가의 자제처럼 보였고, 정보에 능통한 자라면 그가 왕족이란 사실까지도 알 법했다.
하지만…… 루스는 슬쩍 미하일이 갇힌 방을 확인했다. 왕족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저런 누추한 곳에 버려두었다는 것은 그들을 납치한 자들이 아주 자신감이 높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런 공간에 가둬 둔 이유는 뻔했다. 납치범들은 곧 협상에 들어갈 것이다. 의뢰인과 협상을 하든, 더 비싸게 쳐줄 제삼자와 협상을 하든. 최대한 협상이 이뤄지기 전에 벗어나야- 응? 루스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빠르게 들었다.
“……왜?”
미하일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스의 질책하는 듯한 시선에 미하일은 고개를 기울이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목숨이 걸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누가 그걸 몰라?”
갑자기 왜 저 이야기를 하는 거야. 루스는 짜증스레 쯧, 혀를 찼다. 드래곤은 이미 흘러간 일을 다시 끄집어낼 정도로 세심하고 사려 깊을 나이는 이미 지났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지금 드래곤의 힘을 사용할 수 도 없는 인간의 몸 아닙니까? 자칫하면 그냥 죽었을 수도-”
이를 악물며 루스를 향해 짓씹듯이 말하던 미하일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답답한 것은 미하일도 마찬가지였다. 미하일이 지금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하지 않는 드래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미하일은 조금 전까지 안절부절못하며 건너편 감옥에 누워 있는 루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가의 일원답게 미하일은 기습과 납치에 쓰이는 특수 마법에 대한 면역 훈련을 받으며 자랐다. 그 덕에 납치를 당해 여기에 갇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불안에 잠겨 루스가 일어나길 기다리던 미하일을 반긴 것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자신이 죽을 줄 알았다’라고 말하는 루스였다.
“만약 오르디나스가 내가 오늘 죽는 것으로 정했다면 그랬겠지.”
이번에도 오르디나스가 나오네. 미하일은 루스의 담담한 대답에 불만스레 고개를 들었다. 하마터면 다신 볼 수 없었을 루스의 말간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미하일은 입술을 삐죽 비튼 채로 말했다.
“그러면 오늘 당신의 목숨은 제가 구해 드린 거네요.”
“…….”
“아닌가요?”
내 목숨을 ‘구해’?
쪼잔하게 굴 생각은 없으나, 미하일이 저렇게 나오니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솔직히 미하일이 자신을 구했다고 동의하기엔 걸리는 점이 몇 가지 있었다.
루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철창 앞까지 몇 걸음 걸어가 건너편의 미하일을 내려다보면서 한마디 했다.
“네가 검을 포기한 바람에 내가 죽을 뻔한 건 기억 못 하나 보지?”
“그러지 않았다면 당신이 위험했습니다.”
“진짜 그 상황에서 검을 버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나?”
“……예?”
“내가 검은 절대 버리지 말라고 했었잖아. 바보같이 지금 이게 무슨 꼴이야.”
“…….”
“철창에 갇히고, 옴짝달싹도 못 하는데. 이왕 내 목숨을 구해 줄 거면 좀 제대로 해 보지 그래?”
루스는 차가운 철창에 이마를 가져다 대어 열을 식혔다. 인간의 몸이 된 걸로도 모자라 이렇게 납치까지 당할 줄이야.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하일에게 괜히 좀 과하게 말하긴 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루스는 철창에 이마를 댄 상태로 창살 너머를 힐끗거렸다. 그곳에는 결의에 찬 듯 미하일이 눈을 반짝이며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좋아요. 저만 믿으십시오.”
“……그래.”
어차피 더 믿을 구석도 없었다.
루스는 허탈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울해하는 것 보다야 저렇게 활기찬 편이 낫긴 하니까.
“아까 그놈들이 쓰던 언어는 어느 나라의 것이지?”
“루스타바란 왕국 근처의 신생 국가 ‘시카리너’에서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그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 도대체 다른 나라에서 왜……?”
루스가 이 납치범들의 의도를 더 깊게 가늠해 보려는 순간이었다.
스윽- 왕자가 팔목에 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무언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마법 시전어였다. 동시에 미하일의 감옥 쪽에서 환한 빛이 한순간 어둠을 몰아냈다가 다시금 잠잠해졌다.
미하일이 꺼내 든 것은 루스타바란 왕가의 단검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 시절에 직접 본 적 있는 마도구였다.
“다행히 마법 반응 검사는 하지 않았나 보군요.”
미하일은 단검을 찬찬히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납치당하기 전, 매일같이 허리에 차고 다니던 펠렌 디프스의 검을 포기했었다. 미하일은 입안이 쓴지 꾹 입술을 다문 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드리안의 마음이 담긴 선물이었는데…….’
그는 건너편의 루스를 힐끔, 확인했다. 정작 선물한 이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아 조금 서운해졌다. 호위 기사들이 뒤따라 그들을 찾으러 정상으로 올라온다면 검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 애써 낙관적으로 생각해 보려 했지만, 울적한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상념에 잠긴 미하일을 깨운 것은 루스의 재촉이었다.
“단검 들고 뭐 해. 빨리 자물쇠부터 풀어 봐.”
지금 이 상황에서 믿을 만한 것은 미하일의 저 단검뿐이었다. 미하일은 빠르게 몸을 일으켜 자신의 철창 밖 자물쇠에 단검을 가져다 대었다. 루스는 복도를 향해 시선을 돌려 혹시라도 누군가 이 상황을 발견하지 않도록 망을 보았다.
철컥, 철컥. 단검의 뾰족한 끝으로 자물쇠의 잠금 부분을 돌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
루스는 그 꼴을 한동안 열심히 지켜봐 주었으나,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만 들리기에 결국엔 퉁명스레 이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오늘 안에 열 수는 있겠어?”
“조용히 좀 기다려 주시죠.”
미하일은 미간을 와그작 구기며 짜증을 부렸다. 왕가의 막내 왕자로 태어나 이런 좀도둑 같은 짓거리를 해 봤을 턱이 없었다. 기사단들이나 시종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하던 도적들의 수법들을 들어 본 게 전부였다.
“더 날카로운 날을 이용해서 돌려 봐. 지금은 그냥 자물쇠 겉에 상처만 내고 있잖아.”
“옆에서 훈수를 두니 더 집중이 안 됩니다. 열리면 알려 드릴테니 편하게 앉아 계시죠.”
“……그냥 단검을 내게 던져.”
“싫습니다. 제가 할 겁니다.”
틱! 다시 한 번 미하일의 단검이 자물쇠의 구멍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쇠 긁히는 소리가 났다.
“이런 때에 고집부리기야?”
갇힌 상황에 어린놈이랑 입씨름이나 하고, 이게 뭐 하는 짓이람? 루스는 허탈한 표정으로 한 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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