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미하일은 루스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괴한들을 막으려 한 손에는 칼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손으로는 루스의 앞을 막아서려 팔을 뻗었다.
이쪽은 둘, 상대는 일곱.
지나가는 애가 봐도 이쪽이 한참은 밀렸다.
루스의 머릿속에서는 지금 사용하기 좋을 만한 마법식이 몇 개나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단 하나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쳇, 루스는 속으로 혀를 차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일부러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던 경우는 많았어도, 이렇게 애초에 선택조차 할 수 없었던 상황은 처음이었다.
그는 처음 느껴 보는 무력감에 입속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괴한들은 더 가까이 다가서서 루스와 미하일을 완벽하게 포위하려 들고 있었다. 검을 든 미하일이 신경 쓰였는지 남자 하나가 검지로 미하일을 가리키며 외쳤다.
[거기 너, 검을 버려.]
루스는 남자가 구사하고 있는 언어는 전혀 몰랐으나,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루스는 미하일의 팔을 슬쩍 잡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절대 무기를 버리면 안 돼.”
루스는 단호한 어투로 작게 중얼거렸다. 상황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유일한 무기를 바보같이 스스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
미하일은 그런 루스를 힐끔 눈짓하고는 검을 쥔 손에 더 힘을 줬다. 그의 머릿속도 복잡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수적으로는 열세였으나 만약 포위당한 것이 혼자였다면 어떻게든 싸워 보려 했을 것이다. 산 아래에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그곳까지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후퇴를 하거나 신호를 보내는 것 정도는 가능할 법했다.
하지만 무장도 하지 않은 루스까지 보호하면서 일곱이나 상대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하일의 눈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탈출로를 찾아야 했다.
[너, 내 말 이해했을 텐데?]
“…….”
이 상황에서 검을 버린다는 것은 투항이나 마찬가지였다. 먼 거리에서 위협용으로 화살을 쏘기는 했으나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도 바로 목숨을 빼앗으려 들진 않다니. 아마 괴한들의 목적은 왕족인 자신일 것이라고 미하일은 확신했다. 미하일은 괴한과 눈을 맞춘 채 쓰게 웃으며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죽이지 않고,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게 틀림없어.
미하일은 속으로 결론을 내리며 검을 바투 쥐었다. 그가 순순히 검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였다.
쇄액- 날카로운 검이 허공을 가르며 미하일에게 향했다.
검 두 개가 만들어 낸 불쾌한 쇳소리가 숲을 채웠다. 숲속에서 불청객을 나무라는 듯 새 몇 마리가 빠르게 날아올랐다. 방어를 하려면 루스 앞으로 뻗은 팔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하일의 오판이었다.
미하일과 검을 맞대고 있던 괴한이 동료에게 턱짓을 했다. 미하일은 그 턱짓의 의미를 눈치채고는 루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루스!”
지시를 받고 루스의 뒤쪽으로 조용히 다가간 괴한이 재빠르게 팔을 뻗은 것이었다.
[다른 놈을 신경 쓸 겨를은 없을 텐데?]
철컹, 검끼리 비벼지며 마찰음이 울렸다. 미하일은 입술을 짓씹으며 손의 방향을 틀어 괴한의 검을 흘려 냈다.
그들의 속셈을 눈치챈 루스는 빠르게 몸을 뒤로 움직여 자세를 낮췄다. 드래곤의 힘은 잃었지만, 일반인보다는 살짝 더 좋은 기민함 덕분이었다. 수많은 유희를 해 온 경험이 오랜 시간에 걸쳐 드래곤의 몸에 축적된 결과였다.
“루스! 괜찮아?”
“……뭐, 그렇지.”
하지만 상황은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았다. 괴한의 우두머리가 미하일이 루스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었다. 미하일과 검을 맞대고 있는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괴한들이 루스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쳇, 루스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최대한 시간을 끌 준비를 했다. 그러고는 미하일과 시선을 맞췄다. 루스가 눈빛으로 ‘내가 시간을 끌어 볼 테니 넌 그놈을 해치우고 산 밑으로 내려가서 호위 기사들을 불러와.’라는 무척 구체적이고 장황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순간이었다.
“…….”
미하일이 표정을 잔뜩 찌푸린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그간 드래곤의 자존심으론 허용한 적도 없고, 받은 적도 없는 그런 감정이었다. 물론 저들이 들고 있는 검에 맞는다면 인간의 몸인 루스에게도 치명상일 것이 분명했지만. 루스가 미하일을 향해 ‘빨리 안 가고 뭐 해?’라고 표정으로 말하듯이 고개를 슬쩍 움직일 때였다.
[이놈도 데려갈 겁니까?]
루스 바로 앞에 서 있는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가 우두머리에게 물었다. 흠, 우두머리는 그 질문에 잠시간 고민했다.
[그놈까지는 계획에 없었는데. 우선은 인질로 쓰도록 하지. 하지만 거슬리면 죽여도 상관없어. 중요한 건 은발 쪽이니까.]
그 말을 알아들은 미하일의 눈빛이 단번에 바뀌었다. 미하일은 크게 심호흡했다. 이 상황에서는 루스를 빼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어이.]
미하일은 다소 과장된 행동으로 손에 힘을 뺀 후 손바닥을 괴한들에게 내보였다. 펠렌 디프스의 검이 카랑!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괴한들의 공격에 대비하던 루스는 그 소리에 미하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했잖아? 그를 놔줘.]
미하일은 담담한 목소리로 괴한들과 협상을 시도했다.
“……너 미쳤어?”
루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쳤다. 검 아니면 일곱이나 상대할 힘은 다르펑의 뿔만큼도 없는 주제에 뭘 믿고 저렇게 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미하일은 루스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괴한들의 우두머리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우두머리는 그런 미하일을 보더니 턱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는 씨익, 웃었다. 배짱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들어 등 뒤의 부하에게 검지를 까닥였다.
[좋아. 한결 편해졌군. 걱정 마, 죽이려는 건 아니니까.]
그게 무슨?
미하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우두머리를 신호를 확인한 모든 괴한들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자신의 뺨에 스윽 묻혔다. 괴한들의 뺨에는 하나같이 붉은 문양이 그려졌다.
“윽…….”
눈앞이 갑자기 흐려지며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마법이라도 쓴 건가? 미하일은 그 기운에 저항해 보려고 쓰러지려는 몸을 힘겹게 지탱했다. 그러나 무효화 마법 없이 버텨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괴한 하나가 천천히 쓰러지는 미하일의 몸을 받아 냈다.
우두머리가 빠르게 걸어와 ‘상품’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렇게 순수한 은발에 붉은 눈이라니! 간만의 월척이야. 힐데케산까지 따라붙길 잘했군.]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설마 진짜 왕족은 아니겠죠? 호위 기사까지 있는 걸 보니 귀족은 맞는 것 같습니다만.]
[왕족이 이 깊은 산골 마을까지 올 일이 뭐가 있겠어. 게다가 왕족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이면 돈을 더 얹어 준다고 했으니 우린 더 좋지.]
[이 검은 제가 가져도 됩니까?]
[그래. 그래.]
우두머리는 킬킬 웃으며 은발 머리의 청년을 자루에 넣으라고 명령했다.
[와, 이놈도 장난 아닌데요? 얼굴에서 귀족 같은 태가 나네.]
루스의 로브를 벗겨 얼굴을 확인한 괴한이 중얼거렸다.
[그런 건 특히 더 비싸게 팔리니까 상처 안 나게 조심해.]
우두머리는 오오, 하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옆의 남자가 눈가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어딘가 무척 낯익은 얼굴이었다.
[저 얼굴을 마을 현상금 목록에서 본 것 같은데 말입니다……?]
[현상금?]
의뢰인이 좋아할 것 같은 단어였다.
우두머리는 루스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번뜩 들어올렸다. 그의 눈에 이채가 맴돌았다.
***
“……스!”
누가 저렇게 애타게 부르는 거지?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윽, 눈을 더 크게 떠 보려는 듯이 루스의 눈가가 파르르 잘게 경련했다.
“루스!”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깊은 어둠 속에서 어떤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미하일의 목소리였다. 루스의 곧게 뻗은 검지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루스라면, 내가 유희 때 사용했던 이름인데. 루스는 잘게 신음하며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이내 밝은 빛이 눈을 쑤시는 것 같더니, 뒤늦게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습니까?”
“으으…….”
루스는 지끈거리며 쑤셔 오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가 누워 있는 곳은 그리 밝은 방이 아니었다. 거기다 아늑하고 편안한 방은 더더욱 아니었고, 잘 봐줘도 버려진 창고 같은 곳이었다.
“……응?”
루스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신의 꼴을 확인했다. 그는 사방이 막힌 어두운 방의 바닥에 버려진 포대 자루처럼 누워 있었다.
“여기는…… 여기가 어디지?”
귓속을 여전히 삐- 하고 울리는 이명이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루스는 그 둔통에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윽, 하고 신음을 뱉으며 곧바로 다시 쓰러졌다.
마법에 당했군.
당하는 입장은 전혀 배려하지 않은, 거칠기 짝이 없는 마법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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