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이가용-140화 (140/184)

140화

경쾌한 새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창을 통과한 햇빛이 감은 눈 위를 비추는 것이 곧바로 느껴졌다.

루스는 그 빛에 슬쩍 눈썹을 움직였다가 몇 번을 몸을 뒤척이더니 결국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루스는 하암, 하고 기지개를 펴다가 침대 바로 옆에 있는 이를 발견하고는 쭈욱 뻗던 팔을 멈췄다.

미하일이 의자에 앉아 침대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

뭔가 중요한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 보려 하니 생각나는 이야기는 없었다. 루스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대강 정리하다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은 직접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짜증스레 고개를 저었다.

옆에서 잠든 미하일은 단 한 번의 뒤척임도 없이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어제 집어 들었던 책이 반절 정도 접힌 상태로 들려 있었다. 루스는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책을 꺼내려 했으나, 미하일은 손안에 잡혀 있던 책이 천천히 빠져나가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일어났네? 깨우지 않으려고 조용히 움직였는데.”

미하일은 묘하게 잠이 덜 깬 상태로 잠시간 멍하게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침대에 기대어 있던 자신의 뺨을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될 줄이야. 여기서 잠든 줄은 몰랐네요.”

“난 이제 씻으려고. 많이 피곤하면 일단 내 침대에 좀 더 누워 있어. 깨워 줄게.”

“됐습니다.”

루스의 제안에 미하일은 확 정신이 깬 것처럼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는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혹시 그 뒤로 또 꿈을 꿨습니까?”

“아…….”

미하일의 질문에 루스는 이내 그 뒤로 한 번도 깨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아니. 간만에 푹 잔 것 같아.”

“그러면 제가 옆에 있길 잘했군요.”

루스의 푹 잤다는 표현에 미하일은 뿌듯하단 듯 중얼거렸다.

그의 은색 머리카락은 엉망이었고, 침대에 뺨을 대고 대충 잠들었기 때문에 그 뺨에 이불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쳐.”

루스는 그런 미하일을 잠시간 바라보다 몸을 획 돌려 욕실로 들어갔다. 미하일의 시야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올라와 있었다. 아무튼 저런 데서 유치하게 구는 게 애긴 애였다.

***

다시 이제는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마차였다. 마차가 다음에 설 곳은 그들의 목적지인 힐데케산이었다. 미하일은 지도를 한 번 확인하고는 맞은편의 남자를 힐끗거렸다.

“곧 힐데케산에 도착할 것 같네요.”

미하일은 마차 차창을 바라보고 있는 루스에게 지금의 위치를 귀띔해 주었다.

“그래? 드디어 도착했군.”

“혹시 그 전에 제게 해 줄 말은 없습니까?”

“응?”

이상한 말이었다. 루스는 창밖을 보던 시선을 안쪽으로 돌려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묘한 표정인 미하일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사실은 그쪽이 아드리안이었다라든가.”

“…….”

이게 무슨.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 버린 루스가 입을 살짝 열었다. 루스는 눈썹을 추켜세우고는 살짝 열렸던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미하일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에 지금 이 침묵은 루스의 당황스러운 마음을 완벽히 보여 주고 있었다.

“…….”

“왜 아무 말도 없으십니까.”

“……하도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문이 막힌 거지.”

루스는 하, 하고 짧게 혀를 차면서 대답했다.

“그런가요?”

미하일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무슨 소리. 만약 내가 아드리안 행세를 하던 드래곤이었다면, 왜 네게 말을 안 했겠어.”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주장을 미하일에게 말했다. 동시에 여유 있게 평상시의 억양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미하일은 그런 루스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그 이유는 오히려 제가 물어봐야 하겠군요.”

그의 눈빛에는 원망과 혼란, 그리고 그 모든 감정들 가장 아래에 약간의 기대가 있었다. 미하일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정의하기 힘든 그런 감정이었다. 아드리안이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 있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기저에 깔린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아드리안의 시신은 어딘가에 있어.”

예를 들면 지금 내 레어에. 루스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만 제외하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 꺼내서 보여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미하일이 도대체 뭘 보고 저런 추론을 했는지는 몰라도 만드라고라로 만들어 낸 아드리안의 시신을 마주한다면 쏙 들어갈 이야기였다.

“어딘가에…….”

지금 이 대륙 어딘가에 아드리안의 시신이 있다고. 미하일은 루스의 이야기를 듣고는 중얼거렸다.

“내가 그러니까 그 소원을 빌면 후회할 거라 말했었잖아.”

“그건-”

미하일은 루스와 여유롭게 시선을 맞췄다.

“제가 후회를 할지 말지는 두고 봐야죠.”

그때였다.

똑똑, 힐데케산 입구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마부의 노크 소리가 둘의 대치 상태를 깨트렸다. 미하일이 마차에서 먼저 내리고, 루스는 속으로 한숨을 한 번 쉬고 뒤따랐다.

힐데케산은 여느 산과 다를 것 없이 조용하고 공기가 맑았다. 미하일은 자연스럽게 뒤를 따르려 하는 호위 기사들을 멈춰 세우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하지만, 왕자님. 저희는-”

“그렇게 위험한 산은 아니야. 여긴 지겨울 정도로 왔던 곳이니까.”

미하일은 기사의 만류를 단번에 거절했다. 아드리안이 떨어졌던 곳을 둘러보는 것 정도야 둘이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네…… 그럼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서 있는 루스에게 출발하자고 눈짓했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산을 올라갔다.

“아드리안이 떨어진 정확한 위치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래. 절벽이라고 했었나? 그다음으로는 절벽 아래도 한번 확인해 봐야겠군.”

“……아시겠지만, 이미 여러 번 다양한 전문가들이 확인했었습니다.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텐데요. 무슨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원래는 당연히 마법으로 알아보려 했었지. 그런데-”

루스는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나도 갑자기 힘을 잃을 줄은 몰랐거든.”

“…….”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미하일의 날카로운 눈빛이 루스를 향했다가 이내 사라졌다.

“네, 일단은 힐데케산에 왔으니 확인은 해야겠죠.”

그래, 라고 말하며 루스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참이었다. 미하일이 갑작스레 고개를 휙 돌리고 그들이 서 있는 숲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루스는 그런 미하일을 옆에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윽!”

“잠깐만 조용히.”

미하일은 가던 길을 멈춘 채 팔을 뻗어 루스의 앞을 막았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매고 있던 검의 손잡이 위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이었다.

파스락,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에 루스와 미하일 모두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런…… 루스는 그제야 둘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아채곤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포위당한 것이었다. 그 추론을 입증하듯이 쇄애액- 화살이 빠르게 이쪽으로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미하일은 입안을 슬쩍 깨물며 자신의 팔에 힘을 주어 루스를 끌어안았다.

팍! 화살은 다행히 그들의 발치에 꽂혔다.

루스는 미하일의 팔을 빠르게 치우고는 그 화살을 빠르게 뽑았다.

“그럴 시간 없습니다. 빨리 몸을 피해야 합니다.”

미하일은 루스의 팔을 잡아끌며 재촉했다. 조금만 더 밑으로 내려간다면 기사들과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혼자서 루스를 안전하게 지키면서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었다.

루스는 그런 미하일의 잔소리를 못 들은 척하면서 집어 든 화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깔끔한 마무리로 날카롭게 다듬어진, 평민들이 사냥에 쓸 만한 화살이 아닌 고급스러운 것.

“그때 그 화살과 같은 것이야.”

그 이야기와 동시에 화살이 날아온 방향에서 험상궂은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포위당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처럼 여러 방향에서 루스와 미하일을 향해 인간들이 다가왔다.

마치 그들이 여기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젠장, 미하일은 이를 악물며 루스를 등 뒤로 숨기려 했으나, 이내 그들의 뒤에도 적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드디어 기사들이 빠졌구만.]

대륙 공용어가 아닌 먼 나라의 언어처럼 들렸다. 루스는 험악한 인상의 인간이 말한 언어를 이해할 수 없어 표정을 와그작 구겼다. 말이 통하지 않는 적을 힘을 쓸 수 없는 인간의 몸으로 상대해야 하다니, 최악이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옆의 미하일은 남자가 사용한 언어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냐.]

미하일의 입에서 유창한 타국의 언어가 흘러나오자, 루스는 내심 안도했다.

루스는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오르디나스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놓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오르디나스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내게 드래곤의 힘을 돌려주었을 텐데. 그는 제멋대로 생각하며 미하일에게 속삭였다.

“잠시만 시간을 끌어 봐.”

“뭐? 무슨!”

루스는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미하일의 팔을 치우고는 천천히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시전하기 전에 많이들 취하는 준비 자세였다.

루스와 미하일을 둘러싼 인간들은 그 행동에 흠칫, 놀라며 서로를 확인했다. 저 어두운 로브를 입고 있는 청년이 마법사라는 정보는 없었는데. 그들은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남자를 눈짓했다.

그러나 청년이 한참을 눈을 감은 채 팔을 뻗어도 그들이 서 있는 이 숲속에서 마나 한 점 움직이지 않았고, 특별한 변화도 없었다.

칫, 루스는 팔을 내민 상태로 짧게 혀를 찼다.

“……역시 안 되는군.”

좀 긴박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힘을 되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루스는 심드렁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하긴 이렇게 갑자기 될 리가 없지. 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사이 루스와 미하일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던 남자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뭐야, 마법을 못 쓰잖아? 그들은 주춤했던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여 몇 발자국 전진했다.

잠시간 멍하니 검은 로브를 입은 청년을 바라보던 우두머리 또한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턱짓했다.

[뭐 해?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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