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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가용-139화 (139/184)

139화

“옆에 있어 드릴까요?”

루스는 미하일의 이상한 제안에 고개를 번뜩 들어 올렸다.

“……내가 자는 동안 계속?”

“제가 그러길 원하신다면.”

미하일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그 나직한 리듬은 방금 악몽에서 깨어난 루스의 마음을 천천히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진정되는 것과 별개로 루스는 점차 정신을 차리고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자는 동안 옆에 미하일이 있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내가 그런 걸 원할 리가.”

루스는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루스의 거절에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루스를 향했다. 루스는 꿈에서 봤던 소년의 눈빛과 겹쳐지는 붉은 눈에 안색을 달리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당신이 제 이름을 불렀잖아요.”

“뭐?”

꿈에서 말한 게 아니었어? 루스는 곤란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검지로 긁으며 중얼거렸다. 불청객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이름을 불러서 들어온 거였군. 그가 속으로 지금 이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제 이름을 부르시길래, 방 안에 들어온 거라 말씀드렸습니다.”

“…….”

루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옆에 있어 달라는 겁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묘하게 내가 부탁한 것처럼 들리는데.”

‘있어 달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는 루스가 투덜거렸다. 미하일은 그 말에 슬쩍 미소 지으며 루스의 방을 휙 둘러보았다. 침대 바로 옆에 작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어디에 있을까요. 침대 바로 옆에 있어도 괜찮나요?”

루스의 대답을 듣지도 않았는데도 미하일이 멋대로 그 의자를 끌어와 앉은 이후였다. 뻔뻔한 미하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루스가 하, 하고 짧게 웃었다. 꿈에서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고 건방진 것은 똑같았다.

“그런데.”

미하일은 의자에 앉아 눈을 반짝이며 침대에 앉은 루스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꿈이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어떤 내용이었길래 제 이름까지 부르셨죠?”

“…….”

루스는 잠시간 고민했다. 방금 그가 꿨던 꿈, 아니 악몽의 내용을 이야기하려면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해야 했다.

“제가 나왔나요? 왜?”

하지만 미하일은 그 내용을 꼭 듣고 싶은 것 같았다.

“……궁금한 것도 많군. 별 내용 아니었어.”

“별 내용 아닌 것 치고는 무척 다급한 목소리였습니다.”

“다급하긴 무슨.”

루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다급하다니, 어이없는 표현이었다.

“그러면요?”

“뭐?”

“그러면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그 다급하지 않고 별 내용 아니었다는 그 꿈이요.”

“……침대 옆에 앉아 계속 이렇게 말을 걸 셈이야? 자라는 거야 말란 거야.”

“마음을 안정시키라고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 드리겠다는 겁니다.”

“이야기를 하는 거랑 마음이랑 무슨 관계지.”

미하일은 루스의 투덜거림을 대강 흘려들으며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운명의 흐름과 영향에 대한 고찰>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는 루스의 책이었다.

그는 한 번도 재미있게 읽어 본 적 없는 학문적인 내용일 것이 뻔했으나, 루스가 하도 흥미롭게 보고 있길래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솟은 것이었다. 검술 훈련법도 명검에 대한 백과사전도 아니었지만, 오르디나스라는 것이 도대체 뭐길래 아드리안과 루스의 흥미를 끈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러고는 미하일은 아무 말도 없이 책만 읽을 기세로 첫 장을 곧바로 읽어 내렸다.

“…….”

팔랑- 루스는 자신의 침대 옆에 앉아 뻔뻔하게 다른 사람의 책을 펼쳐 든 미하일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인간의 몸에 갇힌 것 때문에 이런 꿈을 꾼 것이 분명해.”

책을 읽던 미하일이 루스의 말에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질문했다.

“드래곤들은 꿈을 꾸지 않습니까?”

“원래 꿈이란 건 무언가 이루지 못하고,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원망하는 것들만 꾸는 거거든. 그러니까 구체적으로는 인간들만.”

“……인간들만?”

루스는 입꼬리를 한쪽만 비틀어 올려 미하일의 질문에 답했다.

“그 외에 어떤 생명체가 자신의 분에 넘치는 것을 바라겠어. 세계의 다른 모든 것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고 따르지만, 언제나 인간들만 발버둥치고 정해진 흐름에서 벗어나려 해.”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 눈에 보일 듯한 차가운 말투였다. 그러나 미하일은 루스의 날카로운 말에도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방금 펼친 책에서 읽은 단어와 루스가 말한 운명이란 것의 타이밍이 무척 적절했다.

“신기하군요.”

“……뭐가.”

루스는 비협조적인 표정으로 질문했다.

미하일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내린 가정을 천천히 늘어놓았다.

“만약에 오르디나스가 그 ‘운명’이라면. 지금 당신이 인간이 되어 꿈을 꾼 것은, 당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테니까요.”

“그래, 그렇겠지. 이 세계를 위해 드래곤이 해야 한다는 그 ‘일’이라는 걸 내가 안 한다고 한마디 했다가 이렇게 인간의 몸에 갇힌 것처럼.”

“하지만…….”

루스의 자조적인 말투에 미하일은 이상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왜 잘못된 겁니까?”

“뭐?”

탁, 미하일은 읽던 책을 덮고는 두꺼운 책 표지를 검지로 두드렸다.

“그렇지 않나요? 자신의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지 않은 것이 무슨 잘못이라고?”

“……너희들은 그렇게 생각해서 문제야. 모든 것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이야기가 정해져 있다고.”

“그렇지만 거기서 더 좋은 결말을 원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걸 바로 욕심이라 부르지.”

“높은 목표를 가지는 것도?”

“그래. 너희들의 왕인 카를로가 늘 소드 마스터가 되고 싶어 했던 것처럼. 하지만 애초에 불가능하고 허황됐던 그 목표도 결국 드래곤인 내가 들어줬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지.”

“…….”

루스의 단호한 대답에 미하일은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분히 상처 입히려는 목적이 들어가 있는 말에 굳이 똑같이 날선 대답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저 이야기의 표면이 아닌, 더 깊은 곳에 깔려 있을 드래곤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래서 인간을 싫어하시는 겁니까?”

유심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곧은 미하일의 시선이 느껴졌다. 가끔씩 미하일은 이야기의 주제에 벗어난 질문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저런 피할 수 없는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곤 했다.

스윽, 루스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미하일의 눈빛에서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전에 말했잖아. 싫어하는 건 아니야. 오히려 아무 감정 없다는 편에 가깝지. 물론 너희 덕에 일어나는 사건 사고는 골치 아프지만.”

“그렇다면 굳이 조금 전처럼 나쁘게 말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나쁘게?”

“…….”

미하일은 굳이 루스가 했던 말들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침묵을 선택했다. 그는 언젠가 바사미엘의 아드리안과 한 적 있었던 운명에 관한 이야기에서 드래곤이 정말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왜 당신은 오르디나스의 의지를 따르려 하지 않으려 했죠?”

“그래서 후회하고 있잖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드래곤의 힘만 되찾으면, 오르디나스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어.”

루스는 침대에 앉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꾹, 손에 힘을 줘 주먹을 쥐었으나 여전히 아무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래도 힘이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위대하신 오르디나스의 성에 찰 정도가 아닌 모양이지. 아니면 내 마음이 진실되지 않은 걸 느꼈던가 말이야.”

“그 불안한 마음 때문에 악몽을 꾼 걸지도 모르겠네요.”

“뭐, 그럴 수 있겠지.”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루스가 누워 있는 침대를 툭툭 두드렸다.

“다시 잠들려고 시도해 보세요. 잠들 때까지 옆에 있을 테니.”

“그래.”

루스는 두꺼운 이불을 몸 위에 덮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러운 이불이 몸에 닿는 느낌이 들었으나, 조금 전 둘이 나눈 이야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탁, 미하일은 협탁 옆의 작은 촛불 하나만 남긴 채 그가 방에 들어오면서 켰던 램프를 껐다.

루스는 침대에 누워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굳이 네가 이 상황을 해결하려 할 필요는 없어.”

“……끝난 이야기 아니었습니까?”

“내가 힘만 되찾으면 대륙의 검은 마나 같은 건 완전히 없애 줄 테니까.”

“…….”

그 말을 끝으로 루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슬쩍 쥐었으나, 여전히 힘이 돌아오지 않은 나약한 인간의 손이 보일 뿐이었다.

“……이렇게 직접 말했는데도 안 믿어 준다는 말이지.”

칫, 루스는 짜증스레 투덜거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바로 당신의 그런 태도 때문에 힘이 안 돌아올지도 모르겠는데요. 미하일은 그런 루스를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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